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전쟁 이후
대륙력 885년 겨울.
산토리아나 산 깊숙이 초라한 화전민촌이 하나 있다. 마을에는 열 가구도 안 되는 허름한 통나무집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마을에서 화전을 피해 좌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거친 바위언덕이 하나 나오고 그 언덕 끄트머리쯤에 초라한 오두막이 하나 있다.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벽을 세우고 흙을 이겨 틈을 메웠다. 지붕에는 특이하게도 너와를 씌웠다.
“왔나?”
너와집 앞 너른 마당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차츠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하이오지와 예니에프를 맞았다.
“영 재미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잠시 쉬다 가려고 왔지.”
“여기가 뭐 할 일 없으면 들르는 장소 줄 아나? 집도 좁은데, 쯧!”
예니에프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이오지가 그런 예니에프의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며 말했다.
“아, 뭘 그리 어려워해. 여기가 무슨 차츠라 집인가?”
“맞아, 자네도 얹혀사는 주제에 웬 타박이야?”
하이오지의 말에 예니에프가 발끈했다.
“흐흐, 그도 그렇구먼. 어서 오게.”
차츠라가 미소를 지으며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몸을 일으킨 차츠라의 왼쪽 바짓단 아래가 허전하다. 예니에프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다리가 저러니 그림자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게. 이제 쓸 일도 없으니 아쉽지도 않아.”
커트리안이 마지막 진공작전을 펼칠 때, 죽음을 불사하고 그 움직임을 감춰 준 것이 동맹의 레인저들이다. 그 작전을 총지휘했던 사람이 차츠라였다. 부상이 만만치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생환자 특유의 회복력으로 대부분 재생이 되었으나 잘려나간 발목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셋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노리앙은?”
하이오지가 너와집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사냥을 나갔다네. 오래 걸리는 법이 없으니 곧 돌아올 걸세. 춥군, 들어가지.”
옹색한 너와집은 문도 높지 않았다. 하이오지와 예니에프는 허리를 굽혀서 낮은 문을 통과했다. 대신 집 안에서는 허리를 펴도 된다. 원뿔형으로 지붕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집 안으로 들어선 하이오지가 메케한 연기 냄새에 코앞을 손으로 휘저었다.
“굴뚝이라도 만들지 않고.”
공연히 툴툴거리는 것이다. 너와는 틈이 많아, 연기가 지붕으로 쉽게 빠져 나간다. 그냥 냄새가 날 뿐이다.
연기의 진원지는 진흙을 구워 만든 두 개의 화덕이다. 조리용이기도 하고, 난방용이기도 한 다기능 장치다. 차츠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화덕을 만들어 놓고 자랑스럽게 돌아보던 노리앙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차츠라가 처음 노리앙의 흔적을 쫓아 이곳에 왔을 때 노리앙은 집 안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지냈다.
화덕 반대편에는 다섯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필요에 의해 하나씩 만들다 보니 다섯 개까지 늘어난 것이다. 노리앙은 의외로 목공에 재능이 있었다. 우선 적당한 나무를 찾아낸다(나무야 널리고 널렸으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침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두 아름 정도의 나무가 적당하다. 나무를 정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베어 낸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도끼 따위는 필요치 않다. 침상 길이로 베어 낸 후 다시 세로로 두어 번 칼질을 하면 두툼한 상판이 완성된다.
상판의 윗면은 가장자리를 남겨 두고 깊게 파낸다. 마른 풀을 채울 자리다. 다리도 만들고 다리를 끼워 넣을 홈도 파고, 목옥으로 옮겨 와 조립한다. 이 모든 작업에 들어가는 도구는 단 두 개뿐이다. 오첩도와 골곤의 뼈로 만든 단도 하나면 족하다.
아마 목공을 위해 오오라를 사용하는 목수는 대륙에서 그 하나뿐일 것이다. 침상뿐만 아니라 오두막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커다란 원목 탁자도 그렇게 탄생했다. 의자는 껍질도 벗기지 않은 나무밑동을 통으로 잘라다 놓았다.
“정말 아늑하군.”
예니에프가 침상에 걸터앉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동안 머물던 아도니아의 고급 저택도 이보다 편안하진 않았다. 오두막은 푸근한 온기로 가득했다.
