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0. 너는 내 운명 (4)
쿵!
발이 내려오면서 생긴 풍압이 그를 짓눌렀다. 머리카락이 미친듯이 날리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귀가 얼얼했다.
‘이대로 가는 건가? 전 국민의 애도. 국민 여배우의 눈물. 거기에…… 어라?’
혜성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실눈을 떴다. 이상했다. 비참하게 깔린 것치곤 고통이 없었다.
“혜성 씨!”
눈물을 글썽이는 강지영이 제일 먼저 보였다.
도망친 줄 알았던 CP와 스태프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손에는 방패며 투구, 갑옷 등의 방어구를 잔뜩 든 채로.
“혜성 씨가 우리를 지켜줬으니, 이젠 우리가 혜성 씨를 지키겠습니다!”
CP도 상기된 얼굴로 울먹이며 혜성을 쳐다봤다.
“도망쳐서 미안합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싸웁시다!”
“혜성 씨! 당신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다른 스태프들도 결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다들 크게 감동한 표정이었다.
‘아아, 굳이 감동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하던 대로 도망쳐도 되는데……’
혜성은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도로 삼켰다.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개개인은 약했지만, 여럿이 뭉친 힘은 강했다. 기둥 같은 거인의 발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크아아악!”
거인이 괴상하게 울부짖었다.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놈은 한발 물러섰다가, 오른발로 사람들을 걷어찼다.
다만 워낙 덩치가 큰 탓에 놈이 발길질하기까지는 4, 5초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도망쳐!”
스태프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단 한 사람. 혜성의 바로 옆에 있던 강지영만 제외하고.
강지영은 거인에게 압도된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안 돼!”
파앗, 혜성의 신형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그는 강지영을 밀치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대신 섰다.
콰앙, 곧이어 거인의 발이 그대로 혜성을 강타했다.
“크헉!”
혜성은 피를 뿜으며 그대로 날아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장이 파열되는 기분이었다.
“혜성 씨!”
쓰러진 강지영이 안타깝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태프들도 모두 혜성이 날아간 곳을 쳐다봤다.
쿵, 쿵, 쿵!
혜성은 나무와 조형물 2개를 연달아 뚫고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먼지만 요란할 뿐. 혜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 충격이면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우어어어!”
거인 녀석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혜……”
CP가 뒤늦게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퍼펑!
은색 섬광이 슬라임 거인을 강타했다. 사람들의 눈이나 상공의 드론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빛이 번쩍인 것 같았다.
“끄어어어!”
거인은 복부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덩치만큼이나 반응도 길었다. 녀석은 한참을 비틀거린 뒤,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인제 보니 녀석의 배에는 손잡이만 남은 대검이 깊이 박혀 있었다.
‘뭐지?’
모두의 시선은 거인의 반대 방향, 혜성이 날아갔던 곳으로 집중됐다.
혜성이 검은색 옷을 툭툭 털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을 하고. 번쩍거리던 갑옷은 처박힐 때 부서지고 없었다.
- 또 신나게 얻어터졌네. 넌 매일 싸움이냐? 하긴, 내 입장에서야 싸움은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머릿속에서 대수영의 웃음이 들렸다. 충격과 함께 녀석도 깨어난 것 같았다.
2차 각성. 상대의 힘과 스피드, 카피. 거기에 대수영의 예측까지.
“시발, 죽는 것도 참 어렵네. 누구 맘대로 각성이야?”
혜성은 거인과 스태프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영화처럼 멋진 죽음에 대한 바람은 사라졌다. 대신 상대를 노려보며 전의에 불탔다.
***
병원 앞, 설렁탕집.
평소라면 손님으로 북적일 저녁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숨 막힐 듯한 침묵만이 흘렀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와! 저거 뭐야?”
사람들은 수저를 든 채로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혜성이? 인터뷰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거기서 왜 나와?”
태호도 넋을 잃은 손님 중 하나였다. 구석에서 혼자 설렁탕을 먹던 참이었다.
[긴급 생중계. 이혜성 대 변종 슬라임]
뉴스인지 액션 활극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영상이 긴급 뉴스로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슬라임과의 전투였다. 그런데 슬라임들이 거인으로 진화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위험에 빠진 미녀. 그 미녀를 구하기 위한 영웅의 장렬한 희생. 위기의 순간 영웅의 각성과 반격. 끝으로 무참히 무너지는 몬스터까지.
영화에서 흔히 말하는 흥행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스태프 하나가 혜성에게 새로운 레플리카 대검을 던져줬다. 혜성은 놈을 쓰러뜨린 뒤, 놈의 심장에 대검을 박았다.
“와-아! 그렇지!”
“역시 이혜성!”
그 순간, 식당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전역에서 함성이 터졌다. 비록 레플리카 대검이었지만, 거인의 괴력을 카피한 혜성의 손에 쥐어지니 AA급 아이템 못지않았다.
“대검술의 기본은 힘이지. 이제 혜성이의 대검술도 꽃을 피우는 건가?”
