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33화 (133/142)

133. 루이텐 구릉 전투

커트리안군은 몇 번의 전투 끝에 루이텐 구릉 십사 킬로미터 안쪽까지 진출한 후, 주변에서 가장 높은 구릉을 택해 진지를 구축했다.

커트리안이 직접 지휘하는 켈커티스 2군단이 중앙에 자리 잡고, 최근 3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1사단장 에지디오가 이끄는 켈커티스 3군단이 왼쪽에 포진했다. 또한 오른쪽에는 노장 로사리오 마잔티가 이끄는 아미나 2군단이 자리를 잡았다.

노장 로사리오 마잔티 입장에서는 두 번째로 이 구릉에 진지를 구축하는 셈이다. 첫 번째는 삼십여 년 전 당시 북부 대륙 최고의 전사라 일컬어지던 헤트르 폰티나와 함께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으로부터 팔십여 킬로미터만 더 진격하면 연합의 중심지인 아도니아 평야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아도니아시가 위치한 지역까지 들어가려면 테네온시를 거쳐 다시 백육십 킬로미터를 들어가야 한다.

“이번에는 기필코 아도니아 평야를 밟고 말리라!”

로사리오 장군은 결의를 다지며 빤히 마주 보이는 구릉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적 군단을 바라보았다. 아도니아 2군단기와 6군단기가 나란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 군단기를 확인하자 다른 군단기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연합 최정예 아도니아 군단이 두 개나 포함된 네 개 군단, 비록 이쪽에도 동맹 최정예 군단인 켈커티스 군단이 두 개나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병력면에서는 손색이 있었다.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서두는 기색 없이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로사리오도 사단장들을 불러 진지 구축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하도록 당부했다. 더불어 병사들로 하여금 허둥대는 모습을 연출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서로 간에 진지를 구축하고 대치한 지 하루가 흘렀다. 그럼에도 연합군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병력면에서 부족하다지만 그렇다고 동맹 입장에서 똑같이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루이텐 구릉은 엄연히 연합의 땅이다. 더구나 아도니아 평야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이다. 보급선이 긴 동맹군이 마냥 죽치고 있을 지역이 못 됐다.

로사리오는 전장에서 평생을 늙어 온 군인이다. 전장을 읽는 눈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지난해 바라흐하의 반란 때 자칫 한 발만 잘못 내디뎠다면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아미나군을 구해 낸 것도 그의 탁월한 안목 덕이다.

지금의 대치는 절대 동맹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불안해진 로사리오는 다시 한 번 커트리안을 찾았다.

커트리안은 마침 막사 안에서 그림자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마잔티 장군.”

“총사령관님을 뵈오.”

로사리오는 커트리안을 향해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연배에 관계없이 커트리안은 켈커티스의 바실레오스였고, 전체 동맹군의 최종 지휘권자였다.

“무슨 일이오?”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커트리안의 시선이 로사리오를 향했다.

“지시대로 움직이고는 있소만 과연 저들이 먼저 움직여 줄지가 의문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트릭에 저들이 움직일 것 같지가 않소. 차라리 병력 면에서 우위에 서 있을 때 우리가 먼저 치는 것이 어떨까 싶소이다.”

커트리안은 엉뚱하게도 로사리오 대신 옆의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츠라,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나?”

음침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도나아 7군단과 크루니아 2군단이 이틀 거리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모래 정오쯤이면 도착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다시 로사리오에게로 옮겨 갔다.

“들은 바와 같이 연합의 두 개 군단이 코앞에 도착해 있소. 드러난 병력은 우리의 두 배가 되는 셈이오. 게다가 우리 군엔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소. 장군 같으면 지켜보기만 하겠소?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후후, 저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오.”

로사리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작전이 가능하게 한 배경엔 동맹군의 현재 상황이 깔려 있었다.

연합의 땅에 넘어온 이후 크게 패한 적은 없었으나 병사들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병력이 많다하나 카디널 평원 곳곳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다. 전선도 불투명하다.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보급도 충분치 못했다. 그리고 연이은 전투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중부 라쿠스 시로 들어 온 혼합군의 피해가 컸다.

연합이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을 거꾸로 이용하기 위해 세운 작전이다.

그렇다고 우려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남이스테르 강에 대한 지배력도 확고해지고, 카디널 평원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조만간 보급품이 넘어오고, 병력이 충원된다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로사리오는 중년 사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이곳은 연합의 땅이다. 그럼에도 정보전에서 오히려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틀거리에 떨어져 있는 연합군의 이동 상황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겨우 두 시간 거리에 매복 중인 동맹의 군단들은 적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커트리안 옆에 서 있는 음침한 사내, 햇볕에 잔뜩 그을린 촌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절대 평범한 사내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사리오는 중년 사내의 보고를 고려해 숙고했다.

