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37화 (137/142)

137. 복수

커트리안이 이끄는 동맹군은 삽시간에 테네온을 무너뜨렸다. 아도니아의 위성도시 격인 테네온의 인구는 십만이다. 그리고 커트리안군의 병력 수는 그보다 많은 십일만이다. 테네온시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동맹의 손에 떨어졌다.

아도니아는 테네온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루이텐에 주둔 중인 군단으로부터 긴급 전령이 도착했다. 동맹의 주력이 아도니아로 몰려간 정황이 포착됐으니 대비하라는 소식이었다. 도시 전체가 탄식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대비를 하란 말인가? 그것도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말이다.

물론 루이텐 구릉에 포진했던 병력은 동맹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출발한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최소 나흘은 지나야 아도니아에 당도할 수 있다. 더구나 카디널 평원 인근에 퍼져 있는 병력들까지 불러들이려면 보름도 짧았다.

☆ ☆ ☆

아도니아 제1목민관으로서 원정을 담당해야 할 트라쿠스는 정세를 조망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직할군단인 1군단을 이끌고 아도니아에 남았다. 테네온의 소식을 듣자마자 성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사방에서 아도니아 성을 에워싼 어마어마한 병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군세를 확인하며 트라쿠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북부 최대의 도시 아도니아의 목민관으로 있지만 저렇게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동맹군은 대놓고 갈리온 수레에 실어 온 수많은 공성병기를 조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트라쿠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요격을 나갈 수도 없었고, 반격을 가할 병기를 조립할 수도 없었다. 현재 아도니아성에 주둔 중인 병력은 자신의 직할군단뿐이다. 부랴부랴 예비병을 소집하고 있었으나 그래 봐야 두 개 군단이 한계였다.

그리고 아도니아시의 공성병기는 카디널 평원을 탈환하기 위해 모든 빼나간 상태였다.

아도니아 오백 년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위기였다.

트라쿠스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루이텐 구릉에 주둔하고 있는 다섯 개 군단에게서 소식이 전달된 것은 어제다. 그제 출발했다고 해도 앞으로 최소 사흘이 지나야 아도니아에 도착할 수 있다.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병력은 피오렌티니와 크루니아의 병력이었으나 그들도 아도니아와 마찬가지로 주력군은 모두 카디널 평원으로 출진시킨 상태였다. 잘해야 한 개 군단이나 동원할 수 있을까? 적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숫자다.

그나마 싸워 보려면 카디널 평원에 나가 있는 병력까지 모두 끌어 와야 했다. 언제 말인가? 그 병력까지 다 불러올리려면 열흘이 걸려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도니아의 게이트는 도시 안에 있지 않다. 때문에 게이트를 이용해 다른 폴리스의 기사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정규 한 개 군단과 두 개 예비군단으로 열흘을 버틴다? 트라쿠스는 고개를 저었다. 절망적이었다.

트라쿠스는 망루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 개월 전 출진 명령을 받은 로크리안이 말했다.

“목민관, 적의 보급선을 늘려야 하오. 카디널 평원을 포기하고 루이텐 구릉을 내주시오. 그리고 전장을 아도니아 평야로 옮겨 오시오.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이 될 거요.”

콧방귀를 끼었다. 침략당한 것도 모자라서 아도니아 평야에 웅크린다면 체면은 둘째 치고, 어떤 폴리스가 아도니아를 믿고 따르겠는가? 안 그래도 아도니아의 행사에 불만이 많았던 배터링 평야의 폴리스들이나 당장 폴리스의 안위를 위협받고 있는 남부의 폴리스들은 그 즉시 연합에서 탈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아니, 거꾸로 동맹 쪽에 붙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솔직히 이런 결과가 나와서 그렇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커트리안이 바보가 아닌 이상 루이텐 구릉을 열어 준다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아도니아 평야로 들어설 리가 없지 않은가? 루이텐 구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그들이 진격한 거리는 십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섣부른 진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모를 리가 없다.

