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북대륙연방
최초의 제국 아란탄시아가 탄생했을 시기, 북부 대륙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꾸준히 개척되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북부 대륙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344년 발생한 마계 침공이었다.
사람들은 강력한 마물들을 피해 가족 단위로, 마을 단위로 춥고 척박한 북부 대륙까지 피난을 떠나왔다. 강대한 마왕들이 넘어오면서부터는 이 피난 행렬이 국가 단위로 확대됐다.
사람들이 북부 대륙으로 몰리자 자연스럽게 마물들도 북부 대륙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마물들은 먹잇감을 원했던 것이지, 영토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우여곡절 끝에 마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중부 대륙으로 넘어갔지만 일부는 여전히 새로 개척한 터전을 지키며 북대륙에 남았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고, 폴리스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오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과거 함께 싸우고, 협동했던 사람들인지라 별다른 분쟁 없이 나름의 문화를 꽃피우고, 공화제라는 진보적인 정치체계를 구축해 왔다.
하지만 영원한 평화는 없는 법, 북부 대륙에도 분쟁의 씨앗이 싹텄고, 그 싹이 성장하며 동서전쟁이라는 지루한 전쟁을 불러왔다. 북대륙 오백 년 역사 중 무려 오분의 일을 차지한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결국 커트리안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탄생하며, 대륙력 883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마감된 통일전쟁은 역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완전히 갈라섰던 두 세력이 백여 년 만에 통합되었으니 그 역사적 의의도 작지 않았지만, 그 전쟁 기간에 발생한 수많은 사건들과 기록, 놀랄 만한 전략과 전술, 그리고 정치적 행보까지, 연구되어야 할 주제들이 넘쳐났다.
그랬기에 생환자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879년부터 북대륙이 통일된 883년간의 역사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생겨났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통일전쟁을 시기적으로 구분할 때는 보통 3단계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1단계는 생환자들이 돌아와 실지를 회복하고 힘을 키운 준비기로, 879년부터 881년 여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2기는 크로아지크에서 힘을 키운 커트리안이 켈커티스로 돌아와 바라흐하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맹의 힘을 결집시킨 기간으로 881년 여름부터 882년 봄까지를 말한다. 시기적으로는 무척 짧았지만 적지 않은 의미를 담은 시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3기가 바로 통일전쟁이 발발되고, 마무리된 882년 봄부터 883년 봄까지의 1년여 간의 기간을 일컫는다.
각 기간별로 중요한 전투와 사건들이 워낙 많았을뿐더러 전쟁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작전들이 속출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예만 들어도, 한 개 군단을 둘로 나눠 센드버그와 뱅갈스톤이라는 두 군데 요충지를 동시에 탈환할 때 커트리안이 펼쳤던 기만전술이 있었고, 수군이 약한 동맹이 통일전쟁 발발 직전 특수부대를 동원해 차례로 연합의 주요 항구들을 파괴하여 연합의 강상 지배력을 제로로 돌린 기습작전이 있었으며, 기마군단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마하리 산맥 북부 폴리스들을 무려 반년간이나 묶어 두었던 쥬시아누스 장군의 신속 기동전술을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개 군단만으로 무려 여덟 배가 넘는 적을 굴복시킨 켈커티스 반란 진압작전을 들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카샤린 방어전이나 북방 3성 함락전, 카디널 평원 구축전, 루이텐 구릉 대회전이 있었고, 상대의 이목을 속이고 전격적으로 적의 심장부를 타격한 기상천외한 진공 작전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북부 전쟁사에 있어 가장 처절하고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 아도니아 함락전이야말로 통일전쟁의 백미로 꼽혔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무려 칠 주야로 펼쳐진 그 공성전이 끝났을 땐, 아도니아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 버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민간의 피해는 차치하고라도 수성을 담당했던 정규 군단은 물론 급조된 두 개 예비군단까지 전멸을 면치 못했고, 뒤늦게 아도니아로 달려 온 정예군단들까지 몰살당함으로써 아도니아는 과부와 고아만 남은 도시가 돼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한 이견이 특히 분분했는데, 이미 승패가 가려진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의견이었다. 실질적으로 항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많았다. 물론 아도니아가 항복할 의향이 있었느냐는 부분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당시 아도니아를 이끌던 세 명의 목민관 중 트라쿠스와 치프만은 자살을 택했고, 프리온은 살해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증언을 남기지 못했다.
이후 역사가들은 아도니아 함락전에 있어서만큼은 커트리안이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일치시켰다.
물론 아도니아의 병력들을 전멸시킨 것이 전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의도한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커트리안의 전후처리 방식을 되짚어 봤을 때 아도니아 군단들의 전멸도 의도되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도니아성의 함락 후 커트리안은 아도니아의 정치, 군사적 유력 가문들을 모조리 찾아내 처형해 버린다. 물론 예외가 있었으나 오직 한 가문에 대한 예외였기에 특별히 언급할 가치는 없다. 또한 점령군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시민들 역시 철저히 색출해 처벌해 버린다.
