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 이혜성을 분석하라. (2)
쿵, 보스급 살라만더 한 마리와 새끼 네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아니, 떨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녀석들의 주위가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야, 이건 좀 반칙 아니냐?”
“그, 그러게요.”
혜성과 막내는 입을 쩍 벌리고 주춤 물러섰다.
전체적인 모양은 붉은 도마뱀. 같은 살라만더라도 타입이 다양했는데,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건 그중에서도 특대형이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약 5m, 무게는 최소 1t이 넘어 보였다. 유일한 공격 기회는 놈들이 낯선 곳에 적응하기 전.
“에라이!”
막내가 보스에게 다짜고짜 불기둥을 날렸다.
퍼퍼펑, 요란한 폭발이 일었지만 예상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염은 놈의 붉은 피부에 흡수되듯 소멸했다.
“아, 젠장.”
막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데미지는 고사하고 오히려 화만 돋운 것 같았다.
“다른 건 없냐?”
“전 화염계 원거리 딜러라고요. 몇 개 있긴 하지만 별 소용은 없을 거예요.”
“아, 이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놈.”
혜성도 표정이 굳어졌다. 원거리 딜러를 비하하는 말. 농담이었지만 웃을 여유는 없었다.
“끄아아악!”
보스가 한 차례 크게 울부짖은 후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새끼들 또한 쿵쾅거리며 뒤따랐다.
큰 트럭 한 대와 승합차 네 대가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흩어져!”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좌우로 갈라졌다.
혜성은 뒤를 슬쩍 돌아봤다. 젠장. 보스가 쫓아오고 있었다.
2차 각성 전의 그는 C급이지만, 적은 A급 같은 B급이었다. 당연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콰아악, 살라만더가 강한 화염을 뿜어냈다.
앞으로 도망치기엔 늦은 상황. 혜성은 후끈한 기운을 느끼며 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그의 뒤에서 다른 폭발이 일었다.
“뭐지?”
혜성은 옆을 돌아봤다. 다른 화염 기둥이 솟아 놈의 입김을 막은 것이다. 물론 화염 기둥을 만든 이는 막내. 기둥은 스르르 갑옷의 형태로 변해 그를 에워쌌다.
그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막내도 새끼들과 한창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새끼들도 처음엔 맹렬하게 화염을 뿜어냈다. 하지만 막내가 같은 화염계라는 걸 알자, 꼬리와 근육질의 앞발을 이용한 육체 공격으로 방법을 바꿨다.
“흥!”
막내는 약을 올리듯 새끼들의 공격을 피했다. 아무리 원거리 딜러라도 A급은 A급.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지만, 놈들의 시선을 끌면서 피하는 건 가능했다.
‘놈들의 스킬은 화염. 화염에 내성도 강하다. 이래선 스킬을 카피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 그나마 막내의 보호막 덕분에 나도 놈들의 스킬에 내성이 있다는 건데. 결국 맨손 싸움. 이러면 체급 차이가 너무 커서 내가 불리하다.’
짧은 순간, 혜성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오케이! 됐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도 질 게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순직. 다만 막내가 있으니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죽어야만 했다.
‘뇌전은?’
혜성은 주먹을 말아 쥐며 뇌전의 감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뇌전은커녕 정전기도 나오지 않았다.
- 내가 완벽하게 치유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병원에서 태호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피한 스킬은 데미지가 남아 있어야만 가능한 건가?’
부웅, 그 사이 놈은 거대한 꼬리를 수평으로 휘둘러 혜성을 공격했다.
“젠장!”
혜성이 두 팔로 가드를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쾅, 그는 멀리 나가떨어졌다. 트럭에 치인 기분이었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지만, 가슴이며 온몸이 뻐근했다. 그렇게 연달아 두 번을 더 부딪치니 곧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번엔 정말 순직인가?’
혜성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억지로 버티고 섰다. 완전히 그로기 상태. 놈이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게 언뜻 보였다.
부웅, 마지막으로 놈의 꼬리가 수직으로 그의 머리를 쪼개려는 찰나, 의식의 끈이 끊어졌다.
“혀엉!”
막내의 외침이 멀리서 환청처럼 들렸다. 그때였다.
두근!
돌연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은은한 서기가 뻗치는 가운데 혜성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불타올랐다.
호전적인 전투 본능과 함께 2차 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쾅, 혜성은 손을 위로 뻗어 놈의 꼬리를 잡았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놈이 괴성을 터뜨리며 꼬리에 힘을 줬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끄아아아!”
살라만더의 울음이 변했다.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꼬리를 파고 들어간 것이다.
놈의 푸른 피가 그의 손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혜성은 놈의 꼬리를 어깨로 받치고 업어치기를 하듯 호쾌하게 내던졌다.
쾅, 10m 전방에 요란한 흙먼지가 일었다. 놈이 1m 가까이 되는 구덩이를 만들며 파묻힌 것이다.
“이게 진짜 내 힘인가? 2차 각성은 단순히 스킬을 카피하는 게 아니었나?”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특별한 스킬은 없었지만, 전신에서 힘이 넘쳤다.
놈의 힘과 스피드를 증폭해서 카피한 것 같았다. 발을 슬쩍 들었다가 내디뎌 봤다.
쾅, 그가 서 있던 땅이 살라만더가 누른 것처럼 움푹 파였다.
씨익, 그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걸렸다.
“생각은 나중에. 일단 너 좀 맞고 시작하자.”
그는 팔을 빙빙 돌리며 살라만더에게 다가갔다.
꾸에엑, 살라만더는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질 쳤다.
***
을지로 SJ 기획.