만일 커트리안의 말대로만 되어 준다면 자신이라도 필경 그런 선택을 할 것이 분명했다.

두 진영 간의 거리는 칠백 미터가 넘지 않는다. 우리 진지를 오가는 병사들의 수가 줄고 있음을 헤아릴 만한 거리다. 적 지휘관이 바보만 아니라면 식사 시간에 오르는 연기의 수가 매일매일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흘을 관찰하고도 공격을 주저한다면 지나치게 신중한 지휘관이거나 겁쟁이일 것이다. 숙고를 마친 로사리오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사흘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늘게 시작된 빗줄기가 오전을 거치면서 굵어졌다. 그 빗줄기를 뚫고 연합군의 전진이 시작됐다. 구릉 위 진지 뒤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동맹군의 진영에서 어지러운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혼란이 극에 달했다. 심지어는 몇몇 병사들이 말을 탈취해 진지 밖으로 달아나는 모습까지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연합군은 확신을 갖고 진격의 속도를 높였다. 군홧발을 구르고, 북을 치며 위압적으로 다가들었다. 그동안의 패배는 완전히 잊은 모습이었다.

양 진영의 거리가 칠십 미터에 이르자 앞에 선 세 개 군단이 일제히 첫 번째 필라를 날려 왔다. 만 오천 개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필라가 빗줄기를 뚫고 떨어져 내렸다.

혼란에 빠졌던 동맹군도 그제야 대오를 정비했다. 동맹의 병사들은 진지 앞 목책에 몸을 바짝 붙이고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병사들이 필라에 맞아 대지에 몸을 뉘였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동맹군의 숫자가 연합의 예상과 달리 크게 줄어 있지 않았다. 연합의 지휘관들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황망 중에 자신의 눈이 착각을 일으켰거나 비로 인해 시야가 흐린 탓이라 치부했다. 그리고 이제와 공격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필라는 이미 던져진 상태였다.

“투창!”

연합의 병력은 삼만에 이른다. 이보다 큰 타깃은 없다. 동맹의 병사들은 겨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동맹의 진영에서 출발한 만 오천 개의 필라는 거센 빗줄기를 뚫고 연합의 진영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합군은 일제히 방패를 세워 들었다.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고 머리 위로 촘촘히 방패막을 형성했다. 만 오천 개의 필라가 연합군의 방진 위로 떨어져 내리며 우박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그 많은 필라를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동맹의 필라가 방패와 방패 사이 틈을 파고들었다. 방진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북부군은 보통 세 개의 필라를 가지고 다닌다. 양군이 함께 진격한다는 가정하에 필라의 유효 사거리인 백 미터 이내에서 필라를 던져 낼 수 있는 횟수는 세 번이 한계다. 필라의 무게를 고려한다면 그 이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체력적인 낭비다. 보통 칠십 미터에서 한 발, 오십 미터 거리에서 한 발을 날린다. 그리고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거리인 이삼십 미터 사이에서 마지막 한 발을 날리고 돌격을 감행한다.

연합의 병사들은 첫 번째 필라가 날아왔으니 잠시간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맹군은 첫 번째 필라를 날리자마자 바로 두 번째 필라를 던져왔다. 그리고 세 번째 필라가 날았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빗속을 뚫고 연속으로 필라가 날아왔다.

연합군의 방패는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특히 선두에 섰던 군단병의 방패가 박혀 든 필라로 빽빽해졌다. 일부 방패들이 필라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 나갔고, 멀쩡한 방패도 필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처졌다.

그제야 연합군 지휘부에서도 동맹의 작전을 눈치챘다. 동맹은 목책 뒤에 다량의 필라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거리는 오십 미터까지 좁혀진 상황, 필라 몇 발이 무서워 후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연합군 진영에서 뿔나팔 소리가 세 번에 나눠 울렸다. 정해진 신호에 따라 후열에 섰던 군단들이 좌우로 튀어나오며 날개를 펼쳤다. 동시에 연합의 두 번째 필라, 삼만여 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날아오는 동맹의 필라를 피해 내느라 거리 조절도 어설펐고, 충분한 힘을 싣지도 못했다.

그렇게 삼십 미터에 이르러 연합은 세 번째 필라를 날림과 동시에 돌진을 감행했다.

