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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24화 (24/150)

# 024. 넘어서는 안 되는 선 (4)

CP 대 혜성.

퍼퍼펑,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연신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불과 얼음의 충돌이었다. 급속한 온도 변화 때문에 무대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같은 화염계지만 막내와는 스타일이 다르군.’

혜성은 대수영의 환영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막내는 원거리에서 큰 데미지를 주는 딜러 타입. 반면 CP는 연약한 외모와 달리 근거리에서 싸우는 격투가 타입이었다.

“역시 카피는 한 번에 하나씩밖에 안 되는군.”

CP가 품을 파고들며 아래에서 위로 펀치를 날렸다.

혜성은 놈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화끈한 열기를 느꼈다.

‘이 자식. 내 스킬 카피를 예측하고 장현수를 먼저 내보낸 건가?’

혜성은 대검을 수직으로 세워 막으며 물러섰다. 놈의 말대로였다. 그가 쓰는 것은 전부 장현수의 빙계 능력. 화염은 카피가 되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도 여러 능력을 동시에 각성할 수는 없었다. 각성의 중추가 되는 단전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돌연변이라는 듀얼 각성자도 전체 각성자 중에서 5% 남짓에 불과했다.

생각은 여기까지. 그 사이에도 공방전은 계속됐다. 놈은 다시 상체를 낮추고 그의 왼쪽을 파고들었다.

- 위험!

대수영의 경고가 들렸다. 놈이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소나기 펀치를 날리는 게 환상처럼 보였다.

“젠장!”

혜성은 대검을 수직으로 해서 왼쪽을 방어했다. 동시에 왼손 엄지와 중지를 튕겨 얼음의 산탄총을 발사했다.

“흥!”

CP는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주먹을 뻗었다. 화륵, 주먹에 맺힌 불이 주위의 불덩이에 감응하듯 더 커졌다.

퍼퍼펑, 불기운이 실린 펀치 서너 대가 혜성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크윽!”

혜성은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대검으로 막아 겨우 치명상만 면한 상태. 검신을 뚫고 은은한 통증이 전해졌다.

‘이게 시너지 효과라는 건가?’

식은땀이 흘렀다.

비슷한 등급의 능력자가 싸울 때는 주위 환경도 중요했다. 놈의 순수한 전투력은 자신보다 낮았다. 아마 A급 정도일 터. 하지만 불의 기운이 가득한 탓에 이곳은 놈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화염 스킬과 화염진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놈의 공격은 AA급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놈이 재빠르게 뒤를 파고들었다. 이번엔 속임수. 놈이 다시 우측으로 움직이는 게 미리 보였다.

뒤쪽은 무시했다. 혜성은 오른쪽을 향해 대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컥!”

혜성은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옆으로 주춤 물러섰다. 그의 뒤에는 엷은 서리가 끼어 있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불기둥 너머였다. 갑옷이 반쯤 타고, 얼굴과 팔에 화상을 입은 장현수가 히죽 웃고 있었다. 지옥에서 돌아온 악귀 같은 몰골로.

“어딜 보는 거냐?”

이어서 CP의 불 주먹이 앞에서 날아왔다.

사방에는 함정. 뒤에는 장현수. 그리고 앞에는 CP. 대수영도 이건 예측할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 혜성의 몸에서 검은빛이 뿜어졌다.

***

“죽어!”

악에 받친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단검을 들고 돌진하는 이혜진이었다.

막내의 주먹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퍽, 이혜진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졌다. 그녀의 복부에는 막내의 주먹이 꽂혀 있었다. 아무리 경황 중에 기습을 당했어도 그는 A급 능력자. 일반인 여성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젠장. 이걸 어쩌죠?”

막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장진우를 돌아봤다.

“혜진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 장진우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열어놓은 문과 환기구를 통해 연기가 빠져나갔다. 다른 함정은 없었다. 낡은 소파와 침대가 있고, 바닥에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평범한 지하실이었다.

막내는 일단 이혜진을 침대 위에 눕혔다.

“여기는 어미 독수리. 상황 종료. 전 대원은……”

그 사이 장진우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급팀에게 무전을 보냈다. 곧 사이렌이 울리고, 요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된 걸까요?”

막내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혜진을 내려다봤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최면이나 세뇌를 당한 것 같군.”

장진우는 침대맡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은 없었다. 눈꺼풀을 뒤집어 보니 충혈된 흰자위만 보였다. 그다음 그는 그녀의 이마에 왼손을 얹고 의식을 집중했다. 공간을 스캔하는 것과 비슷했다.

“정확한 건 의무진이 확인해봐야겠지만, 최면술사가 혜진 씨의 기억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든 것 같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래도 기억을 찾을 수 있는 거겠죠?”

“글쎄. 그건 나도 잘……”

장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

쾅, 막내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혜진. 자기보다 서너 살쯤 어려 보이는 대학생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 이런 사람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장현수는 최면술사가 아니다. 즉, 제3자가 개입했다는 뜻. 혹시 장현수도 누군가의 최면에 당한 건가? 대체 누가?”

장진우는 이혜진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공개홀 뒤편 상황실.

강지영을 비롯한 일부 스태프들이 남아 있었다. 속된 말로 시청률 대박. 위험한 건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벽면에 걸린 10대의 모니터에는 관객석 쪽 카메라와 드론들이 촬영한 무대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꿀꺽,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현수가 돌아오고 혜성이 위기에 빠진 순간.

“안 돼!”

스태프들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몇몇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단 한 명, 강지영만 예외였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설마 내가 CP도 능력자라는 걸 몰랐을까? 뭐, 가족까지 건든 건 의외였지만.”

