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8. 내 이름을 불러줘. (2)
한강 공원 벤치.
혜성은 커피를 한잔 들고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DDP에서의 사건 이후 얼굴이 널리 팔린 상태라두꺼운 뿔테 안경과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공원에는 평일 오전이지만 사람이 제법 많았다.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학생들.
익숙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지만, 어쩐지 자신만 혼자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하아.”
긴 한숨이 나왔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가 갑자기 간절해졌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떠올랐다.
“어디 가서 대충 빵이라도……”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탕탕, 난데없는 총성이 평화로운 일상을 깼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거나 자동차 타이어가 터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
혜성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근처에 게이트 생성 경보는 없었다. 누군가의 인위적 소동이라는 뜻.
콰쾅, 이어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소형 폭탄이었다.
“꺄아아아!”
그제야 사람들은 높고 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아수라장. 혜성도 마시던 커피를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이잉, 이어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경찰차 몇 대가 줄지어 나타났다.
“무슨 일이 터진 건가?”
혜성은 재킷을 챙겨 들고 경찰차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걱정되면서도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
현장은 엉망이었다. 벌써 냄새를 맡고 온 BJ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단독 방송도 있었지만, 촬영기사까지 대동한 BJ들도 많았다.
- 여기는 여의도 한강공원. 능력자가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현장입니다.
- 현재 범인은 경찰과 대치 중이며, 방송과 언론을 통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 범인은 은퇴한 B급 능력자로 추정되는 가운데, 그 동기는 아직…….
요즘 BJ들은 단순히 흥미 위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각지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게이트 시대가 열린 이후, 1인 뉴스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일부 BJ는 자신만의 정보원까지 두며 공중파 못지않은 정확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혜성은 BJ들과 구경꾼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곧 경찰의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경찰은 현장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아저씨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젊은 경찰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밀어냈다. 혜성을 귀찮은 구경꾼 중 하나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NSA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모자와 안경을 벗은 뒤,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보여줬다. 대번 경찰의 태도가 변했다.
“앗!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경찰은 허겁지겁 거수경례하며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통상적으로 능력자 관련 범죄는 NSA나 CIC가 경찰보다 우선적으로 수사권을 가졌다.
“뭐? NSA의 이혜성?”
“그 DDP의 영웅?”
“대박이다, 대박!”
주위 BJ들은 흥분해서 고함쳤다.
‘오케이! 일단 판은 제대로 깔렸고.’
하마터면 미소가 나올 뻔했다. 혜성은 웃음을 참고 애써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아마 인터넷 게시판도 혜성의 등장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며 난리가 났을 것이다.
분위기를 보니 아직 NSA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공원 주차장 구석.
경찰 승합차 한 대가 임시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구경꾼들 막아! 저 BJ들도 좀 쫓아내고!”
“본부는? 지원팀은 아직이야?”
“어차피 우리만으로 능력자를 막는 건 무리다. 요원 새끼들은 언제 오는 거야?”
경찰들은 장기전을 생각한 듯 주위를 차단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혜성을 안내한 경찰은 그중 나이 지긋한 경찰에게 귓속말로 보고했다.
“이혜……”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그가 소개하기도 전, 나이 지긋한 경찰이 그의 손을 맞잡으며 반색했다. 어둠 속에서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경찰은 눈살을 찌푸리고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시작은 종로의 금은방이었다. 은퇴한 B급 능력자가 강도 행각을 벌인 것이다.
근처를 지나던 경찰들이 달려들었지만, 평범한 경찰들이 능력자를 체포하는 건 무리였다.
범인은 경찰들을 따돌리고 도주, 현재 한강공원의 중식당에서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 중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이름이 뭡니까?”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능력자의 범죄가 최근 급증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대범한 놈은 금시초문이었다.
“헌터 시절의 별명은 거창합니다. 붉은 코뿔소라던가요?”
경찰은 두툼한 서류를 건넸다.
“아!”
혜성은 탄식을 내뱉으며 서류를 훑어봤다. 붉은 코뿔소의 자료였다. 사정이 대충 그려졌다.
붉은 코뿔소, 황석구.
공격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스태미나 하나는 유명한 탱커 스타일이었다. 주로 B급 던전에서 활동했는데, 큰 부상을 당하고 반강제로 은퇴했다고 했다.
그게 약 3년 전. 헌터도 현역으로 뛸 때나 잘나가지, 은퇴하고 사기라도 몇 번 당하면 패가망신은 순식간이었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술이라도 한잔한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면 마약이라도 했든지 말입니다.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해 보입니다.”
“내부 상황은요?”
혜성은 정면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2층짜리 고급 중식당이었다. 평일 오전이니까 사람은 많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최악입니다. 식당에 있던 사람 대부분은 뒷문으로 빠져나왔습니다만, 아직 주인을 포함해 8명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게다가 놈은 몸에 사제 폭탄을 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식당이다 보니 인화성 물질이 많을 테고요.”
