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36화 (136/142)

136. 아, 쥬시아누스

커트리안이 총력전을 감행하고 있던 시기, 로크리안과 쥬시아누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다시 한 달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나의 타깃에만 집중한 로크리안의 추격은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했다. 사례시온은 물론 데이브에서도, 다시 바이오란테 시와 킨페 시 인근을 넘어 오르소 시까지 이어졌다. 지루하고도 끈질긴 숨바꼭질이었다.

추격을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은 끊임없이 북부 폴리스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치고 성한 곳이 없었다. 곧 가을걷이를 해야 할 들판이 뭉개졌고, 곡식창고가 불탔다. 방목 중이던 소떼가 흩어졌고, 마을이 송두리째 파괴됐다.

겉으로 보는 모습은 로크리안군이 뒷북만 치고 있는 꼴이었지만, 실상 쥬시아누스군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습격을 해도 보급품을 챙기기는커녕 충분한 타격을 가하지도 못하고 빠져야 했고, 모든 길목에서 각기 다른 폴리스들의 매복병을 만나야 했다. 뒤에는 로크리안의 직할군단이 징그러울 정도로 따라붙었고, 앞에서는 연합의 군단들이 요충지를 선점한 채 길을 가로막았다.

적은 모든 레인저들을 총동원해 작전을 짜는 데 반해 쥬시아누스군은 그야말로 까막눈이나 다름없었기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기동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쫓기게 되자 말도 지치고, 사람도 지쳐 갔다. 주의력이 흩어지자 격전 중 사망하거나 부상으로 낙오하는 병력이 속출했다.

크로아지크 2군단이 아무리 강군이라고 해도 고립된 상태에서 반년을 싸웠다. 이제는 병기는 물론 식량의 보급마저 원활하지 못했다.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르자 하루가 다르게 기마대의 사기가 떨어졌다. 결국 한 달 사이에 또다시 절반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남은 병력은 불과 칠백여 명,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이제 기마대의 모습은 마적 떼와 다를 바 없이 되었다. 대충 빼앗아 입은 갑옷에는 통일성도 없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무장 상태도 최악에 이르렀다. 크로아지크 2군단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던 장병기들은 절반이 소실됐고, 남은 필라도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다 보니 약탈과 파괴는 몰라도 교전은 무리였다. 이제는 로크리안의 직할군단이 아니라 보통의 군단이라도 전투를 삼가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최근 커트리안으로부터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지막 진공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임무가 완수되었다는 사인을 받자마자 쥬시아누스군은 남하를 시작했다. 하지만 남하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가는 곳마다 다시 매복에 걸리고, 길목이 막혔다.

그런 와중에 찾아든 곳이 트렌티니 인근 마하리 산맥 지류였다.

집요하게 꼬리를 물어왔던 로크리안의 추격군은 이틀째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쥬시아누스는 적어도 하루 이상의 거리는 벌려 놓았다고 안심했다. 쥬시아누스는 마하리 산맥 지류인 산토리아나 산 북사면 아래 좁고 기다란 계곡에 은밀히 야영지를 세우고 휴식을 명했다. 아무리 기마군단이라 하더라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이상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사방이 훤히 터진 곳에서 밤을 지내다가 적이 어둠을 틈타 기습을 해오면 치명적인 손실을 당할 수 있었다.

계곡의 입지는 매우 훌륭했다. 계곡 입구에선 트렌티니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고, 좌우로는 험난한 마하리 산맥이 가로막혀 있었으며, 계곡 뒤쪽으로는 다시 들판으로 돌아나갈 수 있는 협로가 존재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해도 몸을 피할 수 있는 퇴로까지 확보된 안전한 지형이었다. 물론 사방 능선 위로 감시병을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곳에서 하루 밤을 쉰 후 비바지오 호수를 돌아 남하할 예정이었다.

그 시간 커트리안의 지시를 받은 조노량은 배터링 평야로 접어들고 있었다. 쥬시아누스의 안전한 회군을 도우라는 커트리안의 지시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노량은 기마군단과 길이 엇갈렸다. 기마군단의 흔적을 쫓아 배터링 평야에 들어섰을 때,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은 사례시온 인근을 거쳐 남쪽으로 쭉 돌아 나간 후였다.

어쩔 수 없이 조노량은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그 시간 쥬시아누스는 계곡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둘은 그렇게 백오십 킬로미터를 격하고 있었다.

☆ ☆ ☆

적의 움직임을 보고 받은 로크리안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개월간 공을 들인 작전이 성공했음에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로크리안은 한때 아도니아의 제1목민관으로서 폴리스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전사로서의 자부심도 뒷전으로 미루고, 부끄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 모든 희생의 무게는 일개인의 욕심 앞에 무너졌다.

