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세월에 묻히고
대륙력 909년 가을.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조노량은 차츠라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샤마노프는 벤트의 부고를 전한 후 꼬박 열흘간 죽은 듯이 자다가 떠나갔다.
“꼭 그래야 했을까?”
조노량의 물음에도 차츠라는 말없이 고개를 묻었다. 하긴 반대로 차츠라가 그런 질문을 던졌대도 자신 역시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술만 털어 넣었다.
자신이 가야 했을까? 그랬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갔더라도 그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원했던 것이니.
‘왜? 벤트, 왜 그래야만 했나?’
조노량은 벤트와 함께 했던 여정을 떠올렸다. 오만한 그의 표정을 떠올랐고, 그 오만한 표정 뒤에 숨은 작고 연약한 영혼, 떨리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노리앙, 왜 혼자서 가고 그래! 같이 가야지. 우린 늘 함께여야잖아?’
마리노에서 자신에게 보여 줬던 눈빛… 을 잊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던 눈빛.
‘그토록 참을 수 없었던가?’
샤마노프는 말했다. ‘벤트가 우리에게 시간을 준 거지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도 아메조프처럼 자살을 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샤마노프의 말처럼 자신을 희생시켜 다른 이들을 구하려 했는지도.
‘아마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었겠지.’
벤트는 케이론의 목민관이 되었다. 전대 목민관의 아들임에도 전통을 깨고 목민관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과거 바라흐하의 기반을 무너뜨릴 때 그랬듯이 서중부 폴리스들을 부추겨 북대륙연방에 반기를 든 것이다.
무모한 반란이었다. 애초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머리 좋은 벤트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불과 3만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커트리안은 생환자들을 모두 그 전쟁에 투입했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 스마르마저 그 전투에 몰아넣었다. 통일전쟁 이후 첫 번째 대규모 전투였다.
통일전쟁을 거치며 무수한 전술교본을 남겼던 커트리안이 그 전투에서만큼은 아무런 전술도 구사하지 않았다. 그건 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란군 3만과 진압군 5만은 들판 한가운데서 그야말로 무식하게 격돌했다. 전투는 닷새간 끊임없이 치러졌다. 모든 생환자들이 진압군의 전면에서 한껏 피를 뒤집어쓴 데 반해, 벤트는 마지막까지 반란군의 후미에 남았다.
그렇게 생환자들이 살육의 욕구를 충실히 만족시켰을 때, 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차츠라가 스스로 잔을 채우고 비웠다.
조노량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내쉬어도 답답해진 숨통이 트이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우려했던 일이다. 생환자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노량은 차츠라의 빈 잔을 다시 채워 주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벤트의… 안식을 위해.”
“벤트의 안식을 위해…….”
둘은 함께 잔을 비웠다.
그가 무엇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지 짐작이 갔다. 성공을 위한 반란이 아니었다. 동료들 모두 억지로 본성을 억누르고 있지만 일부는 이미 한계상황까지 갔다. 더 이상 억누르다가는 수도 한복판에서 폭주할 수도 있었다. 벤트가 혼자서 그 짐을 떠안은 것이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명예로운 이름을 버렸고, 수만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오욕의 굴레를 짊어졌다. 그리고 변명 없이 갔다.
그것을 알기에 커트리안은 가지 못하고 남았을 것이다. 동료로서의 커트리안은 벤트를 살리고 싶었겠지만, 집정관으로서의 커트리안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간 반란군의 수괴를 살릴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감당할 짐이다.
다만 또 하나의 짐을 짊어진 샤마노프가 안쓰러울 뿐이다. 아무리 벤트가 바란 바였다지만 자신의 손으로 동료의 목숨을 거뒀다. 왜 하필, 사먀노프였을까? 차라리 스마르나 하이오지였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대륙력 909년 10월.
한 달 후 조노량은 또 하나의 소식을 접했다. 화전민촌으로 뒤늦게 포니의 부고장이 날아 온 것이다. 포니는 벤트와 같은 전장에서 죽었다. 서로 반대편에 서서 싸우다가 죽었다.
이제 겨우 스물넷인데…….
어린 포니와 함께 했던 십 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그가 동경했던 연합과 그가 미워했던 동맹, 그리고 그 후신인 연방을 위해 채 펴보지도 못한 젊은 목숨을 바쳤다.
