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닌파 발다사르
대륙력 886년 늦은 봄.
조노량은 폴을 배웅한 후 돌아서서 얼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폴이 했던 말 때문이다.
‘중부 아젠타 왕국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더군. 아무래도 출정하게 될 것 같아.’
세상은 왜 동료들을 가만히 두질 않는가? 안 그래도 불안한 친구들인데 또 피를 봐야 한단 말인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잠시 갈등하던 조노량은 결심을 굳혔다.
이레 후 조노량은 알티스시를 지나 드로이크 산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악산이라는 르부르토 산맥도 겪어 보았고, 마계의 문에 있는 테트리카 산맥도 겪어 봤지만 드로이크 산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높고 험준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 산악이 북부와 중부를 잇는 호리병 같은 통로를 가로막고 있으니, 만약 머서너리 로드가 없었다면 교류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
머서너리 로드는 드로이크 산맥의 좁은 협곡들 사이를 아슬하게 넘나들며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만약 곳곳에 박아 놓은 표지석이 없었다면 조노량은 어이없게도 길을 잃을 뻔했다. 길 자체가 자주 끊기고, 우거진 덤불로 뒤덮여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험하고 긴 길을 정상적으로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길을 접해 보니 폴에게 전해 들은 커트리안의 작전에 대해 수긍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머서너리 로드가 끝나는 지점을 병력으로 틀어막으면, 아무리 대병력이라 해도 절대 쉽게는 넘어올 수 없는 형태였다. 물론 아젠타 왕국에는 닌파라는 불세출의 무인이 있다고 하니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이틀에 걸쳐 머서너리 로드를 넘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초록빛 들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수만의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집결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폴에게 들었던 것보다 스무날은 빠른 행보였다. 정보를 잘못 파악했거나 역정보에 걸려든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하긴 일반인이 머서너리 로드를 통과하려면 최소 보름은 잡아야 할 테니 뒤늦게 올바른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제시간에 커트리안에게 전해지기는 힘들 것이다.
이곳에서 며칠 기다릴 생각까지 했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조노량은 초원을 가로질러 몸을 날렸다.
아젠타 왕국은 중부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강대국이다. 머서너리 로드에 직접 접하지는 않았지만 북부에서 중부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더구나 머서너리 로드를 관장하는 카르카 공국과는 혈연으로 이어진 우방이었다.
카르카 공국은 물론이고 중부 대륙 북부에 위치한 왕국들은 북부 대륙의 힘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경계해 왔다. 그런데 최근 북부 대륙에 묘한 기류가 조성되고 있었다.
인구는 많지 않지만 북부 대륙은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강력한 전사들의 땅이다. 북대륙연방이 정상적으로 결성되기 전에 와해시키거나 분열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때문에 강국 아젠타 왕국을 중심으로 3개 왕국이 모여 10만의 북벌군을 결성했다. 역정보를 흘리고, 그보다 한 달가량 빠른 시기에 기습적으로 머서너리 로드 초입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미 집결된 병력만 7만이고, 사흘 이내에 브리안국에서 추가로 3만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 원정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닌파 발다사르는 후방 막사에서 각 군의 사령관들과 함께 북부대륙의 지도를 펼쳐 놓고 마지막 작전을 검토 중이었다.
머서너리 로드 초입 좌우측 언덕 위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척후대에 배급된 마법스크롤이 찢어질 때 발생하는 효과였다. 숙영지에서 질서정연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원정군의 이목이 쏠린 건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까만 점이었다. 그 까만 점이 초원을 가로지르며 마법처럼 사람의 형체를 이뤘다. 먹이를 향해 내리꽂히는 창공의 수리보다 빠른 속도였다. 본진에서도 요란한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며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서둘러 무기를 잡고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원정대의 병사들은 고위급 마법사를 떠올렸다.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야 저런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는 순식간에 원정대 병사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윈드 블레이드와 소닉 버스터, 윈드 캐논과 같은 가공할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정대 본진이 뚫린 건 한순간이었다. 마법사는 본진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피분수를 뿌려냈다. 일반 병사들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엄청난 마법들이었다.