누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는지도 알았고, 그 손발이 누군지도 안다. 믿었던 동지와 친우, 그리고 오랜 후견인들…

아드리안이 왜 크로아지크에 처박혔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자신보다 먼저 더러운 꼴을 겪었고, 상처 입었다. 그리고 부질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적이 훨씬 깨끗하다. 피온 치프만처럼 말이다. 면전에서는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고, 전공을 치하하던 자가 뒤로는 친인들을 협박하고 현실적 이익을 흔들며 더러운 배신을 기획했다.

하드리아누스 트라쿠스! 오랜 후원자인 아그리파 트라쿠스의 아들이자 보수파의 수장이다. 한때 함께 수학했던 어린 동문이자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런 자가 자신의 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등에 칼을 꽂게 만들었다.

자신만의 개인적 문제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아도니아를 위한, 북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다면 그 또한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보라, 그 더러운 음모의 결과가 무엇인가? 북국을 분열로 몰아간 켈커티스를 지우기는커녕 아도니아의 안녕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지 않은가?

만일 사 년 전 오누리스만에서의 작전만 성공했더라면 지금쯤 소모적인 동서대립을 끝내고 풍요로운 중부 대륙으로 눈을 돌렸을 터였다.

비겁한 자는 아직까지 라쿠스 시에서 벌어진 음모를 자신이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바라흐하에게 뒤집어씌우고, 치프만에게 뒤집어씌웠다. 차라리 치프만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치프만의 혐의를 흘리는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십 년 이상 정치를 해 왔던 자신이다. 그 정도 트릭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수룩했다면 제1목민관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소모적인 전쟁을 끝낼 대계를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트라쿠스여, 그대 하나의 명예와 영달을 위해 벌인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 죄업을 어찌 씻으려 하는가?

이제 그대가 원한 대로 북부통일의 주역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승리자로서가 아니라 망국의 목민관으로서 말이다.

로크리안은 무거운 표정으로 들판 너머를 바라보았다. 쥬시아누스 더드리안이 웅크리고 있는 계곡이 어둠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 불쌍한 친구를 잡는다고 대세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아도니아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기에 나섰을 뿐이다. 어쩌면 저 계곡에 뼈를 묻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 해도 후회는 없다. 대의를 위해 희생시켰던 자들에 대한 속죄가 될 테니 말이다.

“크크크.”

로크리안은 조소했다. 누가 누구를 어리석다 비웃는 건인가?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트라쿠스를 비웃는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발단은 결국 자신의 손에서 시작된 일이 아닌가. 대의를 핑계 삼아 저들을 희생시켰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제 자신의 손으로 또 한 번 저들을 죽여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아, 로크리안이여, 어리석은 자여!

로크리안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 모든 죄업을 무엇으로 속죄할까.

☆ ☆ ☆

쥬시아누스군은 오랜만에 불을 피워 양질의 식사를 지시했다. 오늘만 넘기면 지긋지긋한 추격대를 따돌리고 본진으로 향할 것이다.

노쇠한 말을 잡고, 얼마 남지 않은 밀로 뜨끈한 빵을 구워 냈다. 술이라도 한 잔씩 돌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긴장을 늦출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뮤트가 몰래 술이 담긴 수통을 꺼내 들었다. 군단병들이야 금주를 지시했지만 뮤트에게까지 공정함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뮤트는 생환자들 중 가장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친구다. 전투만 벌어지면 살기를 주체하지 못해 매번 뜯어말려야 했다.

쥬시아누스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수통을 홀짝이는 뮤트를 바라보았다. 한 모금 하라는 말도 없이 눈치를 본다. 딴에는 몰래 마신다고 그러는 거겠지만 민감한 코를 속일 수는 없다. 술이라도 마시고 그의 마음이 안정된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누웠지만 쥬시아누스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가까이 누운 뮤트가 끊임없이 혼잣말을 해 댔기 때문이다. 간혹 잇새로 고음의 신음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쥬시아누스는 이와 유사한 울음소리를 갖고 있는 마물을 안다. 마치 털처럼 뱀의 머리를 촘촘히 달고 다니는 고릴라, 덕분에 쥬시아누스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요란한 뿔피리 소리에 다급히 깨어나야 했다.

능선에 올라가 있던 감시병이 구르듯 언덕을 뛰어 내려왔다. 쥬시아누스는 본능적으로 계곡 입구를 살폈다. 횃불도 없이 어두운 벌판을 가득 메우고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로크리안의 추격대라는 걸 직감했다.

구르듯 능선을 달려 내려온 감시병들이 숨도 삼키지 못하고 보고했다.

“뒤쪽 협로도 적 병력에 의해 틀어막혔습니다. 군단 규모입니다.”