“아, 좋다!”
하이오지가 침상 하나를 차지하고 대자로 누웠다.
그 모습을 보며 차츠라가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여전히 음침한 느낌의 미소였지만 웃음이 부쩍 잦아졌다.
“커트리안이 찾던데…….”
하이오지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 말에 차츠라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졌다. 복수는 끝났지만 후련하지 않았다. 무엇을 한들 후련해지진 않을 것이다. 몸에 입은 상처는 세월이 지나면 흐려지지만 마음에 입은 상처는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한다. 누구를 죽인들, 얼마를 죽인들, 그리운 사람들이 살아오진 못한다.
차츠라는 하이오지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제우스 소식은 들었는가?”
“제이핀 왕국에 있는 로리안의 신전에 처박혔다는 소식은 들었네. 아마, 추기경이 됐다지.”
“그랬군.”
제우스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동료였다. 하지만 자신들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아도니아의 주요 정치인들과 유력가문들이 모두 숙청될 때 예외적으로 폼프니우스 가문은 살아남았다. 직계는 물론 방계까지 전부 살려 주었다. 제우스에 대한 배려였다. 제우스는 그들의 가족이기에 앞서 보호자였다. 생환자 중 그에게 구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여리고, 어린 청년이었지만 그들이 스스럼없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였다.
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젠 그 친구도 삼십 대 중반인가?”
차츠라의 말에 예니에프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세월이 흘렀으니까.”
차츠라는 절뚝거리며 화덕 앞으로 가 앉았다. 화덕 옆에 쌓여 있는 장작을 몇 개 덜어 내고 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적당한 크기로 쪼개기 시작했다. 하얀색 주머니칼에 묵빛 오오라가 맺혀 있다.
잘 마른 장작은 화덕에 들어가자마자 환하게 타올랐다.
“노리앙은 추운 걸 싫어한다네.”
차츠라의 말에 하이오지가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생환자들 중 추위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가장 강한 노리앙이 추위를 탄다는 것이 우스웠다.
“어쩌면 말이야. 노리앙은 우리처럼 변이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네.”
예니에프가 의아한 표정으로 차츠라를 바라봤다.
“우리는 추위도 느끼지 못하고, 더위도 느끼지 못하지. 몸이 둔화되면 그제야 영향을 받긴 받는구나, 라고 이해하지. 그런데 노리앙은 그렇지 않더군.”
하이오지가 히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노리앙이 늙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나?”
차츠라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를 만난 지 벌써 십이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먼.”
“노리앙을 가장 먼저 안 건 나야. 일반 반원으로 있었을 때부터니까… 보자, 자네보다 한 오 년은 먼저 알았지 아마. 그런데 말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구. 그는 여전히 삼십 대로 보이지. 까놓고 말해서 우리 중 가장 젊은 예니에프도 노리앙보다는 늙어 보이지.”
하이오지가 턱으로 예니에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예니에프가 발끈했다.
“나이 얘기는 왜 하는데? 형 소리라도 듣고 싶은 거야?”
“형은 무슨… 그렇단 말이지.”
하이오지에게서도 어느덧 연륜이 묻어 나왔다.
“그는 우리들처럼 버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고 있는 거지. 스스로 자제하고, 억누를 필요도 없고, 행동 하나를 하면서도 내가 과민한 것이 아닌가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지. 그는 변하지 않았어.”
하이오지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전혀 이해 못할 내용이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도 절실한 이야기였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폭주하고, 때로는 무너지려는 정신을 다잡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들이 즐거워할 때도 즐거운 줄 모르고, 남들이 슬퍼할 때도 슬픈 줄 몰랐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오코프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지에 머물면서도 결국 이성을 잃고 마물이 되어 살해당한 친구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오코프의 일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마계의 문을 벗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오염된 육체는 이미 짙게 염색된 천처럼 아무리 빨아도 제 빛깔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그들의 믿고 의지하는 커트리안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역시 최근 들어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곤 했다.
“자자,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그 끔찍한 땅에서도 살아나온 우리들이야. 이 정도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안 그래?”
하이오지는 쾌활한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시켰지만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예니에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람을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만 분명 즐거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난 그게 즐겁더란 말이지.”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참지 못한 하이오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그냥 참고 살면 되는 거지. 약해 빠져 가지고선!”
