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에필로그
대륙력 1333년.
나탈리나 산맥 깊숙이 이름이 붙지 않은 산이 하나 있다. 이름 없는 산이라 해도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산이다. 그 곳, 남쪽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뒤덮여 있다. 그 바위 하나하나가 각각 백 미터 단위는 훌쩍 상회한다. 그런 바위들이 줄을 맞춘 듯 자리 잡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중 버섯 모양으로 자라난 괴석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사람은 알몸으로 지붕처럼 기울어진 바위 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 자체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장소인 데다, 돌덩이도 날려 버릴 거센 바람이 불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사람 모양의 바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바위가 호흡할 리는 없으니 결국 사람이겠다.
삼십 대 중반의 검은 머리 사내는 벌써 한 시간째 호흡을 뽑아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호흡이다.
그 순간 사내의 머리 위로 뿌연 연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무는 곧 오색 창연한 빛을 띠더니 다섯 개의 고리를 형성했다. 무림에서 흔히 ‘오기조원’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머리 위에 머물며 잠시 빛을 뿌리던 고리가 순식간에 사내의 호흡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리고 사내가 감았던 눈을 떴다. 만물을 포용할 듯 깊고 푸근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강하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뜨거우면서도 데지 않을 부드러움을 담고 있다.
사내는 날숨 하나로 모든 운기를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이리 호출을 해 대는가.’
조노량은 벗어 놓았던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절대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던 기물이지만 이제 원한다면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없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목에 건 펜던트가 끊임없이 떨었다. 좌선을 시작할 때 울리기 시작했고, 좌선에 든 지 일 년이 되었으니 이 펜던트도 일 년째 떨고 있는 셈이다.
조노량은 지금 이 펜던트에 흐르는 기운이 소환을 위한 기운임을 알고 있었다. 이렇듯 애타고 찾고 있으니 소환에 응해 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조노량은 묶었던 흐름을 풀어 놓았다.
잠시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공간의 벽을 넘었다. 조노량은 그 속에서 수많은 분기점을 보았고, 수많은 차원을 엿봤다. 자의로 넘을 수도 있었기에 수도 없이 보았던 광경이고, 또한 언제 봐도 신비로운 광경이다.
조노량은 뿌옇게 흐린 대기를 바라보았다. 오백 년 만인가? 시간의 흐름을 잊은 지 오래지만 대충 맞을 듯싶다.
뭉클거리는 연기더미가 조노량을 맞았다.
하기의 힘이 이전보다 더욱 강대해졌다는 것은 남쪽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또한 과거 아스르부테에 버금가는 존재들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가 소멸되는 것도 느껴 왔다. 하기는 그들의 숫자만큼 강대해졌으리라. 하지만 조노량은 더 이상 하기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자는 그였다.
하기도 조노량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힘이 깃든 소환을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존재였고, 과거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기는 스스로 몸을 낮춰 체화했다.
“어째서 그대가 주운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조노량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미 느끼고 있을 터인데 굳이 물어야 하오?”
하기가 인간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노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법사는 그사이 부끄럼을 타게 된 건가? 왜 나서지 않지?”
그 말에 한쪽 공간이 일그러지며 하기와 똑같은 모습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운은 비스듬히 서서 고개만 살짝 틀어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흠흠, 안녕하시오.”
조노량은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덕분에, 둘이 함께 있으니 보기가 좋군. 역시 하나라는 건가.”
벌거벗겨진 느낌, 하기와 주운은 조노량을 대함에 껄끄러움을 느꼈다.
“어찌 아시오?”
“같은 흐름을 갖고 있군. 존재감도 동일해. 쌍둥이라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지.”
“끄응.”
주운은 침음을 흘렸다. 하기로부터 듣고, 이젠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한눈에 알아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마법도 알지 못하오. 그런데 무엇을 보는 것이오?”
“그대들, 아니… 그대가 보이는군.”
하기는 미소를 지었고 주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똑같은 얼굴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조노량을 응시했다.
조노량이 다시 부언했다.
