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급변하는 정세
결국 연합은 아도니아 평야에 위치한 일곱 개 폴리스와 동쪽 해안에 접한 메하니, 게브라, 그리고 마하리 산맥 남쪽의 줄라시만으로 동맹의 주력 군단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안 그래도 루이텐 구릉 전투에서 대패를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는데, 마하리 산맥 북부의 폴리스들로부터 추가 지원을 못 받게 되자 연합의 위기감은 더욱 팽배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동맹의 군대가 아도니아 평야까지 진군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병력의 수에서 연합이 우위에 서 있었고, 질 면에서도 켈커티스의 군단들을 제외한다면 연합의 병력이 동맹보다 뛰어났다.
결국 트라쿠스는 오르비스에 위치한 최정예 부대인 아도니아 4, 5군단의 회군을 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도 남이스테르 강이 더 이상 연합의 손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부 머서너리 로드를 관장하는 베르트 3성의 협조를 얻어 겨우 회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트라쿠스의 이 선택으로 오르비스 평야는 다시 동맹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고, 더불어 오랜 시간 마리노에 발이 묶였던 템쉬 장군의 켈커티스 4군단과 미니얀, 쿠아란의 추가 군단을 연합의 땅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두 달 후엔 오르비스와 마리노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균형이 연합의 땅에 재현된 것과 다를 바 없이 돼 버린다.
크리들의 3군단은 세라실을 파괴하고 비바지오 호수를 끼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연합군에 추격을 당하는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카디널 평원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즈음 제우스도 동맹의 추가 원정대에 섞여 카디널 평원으로 넘어왔다.
제우스는 그날로 커트리안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참전 의사를 밝혔다. 커트리안으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커트리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제우스를 바라보자 제우스가 말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겠습니다. 동맹뿐만 아니라 연합의 부상병들도 함께 말입니다. 그것이 만물의 어머니, 로리안의 뜻입니다.”
전장에서 적 병사들을 치료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치부됐다. 부상이 심한 자는 즉결처분했고, 경상자는 자가 치유되기만을 바라야 했다.
치료로 인해 관리해야 할 포로가 많아지면 통제할 병력도 늘려야 했고, 혹 건강해진 포로들이 내부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보통 골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트리안은 잠시의 숙고도 없이 이를 허락했다. 제우스가 가진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뿐더러, 연합의 포로들보다는 아무래도 동맹의 병사들이 받을 혜택이 월등히 컸기 때문이다.
이후 역사에 ‘카디널 평원전’으로 기록될 이 개월간의 치열한 공방에서, 제우스의 명성은 동맹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제우스의 손을 거치면 어떠한 부상도 치유되었다. 동맹의 병사들은 성자의 등장에 환호했다. 죽지만 않으면 모든 상처를 회복시키는 신관이 함께하자 병사들은 더 이상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6월 중순, 라쿠스 시 인근에서 펼쳐진 대규모 회전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까스로 연합의 병력을 밀어내긴 했지만 동맹군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들판 가득 펼쳐진 참상에 제우스는 눈시울을 붉혔다. 라쿠스 시 성문 앞 벌판은 초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질펀한 피 웅덩이 속에 몸을 누인 부상자들이 제우스를 찾아 울부짖었고, 제우스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들판을 뛰어다녔다.
자신이 조금만 늦장을 부려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강박관념에 탈진할 때까지 들판을 뛰며 고위급 신성마법인 리스토어를 펼쳤다.
리스토어는 반경 삼십 미터에 이르는 범위형 마법이다. 그 범위 안에 든 부상자들은 어떤 부상에서도 회복될 수 있었다. 팔이 잘린 자는 새살이 돋아 출혈이 멈췄고, 끊어진 내장은 스스로 자리를 찾아 이어졌다. 부서진 뼈가 맞춰졌고, 파이크에 관통된 구멍이 메워졌다.
이 신성마법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지역 전체의 생명력을 폭발적으로 가속시키는 권능이다. 그렇기에 신성력의 소모가 막대했다. 아무리 제우스라 하더라도 열 번이 넘어가면 신성력이 고갈될 지경이었다.
제우스가 좀 더 효율적으로 치료를 펼칠 수 있도록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장을 뒤지며 부상자들을 한곳으로 모았지만 제우스는 그마저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뛰어다녔다. 동맹의 병사든, 연합의 병사든 가리지 않고 단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처참한 전장을 끊임없이 뛰어다녔다.
제우스 스스로는 몰랐지만 현 시대 최고의 신관은 제우스였다.
어느 종파의 대주교도 혹은 추기경도 제우스의 신성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제우스였지만 이런 대규모 신성마법을 끊임없이 펼쳐서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노리앙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막강한 전력인 노리앙을 제우스 곁에 붙여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제우스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라쿠스 대회전을 시작으로 전선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 대규모 회전은 거의 루이텐 구릉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이었다. 연합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었고, 동맹이 승기를 잡는 전투도 많았다. 하지만 동맹은 승리를 하고서도 구릉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보급선은 차치하고라도 주력군이 카디널 평원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카디널 평원의 안전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현시점 카디널 평원은 본토와 원정군을 잇는 생명줄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영악한 트라쿠스는 이런 동맹군의 약점을 노렸다. 트라쿠스는 루이텐 구릉에 몰려 있는 연합군을 카디널 평원 전체로 분산 배치함으로써 전선을 다각화했다.
전선이 넓어짐에 따라 물량 면에서 모자람이 있는 동맹군은 어쩔 수 없이 카디널 평원 곳곳에서 고전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되자 전쟁 초기 한껏 고양되었던 동맹의 기세도 주춤거리게 되었다.