밀집방진은 단단히 구축된 진지에 취약하다. 아니, 진지를 상대로는 방진 자체의 효용성을 발휘할 수 없다. 어떤 진형이 되었든 참호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동일했고, 키높이로 설치된 목책도 타 넘어야 한다. 잘 구축된 진지는 진형에 관계없이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 공략이 가능하다. 연합은 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전속 돌격을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아도니아 군단들이 정면을 담당했고, 나머지 네 개 군단이 측면의 참호로 달려들었다. 이중의 참호가 순식간에 시체로 메워졌다.

진지전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육박전에 돌입한다. 상대적으로 고지를 점한 동맹군이 일제히 오 미터 길이의 파이크를 내리꽂았다. 목책 뒤에 하반신을 감춘 동맹군이 파이크 거리를 돌파하고, 진지를 타 넘으려는 연합군 병사들을 향해 방패를 휘두르고 글라디우스를 내질렀다.

진지를 중심으로 굳건히 버티는 만오천 동맹군과 진지를 타 넘으려는 삼만 연합군 병사들 간에 대혼전이 펼쳐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과 비명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목책 앞에 파놓은 참호로 비에 섞인 다량의 피가 흘러내려가 넘칠 지경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아도니아 기사들과 종사들이 말뚝을 뛰어넘기 위해 몸을 날렸고, 이를 막기 위해 동맹의 기사들도 오오라를 뿌려 댔다. 기사들 간에도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아도니아는 연합의 중심도시다. 단지 인구수만 많다고 중심도시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도니아 기사들의 실력은 여타 폴리스들의 기사들보다 한 단계 위의 실력을 가졌다. 하지만 켈커티스에도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기사들이 많았다.

연합과 동맹을 대표하는 두 집단 간의 대결은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기사들의 대결에는 섣불리 병사들이 나설 수가 없었다.

중급과 상급을 상회하는 기사들이 뿌려 대는 오오라는 일반 병사들이 대항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기사들 앞에서 일반 병사들은 그야말로 허수아비와 같았다. 방패로 막으면 방패를 갈랐고, 글라디우스로 막으면 글라디우스가 베어졌다. 일부 목책이 허물어졌고, 동맹의 병사들은 방패로 스크럼을 짜고 밀려드는 연합군을 막아 냈다.

그 순간 커트리안을 제외한 아홉 명의 생환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목책에 붙었다.

하나하나가 최상급 소드마스터인 생환자들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생환자들의 활약이 시작되자 기울었던 분위기가 다시 반전됐다. 쓰러진 목책이 세워지고, 방패가 틈을 메웠다.

생환자들이 버티고 있는 장소로는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도 감히 몸을 들이밀지 못했다. 특히 목책 뒤에 서서 오오라를 뿌려 대는 예니에프의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오라를 뿌릴 때마다 기사와 병사를 가릴 것 없이 서너 명씩 한꺼번에 쓸려 나갔다. 가까스로 오오라를 막아낸 기사들도 그 기세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샤마노프의 활약도 그에 못지않았다. 몸놀림만으로 치면 조노량 외에는 따라갈 사람이 없는 샤마노프다. 그리고 그는 강하고 민활한 촉수를 얻었다. 그것도 다섯 가닥이나 되는 강력한 촉수다. 무거운 마물의 가죽으로 싸 놓았지만 무게에 관계없이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아도니아의 이름 높은 기사들이 샤마노프에게 달려들었지만 변변히 활약도 못하고 어이없이 나가떨어졌다. 전방에서 날아오는 촉수는 피해 냈지만 혼전 중에 뒤통수를 노리는 촉수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살상력 면만 따지면 샤마노프의 촉수는 예니에프의 오오라 못지않았다.

또한 오랜만에 커트리안 곁을 떠난 스마르가 특유의 쾌검으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동안 그런 살기를 어떻게 주체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한 살기를 뿌려 댔다.

스마르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을 뻗어 낼 때마다 여지없이 기사들의 목이 떨어졌다. 개인전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검투사는 웬만한 기사들보다 상위에 서 있다. 스마르는 검투사 중 최고 등급인 아도니아 시민궁 시합에 속했던 검투사다. 당시의 실력으로만 따져도 상급의 기사들조차 감히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 하물며 변이를 겪으며 신체적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스마르였으니 기사들이 변변히 대항조차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훈련된 기사들의 눈으로도 스마르의 검을 따라잡지 못했으며, 요행히 막아낸다 해도 방패와 함께 베어졌다. 그 외에도 가면의 기사 폴이나 외팔이 브리오티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살기를 주체치 못한 메뚜기 아메조프가 진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십여 미터를 날아 적진 한복판에 꽂혔다. 주변의 적을 마구잡이로 벤 후 병력이 몰리면 다시 뛰어올랐다. 무려 이십 미터다. 아메조프의 등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던 연합의 병사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린 사신의 검에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반면 임무를 마치고 불과 이레 전 본대에 합류한 조노량은 적절히 위험한 곳만 방비하며 기사들 위주로 베었다.