“알지는 못해, 다만 느껴질 뿐.”
그들을 대하는 조노량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부드러울 뿐이다.
잠시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주운이 주제를 바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 일은 그렇다 치고, 당신의 얘기를 해 봅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글쎄…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지. 다른 대답을 원한다면 아직 알지 못한다고 할밖에.”
하기가 물었다.
“아직이라 함은 알고자 했었다는 의미요?”
조노량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도 보다시피 이렇게 비정상적인데, 어찌 의심하지 않았겠나?”
“실마리는 잡았소?”
“쉽지 않군. 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았었지.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네.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아니면 이미 죽어 버렸는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멀쩡한데 말이지. 허허.”
그 말에 하기와 주운이 동시에 감정을 드러냈다.
“다른 곳에서… 살아… 있었다고?”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 차원 이전에 다른 차원도 거쳐 왔던 거로군. 그 전엔? 그 전에 무엇이었소?”
“어려운 질문만 하는군. 태어나기 전의 일은 알지 못하네.”
대답을 들었으나 그의 말 속에서 대답보다 중요한 단서가 흘러나왔다.
“태어나다니? 당신이 태어났다는 말이오? 누군가의 배 속에서?”
“당연한 말을 하는군.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나?”
하기는 혼란에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자신이 짐작했던 것들이 모두 틀렸단 말인가? 그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다. 누군가의 배 속에서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궁금하군. 그대들은 내가 누군지 아나?”
조노량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감정이 담겼다.
하지만 하기는 조노량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이곳으로 왔을 때 어떤 모습이었소?”
“지금과 같았다. 어느 순간 이 세계에 와 있더군.”
하기는 고개를 저었다. 전에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지 못했다. 그가 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어야 했다. 그리고 사실은 의지를 가질 수도 없는 존재였다.
“이제는 모르겠소. 세계 자체라고 생각했건만… 틀렸나 보오. 당신은 진정 누구인 거요?”
“어이없는 말을 하는군.”
하기는 생각에 잠겼다.
이 땅에 부여된 권능은 흡수다. 무한히 채워질 뿐, 이 땅에 속하게 된 존재는 무엇 하나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육체든, 영혼이든, 에너지든 말이다. 그렇게 무한히 먹으며 영격을 높였다. ‘백’으로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랬기에 그가 품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근원에너지, 이 세계의 근본적인 기운과 완전히 동일한 기운을 품은, 아니 질량을 따질 수 없을 만큼 동격의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 순간 조노량이 미소 지었다.
“그보다 그쪽 친구들은 뭘 좀 알고 있나? 언제까지 훔쳐보기만 할 텐가?”
조노량의 말과 함께 좌측 검은 숲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인사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너무 오래 함께했더니 친근감까지 드는군.”
쭈뼛거리던 검은 인영이 후다닥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해왔다.
“헤헤, 반갑습니다. 아실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요.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빤히 보고 계신데 뒤에 숨어 있으려니 영 답답하고, 죄스럽고… 에, 또 민망하기도 하고 말입…….”
검은 인영이 잔소리를 늘어놓자 흰옷을 입은 노란머리 사내가 입을 틀어막으며 말을 이었다.
“이자는 퓨콤뜨리아리트라는 마귀입니다. 워낙 말이 많은 놈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전 레오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앤젤나이트라고 부르는 존재지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퓨콤뜨리아리트를 보며 하기가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날렸다. 반면 레오를 볼 때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레오가 하기와 주운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라? 주운과 하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조노량이 말을 이었다.
“참 오랫동안 따라다니더군. 뭔가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
레오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저 위에 계신 분들도 모르지요. 아니 누군지는 알지만 왜인지까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시하고 보호하라는 의지를 전하시니 그리할 뿐입니다.”
조노량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억지로 입을 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검은 친구도 모른다고 하겠지?”
“그러문입쇼. 저도 이 친구와 비슷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요.”
조노량은 미소 지었다.
“참, 인사가 늦었군. 지난번엔 고마웠네.”
