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22화 (22/150)

# 022. 넘어서는 안 되는 선 (2)

NSA 본부 분석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십여 명의 요원이 각자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장현수가 보낸 사진을 확대한 것이었다.

“어? 뭔가 보입니다.”

막내가 모니터를 향해 거북이처럼 목을 내밀고 소리쳤다.

“뭔데?”

장진우를 비롯해 주위의 요원들이 우르르 그의 뒤로 몰려들었다.

“이거 좀 보십시오.”

막내는 마우스로 사진의 11시 방향 구석을 확대했다.

처음엔 모자이크처럼 흐릿했다. 화질을 높이고 몇 단계 보정을 거쳤다. 작은 환기구가 보였다. 그리고 환기구 너머.

“십자가? 교회 근처인가? 너무 막연한 거 아냐?”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배경 보이시죠?”

막내는 사진을 더욱 확대했다. 십자가 뒤로 작은 산과 버스의 일부가 보였다. 버스를 더욱 확대하자 번호판 첫 자리가 드러났다. ‘5’.

“그렇지!”

장진우는 손뼉을 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자, 봤지! 산동네. 교회. ‘5’로 시작하는 버스 노선. 빨리 전 지부에 배포하고 수색 요청해. 경찰에도 협조 요청하고.”

그는 주위의 요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한시가 급했다.

“서울과 경기도에 이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텐데요?”

“맞습니다. 시간도 별로 없고 말입니다.”

일부 요원들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막연했다.

장진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혜성 씨가 조직을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는지 알아? 이젠 우리가 혜성 씨를 위해 나설 차례. 모든 임무를 중단하고라도 찾아야 한다.”

그는 혜성의 활약을 잠깐 떠올렸다. 불과 며칠 동안이었지만, 혜성의 활약은 훈장 한두 개로는 부족했다.

반론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요원들은 막내가 인쇄한 사진을 들고 흩어졌다.

“그나저나 공개방송에서 일 대 일 대전이라니. 우리가 UFC 선수도 아니고. 정말 게임이라도 하는 기분이군.”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장현수를 떠올렸다. 놈과는 과거에 작전을 같이 수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걸 싫어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장현수 놈.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건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방송국 대기실.

“10분 남았습니다.”

조연출이 들어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런 방송은 처음이었다. CP 이하 전 스태프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시청자들은 아직 혜성 씨 동생이 엮인 걸 모릅니다. 전, 현직 에이스 요원 간의 격돌. 이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죠. 일단 링에 올라가시면, 특별 결계 때문에 밖에서는 진입할 수 없습니다. 규칙은 없고……”

이미 몇 번이나 들었지만, CP는 안경을 고쳐 쓰며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혜진아.’

문득 마음이 아렸다.

공부하고 돈밖에 모르는 평범한 여대생.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고, 둘만 있으면 오히려 어색했다.

사실 생일이 언제인지도 잘 몰랐으니까. 그런데 막상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자,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쓰라리고 허전했다.

‘혜진이가 인질로 잡힌 이상, 대결은 내가 불리하다. 정말 기관에서 혜진이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장진우와 막내를 떠올렸다.

하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옷과 장비를 재점검했다. 검은색 강화복과 보호대. 워커. 장갑. 그리고 대검.

혜성은 대검의 날을 유심히 살폈다. 초조한 얼굴이 넓은 검신에 비쳤다. 유명한 시그니처 아이템에는 조금 미치지 못했지만, NSA에서 제공한 A급 진품이었다.

그때였다.

“어? 저게 뭐야?”

“여기 왜 온 거지?”

대기실이 술렁거렸다.

“뭐지?”

혜성도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강지영과 그 매니저였다.

수수하게 청바지와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다만 매니저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평범한 인사를 나눈 뒤, 강지영의 매니저가 혜성의 앞에 캐리어를 펼쳐 보였다.

“이걸 주려고 왔어요.”

“이게 뭡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혜성. 캐리어에는 검은색 정장과 구두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 일의 답례예요. 체사레 아톨리니 알죠? 세계 3대 명품 정장. 거기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든 거예요.”