예니에프는 쓰게 웃었다. 하이오지에게 저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다. 그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마물들처럼 더 많은 피를 원했다. 그런 자신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예니에프는 새삼 그때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도니아 성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시즈타워가 건설되고, 캐터펄트가 조립됐다. 수많은 맨틀릿과 갤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도니아인들은 절망하고 탄식했다. 그것이 또 얼마나 달콤했던지…….
아도니아의 병사들과 시민들은 처절하게 저항했다. 병사들은 물론 노인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성벽 위에 올랐다. 즐거웠다. 반항이 드세면 드셀수록 만족감도 커져 갔다.
“아도니아인들은 알았을까? 포로들을 채찍질하고 갱도로 몰아넣으면서 그것이 자신들을 겨누는 창이 될 줄 말이야?”
하이오지는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광부였으니 그 상황이 더 재미있었으리라.
포로병 출신들인 크로아지크 3군단은 맨틀릿(방패형 방어벽) 뒤에서 대놓고 여러 개의 땅굴을 팠다. 깊게, 해자 밑을 지나 성벽 아래로 접근했다. 아도니아인들이 마주 땅굴을 파고 물을 퍼부었지만 3군단병들은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깊이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성벽에 접근했다. 침수로 인해 피해를 본 땅굴은 겨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땅굴을 파는 건 고전적인 전술이지만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전술이다. 하지만 크로아지크 3군단은 채광으로 특화된 부대였다. 3군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땅굴을 파고들어 갔다.
나흘 후 루이텐 구릉에 포진했던 아도니아의 다섯 개 정예 군단이 도착했다. 양진영은 아도니아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벌판에서 대회전을 펼쳤다.
연합의 다섯 개 군단과 동맹의 열다섯 개 군단, 북부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이 맞붙은 회전이었다. 양쪽 모두 최강의 군단들이었지만 결국 연합의 군단들은 수적 열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철저히 괴멸 당했다.
아도니아인들은 성벽 위에서 마지막 희망이 꺾여 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사흘 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크로아지크 3군단은 성벽 밑에 설치했던 버팀목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후 철수했다. 버팀목이 사라지자 육중한 성벽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었다.
하이오지도 당시를 떠올리는지 입가를 씰룩였다.
처참하게 무너진 성벽으로 동맹의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트라쿠스가 준비해 놓았던 칠십 명의 마법사들이 몰려드는 동맹군을 향해 제각기 공격마법을 퍼부었다. 수십명의 병사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얼음창에 꿰뚫렸으며, 날카로운 바람에 양단되었다. 마법의 위력은 강력했으나 공성에 참여한 병력만 오만이 넘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쓰러져 갔으나, 따지고 보면 고작 천 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의 육신은 예니에프 자신과 성난 기사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 나갔다.
아도니아인들은 성벽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처절하게 저항했다. 바라던 바였다. 그다음엔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처참하게 으깨진 시신들 사이에 우뚝 서있었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성을 잃었음을 자각했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아도니아를 점령한 이후로도 몇 차례 전투가 이어졌다.
한발 늦게 달려온 연합의 병력들이 동맹군의 매복에 걸려 하나씩 각개 격파 당했다.
뒤늦게 마하리 산맥 북쪽에서 내려오던 연합군들은 아도니아의 함락 소식을 접하자마자 행군방향을 되돌리고 약삭빠르게 연합에서의 탈퇴와 중립을 선언했다. 어리석은 친구들, 고작 중립선언으로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다니.
“그렇게 많은 피를 봤는데도, 응어리가 풀리진 않더군. 정상은 아니겠지?”
예니에프의 말에 차츠라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지.”
예니에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복수를 원했던 것인지 단지 살육을 즐겼던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아마 평생 치유되지 않겠지.
“쓸데없는 소리! 근데 노리앙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하이오지는 예니에프의 감상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재차 화제를 돌렸다.
차츠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는군.”
조노량이 일부러 기척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차츠라 정도 되면 웬만한 거리는 자신의 감각 범위 안에 둘 수 있었다. 예니에프나 하이오지보다 더 멀리 말이다.