아젠타 왕국에는 대륙 최강의 기사단인 황룡기사단이 존재한다. 총 113명으로 구성된 황룡기사단은 당대 유일한 그랜드 소드마스터인 닌파 발다사르로부터 직접 훈련받은 기사들이다. 즉, 닌파의 제자와도 같은 기사들로 최소 십 년 이상을 그와 함께 해 왔다.
그 황룡기사단의 숙영지는 마침 마법사가 달리는 경로와 가까이 붙어 있었다. 중부 대륙 최고의 기사들답게 황룡기사단원들은 경고음이 울리자마자 즉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마법사의 위치를 포착하는 순간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저런 강대한 마법사와 분쟁이 발생했다면 먼저 이유를 묻고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마땅하지만, 황룡기사단은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이유를 묻기 전에 제압을 우선시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기사들에게 취약했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붙기만 한다면 기사들의 밥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통념이고, 황룡기사단의 기사들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깨져 나가는 데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검과 헬멧과 아머가 한꺼번에 베어졌다. 마법사의 검이 전방을 가리키면 전방에서 달려들던 기사들이 우르르 피를 뿌렸고, 우측 방을 가리키면 우측 방의 기사들이 무너져 내렸다. 마법사의 손이 좌측 방을 가리키면 좌측이 뻥 뚫려 버렸다.
단일 기사단으로서는 상대가 없다는 황룡기사단이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오 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마법사는 수십 번의 마법을 난사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캐스팅 속도였다. 113명의 황룡기사단은 마법사에게 제대로 접근도 해 보지 못하고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마법사가 아니라 마신이었다.
병사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감히 달려들 생각도 못하고 물러서기 바빴다.
그 덕에 마법사를 중심으로 커다란 동공이 형성됐다. 마신답게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는 그제야 비릿한 조소를 날리며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마법사가 딛고 서 있는 대지는 황룡기사단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병사들을 둘러보던 마법사가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당대 유일한 그랜드 소드마스터 닌파 발다사르는 회의 중 급보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병사들의 머리를 뛰어넘다가 턱없는 장면을 목격하고 경악에 빠졌다.
진영 한복판에 커다란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공터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노검사를 놀라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검사가 경악한 이유는 산산이 흩어져 있는 육편들과 그 육편들이 걸치고 있는 갑옷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처참하게 찢겨져 있다 한들 어찌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투구와 함께 세로로 양단된 반쪽짜리 얼굴, 머리 없는 흉갑과 그 위에 그려진 낯익은 황룡 문양, 피 웅덩이 위에 삐죽이 솟아 있는 붉은색 강철 건틀릿,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신과 함께 수십 년간 전장을 누볐던 수족 같은 자들의 것이었다.
닌파는 전장에 내려서자마자 거칠게 물었다.
“마법사, 무슨 원한으로 이들을 학살한 것인가?”
대륙 최강의 사내, 닌파 발다사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억눌린 분노의 떨림이었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닌파의 몸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강력한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닌파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번에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먼저 이유를 듣고 싶었다. 아니 변명을 듣고 싶었다. 그런 후 가장 고통스럽고 처참한 죽음을 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닌파가 뿜어내는 기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닌파의 말투를 흉내 내 되물었다.
“그대는 무슨 원한으로 북국을 침략하려는 것인가?”
닌파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법사가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다시 주변을 가리킨 후 다시 말했다.
“저 병사들의 피가, 이 기사들의 피가 그대를 분노케 하는가? 저 산을 넘는다면 이 정도 피로 그칠 거라 생각하나?”
닌파가 다시 한 번 분노했다.
“감히 누구 앞에서…….”
하지만 마법사가 닌파의 말을 다시 끊었다.
“감히? 남은 자들의 피마저 봐야 정신을 차릴 자로구나.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당장 병력을 물리고 오십 년간 드로이크 산맥을 넘지 않는다면 살려 주겠다.”
