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 내 이름을 불러줘. (1)
병원 진료실.
“야,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이게 사람 몸뚱이냐? 걸레지.”
태호가 그의 몸에서 손을 떼며 투덜거렸다. 혜성의 상태는 해골 병사에게 당했을 때보다 훨씬 안 좋았다. 한 시간 넘게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은 끝에 겨우 치유를 끝냈다.
“공짜로 해줄 것도 아니면서. 임무 중 다친 거니까 기관에 청구해. 괜히 불필요한 것까진 말하지 말고.”
혜성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 친구여서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태호의 실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기관의 지정 병원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몸 사려, 인마. 아무리 좋은 치유를 받아도 체내에 후유증은 남기 마련이니까. 맷집만 믿고 날뛰던 헌터들이 말년에 어떻게 됐는지 알지?”
“네네. 잘 알겠습니다.”
혜성은 녀석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팔을 크게 움직여 봤다. 약간 뻐근한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복을 벗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으며 주위를 힐끔 둘러봤다.
피 묻은 붕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처음 그가 여기에 왔을 때는 들것에 실려 몸도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며칠 후면 떨어질 작은 반창고 외에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아참. 어제 한 검사 결과 나왔다.”
태호는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내 건넸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혜성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서류를 넘겼다. 배운 놈답게 서류에는 어려운 용어와 수치가 빼곡했다. 그는 건성으로 넘기다가 돌려줬다.
“이게 무슨 뜻이냐?”
“쉽게 말해서 2차 각성하기 전까진 진짜 약하다는 거다. 기껏해야 C급.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날뛰는 건지 알겠는데, 몸 사리는 게 좋을 거야. 까딱하면 2차 각성하기 전에 죽을 테니까.”
태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진지하게 말했다. 잔소리가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명심하지.”
혜성은 성의 없이 대꾸하고 병원을 나섰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잘……”
뒤에서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안 봐도 훤했다.
***
새벽 6시.
혜성은 병원을 나서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공기가 흉부를 자극했다. 밤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의식은 오히려 또렷했다.
“이젠 잠을 자는 시간도 아까워진 건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팀장에게서 특별 연차도 받은 상태. 이 시간에 문을 연 곳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아메리카노 한 잔이 간절해졌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기관의 지정 병원을 마다하고 다른 곳으로 가셨다기에 걱정했는데. 여기 오신 겁니까? 하긴, 태호 씨라면 믿을 만하죠. 정말 좋은 친구분을 두셨습니다.”
오른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중년 사내였다. 비싼 정장과 구두, 시계 등으로 보아 대기업 임원쯤으로 보였다. 외모도 전형적인 회사원이었다.
건물 맞은편, 편의점 앞에는 검은색 세단이 비상 깜빡이를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설마 정태호 씨의 친구분일 줄이야. 그 ‘사고’만 없었다면 지금쯤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특급 힐러가 됐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사내는 병원의 허름한 간판을 힐끔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말투를 보니 태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시죠?”
“아, 제 소개 먼저 해야겠군요. 김준수라고 합니다.”
사내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김준수]
조금 흔한 이름이었다. 소속이나 직급, 직책 등은 없었다. 연락처만 아래에 작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배경의 흰 호랑이를 본 순간, 혜성은 상대가 누군지 대번 알 수 있었다.
국내 랭킹 10위의 능력자. 동시에 국내 넘버 원 길드, ‘백호’의 인사 총괄이었다.
“DDP에서 혜성 씨 활약은 잘 봤습니다. 게다가 어젯밤에도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고요?”
김준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혜성은 명함을 지갑 안에 넣고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의 사건은 아직 정식 보고서도 나오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냄새를 맡고 날 찾아온 거지?’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대의 위아래를 살폈다. 무슨 용건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일단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백호는 정부와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거든요. 가령 이번에 경주 쪽 게이트에 투입된 능력자만 하더라도 절반은 저희 백호 소속입니다.”
김준수는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잠깐 자리를 옮겨도 될까요?”
그는 검은 세단으로 혜성을 이끌었다. 외모는 점잖은 임원이었는데, 의외로 악력이 강했다.
혜성은 잠깐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운전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줬다.
둘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좌석은 다리를 쭉 뻗어도 될 만큼 넓었다. 운전기사는 뒷짐을 지고 밖에서 잠시 대기했다.
“혜성 씨도 제가 왜 왔는지 아실 겁니다.”
김준수가 차내의 냉장고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혜성은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우트. 명함을 받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하시죠. 계약금 3억에 연봉 3억. 3년 계약에 총액 12억이며, 각종 인센티브와 수당은 별도입니다. 이 정도면 신인급에는 파격에 가까운 조건이죠. 게다가 저희 백호가 지닌 최고의 시설과 노하우라면, 혜성 씨는 앞으로 몇 년 안에 국내의 상위 랭커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김준수는 혜성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혜성을 얼마나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혜성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계약조건은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김준수가 직접 찾아와 몇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렸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호’의 조건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었다.