오래지 않아 마당에 뭔가 내려놓는 소리가 나고, 조노량이 너와집 문을 밀고 들어왔다.
“히야, 소리를 들어 보니 묵직한 놈을 잡아 왔군.”
무거워진 분위기가 싫었던 하이오지가 반색하며 조노량을 맞이했다.
“먹을 복이 있는 친구들 아닌가? 마침 그럴듯한 놈을 잡아 왔다네.”
조노량이 밝게 미소 지으며 하이오지와 예니에프를 차례로 안았다.
“하, 자네 아직도 날 모르는군. 생존력 하면 이 하이오지 아닌가? 내 사전에 굶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먹을 복은 나를 따를 사람이 없을 걸? 거 왜, 노리앙도 잘 알잖아, 흐흐. 그래도 빈손으로 오진 않았다네. 자, 이걸 보라구, 오래된 놈으로 특별히 엄선해 왔다구.”
하이오지는 너스레를 떨며 배낭에서 빠블로 몇 병을 꺼내 들고 흔들었다.
“멋지군! 보답으로 오늘은 내가 솜씨를 발휘해 보지.”
다함께 마당으로 나서자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야, 맛있는 놈이잖아? 좋았어!”
조노량은 단도를 꺼내 멧돼지의 피를 뽑고, 내장을 바른 후 가죽을 서걱서걱 벗겨 내기 시작했다. 고기 다듬는 솜씨는 누구도 조노량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멧돼지는 매끈한 알몸을 드러냈다. 마당에 화톳불을 피우고, 그 큰 멧돼지를 기다란 나무에 통으로 꿰어 걸었다.
“이러니까, 옛날 오크들이랑 마물 바비큐를 해 먹을 때가 생각나잖아. 자식들, 영 서툴렀는데 말이야.”
하이오지가 입맛을 다시며 추억에 잠겼다.
어둠이 내리고, 멧돼지는 천천히 익어 갔다. 조노량은 물론 차츠라나 예니에프, 하이오지조차 서둘지 않고 느리게 익어 가는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급한 사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조차 느릿하게 이어졌다.
“그 자식을 생각하면 아직도 밥맛이 떨어져.”
하이오지가 투덜대자 예니에프가 맞장구를 쳤다.
“지가 무슨 영웅이나 된 듯이 그런 비장한 유언장을 남기다니? 참 어이가 없어서.”
아도니아의 마지막 목민관, 트라쿠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도니아가 함락 당했을 때 트라쿠스는 시민궁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발견됐다. 그는 목민관의 보좌에 앉아 당당히 점령군을 맞이했다.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말이다. 그의 책상에는 지신의 피로 얼룩진 유언장을 남겨져 있었다. 유언장인지 격문인지 모를 그 글에는 온통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도니아 군단장들을 무능함을 성토하고, 동시에 동맹의 작전들을 명예롭지 못하고, 비열하고 무책임한 짓이라 꾸짖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능한 목민관이 아니라, 비운의 목민관으로 비쳐지길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다고 역사가 그에게 동정을 표할 거라 생각하다니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그런 한심한 놈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생각하니 더 서글퍼지더군.”
예니에프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노량은 시민궁 시합 후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건네던 트라쿠스의 거만한 얼굴을 떠올렸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능한 목민관이든 비운의 목민관이든 이미 가고 난 후의 일인데 뭐 그리 중요할까. 기록에는 동정심이 없다. 승자를 칭송할지언정 패자를 동정하지 않는다.
고기가 익어 가고 첫 번째 빠블로병이 비워졌다.
“샤마노프에 대한 소문은 좀 잠잠해졌나?”
조노량의 물음에 하이오지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잠잠해지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채찍이라는데 뭐 어쩔 거야? 그 신경질적인 친구에게 감히 확인하자고 덤빌 놈도 없고 말이지.”
하긴 통일의 주역 중 하나에게 마물이니 뭐니 하며 몰아붙일 간담을 가진 자는 없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그 거리에서 가죽 주머니 밖으로 돌출된 촉수를 정확히 관찰할 만한 실력자도 드물었겠지. 물론 본 사람이 있으니 소문이 돌았겠지만, 그래 봐야 절대 확인되지 않을 뜬소문에 불과했다.