별도의 지시가 없었어도 사단장, 에반겔로스가 알아서 군단을 정비했다. 병사들은 무기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팽개치고 말에 올랐다.

보고대로라면 적은 최소한 두 개 군단이다. 충분히 거리를 벌려 놨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아니, 어쩌면 몰이를 당한 걸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적의 병력에 의해 여러 번 진로를 바꿔야 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쥬시아누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손으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언제부터 두통이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마계의 문에 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뒤쪽 협도는 기마 행군은 가능할지 몰라도 기마 돌격은 불가능했다. 틀어막고 버티기만 해도 답이 없었다. 결국 전방을 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병력으로는 로크리안의 직할군단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한 달 전 벌판에서 만났을 때 결판을 지어야 했을까? 아니다. 그래도 한 달이라는 시간을 벌었지 않는가. 쥬시아누스는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후회는 없었다.

계곡 입구는 단단히 틀어막혔다. 말을 버리고 능선을 올라 마하리 산맥을 타넘는 방법도 생각해 봤다. 만약 이곳이 동맹의 땅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연합의 땅이었다. 설사 마하리 산맥을 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너머는 아도니아의 뒷마당이다. 어디를 가든 연합의 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쥬시아누스는 마물들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고개를 저었다. 달아나다가 짐승처럼 사냥당할 바에는 전사답게 싸우는 길을 택했다.

뮤트는 충혈된 눈으로 움찔거리며 마물의 신음소리를 흘려 냈다. 이번 전투를 마치고도 이성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쥬시아누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쥬시아누스도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본성을 풀어 놨다.

주인의 투기를 감지한 흑색 갈리온이 덩달아 흉성을 드러냈다.

선두의 쥬시아누스를 기준으로 700여 기의 기마대가 늘어섰다. 좁은 계곡이었지만 최대한 넓게 포진하고 계곡 입구로 들어서는 로크리안의 직할 군단을 노려봤다.

여명은 차근차근 어둠을 거둬들여 서로의 얼굴을 확인시켜주었다.

로크리안의 직할군단은 좁은 계곡 입구를 틀어막고 두껍게 포진했다.

한때 북부 최강의 부대로 불리며 동맹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아도니아 3군단, 오누리스만에서의 작전에 실패하며 칠 할의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군단병들은 무적군단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되찾길 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4년이라는 세월이 주어졌다. 그 기간 동안 옛 영광을 기억하는 병사들은 절치부심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기사들은 종사들을 몰아붙였고, 고참병들은 신참병들을 끊임없이 닦달해 무적군단의 일원으로 부족하지 않은 병사들로 키워 냈다.

지금 그들이 마주보고 있는 적은 압도적인 기동력을 보유했다. 그런 적을 석 달이 넘도록 추격하면서도 낙오한 자는 삼백이 넘지 않았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신병들조차 이를 악물고 행군을 이어 갔다. 발바닥의 굳은살은 수십 번도 넘게 벗겨졌고, 마비되었던 허벅지엔 칼자국이 선명하다. 그 결과 기어이 적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지난 삼 개월의 추격전을 통해 적의 강대함은 충분히 겪어 보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패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저 강대한 적을 꺾고 무적군단의 영광을 재현할 시간이 되었다. 군단병들은 마르고 그을린 얼굴에 눈빛만 하얗게 번뜩거렸다.

병사들은 그들의 자부심이자 북부 최강의 사나이, 로크리안 군단장을 응시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궁지에 몰린 쥐새끼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로크리안의 표정이 풀렸다. 오래 번민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이 될지 아닐지 모를 작전이지만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전신 헤르모스여, 부끄러움 없이 싸우다 가오니 전사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로크리안의 외침에 군단병들이 형형히 눈빛을 빛내며 따라 외쳤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로크리안은 적 진영에서도 동일한 외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랬다. 지금부터 벌어질 싸움은 진짜 전사들 간의 싸움이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그치지 않을 싸움이 될 것이다.

“돌격!”

드디어 개전을 알리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양쪽 진영 모두 두려움 없이 적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선두에 서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을 조망하고 군단 전체를 조율해야 한다. 하지만 쥬시아누스만은 예외였다. 그는 늘 선봉에 서왔다. 과거 ‘흑색 갈리온의 더드리안’이라 불릴 때도 그랬고, 마계의 문에서도 그랬다. 그 어떤 강대한 적을 만나도 뒤로 물러나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이 강력한 기마군단을 이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군단장이면서 선봉이었다.

쥬시아누스는 선두에서 칠백 기마병들을 이끌고 사천이 넘는 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지쳤고, 무장도 변변치 못했다. 반면 적은 많고도 강대했다. 그리고 적의 수장은 북부 최강의 전사라 불리는 로크리안이다.

