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7. 너는 내 운명 (1)
늦은 오후 무렵, 강남역 근처 커피숍.
혜성은 백호 길드의 김준수와 마주 앉았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두꺼운 뿔테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상처는 어떠십니까? TV에서 봤을 때는 이번에도 친구분께서 고생 좀 하셨을 거 같은데.”
김준수가 점잖게 웃으며 물었다.
“다 나았습니다. 몸이 조금 찌뿌둥한 것 빼곤 괜찮습니다.”
혜성은 자신의 손발을 힐끔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십시오. 상처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요. 힐러가 완벽하게 치료했어도 부상이 쌓이면 후유증이 남는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김준수는 옆에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혜성은 쇼핑백을 슬쩍 열어봤다.
백호 길드에서 쓰는 각종 영양제가 들어 있었다. 대충 헤아려도 시가 500만 원은 넘어 보였다.
“이런 선물은……”
그가 쇼핑백을 돌려주려는 찰나, 김준수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혜성 씨 덕분에 이번에 길드 홍보가 제대로 됐으니까요. 거기서 백호의 홍보영상이 터질 줄이야.”
김준수는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제야 혜성은 쇼핑백을 옆의 빈 의자에 올려놓았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바꿔치기할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제게 연락하신 겁니까?”
그가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김준수는 웃음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짐작은 하셨을 겁니다. 지난번에 제게 하셨던 농담 기억하십니까? 계약금으로 20억 원쯤 주시면 생각해 보시겠다고 하셨던 거 말입니다.”
김준수는 테이블 아래의 서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그때 말씀하신 계약금 20억 원. 맞춰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하시지요.”
“……!”
혜성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조건이 인상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정말 계약금 20억 원을 제시할 줄은 몰랐다.
“혜성 씨는 보면 볼수록 탐이 나더군요. 물론 혜성 씨의 조국애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길드에서 활약하는 것도 넓게 보면 사람들을 위한 것 아닙니까?”
김준수는 혜성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결정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댁에 돌아가셔서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혜성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상대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0억 원.
이거 한 방이면 순직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
그날 밤, 자취방.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혜진아.
…….
혜성은 한숨을 쉬며 태블릿 펜을 내려놓았다. 벌써 수십 번째 같은 말을 썼다 지웠다.
할 말은 너무 많은데, 그것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억누른 흐느낌만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뒤로 가기를 눌렀다. ‘저장, 저장 안 함’ 사이에서 고민 끝에 ‘저장 안 함’을 눌렀다.
유언장은 남길 수 없었다. 순직 심사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순직이 고의로 밝혀질 경우, 보상금과 서훈, 각종 유족 특권들은 전부 취소될 터였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거지? 이제 겨우 능력자로서 인정을 받……”
목이 메었다. 혼잣말도 채 마칠 수 없었다. 그는 눈을 크게 깜빡여 눈물을 삼켰다. 그리곤 태블릿 옆에 놓인 명함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백호 길드 김준수.
도금으로 멋지게 새겨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20억. 20억이라……”
그는 명함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미 백 번은 더 중얼거린 ‘20억’이란 단어를.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가 C급 보조 요원으로 남았더라면 평생 가도 만질 수 없는 거금. 이건 AAA급의 상위 랭커나 가능한 계약이었다.
그는 순직의 목적을 되새겨 봤다. 처음엔 보상금과 보험금이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다만 차성진과의 싸움 이후, 순직에 새로운 목적이 추가됐다.
‘어차피 결말은 죽음.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는 거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장엄한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 허공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쏜다.
대통령의 헌사가 있고,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차례로 그의 애국심과 용기를 추모한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례식이었다.
명예욕, 자기만족.
뭐라고 불러도 좋았다. 하늘의 별처럼 영원한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결심이 섰다.
“엄마, 아빠, 혜진아. 미안하다. 20억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은 나 자신을 위해 멋지게 죽고 싶어. 길드 소속의 헌터가 아닌, 국민을 위한 국가기관의 순직자로서.”
잠시 후,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김준수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저 이혜성입니다. 네, 네. …… 죄송합니다. 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
다음 날, NSA 국장실.
혜성은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전투 보조요원이었다. NSA 요원이 되고 국장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수고했네. 테러의 목적, 놈이 폭탄을 입수한 경위 등 남은 숙제가 많지만……. 그건 차차 해결하기로 하지.”
국장도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흡족한 미소를 얼굴에 드리운 채.
목에 걸린 신분증에는 사진과 함께 ‘한진영’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혜성 씨가 정말 큰일을 했어. 대한민국 전체가 혜성 씨에게 큰 빚을 진 셈이야.”
“임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혜성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겸손하긴. 포상은 좀 기다리게. 이건 단순히 표창이나 특진으로 끝날 일이 아니거든. 위에서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은 눈치야. 그리고 당분간은 지원팀 임무에서 빠지게. 팀장에게는 내가 말해놓지.”
“알겠습니다.”