그런 면에서 크리들의 촉수는 참 편리하다. 몸속에 감춰진 촉수를 어찌 알겠는가? 당장 목욕만 같이해도 오해가 풀릴 것이다. 설사 그 가는 촉수를 보았더라도 자신의 착각으로 치부할밖에.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독한 빠블로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제는 고량의 향기만큼 익숙하다.
“노리앙, 커트리안이 당분간 아도니아에 머물거라며 한번 들르라더군.”
예니에프는 지나가듯 말했고, 조노량은 혼자 튀어나가 꺼져 가는 불티를 응시하며 흘려들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고, 함께 둘러앉아 생환자들은 고기와 술을 나누며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 ☆ ☆
886년 봄.
조노량은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미소를 지으며 열 살 내외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든일곱, 여든여덟.”
어린 포니는 제 키만 한 나무칼을 들고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횡베기를 한다지만 조노량이 보았을 때는 놀이와 다름없었다. 한참 동안 땀을 뻘뻘 흘리던 포니가 조노량을 향해 해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저한텐 가로베기가 잘 맞나 봐요. 수직베기나 찌르기보다 훨씬 편한걸요.”
“하하하, 그래 보인다. 우리 포니는 이다음에 멋진 전사가 될 것 같구나. 그런데 마지막 동작에서 허리를 조금만 더 깊어 넣어 보는 것이 어떨까?”
누구나 가로베기가 쉽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쪽 가로베기가, 왼손잡이는 왼쪽 가로베기가 쉬울 수밖에 없다. 사람의 신체 구조가 원래 그렇다. 특히 여자나, 아이들처럼 힘이 부족할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제일 어설픈 동작은 찌르기다. 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니 통제력이 떨어지고 검 끝이 흔들리게 된다.
“알겠어요. 헤헤, 전 이다음에 커서 꼭 멋진 기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동맹 놈들을 혼내 주겠어요.”
포니는 앙증맞은 입술을 꼭 다물며 다짐했다.
“그래, 우리 포니는 훌륭한 기사가 될 것 같구나. 동맹 놈들이 벌벌 떨겠는걸.”
조노량은 함빡 미소 지으며 포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기 위해선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단다. 아저씨가 알려 준 대로 매 동작마다 백 번씩! 잊지 않았지?”
“물론이죠. 하루도 거르지 않는걸요. 이거 봐요. 힘도 얼마나 세졌는데요.”
팔뚝을 걷어 올리며 알통을 내보인다. 그 귀여운 모습에 조노량은 또 한 번 미소 지었다.
“그만 내려가 보거라. 부모님이 걱정하시겠구나.”
“네, 노리앙. 그럼 내일 또 가르쳐 주세요.”
“그러자꾸나. 어서 가거라.”
조노량은 뛰어 내려가는 포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심심풀이 삼아 간단한 동작이나 지도해 주고 있었다.
포니는 화전민촌에서 자란 아이답게 가파른 경사에서도 토끼처럼 내달았다.
조노량이 터를 잡은 곳은 마하리 산맥 북쪽 봉우리 중 하나인 산토리아나 산 남쪽 면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높다란 산봉우리들만 보이는 첩첩산중이지만, 이 지역은 경사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고, 햇볕도 잘 들어, 화전을 일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더구나 과거 연합의 땅 한복판에 위치한 산맥이다 보니 몬스터 토벌도 꾸준히 진행해 왔던 지역이다.
물론 전쟁 후에 토벌이 그치는 바람에 최근 고블린 등의 개체수가 조금 늘긴 했다. 그래도 영역이 달라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조노량이 둥지를 튼 오두막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돌아 내려가면 열 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전민 마을이 나온다. 산에 불을 놓아, 나무를 태우고 층층이 밭을 일궈 빠듯 먹고사는 궁벽한 마을이다.
포니도 그 마을에 사는 꼬맹이였다. 워낙 산속 깊이 틀어박힌 마을인 탓에 난리 통에도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무척 다행한 일이다.
사실 이런 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에겐 이렇다 할 소속이 없다. 트랜티니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긴 했지만, 이런 산골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시민권을 부여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의외로 소속감은 있었다.