적의 병력을 확인했을 때 함정에 빠졌음을 알았고, 계곡이 틀어막혔을 때 돌파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마지막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눌러 왔던 살기를 개방했다. 생환자들이 모두 그렇듯 쥬시아누스 역시도 스스로에 대한 통제에 애를 먹었다. 억지로 누르고, 삭이며, 참아 왔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꼈다. 통제를 풀고 마음껏 싸우다 롤이 있는 그곳으로 가 자유를 누릴 것이다.

너무 오래 참아 왔다. 통제를 풀자마자 억눌러 왔던 살기가 폭사되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며 이성을 앗아갔다.

좁은 협곡이 피의 광기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에선 하얀색 거검이 빛을 뿌렸고, 그의 왼손에선 거대한 도리깨가 춤을 췄다.

“크어헝!”

쥬시아누스의 입에서 마물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뒤를 따르던 기마군단병들은 처음으로 광기에 물든 쥬시아누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 포효에 담긴 기세를 느꼈고, 그 의지를 느꼈고, 광기를 느꼈다. 군단장의 광기는 곧바로 군단병들에게 전파되었다. 이성이 마비되고 너덜너덜해졌던 근육이 광기로 채워졌다. 어차피 죽어야 할 자리라면 전사의 자부심과 긍지를 간직한 채 당당히 맞서 싸우다 가리라! 진정한 무적군단의 이름으로!

로크리안은 쥬시아누스와 달리 후미에서 전장을 관조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랑스런 군단병들은 군단의 상징, 붉은 사자 깃발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었다.

적의 말을 베고 목숨을 버렸다. 자신의 가슴에 꽂힌 검을 부여잡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기마군단의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난 몇 달간 접전이 있었지만 달아나는 적의 꼬리를 잘라먹었을 뿐이다. 실상 정면에서 돌격해 오는 기마군단을 맞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칠백에 불과한 숫자였지만 그 위용은 로크리안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기마군단이 저토록 강력할 수 있음을 오늘 처음 알았다.

전장은 좁은 협곡이다. 자연히 종심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적은 자신의 군단을 반이나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파고들고 있었다. 용감한 군단병들이 더러운 말굽에 짓밟히고, 부러진 파이크를 가슴으로 부여잡고 넘어갔다. 기마가 부닥쳐 올 때마다 서너 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튕겨져 나갔다. 첫 격돌에서 선두를 담당한 1사단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강성한 연합의 군단들이 이 기마군단 하나에 번번이 격파당하고 괴멸 당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투는 살육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쪽 모두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서로의 목숨만 노렸다. 병사들은 자부심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계곡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흘러내린 피로 대지가 진창으로 변해 갔다.

로크리안은 침울한 안색으로 전장을 지켜봤다. 무적군단의 전설은 이걸로 막을 내릴 것임을 예감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전황에 대한 마지막 보고를 받았다. 그 보고를 통해 전쟁의 판도가 기울었음을 알았다.

이제 이 싸움은 명예를 위한 싸움일 뿐, 전쟁의 판도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었다.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기울어진 저울추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죽는 것도 좋겠으나 기필코 승리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에게 자부심은 남겨 줘야 한다. 그리고 속죄할 것이다.

로크리안은 방패를 놓았다. 그리고 지휘관이라는 짐마저 내려놓고 천천히 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은 두 계절이 넘도록 마하리 산맥 북부를 공포로 물들였다.

말 등에서 먹고 잔 나날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약한 자들은 쓰러졌고, 강한 자들은 살아남았다. 애초에 북부 최고의 기마술을 가졌던 엘리티아 평야 출신병들이다.

등자는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두 계절 동안 말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렇게 정예화된 크로아지크 2군단병들은 쥬시아누스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병사들의 기세를 보니, 이런 좁은 협곡만 아니었다면 로크리안의 무적군단조차 뚫어 냈을 것 같다.

자랑스런 아도니아 3군단 고참 기사인 조안은 잘려 나간 팔뚝의 통증보다 분통을 참아 내기가 더 힘들었다. 병사 따위에게 일검을 허용해 방패를 들었던 왼팔이 잘려 나갔다. 그 병사를 베고 그의 말마저 베었지만 분통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기마병이 휘두른 장창이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의식이 끊겼다.