강지영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정장을 들어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장은 좀……”

혜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런 상황에 정장이라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주위의 다른 스태프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방송은 첫째도 폼, 둘째도 폼 아니겠어요?”

강지영은 웃으며 반강제로 그의 보호대를 벗겼다. 그러면서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보통 정장이 아니에요. 나만 믿어 봐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혜성은 순간 움찔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기실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바지와 재킷, 흰 셔츠, 그리고 검은 넥타이. 맞춘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았다.

“오! 역시 내 눈이 정확하군요.”

강지영은 엄지를 올리며 감탄했다. CP와 스태프들도 홀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젊고 건장한 체구의 요원이 입으니 모델처럼 옷의 선이 살아 있었다. 물론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혜성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어서 스태프가 들어와 입장을 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혜성은 벽에 세워둔 대검을 들고 대기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

SBC 방송국 특별 무대.

조명이 중앙의 특설 링의 비추고 있는 가운데, 사방은 만 명이 넘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누가 이길까?”

“그야 당연히 이혜성이지. 무적의 2차 각성, 몰라?”

“에이. 장현수도 팀장급이었잖아. 경험만 놓고 보면 이혜성보다 몇 배는 많을걸?”

관객들은 무대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들 방송국에서 주최한 특별 이벤트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둥, 둥, 둥.

힘찬 북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짙은 연기와 함께 동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죽으로 만든 고급 갑옷을 입고, 쌍검을 든 장현수였다.

“오, 저게 장현수의 시그니처인 흑백쌍두인가?”

관객 일부가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흑백쌍두.

그 이름처럼 검고 흰 한 쌍의 검이었다. AA급 유니크 레벨. 흑백쌍두를 든 순간, 장현수는 자신의 스킬을 100% 발휘할 수 있었다.

“흠. 좋아. 아주 좋아!”

장현수는 팔을 크게 뻗고 심호흡했다. 충혈된 눈과 검은 다크서클 때문에 다소 음산해 보였다.

그는 장내를 한 차례 둘러본 뒤, 무대에 천천히 올랐다. 무대는 가로, 세로 약 30m. 이종 격투기의 케이지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넓었다.

다시 북이 울리고 서쪽에서 누군가가 안개를 밟고 나타났다. 후광 같은 조명에 둘러싸인 채.

“어? 저건 무슨 복장이야?”

관객들은 다들 술렁거렸다.

검은 정장과 대검. 혜성의 복장은 뭔가 어울릴 듯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조합이었다.

“지금 화보라도 찍는 거냐?”

장현수는 무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영화처럼 보는 맛은 있겠지만, 실용성 면에서는 최악. 한눈에 봐도 불편해 보였다.

이어서 유명한 아나운서가 무대에 올라 둘을 소개했다. 말이 장황했지만, 혜성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보고 듣는 건 오직 하나, 장현수뿐이었다. 장현수는 그를 향해 얄밉게 히죽거리고 있었다.

혜성은 관중석을 돌아보며 심호흡했다. 방송을 탄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금까지는 차성진 등의 적을 상대하다가 의도치 않게 방송에 휘말린 것. 반면 지금은 모든 게 의도적인 공개 방송이었다.

“광대라도 된 기분이군.”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무대로 올라갔다.

“저 새끼. 상태가 왜 저래? 약이라도 처먹었나?”

혜성은 놈을 노려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벌어진 입, 비정상적으로 붉은 눈, 관자놀이의 튀어나온 핏줄들. 껍질은 장현수였지만, 그 안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은 여기까지.

땡, 이윽고 아나운서가 물러가고 공이 울렸다.

파팟, 혜성은 지체 없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현수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그가 막 대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동생이 걱정되지 않아?”

장현수가 실실 쪼개며 속삭였다.

혜성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혜진이의 피멍 든 얼굴. 대검이 장현수의 옆구리를 베려다가 멈칫했다.

“병신. 물러 터졌군.”