만약 자신이 주력군을 아도니아 평야로 물렸다면, 영악한 커트리안은 카디널 평원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남부를 먹고, 북부의 폴리스들마저 협박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력을 집중해 카디널 평원을 공략하는 것이 맞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적의 주력이 아도니아로 달리고 있는데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주력군 사령관, 잔 왓슨의 태만이다.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 실수였다. 어려움에 처해 봐야 본색을 안다더니 진정 머저리가 아닌가? 그 머저리 하나 때문에 아도니아가 위험에 처했다. 자신의 경력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게 생겼다.

트라쿠스는 진심으로 이 모든 사태가 잔 왓슨 사령관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트라쿠스 공, 여기 있소이까?”

망루 계단이 소란스러워지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2목민관 알프치우스 프리온이다. 트라쿠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치스러운 옷을 걸치고 뒤뚱거리고 있었다. 허둥대는 모습이 가관이다.

“이 사태를 도대체 어쩌실 생각이오? 저 새까만 병력들이 보이지 않소? 군단들은? 군단들은 불러들인 거요?”

어찌하다가 이 허영덩어리 검투광 놈이 목민관으로 선출됐단 말인가? 대중을 현혹하는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멍청한 놈!

“어서 오시오, 프리온 공.”

트라쿠스의 담담한 말투에 프리온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어찌 그리 태평이시오?”

“안달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겠소.”

“이… 대비책을 말해 보란 말이오, 대비책!”

트라쿠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속이 타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보다 더 속을 태우는 자를 마주하니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트라쿠스는 일정을 정리해 보았다.

빠르면 오늘 저녁 피오렌티니와 크루니아의 병력이 당도할 터였다. 그리고 사흘 후 루이텐의 다섯 개 군단이 당도할 것이고, 카디널 평원에 나가 있는 병력들도 거리에 따라 순차적으로 도착할 것이다. 최대 보름이면 전 병력이 집결할 수 있다.

“피오레 경, 폴리스 내에 있는 2서클 이상의 모든 마법사들을 모으시오!”

트라쿠스의 측근이며 시민궁 마법사인 피오레가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는 선장과 함께 침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6서클의 강대한 마법사다.

명령을 내린 트라쿠스는 망루를 내려가며 프리온에게 말했다.

“일단 목민관저로 갑시다. 치프만공께도 연통을 넣고요.”

☆ ☆ ☆

상황을 전해 듣고 측근 원로들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아도니아 제3목민관 피온 치프만은 충격적인 소식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일시지간 시야가 노래졌다.

치프만가의 집사인 바티스타는 눈물을 뿌리며 피온의 발치에 엎드렸다.

“어서 가 보셔야 합니다. 어서요!”

하지만 피온은 같은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아이가 죽었다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루이드 공자님이 미치셨습니다. 파란 님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 남아 있는 모두를 죽이고 있습니다.”

파란의 죽음 앞에 다른 이들의 안위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파란이 죽어? 파란이 죽었다고? 친형의 손에?

피온은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혼미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루이드 공자는 부상을 입고 도망치는 파란 공자님을 끝까지 쫓아가 목을 베었습니다. 루이드 공자님과 공자님을 따르는 수명의 기사들이… 가문에 남아 있던 친인척 모두를 찾아내 도륙하고 있습니다. 흑흑흑!”

집사 바티스타는 피온의 발치에 엎드려 끊임없이 흐느꼈다.

피온 치프만은 수십 년간 아도니아 정치판을 쥐고 흔들던 거목이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강심장이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피온이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분노해야 마땅하지만 커다란 절망 앞에선 분도도 힘을 잃었다.

피온의 수석호위인 듀카가 비틀거리는 피온을 부축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피온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도니아의 안위 따위는 물론이고, 루이드를 찾아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사들을 호출하고 병력을 집결시키라는 듀카의 고함소리가 귓전을 맴돌았지만 그저 멍할 뿐이었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루이드는 문 앞에 의자를 내다놓고 편안하게 앉아 피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눈에 익은 가문의 기사 몇이 호위를 하듯 시립해 있었다.