과거 아스르부테와의 싸움에서 도움을 주었던 것을 말함이었다.
“헤헤,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요. 제가 그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퓨콤뜨리아리트가 다시 수다를 늘어놓으려 하자 레오가 하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리머스 님, 이 친구 좀 잡아드시는 게 어떨까요? 귀가 따가워서 원!”
레오의 말에 퓨콤뜨리아리트는 질겁하며 조노량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움이 안 되는 친구들이군. 그만 가서 그대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조노량의 축객령에 레오는 방글거리며 두말없이 떠나갔다. 퓨콤뜨리아리트도 서둘러 인사를 하고 모습을 감췄다. 그래 봐야 멀리 가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둘의 기운이 사라진 방향을 정확히 바라보며 조노량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번거롭게 굴었군. 알고자 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모르고자 해서 끝까지 모를 일도 아닌 것을. 언젠가 알기 싫어도 진실을 대면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 그런데 나를 부른 이유가 있겠지?”
조노량은 창조자와 군주들도 혼란스러워하는 내용을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겨 버렸다.
하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아서라오. 궁금한 점도 있었고, 오래된 약속도 지켜야겠기에 잠시 선공을 방해하게 되었소.”
조노량의 시선이 좌측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그곳에 있음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참, 그리웠던 아이로군. 옛 인연을 이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 그대가 약속을 지켰음을 인정한다.”
좌측 공간에 뭉쳐 일렁이던 검은 연기 중 하나가 육화를 이뤘다.
“반갑다, 샤!”
새까만 연기가 어느새 새하얀 나신의 여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소멸을 택했던 존재이자 한때 그토록 그리워했던 존재다. 하지만 조노량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존재적 이유로 연심까지는 품지 못했으나 각별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여인이었다.
새하얀 나신의 여인이 조노량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마물임에도 마물답지 않게 청량한 목소리다.
조노량으로서는 처음으로 들어 본 샤의 목소리였다. 감탄이든, 기쁨이든 무언가 표현할 법도 하건만 조노량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조노량의 품에 안겼다.
조노량은 샤의 새하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듯 그녀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데, 목소리나 외모 따위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었다.
“나를 대신해 이 영토를 다스릴 아입니다. 당신과 비슷한 향기를 가진 아이라오.”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에게 안식이 허락될 때까지 돌봐주겠다.”
하기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일이오.”
품에서 샤를 놓아준 조노량이 하기와 주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가 되려 하는군?”
하기와 주운이 동시에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 ☆ ☆
그렇게 조노량은 다시 마계의 문에 자리를 잡았다. 그 옛날 작은 인연이 있었던 검은색 오크와 매우 닮은 오크가 조노량의 오두막을 지어 줬다. 그리고 샤가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그의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들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샤가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그날 조노량은 둘로 나뉘었던 ‘하나’가 다시 하나로 결합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하나’가 이 세계를 떠나가는 것도, 인외의 존재들이 그 ‘하나’를 맞이하기 위해 차원의 벽을 넘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샤는 과거 하기가 품었던 모든 마기를 갈무리하고 돌아왔다. 이 땅의 지배자가 바뀐 것이다.
권능을 이양 받았음에도 샤의 눈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감정을 가지게 된 샤를 조노량은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같은 날 주운에게서 해방된 가디언 헤트르 폰티나가 조노량을 찾았다. 조노량은 그 연약한 영혼이 내켜하는 대로 두었다. 헤트르는 열흘간 조노량에게 검을 겨누다가 끝내 검을 떨어뜨리고 떠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육체가 자연의 섭리에 순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을 잃은 가디언의 숙명이다.
☆ ☆ ☆
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그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끊이지 않고 흘러갔다. 시간의 속도를 인지하고 나서야 조노량은 시간의 흐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실로 놀라운 깨달음이었지만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을 뿐, 태초로부터 변하지 않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시간은 공간과 차원에 따라 이질적이고, 상대적으로 작용함을 알았다. 또한 촌음의 시간이 억겁의 시간이 될 수도 있었고, 억겁의 시간이 촌음이 될 수 있음도 알았다. 다만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 속도와 관계없이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만큼은 절대적 진리였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상단전이 열렸다. 하단전이나 중단전처럼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개안하듯 한 번에 극을 이뤘다.