하지만 로크리안의 직할군단도 보통의 군단이 아니었다. 무적군단의 고참병들은 기사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창을 부여잡고 그 기마병을 말에서 끌어 내렸다. 말에서 떨어진 기마병의 목으로 묵직한 방패가 세로로 떨어져 내렸다. 두 번, 세 번, 기마병은 방패에 의해 목이 끊겼다.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서 전투를 벌이는 아도니아 3군단병의 머리 위로 도끼창이 떨어져 내렸다. 그 흉흉한 속도에 병사들은 막아 낼 엄두도 못 내고 두 쪽이 났다. 그 기마병의 몸통을 향해 파이크가 날아들었다. 기마병은 놀라운 기마술로 파이크를 피해 내며 파이크를 날린 자에게 거꾸로 도끼창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그는 말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글라디우스를 눈치채지 못했다. 글라디우스는 기마병의 다리를 절단하고도 모자라 말의 옆구리 깊숙이 박혀들어 갔다. 그 병사도 무사하진 못했다. 말의 옆구리에 박힌 검 탓에 뒤쪽에서 휘둘러지는 전투 도끼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것이 그 병사가 쓰러진 이유였다.

물고 물리는 살육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명이 트기도 전에 시작된 전투는 능선 위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기마대 한가운데로 파고든 로크리안에 의해 기마대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광기를 토해 놓고 있던 뮤트가 로크리안을 발견했다. 워낙에 요란하게 무너지고 있었기에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로크리안의 글라디우스에는 그 몸통의 길이만큼 뻗어 나온 오오라가 푸른색 섬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 섬광에 걸린 장애물들은 말이고, 방패고 가리지 않고 단숨에 베어졌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통로가 열렸다. 그 통로 위로 무기의 파편과 사람의 신체가 끊임없이 튀어올랐다.

뮤트는 흉소를 토해 내며 몸을 날렸다.

로크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위로 덮쳐드는 살기를 향해 검을 뻗었다. 푸른 오오라가 물결치며 뮤트의 브로드소드를 맞아 갔다.

카앙!

두 개의 검이 충돌하며 날카로운 검명을 토해 놓았다.

로크리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뮤트를 응시했다. 뮤트는 이름 있는 기사가 아니었다. 아니 기사도 아니었다. 그저 일개 병사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로크리안은 뮤트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뿌려 대는 살기와 기세만으로도 그가 생환자들 중 하나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이성을 잃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뮤트는 로크리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뮤트는 로크리안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자, 잊었던 두려움을 떠올렸다.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거인들과 데스나이트, 끔찍한 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을 잃어버렸다.

뮤트는 다시 마계의 문을 헤매고 있었다. 홀로 떨어져 검은 숲에 내팽개쳐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트리안? 노리앙? 쥬시아누스? 뮤트는 왜 지신만 홀로 이곳에 버려져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뮤트는 절규했다. 동료들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갑자기 풍경이 바뀌며 숲이 온통 마물들도 가득 찼다. 그중 하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뮤트는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데스나이트를 공격했다.

로크리안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광기에 잠식당했음을 눈치챘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기세였다. 북부 최강의 전사라는 자신조차 움찔할 정도로 흉흉했다.

그의 모습에서 로크리안은 아도니아의 암담한 미래를 떠올렸다. 이들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위험한 짐승이 되어 돌아왔다.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로크리안은 천천히 글라디우스를 들어 올렸다. 매우 느린 듯 보였으나 뮤트는 본능적으로 얼어붙었다. 광기에 잠식당했음에도 로크리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받자 다시 한 번 공포에 질렸다.

로크리안의 글라디우스가 뮤트의 머리 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뮤트는 본능적으로 브로드소드를 들어 올렸다. 오오라를 머금을수록 단단해지는 골곤의 뼈는 로크리안의 밀도 높은 오오라에도 베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로크리안의 검은 아드리안조차 혀를 내두르던 중검(重劍)이었다.

막긴 막았으나 막지 못한 것과 같았다. 뮤트가 들어 올린 브로드소드가 로크리안의 글라디우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아래로 떨어지며 자신의 이마를 갈랐다. 자신의 검에 베어지고 글라디우스에 다시 한 번 베어졌다. 뮤트의 머리가 십자 모양으로 쪼개졌다.

“크허헝!”

뒤늦게 달려오던 쥬시아누스가 그 모습을 보았다. 쥬시아누스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했으나 그의 집착도 다른 생환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로크리안의 짧은 글라디우스가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 쥬시아누스의 도리깨가 호곡성을 토하며 로크리안에게 덮쳐들었다.

로크리안은 북부 최강이라 일컬어지던 전사다. 다양한 무기를 상대해 왔고, 파훼법도 알고 있었다. 도리깨는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는 농기구다. 하지만 도리깨가 가지고 있는 관절은 무기로서도 괴이하고 악랄한 위력을 발휘한다. 첫 번째 마디를 막든, 두 번째 마디를 막든 나머지 부위가 끝까지 대상을 노리는 기형의 무기였다.

로크리안의 신형이 쭉 늘어나듯 쥬시아누스에게 다가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절이 닿지 않을 만큼 가까운 부위에 글라디우스를 가져다 댔다.

쾅! 드르륵!

