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8. 너는 내 운명 (2)
SJ 기획 소회의실.
조명이 다 꺼진 가운데, 박무영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있었다. 시선은 벽면의 대형 모니터에 고정된 상태였다.
“또 보십니까?”
문득 왼쪽에서 한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니터에서는 혜성 대 차성진의 전투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군.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게 얼마 만인지.”
박무영은 그녀를 힐끔 돌아본 뒤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한수은은 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는 타고난 능력자였다. 몬스터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최강의 사나이.
지금은 사무실에 처박혀 있지만, 혜성의 영상을 보니 새삼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혜성과 관련해서 일본 첩보국의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일본에서?”
그는 리모컨으로 영상을 잠깐 중지시켰다.
“블랙의 자객이 이혜성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수은은 겉에 [1급비]라고 찍힌 보고서를 건넸다.
“어떤 놈이지?”
박무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보고서를 훑어봤다.
암호명 몽환.
정체와 스킬은 불명. 블랙이 오래 전에 한국에 심어놓은 능력자가 행동을 개시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범인은 방송 관계자로만 추측될 뿐. 구체적인 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방송 관계자라…… 하긴, 이번 일로 이혜성은 블랙의 최우선 타깃이 됐을 터. 놈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일단 NSA에 통보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NSA는 잠깐 기다려라. 이번엔 우리가 직접 대응에 나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의 암호명을 말했다.
“정말입니까?”
한수은이 흠칫 놀라 되물었다.
“물론. 이혜성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가? 이걸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윽고 한수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이혜성을 둘러싸고 우리와 블랙의 2차전이 펼쳐지는 건가? 재미있군.”
그는 일본에서 온 보고서를 다시 훑어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만 이번 일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이혜성. 그들은 뒤에서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
‘괜히 인터뷰에 응했나?’
방송국 대기실에 들어선 직후, 혜성은 자신의 결정을 크게 후회해야만 했다. 단순히 말 몇 마디 하고, 사진 몇 장 찍는 정도가 아니었다.
준비 과정부터 어지러웠다. 헤어 담당, 메이크업 담당, 의상 담당 등 한꺼번에 서너 명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한쪽에선 방송작가가 컨셉과 대본에 관해 설명했고, 핸드 카메라를 든 VJ가 그 모습을 촬영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출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예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는 CP가 들어왔다. 노란 바지, 빨간 셔츠, 거기에 녹색 뿔테까지. 생긴 건 후덕한 아저씨였는데, 차림이 형형색색으로 화려했다.
둘은 명함을 교환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방송은 처음이실 테죠?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원래 방송이라는 게……”
장황했다. 솔직히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그리고 출연료 말인데요.”
출연료, 그 단어만은 확실히 귀에 들어왔다.
“소문이 파다합니다. 모 길드의 백지수표 제안을 거절하셨다고요?”
CP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백지수표? 혹시 백호 길드의 제안을 말하는 건가? 언제 이렇게 소문이 퍼졌지? 아니, 그보다 그게 왜 백지수표가 된 거야?’
혜성은 황당함을 억누르며 CP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출연료는 천만 원밖에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이걸 어떻게 드릴까요?”
CP는 넌지시 혜성의 눈치를 살폈다.
‘천만 원? 이게 웬 떡이야?’
동공 지진. 혜성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돈은 당연히 제 계좌로……”
혜성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각계의 조의금을 위한 투자. 그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액수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 기부가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드는 작은 씨앗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부요? 아!”
CP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선한 영향력. 기부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기부도 유도하려는 거죠?”
“그렇습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혜성은 상이용사들에 대한 지원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황석구가 한 말을 그대로 읊었을 뿐이었지만, CP는 크게 감동한 눈치였다.
“그럼 제가 화끈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CP는 그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국민 영웅 이혜성이 자신의 출연료를 익명으로 기부한다. 그런데 그걸 열혈 기자가 우연히 입수하고 특종으로 보도한다. 기자가 정보를 입수한 경위는 영업 비밀. 이어서 각계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국민 영웅의 명성은 더 높아진다.”
그는 혜성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어떠십니까? 아주 좋은 그림 아닙니까?”
“역시 CP님하고는 말이 잘 통하는군요.”
“하하하. 방송물 먹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다시 CP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다른 스태프가 들어와 귓속말로 보고했다. 스튜디오 쪽에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따 스튜디오에서 뵙겠습니다.”
CP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스태프를 따라 나갔다.
스태프들이 다시 그에게 달라붙어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CP와 대화한 덕분인지 혜성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방송도 생각보단 나쁘지 않군.”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본을 들었다. 그렇게 준비가 다 끝나고 스태프들이 돌아간 후였다.
“여어, 혜성 씨. 반가워요. 나 알지?”