닌파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네가 이 닌파의 목숨을?”
마법사는 손을 들어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해하고 있군. 그대의 목숨뿐만 아니라 저들 모두의 목숨을 말이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광오한 말에 닌파는 분노조차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대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까?”
검은머리 마법사는 닌파를 향해 노골적으로 조소를 날렸다.
“도망가지 않는다면 두 시간, 도망간다면 서너 시간은 걸리겠군. 물론 그대도 포함이다. 어리석은 자여!”
7만에 이르는 병력이다. 광오함을 넘어 허풍에 가깝다. 시간은 둘째 치고 7만의 정예병을 학살한다는 것은 자신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유고 뭐고, 닌파에게는 더 이상 마법사의 허풍 따위를 들어줄 인내력이 없었다.
“실력을 보여라, 마법사!”
닌파의 허리춤에서 바스타드소드가 뽑혀짐과 동시에 마법사의 목을 갈라갔다.
마법사는 근거리에 취약했고, 거리는 충분히 가까웠다.
황룡기사단이 오해했듯, 그리고 다시 닌파가 지금 오해하듯, 그들이 마법사에 대한 통념을 믿은 건 절대 이 마법사의 탓이 아니다. 마법사는 기사들이나 닌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닌파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고, 근접전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조노량의 오첩도가 닌파의 바스타드소드를 향해 뿜어졌다.
카앙!
닌파의 바스타드소드가 거세게 튕겨졌다.
닌파는 마법사의 법기, 아니 기형검에 어린 기세를 읽어 냈다. 그리고 달려든 속도만큼 빠르게 물러났다.
“마법사가 아니로군?”
“내가 언제 마법사라고 했던가?”
“비열한 놈이구나!”
말을 그렇게 했지만 닌파는 긴장했다. 마법사라면 캐스팅한 마법으로 대량살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상대가 전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설사 자신이라 하더라도 황룡기사단 전체를 상대하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리고 급보를 받고 자신이 달려 온 시간이라 봐야 절대 십 분을 넘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사술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경지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긴장했다.
하지만 승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자신은 대륙에 하나뿐인 그랜드 소드마스터다.
그랜드 소드마스터라는 호칭은 다만 강하다고 해서 붙여진 호칭이 아니다. 그 호칭은 그저 명예로운 호칭이 아니라 진정한 힘을 담은 호칭이며, 경지에 이른 자만이 감히 언급할 수 있는 절대적 호칭이었다.
닌파는 육체에 대한 지배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공간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진정한 이름의 소드마스터였다.
닌파는 오오라가 어린 검을 좌우로 한 번씩 뿌려 기운을 퍼트렸다. 그의 의지에 따라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대기의 흐름이 바뀐 걸 알 수 있었다. 무겁고 끈끈한 기운이 서서히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조노량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닌파는 아까와 달리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그에 따라 대기에 대한 지배력도 더욱 강고해졌다. 보통의 기사라면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할 기운이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거두고 두 손에 강기를 둘렀다. 아무리 조노량이라 하더라도 저 정도 오오라를 맨손으로 받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싸움을 단번에 끝낼 생각도 없었다.
조노량이 무슨 짓을 하든 닌파는 흔들리지 않았다. 분노도 잊고, 살심도 잊은 채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닌파의 검이 조노량의 머리 위로 느리게 떨어져 내렸다. 그 검을 피할 수 없도록 묵직한 대기가 조노량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강기가 어린 조노량의 오른손이 닌파의 검 좌측면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리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닌파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조노량의 간섭에 닌파의 검이 바깥으로 튕겼으나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틀어진 경로가 수정되며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회전을 마친 조노량의 몸은 이미 닌파의 가슴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닌파는 명치를 파고드는 강력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공간을 지배하는 경지에 오르기 전, 육신에 대한 지배력을 먼저 갖췄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그 어떤 충격에도 닌파의 육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받은 충격은 그 육체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닌파의 몸은 조노량을 뒤에서 비스듬히 안은 자세에서 뒤로 튕겨져 나갔다.