수석호위 듀카의 지휘하에 친위기사들과 병사들이 루이드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도니아 최고의 권력자답게 그의 기사들 역시 아도니아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루이드는커녕 그의 기사들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루이드 뒤에 시립한 기사들 역시 가문의 기사들이었기에 피온도 잘 알고 있는, 그저 그런 기사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피온이 아는 그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감정한 얼굴로 피온의 기사들을 베어 넘겼다. 아도니아 최고의 기사들이 그들의 일검도 받아 내지 못하고 턱없이 죽어 나갔다.

아도니아 시민궁 시합의 4대 천왕 중 마지막 남은 바실조차 애송이 기사의 일검을 견디지 못했다. 둥실 떠올랐던 바실의 목이 피온의 발치에 떨어져 내렸다. 기사와 병사들을 지휘하던 수석기사 듀카의 피가 피온의 얼굴로 튀었고, 5서클의 강대한 마법사 필립의 마법은 허공에 흩어지더니 그의 몸은 대리석 바닥에 눌어붙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뿌려진 피는 하나도 남김없이 증발되어 루이드의 몸으로 빨려들어 갔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피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 우리 사랑스러운 파란을 보러 오셨겠군요?”

루이드가 장난스럽게 손짓을 하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몸뚱이가 멀리서 끌려 왔다. 그리고 머리 하나가 몸뚱이 위에 떨어져 내렸다.

“다른 조각은 번거로워서 찾지 못했네요. 그래도 머리는 찾았으니 이해해 주세요.”

둘째 파란의 머리였다. 파란의 금발은 여전히 눈부시게 밝았다.

피온의 턱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파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목이 메어 통곡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더 즐겨 볼까도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게 됐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으어어… 끄어억!”

피온은 꺽꺽거리며 짐승 같은 소리만 토해 놓았다.

“기억은 공유하지만 기분까지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감정이었겠다는 정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비에게 버림받게 되면 그 정도 감정은 들지 않았겠습니까?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요.”

루이드는 시체로 가득한 주변을 쓰윽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이자라고 쳐두죠.”

피온은 루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가 올지도 모르니 그만 가 보렵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치프만가의 피는 방계에서 잇지 않겠습니까?”

루이드, 아니 ‘루드’이자 ‘토리도’는 마왕이다. 마왕답게 제 기분에 따라 루드의 복수를 완수했다. 그의 몸을 빌린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그 순간 그의 내부에 갇혀 있던 루이드의 영혼이 절규하다 스스로 소멸을 택했다.

‘한을 풀어서 그런가?’

토리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곤 휘파람을 불며 피온의 앞에서 물러나왔다.

☆ ☆ ☆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이면 루이텐에 주둔 중이던 병력이 당도할 거요. 불과 다섯 개 군단이나 아도니아의 정예 병력들이오. 한 치도 방심해선 안 될 것이오. 명심해야 할 것은 추가 병력이 모이기 전에 이 병력을 끝장내는 것이오. 이미 말한 대로 요격군의 지휘는 템쉬 장군이 맡고, 매복은…….”

커트리안의 작전지시를 경청하고 있던 군단장들의 눈이 갑자기 젖혀진 막사 출입구 쪽으로 몰렸다.

하얗게 질린 표정의 헤리엇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헤리엇의 얼굴을 보자 커트리안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어났음을 직감했다.

뭔가 입을 열려던 커트리안의 얼굴이 천천히 굳혔다. 생환자가 저런 행동을 보일 이유는 많지 않다. 절대 작전에 관련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 자리에 없는 얼굴들이 떠올렸다. 쥬시아누스, 노리앙, 차츠라?

커트리안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이지?”

커트리안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나왔다.

커트리안의 질문에 헤리엇은 억눌린 목소리를 토해 놓았다.

“로, 로크리안이 왔습니다.”

순간, 커트리안이 뿜어내는 살기가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군단장들은 최소가 중급 이상의 소드마스터들이다. 그럼에도 커트리안이 뿜어내는 살기에 헛숨을 삼켰다.

커트리안은 보름 이상 쥬시아누스와 연락이 닿지 않았음을 불안해했다. 그래서 노리앙까지 올려 보내지 않았던가?