사실 대항할 수 없는 자들을 살해하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커트리안 역시도 원치 않으면 물러나 있으라 했지만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데, 홀로 달관한 척하며 물러나 있을 염치도 없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대량 살상을 할 마음도 없었기에 적당히 맡은 지역만 방비할 따름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한 개 사단 정도는 단숨에 초토화시킬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올해 서른일곱이 된 덴 나디는 아도니아 2군단 제7기대장이다. 비록 방계지만 나디 가문의 촉망받는 기사였다. 이십대 후반에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되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천재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빠른 성취였다. 안 그래도 검사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덴이 오오라까지 다루게 되자 본가에서도 덴을 상대할 기사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덴은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군소 가문인 나디 가문에서나 상대가 없었지, 아도니아에는 그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뛰어난 기사들이 많았다. 그중에 자질이 떨어지는 자가 없었고, 노력하지 않는 자도 없었다.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서기 위해서 덴도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덴의 경지는 해가 다르게 부쩍부쩍 상승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하늘처럼 높아 보였던 대단한 기사들도 덴을 상대로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오오라의 밀도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검의 경지는 그야말로 최상급에 이르렀다.

실력이 뒷받침되니 군에서도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종사의 신분으로 군에 투신하였고, 오래지 않아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곧 기대장의 직위를 얻게 되었다. 기대장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뽐냈고, 사단장으로의 진급도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덴은 속으로 환호했다. 기사가 전공을 세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전쟁터다. 두각을 나타낼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사단장의 자리는 당연한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의 입성까지도 바라봤다. 군소 가문의 방계 기사로서 최고의 출셋길이 열린 것이다.

덴은 최상급 소드마스터다. 정치적 기반은 부족했으나 그 단점을 메울 만큼 실력을 갖췄다. 그리고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장이 생겼다.

저 허술한 목책 따위는 덴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덴은 쾌속하게 몸을 날렸다. 동맹의 기사 하나가 그런 덴에게 글라디우스를 날려 왔다.

덴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검에 실린 기세만 보고도 상대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자신이 이십대에 이뤘던 경지, 이제 갓 초급에 든 오오라 유저다.

덴은 콧방귀를 뀌며 그대로 검을 내리꽂았다. 덴의 상단베기는 초급의 오오라 유저가 막아 낼 정도로 녹록지 않았다. 초급의 소드마스터와 최상급 소드마스터의 격차는 개천과 이스테르강 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덴은 단숨에 불쌍한 기사의 검과, 투구와, 머리를 동시에 갈라 놓으며 목책 안쪽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의 눈에 기이한 형태의 검을 든 검은 머리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전장의 광기에 경도된 듯 잔뜩 찌푸린 인상이었다. 무장도 허름했고, 느껴지는 기세도 없었다. 동맹의 기사 하나가 덴 쪽으로 달려오다가 검은머리 사내를 보고는 다른 쪽으로 몸을 움직여 갔다. 덴은 그 기사의 행동을 보고 운이 좋은 사내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달려들었다면 그걸로 생을 하직했을 것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눈앞에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검은 머리 사내를 먼저 치우기로 했다. 덴은 그 사내의 명복을 빌며 검을 내리꽂았다. 그것이 덴이 능동적으로 행했던 마지막 동작이었다. 이십 년에 걸친 각고의 수련이 무로 돌아갔다.

조노량의 시선이 스치듯 덴의 시신을 훑고 지나갔다. 아주 짧은 시간 떠올랐던 안쓰러움, 덴의 인생이 갖는 무게였다.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치열해졌다. 어느 한쪽도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고, 그런 만큼 팽팽하게 이어져 갔다. 연합의 병력은 끝없이 밀려들었고, 동맹의 병력은 사력을 다해 막아 냈다. 어느덧 시체의 산이 목책을 넘어섰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연합군의 후방에서 거대한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장의 지휘관은 변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미리 제거하거나 예상하고 싸워야 한다.

아도니아 제2군단 군단장이자 이번 전장의 총사령관인 잔 왓슨은 갑자기 발생한 변수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제 합류한 아도니아 7군단과 크루니아의 군단 외에 다른 병력이 지원된다는 전갈은 받은 바 없었다.