조노량의 상단전은 세계와 이어지고, 우주와 이어지고, 수많은 차원과 이어졌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평행하는 차원이 수도 없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이어졌다.
조노량의 의식은 먼저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스스로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육체를 가지고 있되 없는 것과 같았고, 우주처럼 크되 지극히 작았다. 조노량의 의식이 대뇌피질에 닿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자신과 같은 얼굴도 있었고, 백인과 흑인도 있었으며, 털이 수북한 고인류의 얼굴도 보였다. 본능적으로 그들이 자신을 존재하게 한 근원임을 알았다.
조노량의 의식이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수많은 짐승들이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짐승들, 생전 보지도 못했던 특이한 형태와 모습을 지닌 짐승들이 자신의 내부 깊숙이 그들의 흔적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도마뱀처럼 작은 것들도 보였고, 아스르부테처럼 흉측한 놈도 있었으며, 거대하기 짝이 없는 용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아주 작아졌다. 태초의 자연과 그 속에서 움트는 작고 단순한 생명체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되 자신이 아닌,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수많은 존재들이었다.
그로써 조노량은 생명의 탄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흐릿했던 세계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게 되었다.
조노량의 의식이 천천히 깨어났다. 머물던 오두막이 삭고 낡아 무너졌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샤의 어깨에 수북이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조율하지 않은 탓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조노량의 시선이 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온 우주가 샤를 주목했다.
[나의 종, 나 로리안의 가련한 일부구나.]
영창과 같은 울림이 마계의 문을 가득 채웠다.
샤가 무릎을 꿇고 조노량의 발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조노량의 의식이 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아주 먼 여행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 전에 잠시 멈춰서 정리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불쌍한 영혼들의 해방이었다.
또한 그의 일부이며, 신성을 나눠 준 샤를 그의 대리의지로 남겨 두기로 했다.
[부정한 것들은 멸할지어다.]
마계의 문에 거대한 태풍이 몰아닥쳤다. 대기를 떠돌던 마기와 수많은 악의가 하나로 모여 티끌처럼 작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무로 돌아갔다.
[섭리에 어긋난 것은 걷힐지어다.]
마계의 문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결계가 무너졌다. 주신 아디의 의지로 구분되었던 공간이 구분되기 전으로 돌아갔다.
마계의 문에 맑고 따스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샤의 몸을 채웠던 마기가 소멸하고 이어 거대한 신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계의 문에 얽매어 있던 오염된 영혼들이 사함을 받고 정화되었다. 웅장한 성가가 울려 퍼지며 수천의 천사들이 내려와 사함을 받은 영혼들을 인도했다.
사흘 밤낮에 걸쳐 빛이 임했다.
그 빛은 대륙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눈부신 빛줄기가 북쪽 하늘을 가득 채웠다. 대륙 곳곳에 산재해 있던 로리안의 신전에 거대한 신성이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침묵했던 로리안의 신성이 대륙 구석구석 그늘진 곳이 없도록 충만하게 임했다.
조노량이 샤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 신성이 샤에게 이어져 더욱 밝게 빛났다.
조노량은 다시 과거 동료들의 영혼을 헤아렸다. 오염된 육체를 벗고 순수한 영혼으로 돌아가 윤회의 고리와 접했음을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그중 둘은 자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 의지에 종속되었음도 알았다. 자신과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의지에 의해 말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섭리임을 깨달았다. 그 영혼들이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조노량의 의지가 다시 샤에게 향했다.
[나를 대신할 지어다.]
이제 더 이상 존귀할 수 없고, 더 이상 높아질 곳 없는 궁극의 영체가 된 샤가 조노량의 발치에 엎드려 경배했다.
