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5. 영혼의 파트너 (2)
“이건 뭐야?”
혜성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상하좌우,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이었다.
정면에는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서 있었다.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노려봤다. 창백한 피부와 얇은 입술. 테러범답게 차가운 인상이었다.
“결전의 영역은 처음인가?”
사내가 웃으며 물었다.
“너냐? 이 일을 꾸민 또라이가.”
혜성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또라이라니. 초면에 인사가 좀 거친 거 아닌가? 아무튼 반갑다. 차성진이다.”
“궁금한 게 있다.”
“왜 하필 널 찍은 거냐고?”
“그래. 다른 유명한 능력자도 많은데 말이야.”
차성진은 잠시 말없이 혜성을 쳐다봤다. 미소를 머금은 채. 그는 이윽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람은 서로 반대끼리 끌린다고 했지? 너와 나는 정반대.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무슨 말이냐?”
“네가 여의도 공원에서 사람들 대신 인질이 되는 걸 봤다. 넌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지키려고 하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말이야. 그런 무능한 사람들을 도와줄 가치가 있을까?”
노골적인 비웃음.
“말이 길군. 요점이 뭐냐?”
혜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한 능력자가 군림해서 지배하는 세상. 오직 힘으로 통제되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세상. 어때? 너도 나와 뜻을 함께할 생각이 없나?”
“블랙?”
혜성은 신음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뉴스를 통해 놈이 말하는 것을 접한 적이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각성자들이 나타난 후. 모든 각성자들이 정의의 편에 서서 몬스터들과 싸운 건 아니었다.
각성자들에 의한 범죄와 사회적 혼란도 부수적으로 생겼다. 그리고 그중에는 각성자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자들도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블랙이었다.
“강한 자가 곧 힘이요, 법이며, 세상이다. 이쪽으로 와라.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하찮은 인간들 위에 군림할 자격이 있다.”
차성진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혜성은 놈을 노려봤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놈이 어째서 언론 플레이에 집착했는지. 무차별 테러를 통한 사회적 혼란 야기. 블랙의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미친 새끼. 이게 내 대답이다.”
퉤, 혜성은 가래침을 뱉고 단숨에 거절했다. 계획이 확고해졌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놈은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이유는?”
차성진은 멋쩍게 손을 거두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내 부모님, 내 동생, 내 친척들은 각성자가 아니거든.”
“겨우 그런……”
“혀가 길군. 넌 입으로 싸우냐?”
이번엔 혜성이 그를 비웃었다. 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람은 말로 다스리지만, 미친개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하지.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시작하자.”
혜성은 목을 좌우로 까딱이며 몸을 풀었다.
***
“씨발. 만에 하나라도 저 안에서 죽으면, 나한테 진짜 죽을 줄 알아.”
막내는 초조하게 장막 근처를 서성였다. 기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혜성이 진입한 지 벌써 5분. 장막 밖에서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두두, 요란한 바람과 함께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누가 또 뒷북을 치는 거야?”
막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헬리콥터 쪽을 쳐다봤다.
곧이어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금고를 들고 내렸다. 며칠 전에 그가 운반하던 금고였다. 안경 쓴 두꺼비처럼 생긴 연구원도 마지막에 내렸다.
시간이 없었다.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건 이혜성을 위해 준비된 아이템이다. 그는 어디에 있나?”
연구원이 금고를 힐끔 돌아본 뒤 물었다.
“한발 늦었습니다.”
막내는 정면의 검은 장막을 눈짓했다. 연구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결전의 영역으로 향했다.
“제길. 곤란하게 됐군. 하필이면 결전의 영역이라니. 시공을 차단하는 C타입인가? 이러면……”
연구원은 짜증을 내며 장막을 살폈다. 뭔가 아는 눈치였다.
“이 안으로 진입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막내가 연구원의 곁에 다가와 물었다.
“아주 없는 건 아냐. 다른 요원들이 충격을 줘 강제로 틈을 만드는 사이 진입하는 방법이 있지.”
“그럼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막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준비했다. 수갑은 어느새 푼 상태였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보호 장비 없이 유독가스로 가득한 곳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진입하는 순간 능력도 봉인당할 테고. A급 요원이라도 3분에서 5분이 한계. 만약 그 안에 혜성이 영역을 부수지 못하면 같이 죽어.”
연구원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덧붙이며.
“혜성이 형은 임무를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이젠 내가 형을 따를 차례. 당장 강제 진입을 준비해 주십시오.”
막내는 금고와 장막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오냐, 소원대로 죽여주마!”
차성진은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몸을 좌우로 흔들자 수많은 잔상이 생겼다. 혜성도 이를 악물고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놈의 주먹이 정면에서 날아왔다. 부웅,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혜성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피했다고 느낀 순간, 상대의 주먹이 돌연 시야에서 사라졌다. 퍼억, 그의 허리가 새우처럼 굽어졌다. 놈의 주먹은 어느새 그의 복부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좋게 말하니까 주제 파악이 안 되지?”
차성진은 왼손으로 혜성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곤 뒤로 살짝 물러난 뒤, 무릎으로 혜성의 안면을 강타했다. 혜성은 급히 얼굴로 가드를 올렸다. 속임수였다. 그의 주먹이 다시 한번 복부에 꽂혔다.
“끄억!”
혜성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침이 질질 흘렀다.
“병신!”
고통스러운 와중에 차성진의 차가운 비웃음이 들렸다.
다시 놈이 혜성의 목덜미를 잡으려는 찰나였다.
“뭐라고?”
혜성이 광기에 찬 눈으로 놈을 노려봤다. 2차 각성. 그의 주먹이 빠르고 강하게 놈의 턱을 향해 날아갔다.
“흥!”