꼬맹이 포니만 해도 삼 년 전 마무리된 통일전쟁에서 연합이 패한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고 있다. 제까짓 것이 뭘 안다고 동맹의 폭정을 욕하고, 사라져 버린 연합을 안타까워한다. 물론 자라면서 가치관이 바뀌겠지만 저 아이의 감정이 현재 연합 쪽 사람들의 감춰진 내심이리라.
하긴 전쟁이 끝난 지 불과 삼 년밖에 안 되었으니 아직까지는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조노량은 한껏 기지개를 켰다. 할 일이 없으니 매사가 느릿하다. 수련을 등한시한 지도 한참 됐다. 작년까지만 해도 언제 마계의 문으로 불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름 수련을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접었다.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 그들도 자신을 잊었지 싶다. 지금만 해도 충분히 사람 같지 않은데, 이보다 얼마나 더 강해지길 바랄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조노량은 지금의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사냥을 해 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만들면 된다. 동거인인 차츠라가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었고, 집안 살림도 잘한다. 옛날 같으면 사냥도 차츠라에게 맡겨 놓고 놀고먹었을 테지만 그건 좀 곤란하다. 차츠라는 더 이상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칠칠치 못하게 어디 가서 발목을 흘리고 왔기 때문이다.
조노량이 둥그런 나무토막을 깎아 불편한 대로 의족을 만들어 줬다. 급하게 뛰지는 못하지만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워낙 강건한 친구니 마음먹고 뛴다면야 못 뛸 것도 없겠지만 자칫 힘이라도 잘못 주면 나무토막이 견뎌 내지 못할 거다. 그런 사정이 있어 사냥 등은 조노량이 전담하게 되었다.
조노량은 길게 하품을 하고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가을 햇살이 건너편 산등성이로 낮게 깔렸다. 하늘 한편에 벌써 붉은빛이 도는 걸 보니, 오래지 않아 해가 질 모양이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꺼내 들고 한 달 전 베어 놓은 거목의 곁가지를 쳐 내기 시작했다. 땔감이다.
미리 베어 놓은 탓에 제법 말랐다. 뒤란에 쌓아 놓으면 나머지 수분도 알아서 마를 것이다. 조노량은 몇 단이나 되는 나무를 다듬어 놓고, 다시 잡생각에 잠겼다.
이제 불과 삼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쟁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많았던 주검이 빨리도 잊힌다. 하긴 뭐 좋은 기억이라고 오래 간직하겠는가. 빨리 잊힐수록 좋다.
조노량은 전쟁의 막바지에 이곳으로 와 틀어박혔다.
그리고 얼마 후 어떻게 알았는지 목발을 짚은 차츠라가 찾아왔다. 뭐 천부적인 추격꾼이니 일부러 감추지 않는 한 못 찾을 이유가 없다.
그 후 몇몇 생환자들이 교대로 찾아와 머물다 가곤 했다.
동료들의 방문이야 반가운 일이다. 술잔을 돌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과거를 추억하기도 한다.
커트리안은 북대륙연방인가 뭔가를 결성한다고 바쁜 나머지 아직까지 찾아오지 못했다. 아도니아로 한 번 내려오라는 전갈은 받았지만 딱히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전쟁을 다시 떠올리기도 싫고, 번잡스러운 것도 싫다.
이제 와 더 이룰 것도 없고, 욕심도 없다. 그저 안분지족하며 한가한 세월을 즐기는 것이 최고의 낙이다. 먹을 것을 탐할 이유도 없고, 좋은 의복을 입어야 할 필요도 없다. 낡으면 낡은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입고 먹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더구나 말만 하면 동료들이 무엇이든 가져다주니, 이 편한 곳을 두고 무슨 번거로움을 찾겠는가.
조노량은 다듬어 놓은 나뭇단을 가죽 끈으로 두른 후 둘러메었다.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무게다. 조노량은 끄응 하며 허리를 폈다. 내공은 이럴 때나 쓰라고 있는 거다. 조노량은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놓았다.
거대한 나뭇단이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그 시간 커트리안은 중부 대륙에서 전해진 첩보를 받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어차피 예상됐던 움직임이긴 했다. 그들은 북부 대륙의 힘이 하나로 합쳐지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베르트 3성을 조금 더 압박할 필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