겉보기엔 밝은 분위기의 광고회사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광고 포스터가 환영하듯 붙어 있었고, 벽에 걸린 모니터에서는 그들이 제작한 광고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SJ 기획 소회의실.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와 깔끔한 정장. 광고에 나오는 중년 모델처럼 말끔하게 생긴 외모였다. 목에 건 사원증에는 사내의 사진과 박무영이란 이름이 보였다.
그 옆에는 한수은이란 사원증을 건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 또한 모델처럼 늘씬했지만, 무테안경 때문에 다소 차가워 보였다.
둘은 회의실 벽면의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모니터에서는 월드컵경기장의 상황이 생생히 전달되고 있었다.
현재 월드컵경기장은 정부의 통제로 인해 촬영이 금지된 상태. 그들이 보는 건 특수 위성으로 촬영하고 있는 실시간 영상이었다.
“역시 애송이 둘로는 역부족입니다. 요원들을 투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한수은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혜성과 막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다. 범인도 어딘가에서 저 상황을 보고 있을 테니까. 우리의 목적은 혜성을 미끼로 해서 범인을 끌어내는 것. 범인의 꼬리를 잡을 때까진 좀 더 지켜보기로 하지.”
박무영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성과 막내의 위기에도 전혀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수은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번쩍, 돌연 모니터에서 황금빛이 나타났다.
“호오, 저게 2차 각성인가?”
박무영은 턱을 쓰다듬으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역전됐다. 일방적으로 맞던 혜성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몬스터의 꼬리를 잡았다.
끄아악, 몬스터가 발광하듯 움직였지만, 혜성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사실 살라만더의 기본 능력치는 A급에 가깝지. 한데 놈이 B급으로 취급받는 이유가 뭔지 아나?”
그가 한수은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너무 상성을 타기 때문입니다. 같은 화염계에게는 무적에 가깝지만, 얼음이나 물의 공격에는 엄청난 추가 데미지를 받습니다. 즉, 상성만 맞는다면 C급도 쉽게 놈을 잡기 때문에 B급으로 취급받는 겁니다.”
그녀는 책을 읽듯 딱딱하게 대답했다.
“정답이다. 그래서 놈을 상대하는 방법은 얼음이나 물로 공격하는 게 정석이지. 한데 저건 뭔가? 살라만더를 저렇게 잡는 방법도 있었나?”
박무영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모니터 속 영상.
혜성이 주먹으로 살라만더를 패고 있었다. 놈의 커다란 덩치는 역으로 좋은 샌드백이 됐다.
꾸에에엑, 놈의 비명이 연신 길게 울렸지만, 그의 주먹은 인정사정없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싱겁게 끝났다. 넓은 필드에는 피떡이 된 살라만더의 시체들이 널브러졌다. 몬스터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아아아!”
영상 속의 혜성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마지막 새끼 몬스터가 죽자, 게이트는 제 할 일을 다 한 듯 스르르 옅어졌다. 게이트 클리어.
“무식한 건지, 강한 건지.”
한수은의 입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나왔다. 전투는 힘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이라면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살라만더를 제거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혜성 씨에 대해 잘못 생각했던 것 같군. 혜성 씨의 2차 각성은 단순히 상대의 스킬을 카피하는 정도가 아니야.”
박무영은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테러범도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 테지. 이대로 끝날 리도 없을 테고. 자, 다음은 어디냐?”
***
승합차 안.
“2차 각성이라. 듣던 것보다 까다로운 능력이군. 놈에 대한 정의를 정정해야겠어. 스킬 카피가 아니라 능력을 카피해서 증폭하는 건가?”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모니터를 주시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경기장 위쪽 관중석에 숨겨놓은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었다. 화면 속 혜성의 전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새끼가 긴 울음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이혜성. 넌 아직 자신의 진짜 능력을 모르는 것 같군. 네 능력이 뭔지, 어떤 약점이 있는지, 철저히 파헤쳐주마.”
사내는 히죽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하나가 끝났으니 곧장 두 번째 계획을 시작해야 했다.
***
“아이고, 죽겠다.”
혜성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어짐과 동시에 쌓였던 데미지도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하늘을 보고 큰 대자로 누워 한참 동안 숨을 헐떡였다.
“와, 살라만더를 이렇게 잡는 경우도 있군요.”
막내는 피떡이 된 살라만더 보스를 발로 툭 차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살라만더가 B급이긴 했지만, 이렇게 맨주먹으로 패서 잡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야, 차 안에서 힐링 팩터하고 아이템 좀……”
우웅, 핸드폰의 진동이 혜성의 말을 방해했다. 발신자는 본부.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네,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 전화를 받았다. 네, 네. 통화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뭡니까? 또 범인의 지령인가요?”
막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
“다음엔 어딘데요?”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봤다. PM 2:20을 막 지나고 있었다.
“다음 장소는 명동, 3시까지 가야 해.”
끄응, 그는 막내의 부축을 받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남은 시간은 약 40분. 서울의 교통을 생각하면 서둘러야 했다.
‘놈은 계속 언론을 통해 지령을 내리고 있다. 놈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주목받고 싶어 한다는 뜻. 내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뺑뺑이를 돌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겠지. 그렇다면?’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주목받고 싶어 하는 놈의 특성을 고려한 한 편의 멋진 시나리오가 즉석에서 떠올랐다.
주인공이 절대악에 맞서 세상을 구하고 장렬히 순직하는 새드 무비였다. 각본 이혜성, 감독 이혜성, 주연 이혜성.
‘좋아! 이번엔 꼭…… 순직에 성공한다!’
그는 막내 몰래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