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9. 내 이름을 불러줘. (3)
중식당 2층.
넓은 홀은 조용했다. 혜성은 수갑을 차고 결박당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테러범은 테이블에 앉아 혼자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다.
기자들이 도착하는 건 약 20분 후. 그때까지는 대치도 잠시 소강상태였다.
‘진짜 기자가 올 리는 없고. 기자로 위장한 요원이 오겠지? 누가 오려나?’
혜성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테러범을 힐끔 쳐다봤다.
붉은 코뿔소, 본명은 황석구. 헌터 시절부터 다혈질로 유명했다.
‘고유 스킬이 뭐였더라?’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놈의 서류를 떠올렸다.
씨익,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놈은 아주 재미있는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그 스킬이라면 날 순직시켜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고 넌지시 물었다.
“기자를 불러서 뭘 하려는 겁니까?”
황석구는 대답 대신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냉랭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무료했는지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홧김에 금은방을 털었다. 그런데 한참 도망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지?’라고 말이야.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됐다. 혜성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계속했다.
“언론은 참 이상하더군. 잘나가는 능력자들은 많이 다루지. 그들이 누굴 만나는지, 뭘 먹는지, 어딜 가는지 등.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보도 거리지. 파파라치도 많이 따라다니고 말이야. 하지만 부상 등으로 몰락한 능력자는 어떻지? 세상은 나 같은 놈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아.”
그는 약을 털어 넣듯 단숨에 고량주를 비웠다.
혜성은 측은한 눈길로 그의 오른발을 쳐다봤다. 정강이 이하가 없었다. 의족과 목발뿐.
아직은 예전의 능력이 조금 남아 있어 평범한 경찰은 따돌릴 수 있었지만, 헌터로서의 활동은 더 이상 무리였다.
상대에 대한 동정은 들었지만, 일단 순직이 우선이었다. 혜성의 태도가 변했다.
“지금 술 처먹고 넋두리하는 거냐? 멍청한 새끼. 그러니까 넌 인생의 패배자가 된 거야.”
그는 차갑게 상대를 비웃었다.
“뭐, 이 새끼가? 너처럼 잘나가는 놈이 뭘 알아?”
황석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술잔을 집어 던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술잔을 피했다.
“너도 인터넷에서 내 영상을 봤겠지? 너, 내 능력이 몇 급이라고 생각해?”
“뭐?”
“나 원래 전투팀 아니야. 보조팀이라고. 각성 등급 C.”
혜성은 잠깐 말을 멈췄다.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목이 멘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하급 요원. 2차 각성을 하고 겨우 날아보나 했는데,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
황석구도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C급이라고?
“그래. 요즘은 아카데미를 졸업해도 B급은 된다지?”
혜성은 우울한 감정을 털어내고 쓰게 웃었다.
황석구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묘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난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바로 이 바닥에 뛰어들었거든. 이제 와 취직이라도 하려니 학력에서 막히더군. 몸이 이렇게 됐으니 헌터로 일하기도 어렵고 말이야.”
“그래서 언론을 통해 신세 한탄을 하려는 건가?”
혜성은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얼굴을 보니 대충 나이도 비슷한 것 같았다.
황석구는 그를 잠깐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
“그건 아니야. 당장 서울역에만 나가 봐도 노숙자로 전락한 상이용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지. 내가 바라는 건 우리처럼 약한 능력자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뿐이야.”
그는 재차 쓰게 웃었다.
혜성도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그가 순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자신의 사후에 남게 될 가족들 때문이었으니까.
“현재 정부의 방침은 테러범, 특히 능력자가 관계된 테러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거야. 아마 NSA나 CIC로 구성된 특수팀이 투입되겠지. 오늘의 사건도 9시 뉴스의 끝자락에 슬쩍 지나가고 끝날 테고 말이야. 솔직히 능력자에 의한 강력 범죄가 한두 건인가?”
“결론이 뭐냐? 이 짓을 하지 말라는 거냐?”
황석구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쓴웃음을 거두고 매서운 눈으로 혜성을 쏘아봤다.
“그건 아니지. 그 반대야. 이왕 할 거면 화끈하게. 단호한 결의를 보여줘야 한다는 거다.”
혜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호한 결의?”
“그렇지. 죽음을 불사한다는 것. 예를 들어 정부 요원이나 특수팀의 죽음 같은 거 말이야. 요즘처럼 뉴스거리가 넘쳐나는 때는 자극적이고 화끈한 게 아니고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없을 테니까.”
“진심인가?”
황석구는 흠칫 놀랐다. 여기서 말한 죽음이란 자폭을 뜻하는 터.
폭탄이 터지면 가까이 있는 혜성도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당연히 진심이지. 특수팀이 투입되는 순간, 무조건 폭탄의 스위치를 눌러. 죽음을 통해 네 단호한 결의를 보여주라고.”
혜성은 ‘단호한 결의’에 좀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단호한 결의라.”
황석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혜성의 말을 되뇄다. 마치 혜성의 말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절대 망설이지 마. 죽음은 순간이지만, 네 메시지는 영원히 남을 거야.”
혜성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단호히 못을 박았다.
“좋아. 이왕……”
다시 황석구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둘의 대화가 끊겼다.
- 아아, 황석구 씨!
누군가가 확성기에 대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뭐야?”
황석구는 퍼뜩 깨어나 창가로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혜성도 고개를 삐쭉 내밀고 그의 어깨너머로 상황을 엿봤다.
- 원하는 대로 MBS 기자를 데려왔습니다. 일단…….
경찰은 누군가를 소개했다. 신분증 확인, 옷과 장비 점검 등 일련의 과정이 있고 나서, 황석구는 식당의 정문을 개방했다.
“드디어 왔군.”