태호는 반복해서 보여주는 혜성의 대검술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혜성이 아카데미 시절부터 대검술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보잘것없는 능력치 때문에 좌절하던 것도 곁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지금 혜성이 느낄 희열을 누구보다 생생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대한민국은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상황이 정리되고 혜성이 주저앉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혜성의 품에 달려와 안겼다.
“어, 어?”
“이건 아니지.”
뭇 남성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강지영이었다. 혜성이 엉거주춤 서 있는 가운데, 몇 년째 선호도 1위를 놓치지 않는 여신이 혜성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카메라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둘의 주위를 맴돌며 여신의 눈물을 클로즈업했다.
“야이, 개새끼야! 네가 감히 우리 여신님한테……!”
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리 친구라도 이건 용서할 수 없었다.
***
집에 돌아온 뒤.
강지영은 핸드폰을 꺼서 침대에 던져 버렸다. 아까부터 전화에서 불이 나고 있었다.
- 야, 좋은 말로 할 때 전화 좀 받아. 네가 거기서 이혜성에게 안기면…….
- 저 MBS 박 PD입니다. 지금 방송가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천하의 강지영이…….
- 아이고, 강지영 씨. 이러시면 안 되죠.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지금 광고주들이 아주 난리가…….
소속사 사장과 매니저들, PD 등의 방송 관계자들, 거기에 친한 연예인들까지. 다들 그녀가 혜성에게 안긴 것 때문에 애가 탔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도 그녀와 혜성으로 도배가 된 상태였다.
“미친 새끼들. 내가 누구한테 안기든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차피 방송은 처음부터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 어떻게 되든 미련 따윈 없었다.
중요한 건 그깟 방송이 아니라 이혜성이라는 독특한 능력자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인가? 자, 2차 각성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한번 볼까?”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혜성의 촉감에 정신을 집중했다. 곧 그녀의 몸 전체가 은은하게 빛났다.
단순히 악수를 한 정도가 아니라 온몸으로 혜성을 느낀 상태.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분석이 가능했다.
***
늦은 밤. 한강공원 벤치.
“어? 저거 장현수 아냐? 가서 사인이라도 해 달라고 할까?”
“야, 사인은 무슨. 방송 보니까 이혜성한테 밀리던데.”
“하긴. 받으려면 장현수보다는 이혜성의 사인을 받아야지.”
행인들이 그를 힐끔거리며 쑥덕거리는 게 들렸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그의 귀에는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뭘 봐, 이 새끼들아? 사람 술 마시는 거 처음 봐?”
장현수는 행인들을 향해 손에 든 소주병을 던졌다.
행인들은 가래침을 뱉으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몇몇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그가 노려보자 슬그머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씨부랄, 이혜성. 별 시답잖은 새끼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네.”
장현수는 소주병을 입에 물었다. 벌써 다섯 병째. 오늘따라 술을 마셔도 취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오늘은 완전히 혜성의 독무대. 그는 주인공을 위한 조연으로 전락했다.
“겨우 그런 애송이한테 밀리다니.”
그는 술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산산조각 나며 깨진 술병이 그의 기분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아이고, 이런 데 계셨습니까? 한참 찾았습니다.”
누군가가 장현수의 옆에 앉으며 아는 체했다.
장현수는 왼쪽을 힐끔 돌아봤다. 조금 의외의 인물이었다.
“당신이 여기 왜 왔어? 사람 놀리러 왔나?”
그는 다른 소주병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놀리다뇨. 우리가 방송에서 함께 한 게 몇 년인데요. 전 어디까지나 현수 씨의 편입니다.”
상대는 안경을 올려 쓰며 히죽 웃었다.
“왜 온 거야? 혜성을 돋보이게 할 조연이 필요한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혜성은 겨우 C급 전투 보조요원 아닙니까? NSA의 에이스 출신에게 비빌 레벨은 아니죠.”
상대는 말을 빙빙 돌렸다.
“그럼 뭐야?”
그제야 장현수는 인상을 쓰며 상대를 유심히 바라봤다. 기분 나쁜 놈. 상대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장현수 씨를 좀 돕고 싶습니다.”
“나를 돕는다고?”
“그렇습니다. 솔직히 현수 씨가 이혜성한테 밀릴 게 뭐가 있습니까? 얼굴? 언변? 능력? 아무리 이혜성이라도 NSA의 에이스보다는 한 수 아래죠.”
상대는 ‘에이스’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장현수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시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뭘 어쩌자는 거지?”
“제가 장현수 씨 대 이혜성의 2라운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변종 몬스터 같은 간접적인 대결이 아닌, 누구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죠.”
“서바이벌? 그런데 이혜성에게는 2차 각성이 있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혜성에게는 아주 큰 약점이 있으니까요.”
“약점?”
장현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재차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놈의 가족 말입니다.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아주 웃긴 개소리죠. 방법이야 어찌 됐건 이기면 장땡 아닙니까?”
상대는 소리 죽여 웃으며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가족이라고?”
장현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법이야 어찌 됐건 이기면 장땡이다.”
그는 상대의 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 갑시다. 누가 진짜 영웅인지.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줍시다.”
상대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툼한 뿔테 안경 너머, 그의 작은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