파앗, 혜성에게서 갑자기 검은빛이 뿜어졌다. 순간적으로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

얼마 후, 다시 돌아온 화면에서 혜성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너덜너덜했던 정장은 없었다. 대신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가 혜성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검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저건 뭐야? 갑옷인가? 언제 갈아입은 거지?”

“세상에 저런 갑옷도 있나?”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드디어 나왔군. 이혜성의 시그니처 아이템. 암흑의 수호자다.”

강지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장현수의 검은색 검이 혜성의 목을 찌르려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스르르 움직여 혜성의 목을 감쌌다. 채챙, 강렬한 불꽃을 일으키며 놈의 검이 튕겨 나갔다. 동시에 혜성은 대검을 수평으로 움직여 놈의 옆구리를 베었다.

“큭!”

장현수는 짧은 신음을 토해내며 물러섰다. 대검에 베인 옆구리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콰쾅, CP가 혜성의 얼굴을 향해 화염을 발사했다. 혜성은 막 장현수를 공격한 상태. 막을 수 없었다.

펑, 화염은 혜성의 얼굴 앞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어느새 검은 그림자가 투구처럼 변해 혜성의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무슨 아이템이야?”

CP가 당황하며 물러서려는 찰나, 혜성이 대검을 앞으로 찌르며 얼음의 강기를 대포처럼 쏘았다.

CP는 급히 두 팔을 교차해 상체를 보호했다. 콰쾅, 놈은 트럭에 치인 것처럼 날아갔다. 주먹에 맺혔던 화염은 꺼졌고, 대신 얇은 얼음이 끼어 있었다.

혜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CP의 품을 향해 돌진했다. 카메라가 순간적으로 그를 놓쳤다. 다른 카메라로 겨우 그를 찾아냈다.

“죽어!”

파지직, 뒤에서 장현수가 얼음의 강기를 날렸다. 목표는 혜성의 척추. 부상을 당한 탓인지 강기의 위력이 처음의 반도 되지 않았다.

혜성은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살짝 움직여 어깨로 놈의 얼음 강기를 받았다. 쾅, 검은 그림자가 그의 어깨를 이중으로 감싸며 공격을 막아냈다.

“뭐, 뭐야?”

CP는 당황하며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불의 방벽을 만들려는 찰나, 혜성이 먼저 움직였다. 부웅, 혜성은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묵직하게 움직였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좌우로 갈라졌다. 만들다 만 불의 장벽, 그 뒤에 숨은 CP. 그리고 CP가 기대고 있던 철망까지.

혜성은 몸을 빙글 돌렸다. 이번엔 대검을 고쳐 잡고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콰쾅, 거대한 얼음 강기가 횡으로 날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불기둥들을 위아래로 거침없이 가르며.

“안 돼!”

푸른 강기가 무대 위를 환하게 뒤덮는 것. 이것이 장현수의 눈에 비친 마지막 광경이었다.

***

S 대학병원 VIP실.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층 전체를 지키고 있었다.

“혜진아!”

혜성은 문을 거칠게 열고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도 화상을 입고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혜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각종 센서며 장치를 팔다리에 주렁주렁 매단 채였다. 그 옆에는 장진우와 막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형, 미안해.”

“면목 없군. 우리가 갔을 때는 한발 늦은 상태였네.”

막내와 장진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동시에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혜성은 혜진의 곁에 서서 화를 내듯 물었다.

“그게……”

막내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소재 파악. 구출 작전. 함정. 이혜진의 기습 및 최면. 최선을 다한 일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혜성에게 큰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그렇네. 몸은 며칠 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더군. 다만 문제는 쇼크와 최면의 후유증인 것 같네.”

이번엔 장진우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면의 후유증? 깨어날 수 있는 거겠죠?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아십니까?”

혜성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부모님을 떠올렸다. 고지식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게이트, 던전, 각성, 능력자 등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분들이었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우리 쪽에서 무사히 보호하고 있다. 다만 보안과 안전상의 이유로 당분간은 만날 수 없다.’라고만 알고 계실 거예요.”

막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자네 가족은 기관의 안전가옥에서만 머물러야 할 걸세. VIP에 준하는 특급 경호팀이 24시간 붙겠지. 좀 답답하시겠지만, 그게 최선의 방법이네.”

장진우가 무거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잘하셨습니다. 부모님께는 나중에 제가 직접……”

혜성은 말을 맺지 못했다. 결국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 차마 동생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의사와 최면 전문가가 들어와서 상태를 설명했다.

“최면 능력자라고 누구에게나 최면을 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상대가 정서적으로 혼란할 때를 파고드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혜진 씨는 정신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납치된 이후에도 최면에 완강히 저항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의사는 차트를 꺼내 길게 설명했다. 어려운 말들이 많이 나왔다.

“문제는 후유증입니다. 최면에 완강히 저항하는 과정에서 의식이 뒤죽박죽 섞였습니다.”

이번에는 최면 전문가가 설명을 계속했다. 몸은 살아 있지만 의식은 없는 상태. 쉽게 말해 식물인간이었다.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기관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돼 의식의 파편들을 짜 맞추고 있으니까요. 다만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혜성은 전문가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이혜진을 중심으로 병실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어딘가에 가서 헛구역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부모님께는 지금처럼 계속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는 한참 동안 혜진을 내려다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갔다.

“형. 어디에……”

막내가 쫓아가려는 찰나, 장진우가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고 있을 테지. 마음이 심란할 거야. 지금은 혼자 있게 해주지.”

장진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막내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은 어금니를 깨물고 병원을 나갔다.

“어, 이혜……”

지나가던 몇 명이 아는 체를 하려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목표가 달라졌다. 순직은 둘째 문제.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걸 보여주지. 어차피 나도 무서울 게 없는 놈이거든. 내가 갈 때 가더라도…… 그 새끼들은 꼭 데려간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전의를 불태웠다. 다만 그걸 위해서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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