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32화 (132/142)

132. 기마군단의 탄생

오르비스에 웅크리고 있던 아도니아 4, 5군단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전전긍긍하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커트리안군이 남이스테르를 넘어간 것을 알고 뒤늦게 마리노를 공격해 봤지만 마리노에는 여전히 지긋지긋한 템쉬 장군과 그 예하 세 개 군단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연합의 땅에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아도니아의 정예군단 둘이 오르비스에 발이 묶인 처지가 돼 버렸다.

선택지는 오르비스를 포기하고 연합의 땅으로 돌아가는 방법과, 마리노를 뚫고 북진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템쉬가 버티고 있는 한, 두 번째 방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게 쉬웠으면 지금껏 이러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리노를 우회해서 북진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현재 오르비스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의 병력은 아델모의 병력까지 합해 총 3개 군단이다. 이 병력으로 배후에 마리노를 남겨 둔 채 적진 한복판으로 진군한다? 어린아이라도 그런 무모한 작전을 짜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결국 모래밭에 물 스며들 듯 모든 병력이 녹아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총사령관의 역할을 맡고 있는 아도니아 4군단장 콜롬비아누스 델루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회군을 선택하기도 애매했다.

회군하는 순간 오르비스는 동맹의 손에 떨어진다고 봐야 했다. 오르비스까지 포기하고 일껏 회군했더니 동맹군이 다시 넘어와 버린다면? 동맹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오르비스를 되찾게 될 테고, 자신은 불명예를 안고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전쟁사에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기록될 것이 뻔했다.

연합이 이스테르강을 넘어간 동맹군을 막아 냈을 경우는 더 문제다. 현실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럴 경우 오르비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한 동맹을 밀어붙일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린다면 징계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콜롬비아누스는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끝없이 망설였다.

연합에서도 최정예로 꼽히는 아도니아의 두 개 군단이 이렇듯 망설이고 있던 시기, 연합의 땅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방어에 취약했던 그레체는 반나절도 안 되어 커트리안군에 의해 떨어져 버렸다. 커트리안군은 그 여세를 몰아 로두카로 진격해 들어가는 중이었고, 커트리안과 비슷한 시기에 중부에서 출진한 또 한 갈래의 동맹군단들이 우디네스 삼각주를 넘었다. 그리고 사흘간의 격전 끝에 최악의 방해물인 라쿠스 시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북쪽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쥬시아누스의 2군단은 크로아지크를 남하해 북이스테르 강을 넘었다. 그리고 사르보에서 크리들의 3군단과 결합했다. 어쩌면 북부 대륙 최강이라고 불릴 만한 크로아지크의 2개 군단이 하나로 뭉쳤다. 막강 보병군단과 북부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병군단의 결합이었다. 이 강력한 군단들을 맞아 사르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성문이 파괴되고 도시가 불탔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사르보에 파견나와 있던 아도니아 6군단이 재정비를 위해 아도니아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동안 북부 침공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사르보를 초토화시킨 크로아지크 2개 군단은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린드그렌으로 기수를 돌렸다.