조노량은 벤트를 생각하고, 포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과의 인연을 하나둘 떠올렸다.
조노량은 화전민촌에 울려 퍼지는 통곡소리를 들으며 무거워진 발걸음을 되돌렸다.
대륙력 910년.
샤마노프가 죽었다. 아메조프가 그랬듯 그 역시 자살을 택했다. 때로는 죽음보다 고통스런 삶이 있는 법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대륙력 918년.
시간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 역마차처럼 끊임없이 사람들을 태우고, 또 내려놓으며 쉼 없이 나아간다. 오직 자신만이 굴레처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차츠라의 외모도 어느새 화전민 터의 늙은 농부들과 다를 바 없이 변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많은 크리들은 벌써 고령을 논할 때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섭리일진대, 자신만 섭리를 거스르고 있다.
새삼 오래전 떠나간 친구들이 보고 싶다. 하이오지와 제우스도 보고 싶다. 소식이라도 전하지…….
대륙력 925년.
크리들과 폴이 떠났다. 다 늙은 주제에…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리고 스마르가 오두막으로 와 안식을 원했다. 스마르다운 선택이다. 안식을 주었다.
대륙력 928년.
커트리안이 제위에서 물러났다. 잠시 오두막에 들러 함께 지나간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목적지 없이 떠나갔다. 아마 늙은 사자처럼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거다.
스마르가 없어서일까, 늙은 왕의 곁이 무척이나 허전해 보였다.
대륙력 929년.
예니에프에게도… 안식을 주었다. 산토리아나 산 정상에 올라 홀로 눈물을 흘렸다.
대륙력 930년.
차츠라의 임종을 지켰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참아 내야 했던 삶의 시간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잘 참아 주었다. 그의 무덤에 마지막 한 병의 술을 뿌려 주었다. 술 마시기를 멈추고 짐을 꾸렸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오래 쉬었으니, 공부라도 시작해 볼 생각이다.
대륙력 939년.
풍문으로 브리오티스와 헤리엇이 죽었음을 들었다. 브리오티스가 죽은 건 벌써 두 해 전의 일이란다.
하이오지의 소식은 끝내 접하지 못했다. 소식이 끊긴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으니 살아있길 기대하긴 힘들겠지. 죽기 전에 한 번쯤 들렸을 법도 하건만… 무심한 친구 같으니.
제우스는 로리안 교단의 주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어린 신관도 이제 많이 늙었겠지…….
대륙력 1052년.
하기는 먹구름이 되어 까마득한 상공에서 자신의 영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뿌연 대기로 인해 지상이 흐릿하다. 하기는 자신의 영지를 조금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뭉클거리며 내려앉았다.
지상에선 자신의 권속들이 몸을 낮추고 경배를 올렸다. 네 마리 짐승이 온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했다. 사멸했으나 소멸할 수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이 땅의 권능에 사로잡혀 끝없이 윤회를 반복해야 하는 불쌍한 짐승들이다.
하기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위해 사멸을 택했던 자신의 권속. 마기에 의해 태어난 짐승이되, 아이러니 하게도 신성의 향기를 간직한 영혼이다. 언젠가 이 불합리한 존재가 자신을 대신해 영지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차원의 틈이 더 크게 벌어져 워리놈이 직접 강림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녀에게서 이 권토를 앗아 가진 못할 것이다.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권속을 바라보는 사이 대기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기운에 하기는 잠시 방해를 해 볼까 하는 짓궂은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건 엄밀히 말해 자학이다.
그사이에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머리에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청년이다.
“잘 지냈는가?”
주운은 늙은이의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자신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평범하군.]
주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기는 찌푸린 주운의 표정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다.
하아, ‘혼’이 ‘백’보다 격이 떨어지는 어이없는 경우다.
“자네 말을 아직 인정할 수 없네.”
주운은 과거에 분명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쌍둥이와 같은 존재라네.’
하지만 막상 진실을 대면하고는 이를 외면한다.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하나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혼이 이성적인 존재라면 백은 이기적인 존재다. 혼이 조화로움을 추구한다면 백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백이 치열하게 투쟁하며 강대한 마왕들을 잡아먹고, 이 정도까지 격을 높일 때 혼은 산천이나 유람하며 세월을 허송했다.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들에 감탄하며 촌음과 같은 휴식을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투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고, 자신은 스스로 혼백을 분리할 만큼 지쳤었다. 천 년의 휴식이라지만 오히려 짧다. 그 짧은 휴식을 끝으로 더 강건해지지 않고선 견디기 힘든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하기는 주운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육화했다.