그 순간, 비웃음과 함께 장현수의 쌍검이 그의 양쪽 어깨를 찔렀다.

***

SJ 기획, 소회의실.

“드디어 시작이군.”

박무영은 깍지를 끼고 TV를 바라봤다.

이혜성 대 장현수의 대결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혜성이 순간적으로 주춤거린 찰나, 장현수의 쌍검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한수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장현수가 좀 이상하다는 거?”

박무영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투였다.

“그렇습니다. 뜬금없이 납치에 공개방송이라니. 상식적으로 볼 때 앞뒤가 안 맞는 게 많습니다.”

“장현수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그렇겠지.”

“네?”

“자네도 개코원숭이의 소식은 들었겠지. 그런데 최면에 당한 게 개코원숭이 한 명뿐일까?”

박무영은 그녀를 힐끔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최면이란 다른 이를 무조건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게 아니야. 내면 깊숙한 욕망을 자극해 자신의 뜻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지. 그리고 장현수의 욕망은 대중의 관심과 인기, 자존심인 터. 그걸 충족시키는 데에 공개 방송을 통한 대결만큼 좋은 건 없지.”

“내면에 숨은 욕망이라.”

한수은은 욕망이란 단어를 나직이 반복했다.

장현수는 NSA라는 자부심과 명예, 애국심 등을 버리고 방송계에 진출한 자였다. 대중의 관심과 인기에 대한 열망이 클 게 분명했다.

“자넨 누가 이길 것 같나?”

이번엔 박무영이 웃으며 물었다.

“우선 인질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요원들이 용케 이혜성의 동생을 구출한다 해도 이혜성이 불리합니다.”

그녀는 장현수의 손에 들린 쌍검을 주목했다.

“흑백쌍두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2차 각성을 하더라도 장비와 아이템의 능력은 카피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혜성도 A급 아이템을 들었습니다만, 흑백쌍두보다는 한 등급 낮습니다.”

“특별한 장비를 갖춘 게 장현수 혼자만일까?”

박무영은 소리 죽여 웃었다.

“이혜성이 입고 있는 정장 말씀입니까?”

한수은은 조금 전 박무영과 강지영의 통화를 떠올렸다. ‘정장. 전달. 새로운 시그니처.’라는 말이 언뜻 들렸다.

“하나 묻지. 자넨 최고의 방어구가 뭐라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한수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정답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박무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뒤, 말을 이었다.

“같은 방어구라도 상대에 따라 가치가 다르거든. 예를 들어, 중갑옷은 느리고 완력이 강한 몬스터에게 효과적이지만, 재빠른 몬스터에겐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하지.”

한수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순이었다.

“그래서 우린 발상을 바꿨네. ‘상황에 따라 좋은 방어구의 정의가 다르다면, 그때마다 맞춤형으로 방어구를 바꾸면 어떨까?’라고 말이야.”

“일종의 가변형 방어구입니까?”

“그렇지. 저게 바로 그거야. 이혜성은 백지 수표도 거절했다더군. 그런 거물을 끌어오려면, 우리도 뭔가 큰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겠나?”

박무영은 잠깐 웃은 뒤 화면을 주목했다.

“유명한 능력자들은 저마다 시그니처 아이템이 있지. 예를 들어 유수혁 하면 무형검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야.”

박무영은 유명한 시그니처 아이템들을 간단히 언급했다.

‘대수영’은 스킬을 보완하는 소프트웨어일 뿐.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형태의 아이템은 아니었다.

그제야 한수은도 이혜성의 정장을 유심히 관찰했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어 보였다.

“아직은 그냥 명품 정장이야. 동면 중이랄까? 활성화되려면 사용자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2차 각성 전의 이혜성은 그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거든.”

박무영은 한수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혜성이 2차 각성을 하면, 사람들도 곧 알게 되겠지. 이혜성의 새로운 시그니처 아이템이 무엇이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박무영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다시 TV를 주목했다.

와-아!

관객들의 함성과 함께 대결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