☆ ☆ ☆

연합의 중심 아도니아가 발칵 뒤집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트라쿠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시기에 벌어진 전면전이다. 공격권은 당연히 연합의 손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트라쿠스는 의외의 일격을 맞고 휘청거렸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은 충격적이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단 말인가? 지키기도 빠듯할 병력을 나눠서 침공을 해 와? 트라쿠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남부 그레체로 일곱 개 군단이 들어왔다. 켈커티스의 군단기가 확인되었으니 그쪽이 주공임에 틀림이 없다. 또 중부 라쿠스 시로는 다섯 개의 군단이 들어왔다. 프불리오와 코리노, 라그란 등 중부에 위치한 폴리스들의 군단기가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잡탕부대가 틀림없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북부에서는 크로아지크 군단기를 앞세운 두 개 군단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인데, 이들에 의해 사르보가 함락당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레체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나흘도 안 돼서 들어 온 비보였다. 사르보로 파견나가 있던 6군단을 불러 내린 것이 실책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라쿠스의 비보가 전해졌고, 다시 나흘 만에 남부 카디널 평원의 로두카까지 밀려 버렸다. 농담이라고 해도 이런 악질적인 농담이 없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카티널 평원의 다른 두 개 폴리스인 엄브로시아와 판티노가 로두카를 구하기 위해 병력을 출발시켰다가 라쿠스가 떨어졌다는 소식에 다급히 회군하고 말았다. 라쿠스와 로두카 사이에 낀 형국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현재 아도니아에 남아 있는 군단은 1, 2, 3, 6, 7군단이다. 인근 일곱 개 폴리스의 병력을 더하면 스무 개 군단까지 뽑아낼 수 있다. 무리한다면 스물다섯 개 군단도 가능하다. 따라서 남부와 중부로 침투해 온 병력은 어떻게든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북부였다. 마하리 산맥 북쪽에는 배터링 평야를 중심으로 11개 폴리스가 몰려 있다. 이들 폴리스의 병력을 불러 내리기 위해서는 북부로 들어 온 크로아지크의 병력을 정리하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불과 두 개 군단으로 하루 만에 사르보를 함락시켜 버렸다.

빌어먹을 크로아지크, 언젠가 말썽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은 했다. 갈리온을 길들여 전투에 투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병력이 얼마 안 되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 얼마 안 되는 병력이 엄청난 전투력을 보이고 있었다. 기마대라니? 그것도 돌격형 기마대라니? 어찌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기마 상태로 전투를 치러?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과 두 개 군단 때문에 11개 폴리스가 발이 묶이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강력한 패를 꺼내 들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피온이 했던 제안이 떠올랐다. 로크리안의 복귀,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내용이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제안을 신중히 검토해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트라쿠스가 고민하고 있는 그 시간 크리들과 쥬시아누스는 린드그렌의 요격군단과 마주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비연목만 자라고 있는 드넓은 벌판 한복판이다. 크로아지크 황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황량하다.

린드그렌은 인구 십이만의 강력한 군사폴리스로, 자체 군단만 세 개 군단을 보유했다. 엘리티아 평야에서 한 개 군단을 잃었음에도 그 강성함은 여전했다.

사르보를 함락시킨 크로아지크 군단이 린드그렌으로 기수를 돌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개 군단을 동원해 요격에 나섰다. 양 진영은 사르보에서 백여 킬로미터, 린드그렌으로부터는 칠십삼 킬로미터 지점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드넓은 벌판 한가운데서 서로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거리를 좁혔다.

한창 기세가 오른 크로아지크 군단은 물론이고, 자부심 강한 린드그렌의 병사들도 연합의 땅에 침입한 천둥벌거숭이들을 응징한다는 생각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기마군단으로 그냥 들이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쥬시아누스의 말에 크리들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이번 전투가 마지막은 아니지.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싸워야 할 걸세. 가능하면 전력을 보전해야 해.”

쥬시아누스도 크리들의 말에 수긍했다. 당장 린드그렌을 함락시킨다 해도 배터링 평야에 네 개 폴리스가 버티고 있었고, 마하라 산맥 북부에 트렌티나나 데이브 등의 강력한 폴리스들도 건재하다. 크로아지크 군단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주고, 배후를 혼란시켜야 아도니아로의 진군이 수월하다.

“방패는 3군단이 맡겠네. 2군단은 망치가 돼 주게. 다행히 적들이 참호를 파거나 진지를 구축하지 않았군. 단 반드시 접전이 시작된 후에 움직이게. 2군단의 기동력이면 어렵지 않게 측면과 배후를 장악할 수 있을 거네.”

“알겠다. 건투를 빌지.”

쥬시아누스가 자신의 군단을 지휘하기 위해 돌아가자 크리들은 린드그렌군의 진형을 살폈다. 요격을 나온 군단답게 공격형 방진을 구축하고 진군 중이었다. 어리석은 린드그렌 사령관은 크로아지크 기마군단의 무서움을 모른다. 아니면 자신감이 과하거나.

서로 마주보고 진군하는 상황이었다. 양군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필라의 거리에 들어섰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필라가 날았고, 서로 간에 기세를 올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터더텅!