쥬시아누스의 2군단은 기마군단이다. 전령조차 따라잡기 힘들다. 때문에 연락이 끊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한 달 이상이나 연락이 안 된 적도 있었다. 그때도 쥬시아누스는 ‘문제없음’이라는 짧은 전문을 보내왔다. 이번에도 그러길 바랐다. 노리앙까지 갔으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로크리안이 나타났단 말인가?

절대 로크리안이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 쥬시아누스를 추격하고 있어야 할 로크리안이 왜 이 자리에 나타난단 말인가?

“안 돼…….”

커트리안의 입에서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병사들은 로크리안을 알아보았다. 몇 년간이나 동맹의 땅을 누볐던 연합의 수장이다. 당시의 전투에 참여했던 자라면 로크리안을 모를 수가 없었다.

로크리안은 동맹군 진영 한복판을 걸었다. 터덜터덜, 한 발자국씩 아도니아성을 향해 나아갔다.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터 주고 있었다.

로크리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한때 멋졌을 갑옷은 온통 찢기고 갈라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왼팔은 제멋대로 덜렁거렸다. 그 팔을 고정시켜 놓았던 천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은 먼지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이마 위에서부터 오른뺨까지 길게 베어진 상처 위에는 두꺼운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맨살이 드러난 옆구리에는 굵은 실로 꿰맨 자국이 선명했다.

로크리안은 그렇게 천천히 걸어 십만 대군을 마주 보고 섰다. 그의 무장은 오른손에 쥐어진 짧은 글라디우스가 전부였다.

로크리안은 몇몇 곳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통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살기였다. 몇 명의 남자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토록 강렬한 살기를 풍길 사람들이라면 뻔했다. 굳이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북국의 대통합을 위해 제물이 되었던 자들, 자신의 손으로 마계의 문에 던져졌던 희생양들이다. 그랬건만 결국 아도니아의 심장을 겨눈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들에게만큼은 속죄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없어지진 않는다. 악인은 끝까지 악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도니아의 목민관이었던 자로서, 아도니아에게 마지막 기회는 줘야 했다.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일을 통해서!

커트리안을 비롯한 생환자들이 하나둘, 로크리안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풍기는 살기만으로도 주변이 얼어붙을 듯했다.

“로크리안!”

적의를 가득 담은 샤마노프의 목소리가 아도니아 성문 앞 너른 벌판에 메아리쳤다.

“쥬시아누스는?”

“뮤트는 어떻게 되었지?”

샤마노프의 외침에 이어 쥬시아누스와 함께 내려왔었던 크리들과 하이오지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헤르모스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답을 하는 로크리안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로크리안의 말에 생환자들이 발광을 했다. 스마르가 로크리안에게 달려들려는 예니에프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커트리안이 손을 들어 생환자들을 막아선 후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참회하러 왔는가?”

로크리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사답지 못한 말을 하는군. 아도니아를 지키러 왔을 뿐이다.”

그 말에 커트리안은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광기를 담은 눈으로 로크리안을 노려보았다.

“크크크, 그런 식으로 죽고 싶은가? 전사답게? 당당히 싸우다?”

로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원대로 해 주지.”

씹어 뱉듯 말을 끊고 아도니아 성을 향해 외쳤다.

“보이는가! 그대들의 자랑, 그대들의 목민관, 로크리안이다! 그가 어떻게 죽는지 똑똑히 지켜보라! 그리고 처절하게 저항하라! 벌레처럼 버둥거리고 발악해라! 절대, 항복 따위는 받아 주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 로크리안을 향했다.

“자,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만족하는가? 그 처참한 결과를 지켜보게 해 주겠다.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전사답게 당당히 맞서라! 비굴하게 엎드리지 마라! 절대 속죄하지 마라! 스마르!”

스마르답지 않게 정제되지 않은 살기를 그대로 노출했다.

“왼 손목! 한 마디다. 한 마디가 네 몫이다. 나머지는 형제에게 넘겨라!”

커트리안의 말에도 로크리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로크리안은 쥬시아누스와의 싸움 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걸어서 마하리 산맥을 넘었다. 아도니아에게 마지막 의지를 전하기 위해!

