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9. 너는 내 운명 (3)
‘정말 매력 있다.’
혜성은 강지영을 연신 힐끔거렸다.
대기실에서 담배나 피우던 건방진 연예인이 아니었다.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리허설하는 모습에서 프로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강지영 씨. 정말 끝내주죠?”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친한 척했다. 한껏 멋을 낸 장현수였다.
장현수는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언뜻 보면 사적인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눈독 들이지 마라. 쟤는 내가 찍었으니까.”
장현수가 낮은 협박조의 목소리로 말했다.
“뭐?”
혜성이 대꾸하기 전, 그는 다른 스태프에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옮겼다. 마치 별일 없었던 것처럼.
“재수 없는 자식.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혜성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후, CP가 촬영 시작을 알렸다.
방송국 뒤쪽, 공원을 배경으로 토크쇼가 시작됐다. 중앙에 MC인 강지영이 앉고, 혜성과 장현수가 그녀의 좌우에 앉았다.
“국가를 위한 소리 없는 헌신. 이 시대의 새로운 영웅. 오늘은……”
강지영은 먼저 혜성을 소개했다. 담담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 카메라가 돌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혜성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혜성 씨. 오늘 방송이 처음이시죠?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하세요.”
그녀가 가볍게 웃으면서 주의를 환기했다.
“아!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본대로 대답했다.
“……여의도 폭탄 테러, 정말 대단했죠. 테러범과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그건……”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다음은 술술 나왔다.
같은 게스트였지만, 메인은 어디까지나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혜성이었다.
장현수는 혜성의 말을 들으며 간간이 맞장구를 치는 정도. 촬영이 계속되자 장현수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서렸다.
“잠깐 쉬었다 합시다.”
1시간쯤 지나, CP가 촬영을 중단하려는 찰나였다.
위-잉, 어디선가 사이렌이 숨넘어갈 듯 울렸다. 동시에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의 핸드폰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변종 게이트 생성! 긴급 대피령 발동!”
스태프 하나가 큰 소리로 문자메시지를 읽었다. 스태프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사색이 됐다.
“변종 게이트?”
혜성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어두운 하늘. 1시 방향에서 옅은 회색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변종 게이트.
등장하는 몬스터 자체는 일반 게이트에 비해 낮은 등급이었다. 다만 열리는 시간이 비정상적으로 짧았다. 대피 시간은 10분 남짓.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시간을 끌 테니, 다른 분들은……”
혜성은 카메라를 힐끔 돌아본 뒤 큰 소리로 말했다. 10분 안에 장비를 모두 챙겨 도망가는 건 무리였다.
게이트 오픈, 스태프들 대피, 장렬한 전사. 이번에도 그럴듯한 계획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아니. 나도 남겠다.”
누군가가 거칠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현수였다.
“영악한 놈. 너 혼자 영웅이 되겠다는 거지? 내가 그 꿍꿍이를 모를 것 같았냐?”
퉤, 그는 가래침을 뱉으며 혜성을 노려봤다. 카메라가 꺼졌다는 걸 확인하자 본심이 나왔다.
‘뭐? 영웅?’
혜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기껏해야 C급 몬스터가 나올 겁니다. 국민 영웅과 전직 NSA 요원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장현수는 강지영을 바라보며 ‘국민 영웅’을 강조했다. 속내가 뻔히 보였다.
“촬영용 레플리카 아이템들 있죠? 그거 다 가져오십시오. 오랜만에 시청률 제대로 한번 뽑아 봅시다.”
그는 이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CP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CP는 장현수와 혜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머리를 굴렸다.
장현수는 에이스급 능력자. 혜성은 단신으로 테러범을 막은 국민 영웅. 이 정도 조합이면 변종이 아니라 AAA급 게이트도 문제없었다.
“좋습니다. 대박 한번 내 봅시다.”
CP는 고개를 끄덕인 뒤 스태프들에게 촬영 준비를 명령했다. 촬영장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이 새끼.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혜성은 기가 막혔다. 순직을 위한 희생이 졸지에 몬스터 사냥 방송으로 바뀌었다.
***
“어? 눈인가?”