차성진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혜성의 주먹이 코를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놈의 주먹이 다시 그의 복부에 꽂혔다. 변화무쌍.
“지금 넌 아마 나보다 기본적인 능력치가 높을 거다. 하지만 능력치는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 능력치가 높다고 해서 꼭 싸움에서 이기는 건 아니지.”
차성진의 공격이 종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놈의 말대로였다. 객관적인 수치만큼 중요한 게 바로 전투 경험. 놈은 그 경험이 혜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잽이라고 생각했던 주먹이 스트레이트로 변했고, 그 스트레이트가 다시 훅으로 변했다.
주먹이라고 생각하면 다리가 날아왔고, 다리라고 생각하면 무릎이나 팔꿈치가 날아왔다.
곧 혜성의 몸이 스르르 허물어졌다.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2차 각성으로도 안 되는 건가?’
혜성의 몸은 축 늘어졌다. 2차 각성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반격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차성진은 왼손으로 멱살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오른팔을 뒤로 젖혔다.
혜성은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직은 둘째 문제. 죽을 때 죽더라도 저놈은 꼭 데려가고 싶었다.
‘조금 더…… 내게 조금 더 힘이 있었다면.’
그는 분노, 안타까움, 체념 등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이혜성!”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막내였다.
“넌 또 뭐냐?”
차성진은 막 주먹을 날리려던 자세 그대로 혜성의 뒤를 쳐다봤다. 막내는 억지로 결전의 영역에 진입한 상태. 안색이 창백하고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받아!”
막내는 작은 상자를 다짜고짜 던졌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혜성도 풀린 눈으로 막내를 돌아봤다. 막내가 던진 상자가 슬로모션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울림이 들렸다.
- 내 이름을 불러라.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된다.
뇌전의 광견을 상대할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뜬금없이 무슨 이름?’
- 아무거나 좋아! 빨리!
상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차성진이 상자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 찰나였다.
혜성은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아차, 자기가 내뱉고도 후회했다. 아침 조회 때마다 지겹도록 들은 NSA의 구호를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것이다.
- 계약 성립!
상자의 목소리도 떨떠름한 어조로 응답했다.
파아앗, 상자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틈 사이로 성스러운 빛이 뿜어졌다.
부우웅, 대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빛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혜성에게 흡수됐다.
“저건 뭐야? 아이템을 흡수한 건가?”
차성진은 혜성을 놓고 주춤 물러섰다.
“좋았…… 어라?”
막내는 좋아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혜성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2차 각성, 피투성이가 된 얼굴, 반쯤 감긴 눈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성공한 건가?”
혜성도 자신의 손발을 내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체력이 좀 회복된 것 같긴 한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했다.
“흥! 겉만 요란했군!”
공격 재개. 차성진이 수많은 잔상을 만들며 환영처럼 달려들었다.
‘늦었다!’
놈의 주먹이 가슴에 닿기 직전, 그는 허둥대며 물러섰다.
부웅, 놈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서너 발자국 정도 뒷걸음질 치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차성진은 집요했다. 놈은 자세를 낮추고 혜성의 측면을 덮쳤다.
이번에도 그는 허둥대다가 넘어졌다. 머리 위에서 놈의 주먹이 떨어지는 찰나, 그는 볼썽사납게 옆으로 굴렀다.
쾅, 놈의 주먹은 그가 구르고 조금 지나 바닥을 강타했다.
둘은 거리를 두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부러 당황한 척하는 건가?”
차성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공격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혜성이 이렇게까지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아이템도 소용이 없는 건가?”
막내도 창백해진 얼굴로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봤을 때는 타이밍상 막는 게 무리였는데……’
혜성도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시간 감각이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몸의 균형도 조금 맞지 않았다.
“그냥 죽어라!”
차성진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특유의 잔상을 만들며.
- 정신 차려! 지금 네게 보이는 건 내가 만들어낸 예측이라고!
머릿속이 크게 울렸다.
‘예측?’
- 그래. 모든 공격에는 알게 모르게 패턴이라는 게 있기 마련. 그 패턴을 분석해 다음을 예측하는 게 내 능력이다.
그제야 혜성은 퍼뜩 깨어났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잔상들의 마지막, 놈의 진짜 공격이 똑똑히 보였다.
“이거였나?”
혜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차성진은 상체를 숙이고 오른팔을 살짝 뒤로 뺐다. 턱을 올려치려는 것 같았다.
놈의 주먹이 나오기 직전, 혜성이 먼저 오른발을 뻗어 주먹을 밀쳤다. 반 박자 빠른 대응.
“큭!”
놈은 주먹을 반쯤 뻗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재차 잔상을 만들며 혜성의 우측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혜성의 머릿속에 우측의 상황이 떠올랐다. 보기에만 요란한 가짜. 주먹이 허무하게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진짜는 바닥을 쓸 듯 움직이는 놈의 오른발이었다.
주먹은 무시했다. 혜성은 몸을 빙글 돌리며 오른발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콰앙, 놈 공격하려던 자세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혜성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상대의 환영을 보고 대응한 것이었는데, 이 정도 위력이 나올 줄은 몰랐다.
- 이제 알겠냐? 최선의 방어는 적의 공격이 펼쳐지기 전에 차단하는 거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혜성도 웃었다. 지금 그는 2차 각성 상태. 기본적인 힘과 스피드는 그가 한 수 위였다.
거기에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라는 긴 이름의 파트너가 그의 부족한 경험을 보완해주고 있었다. 다시 투쟁심이 끓어올랐다.
그는 막내를 힐끔 돌아봤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언뜻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길어야 2, 3분. 그 안에 놈을 제거하고 여길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체력도 좀 회복됐겠다. 새로운 파트너도 생겼겠다. 어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볼까?”
그는 주먹을 쥐며 자세를 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