더불어 복귀한 4, 5군단을 포함한 아도니아 정예 군단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루이텐 구릉을 틀어막자, 커트리안군도 쉽사리 루이텐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제우스가 가장 활발히 활동한 이 개월간의 일이다.
그 시기 엄브로시아 인근에서 작전을 마친 조노량은 잠시 짬을 내 엄브로시아에 있는 조와 포트 부자의 집을 찾았다. 라쿠스 시의 항구를 파괴하러 가던 중 벤트와 함께 들렸던 바로 그 저택이다.
생기를 잃고 저 혼자 을씨년스러워져 있던 폐가가 쓸쓸히 조노량을 맞이했다.
조노량은 엉망으로 파헤쳐진 정원과 반쯤 떨어져 바람에 삐걱대고 있는 정문을 보며 저도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순박한 포트의 얼굴과 넉넉한 조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었지만 왠지 가슴이 아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저택 곳곳에 새겨진 격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집 안의 가재도구들은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고, 벽에 걸려 있던 멋진 풍경화는 자취를 감췄다. 장식품이든, 커튼 조각이든 조금이라도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집이 벌거벗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노량은 중앙 홀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먼지와 뒤엉켜 진득하게 굳어 버린 다량의 핏자국을 노려보다 깊게 가라앉았다.
☆ ☆ ☆
카디널 평원은 남북으로 이백 킬로미터, 동서로 백칠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평원이다. 그 평원 위에 로두카, 엄브로시아, 판티노 세 개의 폴리스가 자리 잡고 있으며, 평원 바로 북쪽에 라쿠스 시가 있고, 남쪽에는 그레체 시가 위치해 있다.
그 넓은 지역 전체로 대규모 연합군이 밀려들자 동맹도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넓게 펼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카디널 평원은 동맹의 전초기지임과 동시에 보급기지였다. 단숨에 아도니아로 진군하지 않을 바에는 반드시 지켜 내야 할 근거지였다.
동맹이 카디널 평원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동맹의 병력이 안전하게 남이스테르를 넘을 수 있었고, 멀리 케이론과 오린토에서까지 보급이 이어질 수 있었다.
반대로 연합의 입장에서는 카디널 평원은 반드시 수복해야 할 지역이었다. 카디널 평원을 중심으로 북쪽의 라쿠스 시와 남쪽의 그레체항이 동맹의 주요 보급 루트였고, 카디널 평원은 모든 물자와 병력의 집결지였다. 연합이 이 지역을 재탈환하지 않고서는 동맹의 병력을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병력을 집중해 특정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반면, 그 넓은 지역을 모두 방어할 수 없기에 연합군의 이동 상황을 철저히 파악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정찰과 척후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켈커티스의 3개 레인저 부대는 물론 각 폴리스의 유능한 레인저들이 차츠라의 지휘하에 전부 카디널 평원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연합의 레인저들도 카디널 평원으로 집중된 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카디널 평원을 중심으로 양 진영의 레인저들은 상대 병력의 이동 상황과 주둔지, 매복, 공격과 방어루트를 파악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 정찰전을 펼쳤다.
자연 그림자들과 레인저들로 카디널 평원 인근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워낙 다수의 레인저들이 몰려듦에 따라 반경 이백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카디널 평원과 반경 백 킬로미터의 루이텐 구릉지가 좁게 느껴질 판이었고, 레인저 부대들 간의 직접적인 교전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대체로 연합의 레인저 부대가 조금 더 많은 편이었으나 동맹에는 차츠라라는 걸출한 그림자가 존재했다.
이곳에서 차츠라의 활약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그 어떤 레인저도 차츠라의 종적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림자의 세계에서 상대의 종적을 놓친다는 말은 죽음과 동의어였다. 연합의 그림자들과 레인저 부대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모래 속에서, 나무 위에서, 바위틈에서 생을 마감했다.
연합의 정찰부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운신의 폭이 급격히 좁아졌다.
레인저 부대의 활약으로 동맹은 정보전에서 앞서나가게 되었고, 정보의 장악은 힘의 집중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동맹은 부족한 전력으로도 밀리지 않고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은 마하리 산맥 북부를 종횡으로 휘저으며 동맹 전체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었다.
기마군단이 이 정도까지 활약하리라곤 커트리안도 예상치 못했다. 기마대의 가치나 효용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 2개 보병 군단가량의 전력이겠거니 했으나 막상 패를 까놓고 보니 정면으로 붙어도 능히 네 개 군단은 맞상대할 전력임이 증명되었다. 더구나 그들의 기동력을 감안한다면 열 개 군단과도 맞바꾸지 않을 강력한 패가 되었다.
만약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이 없었더라면 마하리 산맥 북부에서 내려왔을 병력만도 최소 열 개, 최대 스무 개 군단은 되었을 터였다. 덕분에 동맹 측 병력이 충원될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여름이 깊어질 즈음에는 쥬시아누스로서도 한계 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다.
2군단은 매일 매일이 처절한 사투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쥬시아누스는 여전히 ‘문제없음’이라는 짧은 소식만 전달해 왔다. 그 무뚝뚝한 전갈을 받은 커트리안은 쥬시아누스에게 조금 더 버텨 줄 것을 주문했다.
두터운 솜옷을 입고도 깃을 잔뜩 세워 올린 상인이 주루 문을 밀고 들어오자마자 조노량이 탁자로 와 앉았다.
“으, 춥다. 그래서 어찌 되었다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