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35화 (135/142)

135. 아도니아를 향해!

쥬시아누스의 크로아지크 2군단, 전 병력은 기마로 구성된 기형적인 군단이다. 2군단이 이 정도까지 활약하리라고는 커트리안뿐만 아니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실상 쥬시아누스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등자를 장착한 기마군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기마 돌격은 적의 기사들조차 버거워했다. 반면 기마병들은 기사를 향해서도 거리낌 없이 돌진을 감행했다. 오랜 경험에 통해 웬만한 기사들은 기마 돌격의 충격을 받아 내기 힘들다는 걸 체감한 탓이다.

탄력을 받은 말의 속도는 시속 50킬로미터를 상회한다. 승마자에게도 부담스런 속도다.

말이 앞발을 내디딜 때마다 말 등은 승마자의 엉덩이를 튕겨 낸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튕기는 힘도 강해진다. 그로 인해 속도를 내기도 어렵고 중심을 잡기도 어려워진다.

숙련된 기마병이라면 기마 돌격 시 발생하는 필연적인 저항, 즉 첫 번째 충격은 등자가 없더라도 관성을 이용해 한 번 정도는 극복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첫 격돌에서 중심이 흩어지게 되고, 두 번째 격돌에서는 낙마의 위험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것이 기마전의 치명적 약점이었다.

또한 밀집방진과 달리 기마돌진은 각 기마마다 속도와 저항이 제각각이다. 전투 시 아군에 의한 엄호를 받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두 발로 몸을 지탱할 수 있게 되자 중심을 잃는 경우도 없어졌고, 저항에 따른 낙마의 위험성도 대폭 감소했다. 또한 양손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무기에도 충분한 힘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가속에 따른 부담도 구 할 이상 적에게 전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깨에 가죽 끈을 둘러 장창의 뒷부분을 견착하는 방법도 고안됐다. 팔로만 충격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충격을 분산하는 방법이다. 또한 돌격 시 등자를 밟고 엉덩이는 안장에서 떼어내 충격을 감쇄시키는 요령도 터득했다.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운용법을 깨달았고, 전투를 치르면서 보다 효과적인 전술을 터득했다. 그렇게 두 계절을 누비다 보니 애초에 의도한 바 이상으로 본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진영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활약을 했다는 의미다. 많은 활약을 한 만큼 기마군단에 누적된 피해도 상당했다.

무려 두 계절을 단독으로 북부를 종횡했다. 수백 회가 넘는 교전을 펼쳤고,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아무리 강력한 군단도 적지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낸 역사가 없다. 별도의 보급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불가능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셈이다.

온전한 하나의 군단이 가랑비에 옷 젖듯 소실되어 어느덧 한 개 사단 규모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쥬시아누스는 군인이었다. 군인답게 앓는 소리 한 번 없이 우직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쥬시아누스는 차츠라가 보내온 전령을 통해 카디널 평원의 소식을 접했다. 지금 자신의 역할이 전세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다.

쥬시아누스는 힘들다고 포기하는 사내가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지도 않았다.

지금은 큰 승리를 거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북부를 흔들어 주느냐가 중요한 시점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비록 전력이 많이 소실되었지만 사단 규모라 해도 절대 약한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과감하게 부딪치고 다녀서는 활동을 길게 가져갈 수 없음도 알았다. 쥬시아누스는 유연하게 전술을 바꿔 갔다. 더 이상 병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옅게 치고 빠졌고, 그러면서도 마하리 산맥 북부의 폴리스들이 기마대를 방치할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적 병력을 줄이기보다는 주요 시설과 생산지에 대한 타격과 보급품 약탈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과거에는 일부러 요격을 유도하고, 과감하게 쓸어버렸다면 이제는 접전을 피하고, 기동력을 바탕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또한 연합군이 쉽게 추격을 포기하지 않도록 흔적을 흘리고 다녔다.

이렇게 되자 식량 등에 대한 노획은 문제가 없었으나 필라와 근접 병기 등 전투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군수품의 보급에는 난항을 겪게 되었다.