팔꿈치로 발경을 구사한 조노량은 뒤로 밀려나가는 닌파의 몸을 그림자처럼 따라잡았다.
닌파도 인간으로서 최강의 자리에 오른 남자다. 충격으로 밀려나가는 와중에도 검을 들어 대각으로 베었다. 공격보다는 견제의 의미를 담은 베기였으나 상대가 검의 경로 상에 걸리면 그대로 양단되고 남을 힘을 담았다.
닌파의 예측대로 상대가 따라붙었고,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상대의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단숨에 갈라 버렸다. 상대가 스스로 검의 영역 안으로 진입하는 양상, 닌파는 고통 속에서도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닌파는 섬광처럼 사선을 그린 검 끝에서 느껴진 허전함에 한 번 놀랐고, 사선의 왼쪽에서 불쑥 솟아 올라오는 상대의 검은 머리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턱에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박치기?
닌파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엉덩방아를 찧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격은 둘째 치고 부끄러움에 낯빛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세 걸음 앞에 서서 조소를 날리는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닌파의 눈에서 살광이 폭사됐고, 그의 몸은 누가 끌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자로 세워졌다. 동시에 그가 깨달은 모든 경지를 담아 세 번의 베기를 연속으로 구사했다.
하지만 손등에 콧잔등을 얻어맞고, 뒷덜미에 상대의 손바닥이 얹히고 복부에 무릎이 처박혔다. 세 번의 베기가 이리저리 튕겨 나가고, 갑자기 솟아 난 발등에 이가 나갔다. 가까스로 비껴낸 발이 어느새 돌아와 뒤꿈치로 허벅지를 찍었다. 그 직후 하늘이 빙그르르 돌며 거꾸로 처박혔다. 어디를 어떻게 가격 당했는지도, 어떤 방식으로 넘어갔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아까와 달리 닌파는 팔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육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는 않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입에서는 진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접전으로 상대가 마법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는 격투가였다.
만일 격투가 중에도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면 바로 저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랜드 소드마스터였다. 수십 번을 얻어맞더라도 한 번만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면 모든 상황이 역전될 터였다. 닌파는 상대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더 제한시키기 위해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보다 강하게 끌어 올렸다.
조노량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는 아직까지 스스로의 한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가 발하는 의지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끼자 흥취가 떨어졌다.
“제안은 아직 유효하다. 저들을 살리고 싶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흥, 그대의 실력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나 닌파 발다사르를 굴복시키기엔 아직 멀었다.”
조노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살던 곳에 이런 격언이 있지. 어리석은 자들은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자, 관을 보여 주겠다. 그 안에 눕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든 그대의 자유다.”
말과 함께 조노량은 공간의 흐름을 제어했다.
강도를 더해 가며 진득하게 흘러나오던 닌파의 의지가 가을바람에 홀씨가 날리듯 허무하게 흩어졌다. 가볍고 청량한 공기가 조노량과 닌파의 주변을 자유롭게 살랑거렸다.
닌파는 공간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이 무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당황했다.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에 영향을 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이후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공간의 흐름을 틀어 놓은 조노량은 다시 오첩도를 뽑아 들어 닌파를 가리켰다.
그 순간 닌파는 모든 시야가 차단되는 걸 느꼈다. 검이 뽑히는 순간 상대방의 모습이 사라졌고,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오직 하나의 검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천지가 모두 검인데,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닌파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좌절을 맛봤다.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보았다.
공간에 대한 지배력은 완전히 소거되었다. 아니 지배받던 공간에 거꾸로 녹아 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손을 벗어나 떨어졌다.
갑자기 모든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상대의 모습이 보였고, 얼어붙어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관을 보았나?”
닌파는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보았소.”
닌파의 목소리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선택했나?”
상대는 격투가였고, 검사였다. 어쩌면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경지를 이룬 자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처음의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광오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였다. 병사의 숫자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그가 누군가의 죽음을 원하면 원한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알았다.