한 번에 맞닥뜨린 방패 차징소리가 먼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현재 3군단이 배치된 생환자는 크리들 자신과 하이오지, 브리오티스뿐이었고, 2군단에는 쥬시아누스와 뮤트가 있다. 전세를 좌우할 만큼 많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군단병들의 질이 달랐다. 생환자들로부터 엉덩이를 걷어 채여 가며 훈련받은 군단병들은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졌다. 체력으로 압도하고, 경험으로 압도했다.

최초의 차징 이후 린드그렌의 젊은 병사들이 힘에서 밀려 버렸다.

밀집방진과 밀집방진의 대결은 결국 미느냐, 밀리느냐의 싸움이다. 밀리며 내뻗는 창은 힘을 얻기 힘들다. 반면 달려들며 내지르는 창은 본연의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3군단의 일선을 맡은 병사들은 글라디우스를 착검한 채 두 손으로 방패를 받쳐 들고 밀어냈다. 최초의 충격을 보조한 직후 이선과 삼선의 병사들이 린드그렌 병사들의 사각 방패의 틈에 파이크를 꾸겨 넣었다.

린드그렌 측에서도 창에 꿰뚫린 방패병이 쓰러지기 무섭게 2조의 방패병이 기민하게 앞으로 나섰지만 이미 기세를 탄 크로아지크 3군단병의 돌격을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지속적으로 밀리며 대열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린드그렌 1군단이 3군단에 맞서고 있을 때 후미에 처져 있던 린드그렌의 2군단은 좌우로 넓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달려 크로아지크 군단을 감쌀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처 진형이 갖춰지기도 전에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이 그들을 덮쳐 갔다. 진형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맞닥뜨린 기마군단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목덜미와 가슴에 가죽을 씌운 군마들이 파도처럼 린드그렌 2군단과 1군단의 측면을 덮쳐들었다. 다급히 땅이 파이크를 박고 방패를 세워 들었지만 해일처럼 밀려오는 파도는 그 정도로 막아 낼 규모가 아니었다.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말의 무게와 속도, 그리고 관성이 린드그렌 2군단 진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양익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 린드그렌 1군단도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에 측면과 후면을 내줘야 했다. 방어가 취약한 측면과 후면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린드그렌의 병사들은 전투다운 전투도 치르기 전에 산산이 찢어져 패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세를 잃은 보병군단이 기마군단을 따돌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4킬로를 패퇴하는 사이에 린드그렌 병사 대부분이 차디찬 벌판에 몸을 뉘였다. 그나마 후방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군단장들과 호위기대는 무사히 이탈에 성공했지만 린드그렌의 주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비겁한 지휘관이 되었다.

전투 후 크로아지크 군단의 피해는 전사자 백여 명에 부상자는 이백 여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부상자 중 전투력을 잃은 병력은 삼 할에 지나지 않았다. 손실 군마의 숫자는 백 마리가 조금 넘는 정도로, 준비된 예비마의 숫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양군 합쳐 18,000명이 맞붙은 전투의 결과 치고는 터무니없는 수치였다.

그 이후 벌어진 모든 전투가 이와 같았다. 그 어떤 강력한 군단도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을 상대할 수 없었다. 배터링 평야에서 지원 나온 군단들도 2군단의 단독작전에 깨져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고, 패잔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출격한 린드그렌의 병단들도 2군단의 제물이 되었다.

3군단이 전차처럼 묵직하게 진군한다면 2군단은 바람처럼 뛰어다녔다. 두 군단의 거리는 최대 이틀 차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함께 움직이는 크리들조차 2군단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과한 자신감으로 수성전을 포기하고 요격에 나섰던 린드그렌은 허무하게 모든 병력을 소진했다. 아무리 자부심이 높고, 복수심에 불탄다 해도 객관적인 전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으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크로아지크 병력이 린드그렌에 도달하기도 전에 시민들은 짐을 싸서 피난길에 올랐다. 결국 크로아지크 군단이 린드그렌의 성문 앞에 섰을 때는 결사항전을 외치는 한 개 사단 병력만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크로아지크 군단을 맞이했다.

