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1. 넘어서는 안 되는 선 (1)
늦은 저녁, 사람들로 가득한 PC방.
“어? 인생의 진정한 승자 이혜성. 강지영에게 청혼?”
그는 마시던 콜라를 뿜으며 인터넷 기사를 클릭했다.
혜성이 영화처럼 강지영을 구했다는 내용이 90%였다. 이미 다 아는 것.
기사의 마지막은 ‘이혜성이 언제 강지영에게 청혼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끝나고 있었다.
“씨발, 또 낚였다. 이젠 기자 새끼가 독자들에게 묻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가기를 눌렀다. 혜성에 관한 뉴스는 넘쳐났지만, 이런 낚시성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기레기가 괜히 기레기냐? 너처럼 잘 낚이는 놈들 때문에 기레기가 설치는 거야.”
옆에 있던 친구가 킥킥거리며 비웃었다.
그새 혜성에 관한 기사가 또 올라왔다.
“이혜성의 가족이라고?”
“야, 속지 마. 이혜성 가족은 기관에서 숨기고 있다던데 무슨 수로……”
“어라? 야, 이거 진짜 같은데?”
“정말?”
곧 다른 이들도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모니터에는 혜성과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여럿 보였다.
DDP 이후의 사진은 없었지만, 대신 혜성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하단에는 가족들의 이름과 연락처까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댓글을 확인했다.
- 와, 이 미친 기레기들. 이젠 클릭 수 때문에 이런 것까지 올리네?
- 이거 나쁜 놈들한테 새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냐?
- 기레기도 정도껏 해라. 빨리 기사 내리라고!
기사 댓글은 거의 욕설로 도배돼 있었다. 물론 반응과는 별개로 기사의 클릭 수는 급상승했지만.
같은 시각, 다른 인터넷 신문사들도 비슷한 기사를 쏟아 내고 있었다.
***
늦은 밤, 골목 어귀.
한 여학생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등에는 책이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다.
“기자 새끼들. 거머리들도 아니고 아주 징글징글하네. 기관에서는 분명 잘 감췄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녀는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화기는 몇 시간 전부터 불이 났고, 그 때문에 배터리는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주위를 힐끔 둘러봤다. 골목 구석구석 CCTV가 있었다.
하긴, 대한민국 전역이 CCTV로 도배된 상태. 좀 수고스럽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숨어 있는 사람을 찾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한창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이혜진!”
뒤에서 누군가가 크게 그녀를 불렀다.
“아, 사람 잘못 봤다니까요! 전 이혜진이 아니라 이다은……”
그녀는 뒤를 홱 돌아보며 짜증 섞인 표정으로 대꾸하다가 멈칫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장현수라고 했던가? 본능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 누구세요?”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곁눈질했다.
젠장. 오늘따라 그 흔한 취객 하나 없다. ‘도망칠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상대는 능력자였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왼손을 슬그머니 주머니 속의 핸드폰으로 가져갔다.
“당신 오빠에게 볼일이 좀 있지. 이혜진이든 이다은이든. 같이 좀 갑시다.”
사내는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람 살……”
그녀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사내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퍽, 사내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에 꽂혔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미안. 나중에 네 오빠에게 따지라고.”
장현수는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골목 어귀에 세워둔 승용차로 향했다.
***
잠실 N 오피스텔.
혜성은 초조하게 창가를 서성였다. 전망이 좋은 최고급 오피스텔 23층이었지만, 한가하게 야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뉴스는 어떻게 됐지?”
그는 리모컨으로 벽에 걸린 TV를 켰다. 평화로운 일상. 그의 가족, 또는 강지영과의 스캔들에 관한 뉴스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젠장. 유명해지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혜성은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각계의 칭찬과 포상. 대중의 관심. 쏟아지는 인터뷰.
처음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파라치들이 집 앞에서 24시간 진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한 말에도 다양한 의미가 부여됐고, 평범한 식사도 실시간으로 기사화됐다.
항상 감시받는 기분. 그나마 기관의 특별 배려로 거처를 옮긴 다음에 좀 나아진 상태였다.
“이건 뭐, 감옥이 따로 없잖아?”
그는 쓰게 웃었다.
딩동.
기다리던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문 앞에는 편한 복장의 장진우와 막내가 서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혜성은 둘을 안으로 들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인터넷 기사는 다 내렸네. 신문, 방송에서도 협조하기로 했고.”
장진우가 TV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다만 이미 퍼진 기사가 문제예요. 화면을 캡처한 게 메신저로 떠돌고 있거든요.”
막내가 무거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제길. 어떤 새끼가……”
쾅, 혜성은 주먹으로 벽을 쳤다.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좀 흘렀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처음 기사를 낸 자는 찾았네. 혹시 개코원숭이라고 들어봤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기자라던데 말이야.”
장진우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뭐 하는 놈입니까? 어떻게 기관에서 숨긴 제 가족을 찾아낸 겁니까?”