쥬시아누스는 들판 멀리 모습을 드러낸 깃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바탕에 붉은색 사자머리를 그려 넣은 깃발, 과거 무적군단으로 불리던 로크리안의 직할 군단기였다.

그들은 벌써 한 달째 끈질기게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다. 거리를 벌여 놨다 싶어 방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바짝 붙어 왔고, 멀어졌다 싶으면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보병군단임을 감안한다면 정말 경이적인 행군 속도였다. 그리고 지금처럼 불쑥 전방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진로를 예측하고 가로질렀다는 의미였다.

메잔 시 인근의 둔전과 마을 몇 개를 초토화시키고 식량을 약탈한 후 다시 사례시온으로 진로를 바꾼 지 이틀 만의 일이다.

쥬시아누스는 옆쪽에서 뿜어지는 살기를 인지했다. 뮤트였다. 그는 최근 들어 부쩍 살육에 집착했다.

뮤트는 붉어진 입술을 살짝 할짝거리며 들판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바탕 접전을 벌이고 싶어 하는 눈치다.

크로아지크 2군단은 그동안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기마대였다. 그리고 이런 벌판에서라면 한 개 군단 정도는 어렵지 않게 돌파해 버릴 수 있었다.

로크리안의 군단은 과거의 무적군단이었지만, 크로아지크 2군단은 현재 진행형인 무적군단이다. 보병군단 하나 정도는 그 어떤 상대라도 돌파해 낼 자신이 있었다. 승리라는 측면으로만 보았을 때,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상대는 로크리안의 무적군단이다. 승리하더라도 그 한 번의 접전을 끝으로 2군단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전사인 쥬시아누스는 일전을 원했지만, 목적이 분명한 지휘관으로서의 쥬시아누스는 전투에 회의적이었다. 시원하게 한 판 붙고 카디널 평원으로 회군하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마하리 산맥 이북의 병력이 대거 남하하는 걸 억제할 방법이 없다. 현재 2군단의 임무는 승리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기수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킨페를 거쳐 바이오란테까지 달린다.”

결국 쥬시아누스는 망설임 없이 적에게 등을 보였다. 쥬시아누스는 명예로운 전사였으나 명예만 추종하는 자가 아니었다.

크로아지크 2군단이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로크리안의 3군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달 전 꼬리를 잡았고,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한 지는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적은 압도적인 기동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꼬리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로크리안은 절대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는 한때 북부 전체의 판을 짜던 사나이다. 추격 중인 적의 현재 상태 정도는 능히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압박을 멈추지 않고 맹수를 잡기 위한 덧을 꾸준히 설치해 나갔다.

로크리안은 이것이 생애 마지막 작전임을 직감하며 온 신경을 기마군단의 추격에만 집중했다.

로크리안의 수족이며 오랜 전우인 아도니아 3군단 고참병들은 로크리안의 손짓에 따라 아무런 동요도 없이 들판 너머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향해 묵묵히 행군을 이어 갔다.

로크리안의 군단마저 사라져 간 텅 빈 들판에 희고 검은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시선은 로크리안의 군단과 그 너머로 사라져간 쥬시아누스의 군단을 좇았다.

그중 흰옷을 입은 사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까 봅니다, 퓨콤.”

“꼭 이렇게 번거롭게 해야 하나? 그냥 직접 거두면 안 되는가?”

“그런 간섭은 그대들 같은 부정한 자들이나 하는 거고요. 저희 방식은 아니지요.”

모욕적인 언사였으나 검은 옷의 사내는 감히 발광하지 못했다.

☆ ☆ ☆

커트리안군이 연합의 땅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동맹의 폴리스들도 초기 원정대의 놀라운 선전에 고무되었다. 언제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었냐는 듯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북부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도시의 자원을 총동원했다. 폴리스들은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모든 병력을 카디널 평원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전승 후, 자신들이 획득할 지분에 대한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멀리 케이론과 오린토, 그리고 웰디안의 병력까지 카디널로 몰려들었다. 7월 초의 일이었다. 카디널 평원의 동맹군은 넘쳐나는 병력과 물자로 인해 그야말로 풍요로운 군대가 되었다. 카디널 평원에서만큼은 기사의 수나 병력 수에 있어서 오히려 연합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지역적인 우위가 확보되자 연합군도 이전처럼 파상공세를 이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전선은 고착화되고 끊임없이 펼쳐지던 전투도 소강 국면에 들어섰다.