사실 로크리안은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글라디우스를 움켜쥐고 굳건히 대지를 디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세우고, 당당한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래, 그래야지. 쥬시에게 안식을 준 자답게, 마지막까지 당당하라!”

커트리안의 말이 떨어지자 스마르의 검이 뿜어졌다.

로크리안의 글라디우스가 미처 들리기도 전에 스마르의 검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덜렁거리던 로크리안의 왼 손목이 떨어내 내렸고, 동시에 그 단면으로부터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동맹의 병사들도,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연합의 병사들도 말을 잃었다. 인적 없는 겨울 들판처럼 적막이 감돌았다.

“예니에프!”

스마르가 물러나고 예니에프가 앞으로 나섰다.

“아아악!”

예니에프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쥬시아누스는 롤과 함께 가장 오랜 시간 예니에프와 함께했던 동료였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목이라도 베어 내고 싶었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예니에프는 오오라도 끌어올리지 않고, 가장 고통스럽게 로크리안의 왼쪽 팔뚝을 잘라냈다. 잘려진 팔꿈치에서 또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로크리안의 신형이 살짝 흔들렸지만 굳건하게 버티고 섰다.

“브리오티스!”

브리오티스는 웃음이 많은 자다. 생환자들 중 정신적으로는 가장 안정된 자가 브리오티스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야차와 같았다. 누구보다도 냉막하게 굳어 있었다.

로크리안이 글라디우스를 고쳐 쥐었다. 하지만 브리오티스의 글라디우스가 회수된 이후에야 헛되이 허공을 휘돌았다. 덜렁이던 왼쪽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폴!”

폴은 가면 뒤에 숨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브리오티스만큼이나 성격이 좋은 폴이지만 지금은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도무지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커트리안이 조금만 늦게 호명을 했더라면 아마 발광이라도 했을 것이다. 자해라도 했을 것이다.

가면 틈 사이로, 붉어진 폴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리고 로크리안의 왼쪽 발목이 날아갔다. 잠깐 휘청이던 로크리안이 떨어져 나간 다리 대신 글라디우스를 대지에 박아 넣고 섰다.

“크리들!”

크리들이 마치 샤마노프처럼 킬킬거렸다. 한쪽 입꼬리만 잔뜩 비틀려 올라갔다.

카아앙!

크리들은 로크리안을 향해 마물의 목소리로 포효를 내질렀다.

동시에 그의 갑옷을 뚫고 수십 개의 가는 촉수들이 뻗어 나와 로크리안을 위협하고는 자취를 감췄다. 그 끔찍한 모습에 로크리안은 눈을 감았다. 역시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 순간 로크리안의 왼쪽 무릎이 떨어져 나갔다.

“벤트!”

벤트는 앞으로 나서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난 그대가 비겁한 자임을 안다. 그대는 절대 헤르모스의 곁으로 갈 수 없을 거다.”

그 말에 로크리안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스스로도 안다. 적어도 두 번은 비겁했다. 정치적 음모를 위해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두 번째 비겁함이다.

그리고 첫 번째 비겁함은 헤트르 폰티나에게 행했던 일이다. 삼십 년이 훌쩍 넘어간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연합이 처음으로 판티노까지 밀렸던 그때, 자신은 아드리안을 설득해 헤트르 폰티나에게 기사전을 청하게 했다. 아도니아의 안위를 핑계 댔지만 사실은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함정을 파고, 다섯이나 동원해 협공을 펼쳤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몸을 망가뜨리고, 검투장에 세워 그의 명예를 짓밟았다. 그 일로 아드리안과 틀어졌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 간극이 커져 결국엔 남과 다름없이 되었다.

로크리안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던 벤트가 비릿한 조소와 함께 검을 날렸다.

왼쪽 허벅지가 통째로 절단됐다. 로크리안의 글라디우스가 대지로 더 깊이 박혀들어 갔다.

“하이오지!”