샤는 태초에 스스로 태어난 절대적 의지체들, 창조자로도 불리며 신으로도 불리는 의지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 세계의 정신이 되어 무한한 시간을 조율할 것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친 조노량은 마침내 그 작고 초라한 행성을 벗어났다.
푸른색의 작은 별이 조노량을 배웅하듯 밝게 빛났다. 그리고 한순간 수많은 항성과 행성들 사이로 멀어져 갔다.
조노량의 의식은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다.
별들이 모여 거대한 은하를 이뤘다. 언젠가 보았던 수많은 차원과 분기점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이 모두가 자신의 몸임을 인식했다. 조노량의 의식은 나지막이 탄성을 발하고 다시 기나긴 여행을 시작했다.
은하가 작은 별처럼 작아지고, 또 다른 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머물며 살피자 수많은 은하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조노량의 의식은 그 은하들을 뒤로하고 더 멀리 나아갔다.
은하들이 모여 다시 별처럼 작아지고, 그 작아진 빛들이 빽빽이 모여 거대한 면을 이뤘다. 각기 다른 시간이 만들어 낸 마법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같으면서도 다른 우주였다.
조노량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갔다.
그렇게 나아가는 중 의식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빛이 폭발했다. 핵이자 근원이 되는 차원을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 모든 차원과 은하를 합해 놓은 것보다 더 큰 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원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작은 원들을 보았다. 항성과 행성, 마치 오래전 보았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 원들이 품고 있는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조노량은 그 원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바로 핵(nucleus), 만물의 근원이었다.
이전에는 어둠 속에 빛이 존재했다면, 이 단계에서는 빛 속에 더 큰 빛이 존재했다.
우주의 비밀을 접했음에도 관성적으로 조노량의 의식은 나아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원들이 다가 아니었다. 그 원에서 더 멀어지자 그와 같은 원들이 무한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조노량의 의식은 큰 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주 익숙한 빛, 태양이었다.
조노량의 의식은 의문을 품었다. 아주 먼 과거에 떠나온 태양이 어떻게 다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조노량의 의식은 한참 동안 머물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능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 노관장이 있었고, 제갈가의 공자가 있었고, 자신의 등을 꿰뚫은 낭아도가 있었다. 마치 정물화처럼 그대로 멎어 있는 세계였다.
또한 멎어 있지 않았다.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릴 뿐, 시간은 쉼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지나 왔던 억겁의 시간은 결국 촌음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모르겠소. 세계 자체라고 생각했건만…….
하기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느낀 대로 자신은 수많은 우주와 차원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자체였다.
그리고 땅과 바다와 하늘에 의지가 없듯, 그 세계 자체인 자신은 의지가 없어야 했다. 그렇기에 대지의 여신인 자신을 받드는 신관들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신탁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촌음의 시간이 흘렀다. 조노량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 정물화가 존재하는 세계를 뒤로하고 다시 빛을 향해 나아갔다. 태양을 지나고 우주를 지났다. 자신이 지나온 세계와 완전히 동일한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낯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세계는 저 남자에 속한 세계였다.
‘아, 이 또한 윤회란 말인가?’
진실을 인지한 순간 조노량의 의식은 다시 그가 지나온 과거를 거슬러 정물화의 세계로 빨려들어 갔다. 그 길었던 여행이 무색하게도 한순간에 돌아왔다.
등 뒤로 삐죽이 빠져나오던 내장 조각이 급속도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등 뒤로 파고들었던 이물질이 거세게 튕겨져 나갔다.
제갈가 공자 너머로, 생기를 잃은 노관장이 얼굴이 보였다. 노관장은 끝내 공자의 손을 놓지 않고 누웠다. 그 위로 공자의 몸이 겹쳐졌고, 조노량의 몸도 땅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 찰나(刹那)의 순간 조노량의 몸은 원자 단위로 흩어지고, 완벽한 상태로 재구성되었다. 탈태환골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완벽체였다.
또한 조노량이라는 세계가 종말에 이르자 따라서 붕괴되고, 비틀렸던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재구성되었다.