누가 아는 척을 하며 들어왔다. 실내임에도 검은 선글라스를 쓴 사내였다. 손목의 명품 시계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아, 맞다. 저 양반도 같이 인터뷰한다고 했지.’
혜성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장현수.
전직 NSA 전투2팀 팀장. 본부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요즘엔 능력자들이 방송계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었는데, 그 시초라고 할 수 있었다. 방송물이 좋은지 NSA에 있을 때보다 신수가 더 훤했다.
“같은 NSA 출신을 보니 반갑군. 방송은 처음이지?”
장현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혜성의 옆에 앉았다.
“요즘은 기관에서 방송 출연을 허락해 주나?”
“기관에서는 공짜로 홍보할 수 있고, 방송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가급적 허락해주는 편입니다.”
“이야, 많이 변했네. 나 때는 어림없었는데. 내가 처음 방송에 출연했을 때는……”
그는 낄낄거리며 자신의 방송 경험담을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듣기만 했다.
“아참. 요즘 혜성 씨가 전국적으로 화제야. NSA에 목숨을 건다고 누가 알아줄 것 같아? 명예? 사명감?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나나 혜성 씨 같은 능력자는 선택받은 존재라고. 그러니 그 능력을 이용해 한번 멋지게 살아보자고.”
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택받은 존재? 문득 차성진이 떠올랐다. 말투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은 그 미친놈의 헛소리와 똑같았다.
마침 스태프가 들어와 사진 촬영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는 가볍게 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건방진 새끼! 국민 영웅? 그 인기가 얼마나 갈까?”
뒤에서 들으라는 듯한 장현수의 혼잣말이 들렸다.
***
눈부신 조명의 스튜디오.
CP와 수많은 스태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방에서 계속 플래시가 터졌다.
‘역시 연예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혜성은 그만하자는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삼켰다. 평생 찍은 사진보다 더 많이 찍은 기분이었다. 다양한 의상과 포즈, 컨셉, 게다가 계속 억지로 웃은 탓에 입가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
“잠깐 쉬었다 합시다.”
그가 거의 쓰러지기 직전, CP가 사진 촬영을 멈췄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물론 마냥 쉬는 건 아니었다. 의상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다시 하고, 다음에 있을 인터뷰를 위해 대본도 몇 번이나 정독했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더 바빴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CP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왔다!”
모두의 시선은 CP 옆, 매니저들에게 둘러싸여 같이 들어온 여자에게 집중됐다. 대한민국 넘버 원. 수많은 사람 속에 있어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강지영.’
혜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녀의 눈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눈매였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귀여움과 섹시함, 도도함 등 다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손가락을 브이로 해서 내밀었다. 매니저가 담배를 꽂아주고 불까지 붙여줬다.
“지영 씨 차례까진 좀 시간이 있습니다. 우선 이혜성 씨 사진 촬영이 끝난 다음, 이혜성 씨하고 장현수 씨가……”
CP가 굽실거리며 일정을 설명했다.
“인터뷰 한두 번 하나요? 알았어요.”
그녀는 담배를 물고 대본을 훑어 넘겼다. CP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따로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나가려던 그녀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혜성과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이혜성인가요? 영상으로 본 것보다 실물이 훨씬 좋은데요?”
그녀는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얼떨결에 일어나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테러범도 때려잡으면서 뭘 그렇게 쫄아요? 녹화 방송이니까 긴장 풀고 편하게 하세요.”
그녀는 혜성의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섰다. CP가 그녀와 혜성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허겁지겁 뒤따랐다.
“와, 천하의 강지영이 먼저 아는 척을 다 하네?”
주위의 스태프들이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녀가 나간 뒤, 혜성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참. 태호 녀석 사인!”
그는 뒤늦게 부탁을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
지하 주차장 구석, 스포츠카 안.
“이혜성이라고? 영감한테 들은 것하고 많이 다르잖아? 귀여운 면도 좀 있는 것 같고.”
강지영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손바닥을 바라봤다. 혜성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그녀의 손바닥이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손에 남은 감촉을 분석하는 것처럼. 그런데 잠시 후.
“어라? 이건 뭐야? 현재는 C급인데, 잠재력은 측정 불가?”
그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담뱃재가 무릎 위에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혜성의 기운을 느꼈다. 결과는 동일. 분석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어이없군. 그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추가 각성이 가능한 거지?”
너무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군.”
그녀는 조수석 서랍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작은 반지함을 닮은 케이스였다. 다만 은은한 서기를 뿜으며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다가 핸드백에 넣었다.
“영화를 한 편 찍어 볼까? 주인공 이혜성. 머저리 라이벌 장현수. 그리고 비련의 여주인공 강지영. 이 정도면 되겠지?”
그녀는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