황석구는 손바닥을 비비며 계단 쪽을 쳐다봤다. 잔뜩 흥분한 눈치였다. 혜성도 덩달아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잠시 후, 누군가가 천천히 중식당 2층으로 올라왔다. 두툼한 취재 수첩과 펜을 든 중년 기자였다.
“아!”
황석구와 혜성은 동시에 짧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다만 둘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황석구는 환희의 표정인 반면, 혜성의 얼굴은 못 볼 걸 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두꺼운 뿔테와 덥수룩한 수염. 그럴듯하게 변장했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어젯밤에 만난 사내, 바로 회색 여우의 팀장인 장진우였다.
***
같은 시각, 중식당 뒷문.
검은 그림자 두 개가 그늘 속을 빠르게 오가며 접근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헌터나 요원들은 특수 갑옷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입은 건 몸에 착 달라붙는 특수 강화복. 주로 능력자들의 범죄를 다루며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의 복장이었다.
잠시 후, 둘은 뒷문 3m 앞 쓰레기통 뒤에 멈췄다. 이어서 백팩에서 핸드폰만 한 특수 캠코더를 꺼내 뒷문을 살폈다.
예상대로 특수팀의 침투를 막기 위한 트랩이 설치돼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능력자는 능력자. 황석구는 중식당 전체를 자신의 요새로 바꾼 것이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수신호를 교환했다. 그리곤 백팩에서 각종 특수 장비를 꺼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이 정도는 능히 뚫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 그들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혜성!’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저돌성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
“그러니까 내가 처음……”
황석구는 장진우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은퇴한 능력자에 대한 지원책. 쌓인 게 많은 목소리였다.
혜성은 수갑을 차고 옆에 쪼그려 앉아 듣기만 했다.
그때였다. 혜성의 귀에 장진우의 말이 속삭이듯 들렸다.
- 내색하지 말고 듣기만 해라. 놈은 식당 곳곳에 폭탄을 설치했다. 현재 다른 대원들이 뒷문으로 잠입해 해체 작업을 진행 중이지. 그거야 별거 아니지만, 문제는 놈이 지니고 있는 폭탄이다. 계획은 단순하다. 놈의 폭탄을 내 아공간으로 옮겨 터뜨리는 것.
혜성은 깜짝 놀라 테이블을 쳐다봤다.
장진우는 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황석구의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옆에는 소형 녹음기와 액션캠이 놓여 있었다.
- 내 스킬에는 몇 가지 제약이 있다. 첫째, 스킬을 걸고 나서 몇 초간의 딜레이가 발생한다. 이 딜레이는 목표물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다른데 이런 폭탄의 경우 대략 4, 5초 정도 필요할 거다. 둘째, 스킬을 거는 동안 목표물의 좌표가 고정돼 있어야 한다. 즉, 내가 스킬을 거는 동안 누군가가 놈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내 말을 이해했으면 눈을 크게 두 번 깜빡여라.
혜성은 시키는 대로 반응했다.
- 오케이. 수갑을 풀어주겠다. 그리고 내가 신호를 보내면 재빨리 놈을 뒤에서 붙들어라. 특히 기폭장치를 든 오른손에 주의하고.
혜성은 이번에도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사이에도 황석구의 말은 계속됐다. 장진우는 받아 적는 척하며 왼손을 슬쩍 튕겼다.
팅, 혜성을 구속한 수갑의 고리가 끊어졌다. 수갑의 일부를 다른 공간으로 옮긴 것이다. 다시 이십여 분 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황석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을 맺었다.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론 허탈한 표정이었다.
“말씀 잘 알아들었……”
장진우는 받아 적는 척하다가 볼펜을 떨어뜨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팟, 혜성이 황석구를 향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쾅, 의자가 넘어지며 황석구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혜성이 한발 빨랐다. 그는 뒤에서 끌어안듯 황석구를 단단히 잡았다.
“이 새끼가! 이거 안 놔?”
황석구가 거칠게 저항했지만, 혜성도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황석구는 다리를 다치고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 현역인 혜성을 힘으로 당해낼 수 없었다.
‘장진우는?’
혜성은 왼쪽을 슬쩍 쳐다봤다. 장진우는 눈을 감은 채 스킬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액션캠이었다.
실시간으로 지금 상황을 어딘가에 전송하고 있을 터. 어설프게 놈의 자폭을 유도했다간 순직이고 뭐고 없었다. 오히려 유가족에게 소송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놈의 그 스킬이라면 어떨까?’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놈을 힘껏 끌어안았다. 예상대로 황석구가 돌연 스르르 허물어졌다.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뭐야?”
혜성은 짐짓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장진우도 막 스킬을 발동하려다가 멈칫했다.
“이 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다.”
뒤쪽 주방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둘은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가며 뒤를 돌아봤다.
손에 기폭장치를 든 또 다른 황석구가 서 있었다.
“어느새?”
혜성은 짐짓 놀란 척 바닥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그가 상대한 황석구는 없고, 옷과 폭탄만 남아 있었다.
분신술.
황석구가 B급임에도 탱커로 유명했던 이유였다.
비록 만들 수 있는 분신은 하나뿐이고, 능력치도 원본의 절반에 불과했다. 게다가 원본의 반경 5m 내에서만 유지된다는 제약도 있었다. 그래도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상당히 유용한 스킬이었다.
“개새끼들. 그래, 같이 죽자.”
황석구는 스위치에 엄지를 올렸다.
순직 찬스.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놈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정말 자폭해야 하나? 그냥 도망칠까?
놈의 갈등, 이마의 식은땀 한 방울까지 똑똑히 보였다. 그와 동시에 혜성은 폭탄을 향해 몸을 날리며 외쳤다.
“단호한 결의!”
이어서 황석구의 엄지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