주신 아디와 창조자들이 모든 권능을 동원해 그토록 바로잡고자 했던 세계의 균형이 단숨에 이루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형태로 말이다. 보지 않아도 조노량은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틀어지고 벌어졌던 모든 차원의 틈이 메워지고 제자리를 찾았다.
무한히 정지해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조노량은 공자의 등줄기를 꿰뚫은 철검을 놓았다.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한 듯 몸이 섰다.
[사라져라.]
제갈가의 무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물론 그들이 흘린 피조차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조노량은 자신이 품었던 절대적 힘들이 일시간에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기를 엿보았다. 아니 인간이 천기임을 알았고, 인간 안에 태초로부터의 모든 기억이 간직되어 있음을 알았다.
조노량은 긴 숨을 토해 놓았다.
그 숨과 함께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모든 기억이 소실되었다.
조노량의 입에서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언어가 튀어나왔다.
“로리안…….”
조노량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등줄기를 더듬었다. 낭아도에 찔렸던 등이 멀쩡했다. 제갈가의 무사들도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남은 보무관의 동료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초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했음을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헉헉대던 숨이 트이고, 온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음을 느꼈다. 단전에서도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동시에 인간의 몸에 세 개의 단전이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노량! 괜찮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 신종, 만력(萬歷) 7년, 산동반도 태안주 제현에서 중원 무림의 새로운 전설이 태동했다.
<完>
<후기>
후생기는 독자님들께도 무척 긴 글이었겠지만 제게도 정말 긴 글이었습니다. 애초 취미로 시작했던 글이었기 때문에 완결을 낼 수 있을까 의심도 들었습니다. 일이 바빠서 등한시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흥미도 좀 잃고... 다행히 유료화제도가 생겨서 의무감도 생기고 수익도 생기고 완결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에게는 꼭 필요한 제도였던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께는 조금 부담이셨겠지만 말입니다.^^;
후생기는 두 가지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고, 두 번째는 소우주론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주인공을 그런 암담한 상황에 던져 놓으면 무척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계기가 되었죠. 특히 첫 식사를 하는 장면은 매우 감명이 깊었습니다. 후생기에서도 형태는 다르지만 아주 길게 다루었죠. 초반 비슷한 성격의 인물도 몇몇 등장시키고요.
아, 물론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건들은 완전히 다르게 진행됩니다.
당시 두 가지를 고민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완전 환타지를 쓰느냐, 아니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환생형 대체역사물을 쓰느냐?
재미라는 측면 때문에 결국 후생기를 쓰게 되었지만, 가끔 아쉬움도 남습니다. 그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앞으로도 그 글은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후생기에서 시간은 멈추지도 않고 되돌릴 수도 없는 걸로 규정해 버렸으니까요. 물론 세계관을 바꾸면 되겠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군요. 당분간은 후생기의 세계관을 우려먹고 싶습니다.
지금 제 앞에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놓여 있습니다. 1970년도에 문예출판사에서 초판이 발행된 세로활자본이죠. 이동현님이 번역한 책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1963년도에 출판된 소설이니 거의 초기에 번역된 책인 것 같습니다. 하도 읽어서 이제 나달나달합니다.
이 낡은 책 한 권이 후생기를 탄생시켰습니다. 참 고마운 책입니다.
두 번째 모티브는 마지막 장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입니다(무식한 노량이는 모릅니다). 일종의 환원우주, 혹은 소우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철학적 접근이 되겠군요. 자세히 언급하면 후기가 스포로 변할 소지가 있으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최근 인터스텔라의 영향으로 우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초끈이론(쿼크 이전에 끈형 물질이 있고, 그 물질의 진동으로 인해 우주가 성장과 수축을 반복한다는 이론으로 다양한 물리법칙이 존재하는 이질적인 우주가 존재한다)도 있고, 충돌우주론(우리 우주와 평행 우주의 충돌을 다룬 이론으로 빅뱅이론과 배치됨) 등 다양한 이론이 있습니다. 끌어다가 쓰고 싶었는데, 아, 어렵습니다. 읽어봐도 잘 모르겠더군요.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다 포기했습니다.