평소 건들거리던 하이오지도 오늘만은 눈빛이 달랐다. 볼 근육이 도드라지도록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나 남은 오른쪽 발목이 끊어졌다. 아무리 의지가 굳어도 지탱할 기관이 없으면 나뒹굴 수밖에 없다. 로크리안의 신형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비스듬히 넘어갔던 로크리안이 오른쪽 무릎으로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벤트의 조소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들에게는 또 한 번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또 한 번 이들을 이용해, 아도니아의 의지를 일깨우려 하고 있지 않은가? 당당하게 이 자리에 와서 섰지만 정녕 당당한가?

“아메조프!”

아메조프는 호명되는 순간 이미 로크리안을 스쳐 지나갔다. 로크리안의 오른쪽 무릎 위가 끊어져 나갔다. 로크리안은 흙바닥 위에, 자신이 흘려놓은 피 웅덩이 위에, 볼품없이 처박혔다.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기어이 일어나 엉덩이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도니아에서 보이도록 글라디우스를 치켜 올렸다. 비겁한 자는 끝까지 비겁해야 한다. 비겁할 자신도 없다면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한다.

“헤리엇!”

헤리엇은 로크리안을 지나쳐 아도니아를 향해 섰다.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다음은 그곳에 있는 너희들이다. 기대하라!”

헤리엇답지 않게 광포한 살기를 내보였다.

마지막 남은 오른쪽 허벅지가 사라졌다. 피를 너무 쏟아낸 탓인지 이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은 물론 눈 속까지 범벅이 된 흙과 피가 몽롱해진 로크리안의 눈빛을 가려 주었다.

“샤마노프!”

샤마노프는 킬킬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로크리안에게 빼앗을 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샤마노프는 그중 하나를 택했다. 샤마노프는 단창 대신 촉수를 뻗었다. 질긴 마물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가 날아가다가 로크리안의 눈앞에서 멎었다. 촉수 한 가닥이 질긴 마물의 가죽을 뚫고 튀어나와 로크리안의 왼쪽 눈을 꿰뚫었다.

“킬킬, 이 촉수가 바로 당신이 내게 준 선물이지.”

촉수가 왼쪽 안구를 거머쥐고 빠져나왔다. 그 눈알은 비위가 약했던 청년, 샤마노프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 으적 하고 씹혔다. 그 소름 끼치는 장면에 연합은 물론 동맹의 병사들까지 공포에 질렸다.

커트리안이 다시 나섰다.

“수없이 많은 형제들이 죽어 갔다. 그대의 목숨 하나로 갚을 수 없다. 눈 하나는 남겨 두겠다. 죽어서라도 그대가 지켜 내려 했던 것들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 지켜보아라!”

하나 남은 로크리안의 눈빛이 어둠에 젖어 갔다.

“이건, 노리앙의 몫이다.”

사지 중 유일하게 남은 오른쪽 손목이 잘렸다. 동시에 전사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이건, 뮤트의 몫이다.”

팔꿈치가 끊어졌다.

“이건 차츠라의 몫이다.”

오른쪽 어깨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로크리안은 흩어져가는 마나에 의지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흘흘, 나에게… 속죄를 바라지 마라. 모두 안고 가… 가겠다.”

커트리안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암, 그래야지! 속죄를 하고 싶어도 그대 하나로는 속죄가 되지 않아. 자, 너의 목은 쥬시아누스의 몫이다.”

커트리안은 검을 내던지고 로크리안의 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뜯어내며 말했다.

“또한 내 형제, 롤의 몫이고, 클리브의 몫이고, 제스와 퓨트의 몫이며 질로의 몫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땅에서 헤매고 있을 수많은 형제들의 몫이다. 지옥에 떨어지거라!”

로크리안의 목이 산 채로 뜯겨 나갔다. 커트리안은 마침내 끊어진 로크리안의 목을 아도니아를 향해 치켜들고 광소를 토해 놓았다.

성벽 위에 올라 있던 아도니아 병사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통곡이 터져 나왔다. 로크리안은 그들의 지도자였고, 존경받는 전사였다. 북부 최강의 기사였으며, 아도니아의 자부심이었다. 그런 자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처참히 살해당했다. 아도니아인들은 피눈물을 뿌렸다. 그리고 악에 받쳐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로크리안이 의도했고, 커트리안이 보란 듯이 허용한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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