대륙력 882년 8월 21일, 커트리안은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느끼고 최종 작전에 돌입했다.

현재 카디널 평원으로 넘어온 동맹의 병력은 스물일곱 개 군단이다.

커트리안은 카디널 평원에 위치한 3개 폴리스, 로두카와 엄브로시아, 판티노시에 각각 한 개 군단씩만 남기고 전 병력을 카디널 평원 북쪽 라쿠스 시에 집결시켰다.

평원 전체가 동맹의 손에 확고히 장악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츠라의 지휘를 받는 레인저들과 그림자들도 연합의 정찰대를 압도한 시기였다.

때문에 커트리안군의 병력 이동 상황은 매우 늦게 연합 측에 파악되었고, 그 결과는 연합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커트리안은 마지막으로 라쿠스에 카샤린의 군단을 주둔시킨 후, 나머지 23개 군단을 모두 몰아 진군을 시작했다. 동맹의 주력군이 선택한 루트는 거리상의 손해를 감수하고 루이텐 구릉 북쪽 십여 킬로미터 밖으로 돌아가는 경로였다. 루이텐 구릉에 자리 잡은 아도니아 본진을 크게 우회한 것이다. 자칫 카디널 평원과의 보급선이 끊기고 뒤를 잡힐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작전이었지만,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커트리안은 뒤를 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커트리안은 이 작전에 사활을 걸었다. 만약 각 폴리스의 수뇌부에서 사전에 이 작전을 파악했다면 결사반대를 외쳤겠지만 커트리안은 동맹에게조차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이번 원정에 모든 동맹의 힘을 집약시켰다. 무리가 따르는 작전인 만큼 희생도 컸고 위험부담도 높았다. 성공하지 못하면 전멸이다. 현재 동맹의 땅은 텅 빈 것과 마찬가지, 작전이 실패한다면 동맹은 연합의 병력을 감당할 수 없다.

작전이 성공하면 동맹에 의해 북부가 통일될 것이며, 실패하면 연합에 의해 북부가 통일될 터였다.

작전이 시작되고 차츠라는 레인저 부대 전부를 루이텐 구릉에 몰아넣었다. 커트리안군의 동선이 연합 측에 알려지는 시간을 단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그림자들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레인저들은 보통 열 명에서 스무 명씩 작은 부대를 이뤄 행동한다. 그림자들이 최대한 교전을 피하는 반면, 레인저들은 필요하다면 교전도 불사한다. 하지만 상대의 숫자가 많다면 당연히 피해 가야 한다. 그럼에도 레인저들은 교전을 감행했다.

정찰대가 실종되면 기대가 출동한다. 기대 단위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레인저들도 부대 단위로 몰려들었다. 동맹의 레인저들은 당연히 피해야 하는 정규 부대와의 교전조차 불사했다. 하지만 레인저들은 전투 부대가 아니다. 정규전에서 전투 기대를 압도할 수 없다. 레인저들의 희생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악착같은 작전은 연합의 의구심을 불러왔다. 루이텐 북부로 다수의 연합군이 몰려들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몸을 피했어야 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둠속에서 암약해야 할 그림자들과 레인저들이 벌건 대낮에 압도적인 병력을 습격하는 미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 째 되던 날, 아도니아 제4군단 소속 기대는 루이텐 구릉 밖 10킬로미터 지점에서 대규모 병력이 이동해 간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흘 동안 일곱 개 레인저 부대가 전멸했고, 백서른아홉 명의 그림자들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작전을 총지휘했던 차츠라 본인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그렇게 레인저들이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감수하면서 벌어 준 시간 덕에 커트리안군은 단 한 차례의 저지도 받지 않고 이레 만에 아도니아로 가는 관문인 테네온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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