“아참, 자네 부모님 말인데……”
한진영은 잠깐 말을 멈췄다.
혜성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한진영을 쳐다봤다. 오늘 아침, 어머니와 했던 통화가 떠올랐다. 그때는 특별한 일이 없어 보였다.
“블랙은 자네에게 이를 갈고 있을 걸세. 만약 놈들이 보복에 나선다면, 제1 타깃은 아마 자네의 가족이 될 테지. 그래서 내 직권으로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발동했네.”
“아!”
“자네의 가족들은 다른 곳에서 새 신분으로 살게 될 거야. 다만 당분간은 가족들에게 연락을 삼가는 게 좋을 것 같군.”
휴우,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는 국장의 결정을 백번 이해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자네 같은 요원들이 현장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하는 게 내 일이지 않은가?”
한진영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혜성도 찻잔을 들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다만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네. 방송국에서는 민감한 사항은 보도하지 않았지. 예를 들어 차성진이 게이트를 열 수 있었던 건 국가 연구원의 아이템 때문이었다는 것 말일세.”
혜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침 뉴스에 그런 내용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 테러 사건의 전말을 전부 밝힌다?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질 게 뻔했다. 국가기관의 불신임은 둘째 치고, 자칫 사회 시스템 전반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우리에게 협조하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었네. 그게 바로…… 자네야.”
“네?”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한진영은 어쩐지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가 한번 방송에 나가줘야겠네. 우리 쪽에서도 기관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거든. 어떻게 보면 방송국과 우리, 양쪽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지.”
“지금도 신문, 잡지의 짧은 인터뷰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그 정도가 아니야. SBC 공중파, 2시간짜리 특별 인터뷰네. 아마 대한민국의 그 어떤 능력자도 이런 특별 인터뷰는 한 적이 없을걸?”
“전 방송국은 근처도 못 가 봤는데……”
혜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PD를 비롯해 전문가들이 자넬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아주 특별한 사람도 출연하기로 했네.”
한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또 누가 출연하는 겁니까?”
“자타공인 대한민국 넘버원 미녀.”
한진영은 장난하듯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강지영이 사회자로 출연하기로 했네.”
“네? 강지영이요?”
혜성은 차를 마시다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동공 지진.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강지영.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의 여신. 능력자로 비유하면 압도적인 국내랭킹 1위에, 세계에서도 주목하는 차세대 에이스였다.
‘녀석이 들으면 부러워서 환장하겠군.’
그는 태호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녀석이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는 그녀의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머리도 식힐 겸 좋은 경험 한번 해 본다고 생각해.”
“알겠습니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송을 통한 유명세. 그것은 자신의 사후, 각계의 성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필수였다.
***
일본 도쿄, H 호텔 VIP룸.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세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각각 흰색 정장, 회색 생활한복, 검은색 기모노를 입은 노신사였다.
“차성진이 무참히 깨졌다고?”
중앙의 노인이 신문을 내던지며 혀를 찼다. 흰 수염, 흰 눈썹, 그리고 흰 정장과 흰 중절모까지. 흰색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제 불찰입니다.”
우측에 앉은 노인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검은 기모노를 입은 노신사였다. 깊게 파인 주름 탓에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놈 때문에 조직 전체가 우스워졌습니다.”
좌측의 회색 노신사가 끼어들었다. 어쩐지 검은 노신사를 비웃는 것 같았다.
“자자, 우리끼리 다투지 말게. 중요한 건 지금부터니까.”
중앙의 흰 노인은 손을 살짝 들어 둘을 중재했다. 나머지 둘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꼬리는 확실히 잘랐습니다. 문제는 차성진을 막은 놈입니다.”
다시 검은 노신사가 대답했다. 그는 신문을 힐끔 쳐다봤다. 이혜성이 손을 흔드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이혜성이라고 했던가요? 듣자 하니 뇌전의 광견도 놈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회색 노신사가 흰 노신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신문에서 봤네. 아주 독특한 능력을 지닌 것 같더군. 그래, 자네들 생각은?”
“정보국 놈들이 날뛸 겁니다. 광고 회사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말입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단, 이혜성이란 놈은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검은 노신사는 잠깐 말을 멈췄다.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에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 밑에 적당한 애들이 있습니다.”
다시 회색 노신사가 끼어들었다.
검은 노신사는 자존심이 상한 듯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흰 노신사 앞에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차성진을 추천한 것도 자신이었기에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애들인가?”
“본연의 능력은 낮지만, 조금 독특한 재주가 있는 애들입니다.”
회색 노신사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들의 스킬을 설명했다. 상대의 멘탈을 흔드는 정신 계통의 능력이었다.
“그것참 재미있는 스킬이군. 구체적으로 어떻게 놈을 상대할 건가?”
“마침 그 애들이 방송국에서……”
회색 노신사는 목소리를 낮춰 길게 설명했다.
“좋아. 이번엔 자네에게 맡기지.”
이윽고 흰 노신사는 흡족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두 노인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