참 오래 기다리셨죠? 늦게나마 완결을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 긴 시간을 함께 달려와 준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후생기를 완결시길 수 있도록 터와 구조를 만들어 주신 문피아에도 감사드리며, 교정을 담당해 주신 이방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후생기를 쓰며 너무 애를 먹어서 차기작은 좀 가벼운 글로 찾아뵐까 합니다. 세계관은 후생기와 공유하는데, 분위기와 소재는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PS: 시간 날 때 후생기 에피소드 혹은 중원편 프롤로그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연재는 아닙니다. 그냥 여운 삼아서요.
<후기> 끝
<외전-임베디드의 탄생>
전 차원을 관장하는 주신 아디는 차원의 균열로 인해 발생한 혼란에 당황했다. 수억겁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아디는 모든 의지의 주관자며 전 차원의 조율자지만 세계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세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인지를 넘어서는 부분이었고,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범위였다.
아디는 이 세계가 처음 탄생할 때 함께 태어났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고, 하나의 점이 수억의 차원과 수조의 우주로 분화되었다.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나 스스로 존재를 깨닫고, 의지를 갖게 되었다. 태초부터 그와 이 세계는 쌍둥이였다. 그의 의지는 이 세계의 의지와 같은 힘을 가졌고, 그의 뜻은 이 세계의 뜻과 동일했다.
이 세계 자체가 그의 육신이었고, 아디는 정신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 어떤 형상도 갖지 않았으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는 은하일 수도 있었고, 작은 티끌일 수도 있었으며, 생명체일 수도, 원자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스스로의 육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본질은 의지체였다.
스스로 존재를 인식한 날부터 그는 이 세계를 조율했다. 혼돈을 정리하고 질서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닮은 의지체들의 탄생을 지켜보기도 했다. 자신의 창조물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깨어난 존재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세계가 낳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의지체들은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구축했다. 아디의 조율을 받으며 성무를 수행하듯 이 세계의 질서를 만들고, 균형을 잡았다. 의지체들의 의지와 아디의 의지가 결합해 태초의 혼든을 정리해 나갔다.
태초의 물질, 악티늄을 나눠 원소를 만들어내고, 그 원소를 결합해 다시 다양한 물질을 창조했다. 그렇게 탄생한 물질들은 스스로 결합하고 스스로 배척했다. 그렇게 무거운 것이 생겨나고, 가벼운 것이 생겼고, 차가운 것이 생기고, 뜨거운 것이 생겨났다.
그것들이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별이 탄생하고, 은하가 탄생하고, 차원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차원들이 모여 이 세계가 이루어 졌다. 아디는 차원 간에 서로 섞일 수 없도록 벽을 세우고, 혼재되지 않도록 질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침내 생명이 탄생했다. 그 생명들 중 새롭게 의지체들이 탄생했다. 육체에 의지해야 하는 유한자들이다.
태초에서 탄생한 의지체들과 달리 생명에서 탄생한 유한자들은 많이 미숙했고 격이 떨어졌다. 그러나 억겁의 시간을 거치며 성숙되었을 때는 태초의 의지체와 같은 반열에 올라설 가능성이 있었기에 늘 관찰하고 보호했다.
아디는 이 새로운 의지체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과 태초의 의지체들을 창조자 혹은 신이라 명명했다. 차원을 생성하고 세상을 창조했기에 창조자라 했고, 가장 격이 높고 완성된 존재였기에 신이라 했다.
하지만 모든 창조자들이 아디와 동일한 의지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일부 창조자들은 아디와 반하는 의지를 갖고 탄생했으며 아디의 의지에 반하여 그들만의 의지를 구현했고, 그런 차원을 창조했다. 아디는 이 또한 조화롭다고 생각했다.