혜성은 머릿속에서 주판을 빠르게 튕겼다.
‘계약금은 일시불이지만, 연봉은 분할 지급일 테지. 6개월 동안 일한다면 받을 수 있는 돈은 계약금 포함해 4억5천 정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민간 신분이기 때문에 순직은 불가능할 거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쉬웠다. 아마 며칠 전이었다면 상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당장 계약서에 서명했을 것이다.
“설마 다른 곳과 계약을 하신 겁니까? 아니면 저희 쪽의 조건이 성에 차지 않으십니까? 연봉은 추후 재계약을 통해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위 랭커들은 각종 보너스 등을 더하면 연 수입이 20억대를 훌쩍 넘습니다.”
김준수의 얼굴에서 자신만만한 미소가 사라졌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혜성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6개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대신 NSA의 헌장에 나와 있는 구절을 꺼냈다.
“정의는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다. 제가 NSA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입니다.”
“……”
“‘백호’가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백호’의 활약상은 여기저기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니까요. 그러나 돈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위 말하는 ‘가진 자’들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지키고 싶은 건 국민 모두이지, 부와 명예를 가진 선택받은 소수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다.
김준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혜성을 쳐다봤다. 망치로 크게 한 방 맞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혜성 씨에게 사과해야겠군요.”
“네? 뭐가 말입니까?”
“솔직히 혜성 씨의 영상을 처음 봤을 때, 가식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칼에 거금을 거절하는 걸 보니…… 제가 혜성 씨의 순수한 정의감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김준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봉은 필요 없습니다. 계약금으로 한 20억쯤 주시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혜성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김준수는 혜성을 노려봤다.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혜성이 움츠리면서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하하핫! 농담을 진담처럼 잘하시는군요. 세상에 그런 계약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농담이 괜찮았나요?”
혜성도 그를 따라 웃었다. 속에서는 눈물이 났다. ‘농담이 아닌데.’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갔다.
“제 작은 성의입니다. 원래는 계약 기념으로 드리려던 예물인데, 그냥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잠시 후, 김준수가 뭔가를 내밀었다. 언뜻 보면 담배 케이스 같았다.
“이게 뭡니까?”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케이스를 열려고 했다. 김준수가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나중에 확인하십시오. 저희가 AA급 이상의 능력자를 초빙할 때 드리는 예물입니다.”
김준수는 창밖의 운전기사를 힐끔 살피며 은밀하게 말했다.
“네? 계약도 안 했는데 주시는 겁니까?”
혜성은 케이스를 다시 내밀었다.
“혜성 씨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던 걸 떠올렸습니다. 제가 왜 능력자가 되고 싶었는지 말입니다. 이건 그걸 깨우쳐준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혜성은 계속 머뭇거렸다. 순직이 목표인데 아이템이라니. 차라리 돈이나 좀 주지.
상대는 그가 머뭇거리는 걸 겸양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괜찮습니다. 저 김준수, 이 정도 권한은 있습니다.”
김준수는 다시 한바탕 크게 웃은 뒤 덧붙였다. 그제야 혜성은 케이스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아이템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내 최고 길드의 예물이니 싸구려는 아닐 것 같았다.
“아참, 어디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시는 곳까지 태워 드리겠습니다.”
김준수가 차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운전기사가 자리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글쎄요. 그럼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바람 좀 쐴까요?”
혜성은 차에서 내리려다가 정중히 대답했다.
***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 승합차 안.
“준비는?”
운전석에 앉은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창백한 피부와 얇은 입술 탓에 다소 차가운 분위기가 풍겼다.
“완벽하지.”
조수석의 사내는 히죽 웃으며 더플백을 슬쩍 열어 보였다. 능력자 전용 폭탄이 언뜻 보였다.
“고맙군.”
“어허! 이거 왜 이래?”
운전석의 사내가 가방을 가져가려는 찰나, 조수석의 사내가 가방을 반대 방향으로 당겼다.
잊고 있었다. 차명 계좌, 입금, 확인 등의 절차가 끝난 다음에야 사내는 가방을 넘겨주었다.
“나야 돈만 받으면 되니까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정말 ‘거사’를 치를 생각이야?”
차에서 내리기 직전, 조수석의 사내가 물었다.
“물론.”
“이 정도 폭탄이라면 꽤 많은 사망자가 나올 텐데?”
“모든 일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이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운전석의 사내는 정면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장소는?”
다시 조수석의 사내가 물었다. 조금 전과 달리 얼굴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운전석의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여의도 한강공원. 오늘,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축제가 거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