아도니아가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보게 된 사유로 전쟁의 주역인 생환자들의 복수심을 언급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로크리안의 죽음이 큰 몫을 차지했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아도니아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로크리안이 아도니아 성 앞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다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 지경까지 처절하게 항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인 판단이지만 만일 로크리안의 의도대로 항전이 성공했다면 역사는 백팔십도 뒤바뀌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만큼 당시 커트리안의 작전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했다. 만약 당시 아도니아가 사흘만 더 버텼다면 순차적으로 몰려들고 있던 연합의 병력이 하나로 집결할 수 있었을 테고, 보급선이 끊긴 동맹군이 거꾸로 어려움에 처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커트리안이 더 많은 타격을 가하기 위해 일부러 아도니아 함락을 늦췄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과한 억측으로 치부되었다.
역사에 있어 가정이라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겠지만, 반면 그런 가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것도 없었다. 이후 군사학자들은 당시 펼쳐진 작전을 익히고, 반면교사로 삼아 꾸준히 새로운 전술을 연구해 나갔다.
전쟁 후 말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그로 인해 마르탄 초원에 위치한 중소 규모의 폴리스 카샤린이 서중부를 대표하는 거대 폴리스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동서전쟁은 882년 가을 아도니아가 함락되고, 883년 봄, 중립을 표방하며 물러섰던 배터링 평야의 맹주 사례시온이 켈커티스의 군단을 맞이해 항전 없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 후 몇 년의 논의 끝에 북부 대륙은 켈커티스를 중심으로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통합을 이룬다. 이 연방에는 로두카나 에덴보 등의 중립 폴리스들은 물론, 언제나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던 남부 알티스 공동체도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참여하게 된다. 이로써 북부 대륙에 ‘북대륙연방’이라는 이름의 초기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앙 정부의 힘보다는 지방정부의 독립성이 더 강한 기형적인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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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흘러 통일전쟁에 대한 연구도 대부분 정리되고, 역사의 한 장으로 넘어갔지만 그 전쟁에서 활약했던 영웅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민간을 통해 전해져 내려갔다.
사실 민간에서 관심을 기울일 내용은 역사적 교훈이나 전략, 전술적인 내용들보다는 흥미로운 영웅담이었다.
그 영웅담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미화되고 과장된 측면이 많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 거꾸로 신빙성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음유시인들을 통해서 퍼져 나갔는데, 역시 가장 주목받는 이야기는 북대륙연방의 초대 집정관인 커트리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북부 대륙을 통일시킨 주인공으로서 그의 활약은 하루 이틀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는 방대한 것이었다. 그가 선보인 놀라운 전략과 전술들은 전기로 정리되었고, 열여섯 명의 생환자들을 이끌고 절대적 금지인 마계의 문을 벗어난 이야기는 노래로까지 만들어져 퍼져 나갔다. 단, 재임 중 행한 일부 폭정은 대부분 미화되거나 축소되었다.
또 쥬시아누스 장군과 4,500 기마군단병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그 극적인 전개와 비장미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어떤 이야기보다 많은 감동을 받게 했다. 특히 그 이야기는 후대의 기마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또 그랜드 소드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예니에프의 검술은 하나의 유파를 이뤄 후대에까지 전해지며 가장 많은 후예를 거느리게 된다.
그 외에도 불행하게도 마물들과의 싸움에서 얼굴을 잃고 평생을 가면의 기사로 살아간 폴의 이야기도 있었고, 이후 행정가로서 놀라운 업적을 이룬 크리들의 이야기도 있었으며, 두고두고 뭇 기사들의 귀감이 된 스마르의 영웅담도 있었다. 더불어 전쟁 후 전사아카데미의 교장으로서 북대륙연방 전사들의 질적 성장을 견인한 ‘오른팔의 기사’ 브리오티스는 전사들의 스승으로 두고두고 추앙받았다.
가장 오래 살아남아 북대륙연방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헤리엇의 이야기도 전해졌고, 중부 대륙으로 넘어가 수많은 활약을 펼친 하이오지의 이야기는 용병들의 로망이었다. 그리고 통일전쟁 이후 모습을 감춘 전설적인 그림자 차츠라에 대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물론 슬픈 이야기도 있었다. 정신이상으로 자살을 택한 샤마노프와 아메조프의 이야기가 하나였고, 또 다른 방식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케이론의 목민관 벤트의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생환자들 중 절반 이상은 그 마지막이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북대륙연방의 초대 집정관 커트리안조차 자신의 자리를 이양한 후에 사라져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으나 결국 그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생환자들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노리앙에 대한 전설이 회자되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크로아지크 출신 군단병들과 생환자들에 의해 증언되었는데, 손짓 한 번에 성을 허문다는 이야기나, 그레체나 라쿠스 등 남이스테르 강의 폴리스들을 초토화시킨 특공대가 사실은 노리앙이라는 사내 하나였다는 이야기, 혹은 마계의 문에서는 마왕도 때려잡았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크게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대 유일한 그랜드 소드마스터, 닌파 발다사르를 꺾은 일화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북부 대륙을 침공해 왔던 아젠타 왕국이 그렇게 허무하게 물러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마저도 유일한 목격자인 아젠타 왕국에서 쉬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 다만 닌파 발다사르가 사적인 자리에서 이를 인정하고, 노리앙이라는 존재가 있는 한 그 누구도, 그 어떤 군대도 북부 대륙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고 공언한 것이, 용병들을 통해서 북부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북부 대륙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발전을 거듭해서 결국 중부 대륙의 강력한 왕국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강국으로 발돋움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