아디 자신조차 셀 수도 없는 기나긴 시간이 흐르며 또 다른 의지체들이 생겨났다. 놀랍게도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의지들이었다.
태초의 의지인 아디조차 이 세계 외의 일은 알지 못했다. 아니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침입자들은 분명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었고, 스스로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의 의지가 질서에 반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의지는 창조나 조화로움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의지는 오직 파괴와 혼돈만을 추구했다. 무엇이든 탐욕수럽게 집어 삼켜,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했고, 아디와 다른 의지체들의 의지에 대항할 만큼 강대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세계 자체가 무너졌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소멸되었고, 또 일부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침입자들은 어느 사이엔가 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디는 그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차원을 떼어주고 살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사멸이 예정된 차원에 그들을 밀어 넣었다. 그들이 임무를 완수하면 그 찌꺼기를 압축해 암흑성으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암흑성이 종말은 아니었다. 아디는 이 암흑성의 물질들을 가공하여 새로운 탄생을 준비했다.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된 암흑성은 가공할 에너지를 품고 홀씨가 터지듯 한꺼번에 씨앗을 터트려 새로운 은하로 태어났다. 아디는 이 작업을 빅뱅이라 했다.
이렇듯 사멸하는 것들은 사멸하는 대로, 태어나는 것들은 태어나는 대로 분리되도록 규정지었다.
이렇게 엄격한 분리된 생멸은 이 세계의 법칙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였다. 그 섭리에 따라 이 세계는 끝없이 생멸을 반복하며 커졌고, 위대해 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세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의 정신인 아디는 아직까지 온전했으나 세계의 육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차원의 벽에 금이 가고, 허물어졌다. 섞여서는 안 되는 차원들이 무작위로 섞여 나갔다. 질서가 무너지고, 섭리에 어긋나는 균열이 발생했다. 예정되지 않은 순간에 은하가 사멸했고, 차원이 통째로 삭제되었다.
세계의 정신인 아디로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아디는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동시에 모든 차원에 간섭했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무너지는 질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그 중 가능성이 높은 씨앗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차원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 차원을 되돌리기 위해 아직까지 격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위험한 의지체들과 결합시켰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조치였다.
제 290,234,739,824차원, 3,798,989,123,471번 은하, 8,993,482,378번 행성, 지구라 불리는 행성의 생명체들을 투입한 것이다.
제 290,234,739,824차원, 3,798,989,123,471번 은하, 8,993,482,378번 행성인 지구의 의지체들은 태초의 의지체인 제7창조자가 육신을 부여하고 창조한 의지체들로, 타고난 격에 비해 너무 강력한 가능성을 내포한 의지체였다. 탄생하자마자 매우 짧은 시간에 천기를 넘보기까지 했다.
때문에 급히 그들의 행성에 베리어를 둘러 이 세계의 근원에너지인 악티늄에너지를 철저히 차단하고, 또한 악티늄 에너지가 그들의 육체에 독으로 작용하도록 조작을 가했다. 그것이 불과 오백 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그 의지체들은 창조자들이 경악할 만큼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급기야 그들은 창조자들의 영역인 새로운 차원의 창조에까지 손을 대기에 이러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는데 성공했다.
참과 거짓으로만 이루어진 2진법의 세상, 불완전하고 부족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낸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그 불완전한 세상을 양산해 냈다. 그들이 창조자이고 그들이 신인 세상!
처음 아디와 제7창조자는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위험한 의지체들을 멸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가능성을 보고 계속 보호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그러나 이 세계 자체가 무너짐으로 인해 그 고민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이 작고 놀라운 의지체들을 이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많이 이르지만 무너지는 세계의 복구를 위해, 차원의 질서를 위해 이들을 활용할 방법을 생각했다.
아디와 제7창조자는 기주의 의지체들이 창조했던 2진법의 차원을 보완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세상을 만들어 선물했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에 빠진 차원들을 잇는 게이트를 심어 놓았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가상현실이며 가장 완벽한 가상현실게임인 임베디드의 탄생이다.
<외전-임베디드의 탄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