“이다음은 어딘가?”

쥬시아누스의 말에 크리들이 대답했다.

“커트리안 님의 전언이 있었네. 3군단은 세라실을 공략한 후 남하하란 지시였고, 2군단은 마하리 산맥 북부를 잠시 교란해 달라는군.”

“카디널 평원을 접수할 생각인가?”

“단기간에 끝날 전쟁은 아니니까.”

“교두보를 마련할 셈이군.”

“라쿠스와 그레체, 로두카를 먹었다는군. 엄브로시아와 판티노만 먹으면 남이스테르는 동맹의 차지가 되는 거지.”

“후방에 대한 걱정은 덜어 버릴 수 있겠군.”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성문을 뚫어야지?”

크리들의 말에 쥬시아누스가 씨익 웃어 보였다.

“지켜만 보게.”

린드그렌성에는 해자가 없었다. 그동안 침탈당할 염려도 없을뿐더러 군사력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곳보다 높았다. 해자 따위의 불편한 장치는 하등 필요가 없었다. 해자가 없으니 도개교도 필요 없었고, 여닫이 형태의 웅장한 성문을 만들어 달았다. 하지만 그건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 앞에서 치명적인 단점이 되었다.

쥬시아누스는 여섯 마리의 갈리온을 두 줄로 엮은 후 그 가운데에 거대한 통나무를 매달았다. 그리고 그 통나무 위에 버티고 서서 린드그렌 성문을 향해 갈리온을 돌진시켰다.

갈리온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몬스터다. 필러 몇 발에 쓰러지지는 않는다. 갈리온들은 쥬시아누스의 살기에 길들여져 고통도 잊고 미친 듯이 뛰었다. 광포화하여 날뛰는 대신 광포하게 달렸다.

성벽 위에서 결사항전을 외치던 린드그렌 수비대는 뿌연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갈리온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적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문이 튼튼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쿵! 와직!

성문의 빗장이 단번에 부러져 나갔다. 갈리온 여섯 마리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리 두꺼운 걸쇠도 갈리온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파죽지세였다.

사천여 기의 기마대가 성문으로 난입했다. 성문 앞에 대기 중이던 소규모 방진은 그들이 지나가는 것만으로 철저히 짓이겨져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성벽 위에 올라 있던 병사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3군단병들을 보자 전의를 상실했다.

크로아지크군은 삽시간에 인구 십이만의 폴리스를 장악했다.

장하게도 시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남았던 시장은 치욕적인 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성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마지막 한 명의 병사가 남을 때까지 죽음으로 버텼겠지만 허무하게 성문이 깨지고 나자, 피난을 떠나지 못한 시민들이 발목을 잡았다. 문서를 받아 낸 크리들은 시민들을 남김없이 성 밖으로 내몬 후 주요 시설에 불을 질렀다. 이백 년간 성세를 구가하던 린드그렌의 영화는 이걸로 막을 내렸다. 향후 십 년 이상은 아무것도 못하고 폴리스의 복구에 전념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세라실 정도의 폴리스는 3군단만으로도 충분하네.”

“좋네. 그럼 커트리안 님의 지시대로 2군단은 북부를 좀 흔들어 놓은 후 결합하지.”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쥬시아누스가 떠나는 동료들을 위해 오랜만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크리들의 뇌리에 깊이 파고들었다. 평범한 미소였건만 왠지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전투를 치르면서 기마군단의 기동력과 무시무시한 위력을 실감했기에 홀로 남겨 둔다고 해서 크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웬만해서는 쥬시아누스의 2군단이 위험할 일이 없겠지만 설사 위험해지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본대와 결합할 수 있는 신속 기동대였다. 그럼에도 크리들은 이상하게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쥬시아누스, 세라실까지… 아니네. 무운을 빌겠네.”

크리들은 잠시 주저하며 세라실까지 함께 가자고 말할까 하다가 괜한 기분 때문에 작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 같아서 생각을 접었다.

“자네도 건투를 비네.”