주운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는 그 짧은 시간 주운 앞에 과거 늙었을 때의 주운과 똑같은 모습의 늙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육화한 하기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죽음을 맞이할 때 육체란 허물을 벗어던지네. 그렇게 자유로워진 영혼은 ‘레테의 강’에 기억을 씻어 내고 새로운 환생을 준비한다고들 하지.”
하기의 말에 젊은 주운이 의아심을 드러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주운의 질문에도 하기는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애초에 레테의 강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아. 허상일 뿐이다. 영혼이 육체를 버릴 때, 기억도 함께 버리는 거지. 영혼은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니까. 모든 기억은 오직 육체에 저장되는 거다. 여기 이 뇌 속에, 여기 이 심장 속에 저장되었다가 육체와 함께 썩어 가는 거지. 육체가 없는 영혼은 그저 극미한 에너지의 흐름일 뿐이고, 백과 결합해야 비로소 하나의 의지를 갖게 된다네. 자네는 나의 혼이고, 난 육체와 함께 썩어 갈 백이었네. 하지만 우리 육체는 영생을 얻었지.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라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왜 인정하려 들지 않는가? 백이 자아를 갖고 이렇게 떠들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가? 우리가 살아온 세월은 백조차 영성을 갖추고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네. 자네와 내가 스스로를 분리해서 안식을 취하고 싶을 만큼 기나긴 시간이었지. 하지만 이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군. 지금 자네가 취하고 있는 그 거짓된 육체를 버리고 이제 다시 하나로 합쳐질 때가 되었네.”
주운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과거의 그 어리석은 짐승이 아님은 인정한다. 강대한 마왕들을 잡아먹고 단번에 자신을 뛰어넘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자신이 어떤 인과로든 이어져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임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수긍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예외는 있지. 격이 월등히 높아진 영혼들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기억을 간직하기도 한다네. 자네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사실 자네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의 영혼은 우리가 하나였던 시간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네. 스스로 거둠을 받은 자, 최초의 앤젤나이트 프리머스이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주운은 번개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었다. 기어이……?
그토록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었다.
하기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겠지. 한 오백 년? 나도 오랜만의 휴식을 서둘러 끝낼 마음은 없으니까. 주위를 둘러보게. 내가 이뤄 놓은 영지일세. 이제 물려줘야 할 때가 되었지만 잠시 감상할 시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나?”
하기는 말과 함께 아련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태초의 백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 전에 자신의 의지를 이을 영혼에게 권능을 물려줄 시간도 필요하다. 하기는 아직까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주운을 돌아봤다.
“저 영혼이 보이나? 내 영지를 물려받을 권속이지. 샤!”
하기의 부름에 검고, 거대한 연기 회오리가 뭉클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권세를 품은 흄이다. 그 검은 덩어리가 한자리로 모여들더니 형상을 이뤘다. 순백의 나신을 뽐내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주운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샤롤르……?”
여인이 주운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주운은 그녀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아쉬움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다.
“나 다음으로 영격이 뛰어난 존재일세. 드물게도 과거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격이 높은 영혼이지.”
하기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주운의 시선은 샤롤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내 권능을 물려줄 생각이네. 자네에게도 좋은 일일 거라 생각하네. 결국 자네가 베푸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 말일세.”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주운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느끼고 있었지. 난 자네의 새로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랬던가? 그 긴 시간을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던 거로군…….”
“자책하지 말게. 우리에게 이런 인연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녀 역시 눈 깜짝할 순간에 스쳐 지나간 작은 인연일 뿐일세.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았군.”
하기의 말에 주운은 허탈한 심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내가 더 놀라야 할 일이 남았는가?”
“놀랄 일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그분에 대한 이야기일세.”
주운은 침음을 흘렸다. 누구를 말함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네.”
멍해져 있던 주운의 시선에 초점이 맺혔다.
“그분은 누구보다 ‘크신’ 분이지. 하지만 이곳에 존재해서도 안 될 존재이며, 스스로의 의지를 가져서도 안 되는 존재라네. 이 세계에 그런 분은 단 하나뿐이지.”
“크신……? 아!”
“그게 정답일거라고 생각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