혜성은 이를 갈며 사진을 노려봤다. 정말 개코원숭이처럼 생긴 사내가 선글라스를 낀 채 히죽 웃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보통 기자가 아니라 B급 능력자야. 전투력은 별거 없는데, 사람이나 아이템을 탐지하는 스킬을 갖고 있지. 여기저기 알아보니, 놈은 그 능력을 살려 전문 파파라치로 잘나갔다더군.”
“그럼 당장 놈을……”
혜성은 불같이 화를 내려다가 멈칫했다. 장진우와 막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장진우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잘나간다’가 아니라 ‘잘나갔다’였다.
“조금 전, 놈의 오피스텔을 덮친 요원들에게서 연락이 왔네. 놈이 시체로 발견됐다더군.”
장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개코원숭이가 노끈으로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다.
“네? 왜 죽은 겁니까?”
혜성은 사진을 내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자연사일 리는 없었다.
“장소는 밀실. 정확한 건 부검을 해 봐야 알겠지만, 일단 육안으로 봤을 때 타살의 흔적은 없다고 하네. 다만……”
장진우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막내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만 뭡니까?”
혜성도 자연히 불안한 눈으로 장진우를 쳐다봤다.
장진우는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고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전문 조사관의 말에 따르면, 개코원숭이의 사체에서 강력한 최면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하네. 어떤 특수한 최면술을 지닌 능력자가 배후에 있는 것 같아. 또한 자네 가족 말인데.”
“가족이요?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자네 부모님은 우리 쪽 요원들이 무사히 모셔 왔네. 하지만 자네 여동생은……”
장진우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막내도 눈을 감고 혜성의 시선을 외면했다.
“혜진이는요? 혜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혜성의 목소리가 더욱더 높고 다급해졌다.
“우리 쪽 요원이 갔을 때는 집 근처에 가방만 떨어져 있었어요. 현재 주변 CCTV를 샅샅이 분석하고 있으니까……”
막내가 그의 눈치를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여기까지. 혜성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개새끼!”
쾅, 그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괴성을 질렀다. 뭔가 무거운 것이 속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장진우와 막내는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때 혜성의 전화가 다급하게 울렸다. 낯선 번호.
“혜진이냐?”
혜성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꺼내 받았다. 아니었다.
“혜, 혜성 씨! 살려주세요! 으아아아!”
수화기 너머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길게 울렸다. 방송국 CP였다.
“뭐야?”
혜성은 외부 스피커로 통화를 전환했다. 장진우와 막내도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
“여어, 국민 영웅님. 아니, 이제 대한민국 뭇 남성들의 주적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안녕하신가?”
이어서 비꼬는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렸다.
“장현수?”
혜성은 의문과 분노를 동시에 내뱉었다.
“장현수가 왜?”
장진우와 막내도 고개를 갸웃하며 나직이 수군거렸다. 놈이 혜성을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CP를 공격하고 혜성을 협박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한테 좋은 사진이 있는데 말이야. 한번 볼 텐가?”
띵동, 곧 메시지가 왔다. 혜성은 잠시 화면을 바꿨다. 곧 그의 눈이 돌아갔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그는 오피스텔이 떠나가라 욕을 내뱉었다.
장현수가 보낸 건 단발머리의 여대생이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묶여 있는 사진이었다.
반항이 좀 있었던 것 같았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군데군데 피멍이 보였다.
“이 미친놈아! 인간적으로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지. 지켜야 하는 선이라는 게 있잖아.”
“아아, 진정해. 오빠를 닮아서 그런가? 동생이 아주 혈기가 넘치더군. 그냥 잠깐 정신을 잃은 것뿐이야.”
장현수의 능글맞은 반응이 혜성의 분노를 더 부채질했다.
“원하는 게 뭐냐?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라니? 너도 주목받는 걸 좋아하잖아?”
“뭐?”
혜성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장진우와 막내도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부터 게임을 하나 시작하지. 크크크.”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장현수의 비릿한 웃음이 들렸다.
***
강남 S 호텔 VIP룸.
강지영은 소파에 앉아 누군가와 전화하고 있었다.
“……네, 실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블랙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몇 명인지, 어떤 자들인지 알아내는 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지영의 보고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뭐라 말했다. 그녀는 잠시 듣고만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차성진은 그중 곁가지에 불과했습니다. 차성진이 죽었으니 국내에 있는 다른 블랙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리고 이혜성 말입니다.”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머뭇거렸다.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짧은 순간, 그녀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말을 돌렸다.
“아, 그의 몸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는 너무 건강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그의 다차 각성. 그를 완전히 분석하려면 다양한 상황에서 몇 번 더 접촉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건강이란 단어를 강조했다.
다시 수화기 너머의 사내가 말했다. 웃음이 섞여 있었다.
“일단 제 기준으론 합격입니다. 이제 곧 블랙과의 전면전이 시작될 터. 제가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전화를 끊었다.
여운이 많이 남는 통화였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화면에는 SJ기획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길어야 6개월. 혜성 씨. 당신은 대체 뭘 하려는 건가요?”
강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성의 이름을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