로크리안이 막아 낸 부위는 도리깨의 손잡이 부근, 충분한 힘을 실을 수 없는 부위다. 그런데도 로크리안은 손목까지 짜르르 울리는 느낌에 급히 몸을 틀어 자리에서 비껴났다.

덩치에 비해 키가 작은 로크리안이지만 힘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져 본 적이 없었다. 검의 천재라는 아드리안조차도 로크리안의 힘을 인정했다. 로크리안이 발하는 힘은 육체적인 힘이 아니다. 검에 오오라를 싣듯 몸 자체에 마나를 돌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검은 육체적인 힘만 추구하는 이들과는 차이를 보였다. 그 어떤 육체적인 힘도 마나를 이용한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그의 중검이 쥬시아누스의 도리깨에 밀렸다. 급박한 와중이라 충분히 힘을 싣지 못했다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크리안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쥬시아누스에게는 도리깨 외에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골곤의 뼈로 만든 육중한 투핸드소드가 로크리안의 옆구리를 가르고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강하게 글라디우스를 떨쳐 냈다.

터엉!

쇠와 쇠가 맞부딪쳤다고 느끼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로크리안은 다시 한 번 침음을 흘렸다. 이번엔 충분한 힘을 실었음에도 쥬시아누스의 힘을 압도하지 못했다. 압도하기는커녕 조금 밀린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전사로서의 피가 끓었다. 처지를 잊고 흥이 동했다.

둘은 거침없이 자리를 바꿔 가며 검을 주고받았다.

본격적으로 로크리안이 부닥쳐 오자 쥬시아누스도 도리깨를 팽개치고 거검에 온 힘을 집중했다. 생환자들 중 힘에서는 쥬시아누스가 으뜸이다. 그럼에도 둘의 힘은 대등했다.

둘의 공방은 회를 거듭할수록 눈부시게 빨라졌다. 막 격돌했다 싶은 순간 두 번째 격돌이 이어졌고 세 번째 검이 날았다. 누가 더 빨리 검을 날리는지,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내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파워를 주고받았다.

그 흉험한 기세에 둘의 곁으로는 아무도 접근해 오지 못했다. 그렇게 강력한 것처럼 보였던 기마기사들도, 또한 아도니아의 촉망받는 최상급 기사들도 감히 다가들지 못했다.

둘은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그 와중에도 기마대의 숫자가 줄어들고, 로크리안의 직할군단병들이 차례로 쓰러져 갔다. 하지만 둘에겐 전황도, 주변의 변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세계에 오직 둘만이 존재한다는 듯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그렇게 둘의 싸움은 반 시간을 넘도록 이어졌다.

그 둘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양군의 전투는 천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기마대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나 이미 지치고 부상당한 상태였다. 장병기도 대부분 꺾여 나가 단병기를 든 기마가 대부분이었다.

밀집방진 위주의 전투를 치를 때의 단병기가 유리하다. 하지만 기마상태의 병기는 다르다. 전투양상에 따라 병기의 길이도 조절되어야 한다. 기마대는 몸에 맞지 않는 병기와 제약된 공간에 허덕였다. 그런 상태로 장시간 전투가 지속되자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이렇게 불리한 지형에서 의도치 않은 전투에 내몰렸을 때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882년 봄, 4,500 기마병이 크로아지크에서 출정했다. 그리고 적지에서 두 계절을 싸우다 가을의 문턱에서 마지막 병사가 쓰러졌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했던 말은 간데없고, 탈진한 팔은 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병사는 그의 심장을 향해 쇄도해 오는 적의 글라디우스를 바라보면서도 거친 숨결만 토해 놓았다.

그는 전사의 길을 걸었다. 부끄러움 없이 싸웠다. 그의 눈에 고향, 엘리티아 평야의 풍요로운 들판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병사의 눈이 아련히 젖어들었다.

여한은 없다! 병사는 마지막 자존심을 다해 버티고 섰다. 볼품없이 튕겨져 나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 글라디우스 앞에 당당히 가슴을 내밀었다.

병사는 전사답게 선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혼이 빠져나간 후에야 차가운 대지에 몸을 뉘였다.

그렇게 마지막 병사가 쓰러져 가는 순간에도 로크리안과 쥬시아누스의 격돌은 그치지 않았다. 수십 번의 검격이 오갔고,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받았다.

로크리안은 왼쪽 쇠골이 끊겨 팔이 덜렁거렸고, 옆구리에선 내장 조각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안면을 가로지른 검흔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들어가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글라디우스에 어린 오오라 만큼은 아직까지 기세를 다하지 않았다.