그런데도 후방에서 함성이 울려 나왔다. 치열한 전장에서 계산되지 않은 변수는 득보다 실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잔 왓슨 장군은 다급히 전장에서 빠져 뒤쪽의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육백 열 밀집방진을 구축하고 전진해 오고 있는 병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세워 들고 있는 커다란 깃발, 결코 눈에 익은 연합의 깃발이 아니었다.

얼핏 봐도 두 개 군단이 넘는 병력이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리다가 눈빛이 암담함에 젖어 갔다. 멀리 아도니아 진지에 나부끼고 있는 깃발도 어느새 동맹의 깃발로 뒤바뀌어 있었다.

혼란에 빠진 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격전 중에 뒤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갑자기 들려온 함성소리에 당황하고 말았다. 더구나 후열에 위치해 있던 병사들이 연이어 ‘적이다!’라는 외침을 토해 내자 사기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좌측면의 진지를 공략하던 연합의 병력이 확연히 동요하는 모습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 직후 총사령관의 지시도 없이 좌측의 테네온 군단에서 후퇴를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퇴의 신호를 울린 건 테네온 군단이었지만 그 신호에 영향을 받은 건 연합군 전체였다. 서로서로 눈치를 보던 연합군 병사들이 진지 밖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나팔 소리에 총사령관인 잔 왓슨도 급히 정신을 차렸지만 분위기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상황에서 진군의 나팔을 불어 봐야 헛일임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나팔병에게 우측으로 빠지라는 신호를 울리도록 지시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앙을 맡았던 아도니아 2군단과 6군단이 우측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우측에서 잠시 버티던 아도니아 7군단과 데그나 2군단이 중앙군과 보조를 맞춰 뒤로 물러났다.

잔 왓슨이 우측을 택한 것은 자신의 지시도 없이 단독행동을 벌인 테네온군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연합군이 패퇴를 시작하자 동맹군 진지에서 다시 필라가 날기 시작했고, 등을 보인 연합군은 효과적인 방어가 불가능했다.

동맹군은 필라를 날림과 동시에 진지를 벗어나 양쪽으로 나눠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연합의 뒤쪽에서 등장한 동맹군인 트렌티노와 쿠아란의 군단들도 구릉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후퇴하는 연합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동맹군은 장장 오 킬로미터에 걸친 집요한 추격전 끝에 다시 수천의 적병을 베고 진영을 정비했다.

이번 전투로 말미암은 연합군의 피해는 이만 명에 이르렀고, 동맹군의 피해는 삼천 명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대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맹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아미나군이었지만 그럼에도 군단장, 로사리오 마잔티 장군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떨구었다. 과거 헤트르 폰티나와 함께 진격했던 선을 드디어 넘어선 것이다. 로사리오는 장렬하게 싸워 준 군단병들을 위무하며 전사자들의 시신을 일일이 챙겼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커트리안은 십 킬로미터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이번 전투는 아도니아 평야로 진격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연합군을 갉아먹기 위한 전투였다.

카디널 평원을 포기하고, 전군을 몰아 아도니아 평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아직은 카디널 평원에서 멀리 벗어나는 건 곤란했다.

그야말로 연합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전쟁의 양상은 더욱 연합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우선 남이스테르 강 대부분이 동맹의 손에 장악됨으로 인해 동맹의 폴리스들이 안전하게 추가 병력을 파병할 수 있게 되었고, 보급도 튼튼해졌다.

반면 연합은 자신들의 땅에 불어 닥친 전화로 인해 농토는 황폐화되었고, 폴리스 간 교류는 위축되었다. 당장 남부에 위치한 아델모와 더카온은 자신들의 안전에만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었고, 북부에 위치한 사례시온 등은 온 정신을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을 추격하는 데 쏟아붓고 있었다.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이 한 개 군단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도 막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한 기동력으로 종횡무진 쑤시고 다니며 모든 것을 망쳐 놓고 있었다. 농지와 목초지가 망가졌고, 둔전과 마을이 파괴되었다. 양떼가 흩어졌고, 소들이 달아났다. 군단 병력으로는 막을 수도 없었다. 자칫 섣불리 나섰다가 당한 군단이 벌써 네 개 군단을 넘어섰다. 그러니 마하리 산맥 북부의 폴리스들은 가용 가능한 병력을 전부 동원해 이 기마군단을 쫓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이들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마하리 산맥을 넘고자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함정을 파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몰이를 했다. 하지만 번번이 쥐새끼처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그나마 꼬리를 잘라 먹으면서 차근차근 기마군단의 숫자를 줄여 나가고 있다는 데 위안을 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