스태프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 균열에서 뭔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이 아니었다. 형형색색의 슬라임들이었다.
슬라임.
몬스터 도감에서 최하위에 랭크된 몬스터. 언뜻 보면 거대한 물방울처럼 귀여웠고, 반투명한 몸 중앙에는 심장 같은 핵이 있었다.
촬영용 트레일러 뒤.
“쳇, 겨우 슬라임인가?”
“저것들은 나도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도 쪽수는 많잖아. 아마 좋은 경쟁이 될 거라고.”
CP와 강지영을 비롯, 모든 촬영팀원이 눈을 빛내며 전방을 주시했다. 이걸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갑옷과 방패 등의 방어구들이 옆에 있었지만, 아무도 착용하지 않았다. 하긴, 다른 몬스터도 아닌 슬라임이었다. 가볍게 여기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약 50m 앞, 게이트의 바로 아래.
혜성과 장현수는 나란히 서서 슬라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중세 스타일로 완전무장한 상태.
다만 혜성은 묵직한 대검을 든 반면, 장현수는 가벼운 쌍검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촬영팀에서 급히 조달한 레플리카 아이템이었다. 비록 진짜엔 미치지 못했지만, 슬라임쯤은 단칼에 썰어버리고도 남았다.
혜성은 신중하게 자세를 취했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왼발은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몸통은 약간 비틀었고, 두 손은 곧게 뻗어 대검을 수직으로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검을 든 게 얼마 만이지?’
그는 대검의 묵직한 감각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해골 병사의 장검을 든 것과는 전혀 달랐다.
1차 각성을 마치고 능력이 개화하기 전, 그도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던 때가 있었다. 당시 그의 특기는 대검술. 개화한 능력이 너무 낮아 중도에 포기했지만, 순수한 검술 실력은 A급이라 자부했다.
옆에서 장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녀석의 패턴은 유명하지. 데미지를 받아 2차 각성을 하고 반격하는 것. 그런데 저 슬라임들을 상대로도 2차 각성을 할 수 있을까?”
장현수는 혜성을 돌아보고 비아냥거렸다.
‘역시 전투팀장. 그걸 벌써 알아본 건가?’
혜성은 쓰게 웃으며 녀석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이야 방송가에서 실실댔지만, 한때는 NSA에서도 잘나가던 전투팀장이었다.
“전투 개시!”
슬라임들의 첫 번째 무리가 지면에 떨어짐과 동시에 CP가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드론 4대가 상공에서 전투를 촬영하는 가운데, 장현수가 먼저 치고 나갔다.
- …… 28, 29, 30, 31…….
드론 아래에 달린 디지털 숫자가 빠르게 상승했다. 킬 수였다. 퍼퍼펑, 그의 손에 들린 쌍검은 주위의 슬라임들을 조각조각 찢었다.
‘건방진 애송이 녀석!’
그는 우측을 힐끔 돌아봤다. 혜성은 너무 소극적이었다. 킬 수가 아직 한 자리 숫자였다.
“이야, 장현수 씨가 돋보이는군요! 역시 NSA의 전투팀장답습니다! 반면 혜성 씨는 오늘 컨디션이 조금 나쁜 것 같습니다.”
CP가 중계하듯 장현수를 띄워줬다. 장현수의 킬 수는 어느덧 세 자리 숫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반면 혜성의 킬 수는 아직 20.
“글쎄요. 아직은 초반이니까 좀 더 지켜보죠.”
강지영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를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저게 평범한 슬라임일까?”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스태프들은 혜성과 장현수의 전투에만 주의가 쏠린 상태. 그녀가 묘한 수인을 맺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다.
***
슬라임들은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게이트는 하늘 높이 떠 있는 상태. 게이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놈들은 그저 장현수와 혜성의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꾸륵?!”
슬라임 몇 마리가 자기들끼리 엉켰다. 그 와중에 몇몇이 터지면서 서로 핵이 겹쳤다.
“웃기는 놈들.”
장현수는 놈들을 비웃으며 더욱 사냥에 열을 올렸다.
“어?”
혜성이 먼저 놈들의 변화를 눈치챘다. 문득 팔에 소름이 돋았다.