쥬시아누스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언제 날아갔는지 오른팔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격전 중 목숨과 바꾼 팔이었다. 잘린 단면을 타고 쏟아져 내리던 피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오오라에 베어져 길게 갈라진 가슴은 끔찍하게 뒤집혀 있었고, 그 틈으로 하얀 갈비뼈가 드러나 보였다.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심장을 비껴 뚫린 관통상이다.

불가사의한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쓰러졌어야 마땅할 상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를 맞이했다.

쥬시아누스의 거검에 어렸던 오오라가 마지막 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점멸하며 곧이라도 끊어질 듯 헐떡였다.

아드리안과 함께 북부 최강의 전사라 불린 로크리안이다. 그의 경지는 실로 가볍지 않았다.

몸집만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두 배는 됨 직한 쥬시아누스를 맞이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웠다. 그리고 차근차근 승기를 거머쥐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쥬시아누스를 맞이해 믿기지 않는 투지와 무위를 보여 주었다. 스스로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두려움 없이 검을 마주 뻗었다.

쥬시아누스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작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죽음이 임박하자 원한도, 복수심도 희미해졌다. 눈가에 어렸던 살기가 가시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쥬시아누스는 자신의 가슴에도 미치지 않는 이 작은 사내에게서 거인을 보았다. 어째서 이 작은 사내가 희대의 천재라는 아드리안과 비견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사로서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 안식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자다. 쥬시아누스의 검에 어린 오오라가 마지막 점멸을 마치고 사그라지며 피에 젖은 하얀색 몸체를 드러냈다.

로크리안은 이 사내를 안다. 과거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선고해 마계의 땅으로 추방했던 사내, 그리고 북부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기마군단의 전설을 남긴 사내, 이제 그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할 것이다.

전사라는 이름을 간직한 채 당당히 헤르모스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로크리안의 검이 쥬시아누스의 심장을 뚫고 들어갔다.

계곡 가득 아련한 장소성이 울려 퍼졌다.

처절했던 전투는 아도니아 3군단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다. 한 줌도 안 되는 생존자들조차 피웅덩이에 주저앉았다. 무적군단이라는 이름은 지켰으나 더 이상 군단이라 불릴 병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을 모두 합해봐야 세 개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무적군단의 전설은 막을 내렸다.

로크리안은 옆구리에 비어져 나온 내장을 밀어 넣고 더러운 실과 바늘로 꿰맸다. 왼쪽 쇠골은 이미 가루가 되었다. 회복을 한다 해도 왼팔을 사용하기는 글렀다. 거친 천을 이용해 가슴에 단단히 고정했다. 죽은 자의 속옷을 찢어 얼굴을 닦고, 글라디우스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남은 군단병들도 따라 일어났다. 처참하게 찢기고 부러진 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로크리안이 군단병들 앞에 섰다.

“자랑스러운 동지들, 나의 형제여!”

운을 띄우고도 로크리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담담히 아도니아의 종말을 선언했다.

“오늘의 슬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슬픔을 만들지 말자. 아도니아는 승리할 수 없다. 그대들이, 헛되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명한다. 아도니아로 돌아가지 말라. 조용한 곳을 찾아라. 밭을 일구고 화전을 개간해라.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기를 부탁한다.”

늙은 군단병 하나가 물었다.

“찾아오실 겁니까?”

로크리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늙은 군단병을 바라보았다. 십 년을 넘게 함께 전장을 누볐던 고참병이다.

“내 자리를 만들어 둔다면, 꼭 찾아가겠다.”

허튼 약속임을 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죽음에 이들을 끌어들이기는 싫다. 로크리안은 늙은 군단병에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나탈리나 산맥, 게헤나 산 인근에 좋은 화전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군단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군단병들은 로크리안에게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협도를 틀어막고 봉쇄중인 트렌티니 군단의 정찰병이 보고를 위해 몸을 돌렸다.

멋 훗날, 그는 이 처절한 싸움을 기록하고, 증언했다. 그 날 탄생한 전설은 북부 대륙에 아주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갔다.

태양이 채 정상에 이르지도 못한 시간, 시신들로 메워진 음산한 계곡을 한 줄기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그 스산한 장소에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남자와 하얀 옷을 입은 노랑머리 사내였다.

노랑머리 사내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빗어 넘겼다. 그의 반대편 손에는 작고 몽실거리는 기운이 맺혀 있었다. 누군가의 영혼이었다. 사내가 손끝을 심장께로 가져가자 몽실거리던 기운이 사내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다.

“몸뚱이는 여기 있구먼그래. 참 모진 인생이야. 안 그런가, 레오?”

“글쎄요. 앞으로 예비 된 운명보다 모질까요.”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암시에 박쥐날개 사내는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뭔가 깨달은 듯 탄성을 발했다.

“아… 그대들은 이렇게 탄생한 존재였군?”

“뭐, 그런 셈이죠.”