“나와 아젠타는 오십 년간 드로이크 산맥을 넘지 않겠소.”
선택을 마친 닌파가 힘들게 입을 떼었다.
“그리고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오.”
“좋은 선택이다. 그곳에는 내 동료들이 열두 명이나 있거든.”
그 말에 닌파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그 하나도 감당할 수 없건만, 그런 자들이 열둘이나 된다니? 제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함을 받은 것 아닌가?
조노량은 닌파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를 바로잡지도 않았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조 노량!”
닌파는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읊조렸다.
“조 노리앙…….”
노량이라니까…….
☆ ☆ ☆
대륙력 905년.
조노량은 스무 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포니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건만 세월은 저 혼자 착실히 흘러갔다.
커트리안이 준비하는 일들은 그럭저럭 순조로워 보였다. 899년에 ‘북대륙연방’이 출범했으니 어언 6년이 흐른 셈이다. 이제는 제법 국가의 형태를 갖췄다. 소식이나 전해 듣고 그런가보다 할 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세월은 산골 소년을 어엿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포니가 결심을 이야기했다.
“수도 켈커티스로 가려고요. 북대륙연방에서 할 일을 찾아보고 싶어요.”
소일거리로 가르쳤는데, 나름 자질이 있었는지 성취가 만만치 않았다. 검술만으로 치면 아마도 또래에선 상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 오오라를 다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혹은 마나감응도가 떨어져서인지는 조노량도 알지 못했다.
포니 역시 생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전을 생성하지 못했다. 포니의 몸에 직접 진기를 도인해 봤지만 허무하게 흩어질 뿐 단전이 생성되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조노량은 원래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특이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무림에는 벌모세수라는 특별한 수법이 있다. 삼 세 이하의 어린 아이에게만 시전이 가능한 신공으로, 경지가 높은 고인이 아이의 타고난 탁기를 제거하고, 또한 성장하면서 혈맥이 막히지 않도록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수법이다. 벌모세수를 받으면 내공을 쌓고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의 상태로 육체가 변화한다. 그렇게 배려 받은 아이는 가문의 심법을 익히며 쉽게 내기를 쌓아 간다. 하지만 처음 기를 느끼는 것은 순수하게 아이의 몫이다. 그 부분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조노량 자신도 기를 느끼고 단전을 생성하기까지 무척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결국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곳의 방식이 적용돼야 함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곳의 방식대로 그의 몸에 내재된 마나를 자극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나 역시 내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았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인연이 있다면 스스로 깨우치지 않겠는가.
“켈커티스로 가면 헤리엇이라는 친구를 찾아보거라. 내 이야기를 하면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헤리엇과 만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제자라긴 뭐하지만 그래도 작은 가르침을 내린 아이니 약간의 배려를 해주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산 속에서 자란 아이라 헤리엇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게 얼마나 큰 도움인지도 모른다. 그다음 일은 제 하기 나름이다.
조노량은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포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동맹에 대한 반감이 어느새 북대륙연방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포니의 생각이 바뀌었듯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크게는 북대륙연방이 탄생했고, 또 커트리안은 과거 바라흐하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종신제 집정관에 취임했다. 동일한 일로 바라흐하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는데, 커트리안은 오히려 추앙받게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동료들은 또다시 북대륙연방에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위가 높아진 만큼 일도 많아졌다.
사실 조금 바쁜 것이 낫다. 복수를 이루고, 통일도 이뤘다. 어찌 보면 목표를 잃은 셈이다. 차라리 몰입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 좋다. 몸이 바쁘면 쓸데없는 생각은 안하게 되니 말이다.
솔직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전히 위태로움을 느낀다. 금이 간 유리잔 같은 느낌이다. 조금만 잘못 쥐어도 그대로 깨져 버릴 것 같은.
참, 하이오지는 그 모든 일을 팽개치고 중부 대륙으로 여행을 떠났다.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지, 자유롭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제멋대로인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