겹쳐진 핵이 하나로 합쳐져 새로운 핵이 됐다. 새로운 핵은 새로운 슬라임으로 진화했고, 그 새로운 슬라임은 다시 주위의 다른 슬라임들을 집어삼켰다. 마치 슬라임이 슬라임을 먹는 것 같았다.
“융합?”
장현수도 뒤늦게 비명처럼 외쳤다.
“젠장. 변종 슬라임은 남미 쪽에서만 나타나는 거 아니었나?”
혜성은 몬스터 도감을 떠올렸다.
변종 슬라임.
3년 전 브라질에서 처음 발견된 몬스터. 평소에는 D급이지만, 동료들의 핵을 흡수하면 AA급 이상으로 진화한다.
특별한 스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대한 체구와 막강한 힘 때문에 상당히 위협적이다.
놈이 괴성을 내질렀다. 동료를 삼킬 때마다 놈은 점점 커지며 형체가 변했다.
먼저 사람처럼 눈, 코, 입이 생겼다. 원숭이처럼 긴 팔과 다리가 생겼고, 말캉말캉한 피부는 단단한 근육질이 됐다. 키는 약 10m. 전설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무려 둘이나.
“저, 저게 뭐야?”
CP는 슬라임 거인들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른 스태프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었다.
“크아아아악!”
놈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완성이 멀지 않았다는 징후였다. 울음에 호응하듯 주위에 회색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런 건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혜성이 한창 당황한 순간, 옆에서 장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놈씩 맡자. 먼저 쓰러뜨리는 쪽이 승자다!”
장현수는 오른쪽 거인을 향해 내달렸다. 손목을 가볍게 떨었다. 곧 장검에 붉은색과 푸른색 기운이 하나씩 맺혔다. 놈의 진화가 완성되기 전, 선수를 치려는 속셈이었다.
혜성도 대검을 고쳐 잡고 내달렸다. 다만 다른 슬라임 거인이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강지영과 스태프들.
그는 다시 위를 힐끔 쳐다봤다. 이 와중에도 드론들은 자동으로 움직이며 촬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결은 네가 이겨라. 나한테 중요한 건 순직이니까.’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강지영을 응시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 부릅뜬 눈, 그리고 발그레한 볼. 그녀는 슬라임 거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겨우 도망친 슬라임 몇 놈이 촬영팀을 포위했다.
“뭐해! 빨리 도망쳐!”
혜성은 슬라임들을 베며 외쳤다. 그제야 스태프들은 정신을 차리고 흩어졌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스태프들의 충격과 공포가 드론에 생생하게 포착됐다. 조금 전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쿵,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진화를 마친 거인이 그들을 향해 달려온 것이다.
스태프들은 발을 멈췄다. 놈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뭐해? 죽고 싶어?”
혜성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치며 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스태프들이 대피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터.
그는 대검을 고쳐 잡고 이를 악물었다. 그제야 스태프들은 다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콰쾅, 놈이 거대한 발로 땅바닥을 걷어찼다. 나무 몇 그루가 수수깡처럼 꺾여 날아왔다.
혜성은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가 피하면 나무는 그대로 스태프들을 덮칠 것이다.
피하는 건 불가능. 그는 대검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부웅, 넓은 검신 탓에 파공음이 묵직했다.
콰직, 혜성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뼈가 부서진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큭!”
그는 피를 뱉으면서도 대검을 지팡이 삼아 버텼다.
곧이어 소품으로 쓴 조각상 하나가 놈의 발에 차여 날아왔다. 혜성은 억지로 대검을 들어 휘둘렀다.
까깡, 레플리카 대검이 허무하게 부서졌다.
“혜성 씨!”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안타까운 목소리. 강지영인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거인이 돌진하며 발을 높이 들었다.
‘깔리면 2차 각성이고 뭐고 즉사다!’
피하기엔 늦었다. 장현수가 그를 도와줄 것 같지도 않았다.
‘성공이다.’
혜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순직은 둘째 문제.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를 지키다가 죽는다면 그 또한 낭만적이었다.
이어서 거대한 발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