노란머리의 사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이십 대 사내였다.

사내가 처참하게 망가진 쥬시아누스의 시체에 손을 가져다 대자 거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곧이어 허공 중에 작은 일그러짐이 발생했고, 그 작은 틈 사이로 커다란 쥬시아누스의 몸체가 부드럽게 빨려들어 갔다.

부럽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쥐날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보면 볼수록 편리한 주머니야. 하나 얻을 순 없겠지? 알았어, 알았다구.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그냥 해 본 소리네. 그나저나 난 또 앤젤나이트라고 해서 그쪽 분들이 뭔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고차원적인 키메라나, 뭐 그런 멋진 과정을 거친 줄 알았지. 이건 그냥 카피잖아, 카피. 있는 걸 그대로 가져다가 재활용하는 거 아니냐고?”

그 말에 노랑머리 사내가 인상을 구겼다.

“퓨콤뜨리아리트, 말 좀 조심하지? 죽고 싶습니까?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잖아? 주의를 당부 드리겠습니다.”

뭔가 변화무쌍한 말투에 퓨콤뜨리아리트는 찔끔했다. 권능으로만 따지면 이자는 앤젤나이트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자다. 그리고 퓨콤뜨리아리트는 이 노랑머리 남자의 이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마왕 중 하나였다. 이 남자, 훈풍의 기사 레오는 부드러운 말투와 친절한 성격을 가졌지만 동시에 엔젤나이트 중 가장 잔혹한 기사기도 했다.

“아니, 뭐 그런 뜻이 아니고… 아니라니까. 아! 그래, 이 친구는 어느 분의 권능을 받는 거지?”

버벅 거리던 퓨콤뜨리아리트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시하신 분이 루시퍼님이시니, 아무래도 그분의 권능을 나눠 받겠죠?”

“에구구, 하필 루시퍼님이라고? 앤젤나이트가 아니라 마왕의 탄생이로군. 나중에라도 이 친구 그림자만 보이면 사사삭, 잽싸게 토껴야겠군.”

퓨콤뜨리아리트는 몸까지 부르르 떨며 달아나는 시늉을 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기준이 뭐지? 왜 이 친군 거야? 뭐래도 기준이 있을 거 아닌가? 난 말이야, 평소에 그대들이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 무척 궁금했다네. 물론 이 친구를 보며 약간의 호기심을 풀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기준이라는 게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까놓고 얘기해서 이 친구보다 강한 자도 많지 않나? 그런데 왜 하필 이 친구일까?”

훈풍의 기사 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주책바가지 노마왕은 예나 지금이나 말도 많고 궁금한 점도 참 많다.

“에고랄까요? 그릇이라고 해 두죠. 자아가 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삶이니까.”

레오의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에 살짝 고단함이 스쳐 지나갔다.

신념? 의지? 사명? 믿음? 아니, 그런 걸로 견딜 수 있는 생이 아니다.

창조물의 영혼은 나약하다. 그 나약한 영혼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창조자의 권능으로 강화되고 담금질되어도 시간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영혼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상처받고 망가져 스스로를 저주하다 끝내 지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닳고 낡아 더 이상 사용할 수조차 없이 돼버린 녹슨 칼처럼, 종내에는 사라져 버릴 도구일 뿐이다. ‘혼’과 ‘백’을 나눠야 했던 그분처럼 말이다.

“이 친구는 언제쯤 활동을 시작하는 건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쪽 차원에서 활동할 가능성은 희박하니까요. 차원은 많고, 당신 같은 존재들도 많습니다. 우리도 일손이 달린다니까요.”

그날 오후 늦게야 현장에 도착한 조노량은 암담한 눈빛으로 시신들을 뒤져 나갔다. 가슴까지 십자모양으로 처참하게 쪼개진 뮤트의 시신을 수습했고, 사단장 에반겔로스의 끔찍한 시신도 수습했다. 눈에 익은 기대장도 보였고, 군단병들도 보였다. 하지만 끝내 쥬시아누스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다. 조노량은 사흘간 그 계곡에 머물렀다. 부패를 시작한 시신들에게선 시액이 흘러나왔고, 시취가 계곡을 메웠다. 그래도 쥬시아누스의 시신은 찾아낼 수 없었다.

혹 살아 있는 걸까?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다. 함께하던 자들이 모두 죽었는데, 혼자서 살아남았을 남자가 아니다.

아마도 그가 존재했다는 작은 증거조차 남기지 못하고 참혹하게 갔을지도… 조노량은 시신들 사이에 한 줄기 눈물을 떨궈 놓았다. 그리고 소매로 쓱 훔쳐 닦았다.

그래, 쥬시아누스답지 않은가? 그답게 갔는데, 죽은 허물은 찾아 무엇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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