책임자가 옆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이미 반경 500m의 건물에는 전부 대피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특수팀은 언제 옵니까?”
“진즉에 연락했습니다만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경기도 북부에 게이트가 생성돼서 그쪽으로 파견 나갔다나요? 능력자가 관련된 사건이다 보니 보통 특수팀으로는 어렵고 말입니다.”
갈수록 태산. 책임자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범인의 요구 사항은 없습니까?”
“글쎄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방송국의 기자들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책임자의 보고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계속됐다. 주위의 통제 현황, 저격수들의 배치, 교섭 전문가의 파견 요청 등. 무엇 하나 긍정적인 게 없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경찰들은 뒤로 물리십시오.”
잠시 후, 혜성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네? 뭘 하시려는 건가요?”
“인질을 구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그리고 나중에 특수팀이 오더라도 안에서 호응하면서 놈의 주의를 끌어줄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도……”
경찰은 그의 팔을 잡고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른손을 살짝 들고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탕!
중식당 2층에서 총성이 울렸다. 퍽, 혜성의 몇 미터 전방 콘크리트가 움푹 파였다. 위협사격이었다.
혜성은 통제선 밖, BJ들을 힐끔 쳐다봤다.
- 앗! 현재 정부 쪽 관계자로 보이는 자가 인질범과 협상을 위해…….
- 긴급 뉴스입니다! 정부 쪽 인사의 이름은 이혜성. DDP에서 해골 병사들을…….
상황을 중계하던 BJ들의 음성이 더욱 높아졌다. 몸은 경찰의 통제선 밖이었지만, 카메라의 줌은 일제히 혜성을 향했다.
혜성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2층 창가,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덩치는 곰처럼 컸지만,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잠깐 놈과 대화 좀 하겠습니다.”
그는 2층을 노려본 채 말했다. 경찰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손에 확성기를 쥐여 주었다.
“아아, 들립니까? 저는 NSA의 이혜성이라고 합니다.”
혜성은 범인을 향해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탕!
“잡소리 말고 기자들이나 데려와!”
다시 한 차례 위협사격이 있은 뒤, 범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경찰의 말대로 뭔가 불안한 음성이었다.
“더 좋은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헛소리 그만해!”
“인질을 공짜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인질을 교체하자는 겁니다. 민간인 인질을 풀어주십시오. 대신 더 좋은 인질을 드리겠습니다.”
“더 좋은 인질? 그게 누군데?”
“저. NSA의 이혜성이 대신 인질이 되겠습니다.”
혜성은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위협사격이 멎었다. 상대가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도 한때는 몬스터들과 맞서며 시민들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방송을 통해 할 말이 있다면, 평범한 민간인보다는 저 같은 정부 요원을 인질로 잡는 게 훨씬 유리할 겁니다. 방송국의 주목도가 다를 테니까요.”
혜성은 다시 확성기를 들고 못을 박았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범인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됐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혜성은 경찰에게서 수갑을 받아 천천히 들었다. 능력자를 봉쇄하는 특수 수갑이었다.
그는 범인에게 잘 보이도록 손을 들고 직접 수갑을 찼다. 그다음 놈이 있는 이 층을 향해 열쇠를 던졌다.
“전 이제 능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2층에서 말이 끊겼다. 범인은 인질들과 혜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갈등했다.
“현재 BJ들이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 제 말의 보증인이 될 겁니다.”
혜성은 주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마침내 놈이 창가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헝클어진 머리와 지저분한 얼굴. 서울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 같았다.
“알겠다. 괜히 이상한 짓 하면…… 알지?”
놈은 몸에 두른 사제 폭탄을 보여줬다. 녀석도 죽기를 각오한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혜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쩍 지었다.
저 폭탄이라면 확실했다. 시민들을 대신해 인질이 된다. 그러나 범인과 특수팀의 대치 중 사고가 발생하고, 능력을 봉인 당한 요원은 그 와중에 순직한다.
“가자!”
혜성은 심호흡하며 앞으로 천천히 나섰다.
***
웅성거리는 구경꾼들 사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큰 더플백을 옆으로 멘 사내가 있었다. 여느 때라면 상당히 수상하게 여겨질 차림이었지만, 현재 모두의 관심은 인질극에 쏠린 상태였다.
“저거 뭐야?”
사내는 당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거사를 위해 왔는데, 다른 놈들이 먼저 와서 인질극을 벌이는 중이었다.
더 이상한 건 NSA 요원이었다. 상황을 보니 비번으로 쉬는 중에 우연히 온 것 같았는데, 그가 알던 일반적인 요원과는 좀 달랐다.
“혜성이라고 했나? 능력까지 봉인하고. 대체 뭐 하자는 거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질을 구하는 건 좋지만,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것 같았다. 마치 죽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작전은 잠시 보류. 어디, 어떻게 할지 한번 볼까?”
그는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태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