쥬시아누스는 갈리온 머리를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 또한 크리들의 눈에 각인되었다. 크리들은 고개를 털며 애써 상념을 떨쳐 버렸다. 최근 들어 부쩍 심해진 착란 증세 탓이라 생각했다.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쥬시아누스와 헤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진 탓이다.

크리들의 3군단은 린드그렌을 벗어나자마자 서남진을 시작했고, 쥬시아누스의 2군단은 그대로 남하해 배터링 평야 북서쪽에 진을 쳤다.

맹주 사례시오를 중심으로 한 배터링 평야의 4개 폴리스는 아연 긴장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지만 막상 크로아지크의 기마군단에 위협을 받고 보니 그 중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린드그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힘 한 번 못쓰고 패퇴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기마군단에 대항하기 위해 나름 철저히 준비해 놓긴 했으나, 그렇다고 두렵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배터링 평야의 폴리스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과 달리 사흘이 지나도록 기마군단은 평야 내로 진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크로아지크의 기마군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베터링 공동체는 당황했다. 요충지마다 진지를 구축하고, 갖가지 함정을 파며 만전을 기한 것이 무색하게 기마대는 한순간에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리고 기마군단이 나타난 장소는 폴리스 트렌티니였다. 과거 뱅갈스톤 산성에 주둔했다가 쥬시아누스의 매복에 전멸한 초크 장군의 기마사단이 바로 이 트렌티니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쥬시아누스의 기마군단이 확보한 말들 중 상당수가 바로 그 기마사단에게서 노획한 말들이었다. 그야말로 쥬시아누스와는 악연인 관계였다.

트렌티니 성은 린드그렌과 달리 깊은 해자와 높은 성벽, 강력한 성문으로 무장된 폴리스다.

쥬시아누스는 트렌티니를 직접적으로 공략하지 않고 기마군단 특유의 기동력을 살려 트렌티니 주변만 철저히 파괴하고 다녔다. 농경지와 목축지가 초토화되고, 소규모 둔전들과 성외 영지들이 파괴되었다. 피해를 방관하지 못한 트렌티니에서 요격에 나섰지만 성을 벗어난 순간 기마군단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출진했던 군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트렌티니로 도망쳐 들어갔다. 트렌티니는 기마군단의 위력에 치를 떨었다. 장병기로 무장한 기마군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 어떤 방패도 기마 창병들의 차징을 받아 낼 수 없었고, 그 어떤 스크럼도 기마군단의 돌진을 저지하지 못했다.

트렌티니성에 웅크린 세 개 군단은 감히 성 밖으로 나설 생각도 못하고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영지가 초토화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다시 감쪽같이 사라진 기마군단이 엉뚱하게도 배터링 평야 남쪽 사례시온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북부 대륙 역사상 이런 기동력을 발휘한 군단은 없었다.

사례시온은 배터링 평야의 터줏대감이자 맹주격인 폴리스였다. 평야에 자리 잡은 폴리스답게 매우 부유했고, 인구도 많았다. 전혀 공격당할 위험이 없었음에도 부를 과시하기 위해 아도니아에 버금갈 정도로 높고 강력한 성벽을 구축해 놓았다. 그게 사례시온을 살렸다.

웅장한 성곽을 보고 쥬시아누스는 사례시온을 공략할 생각을 버렸다. 딱히 공략할 필요도 없었다. 커트리안에게 받은 전갈은 마하리 산맥 북쪽의 폴리스들이 산맥을 넘어 중부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견제만 하라는 지시였다. 때문에 쥬시아누스는 트렌티니에서 그랬듯 철저히 주변만 파괴했다. 배터링 평야의 다른 폴리스들에서 대규모 요격대를 급파했으나 몇 차례 교전을 펼친 후, 쥬시아누스는 기마군단을 이끌고 유유히 종적을 감춰 버렸다. 약간의 병력 피해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린드그렌에서 쥬시아누스의 2군단과 헤어진 크리들의 3군단은 남이스테르 강 중부에 위치한 인구 7만의 소규모 항구도시, 세라실을 접수했다. 세라실은 원래 강성한 폴리스가 아니다. 병력수도 3천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부분 수군위주였기에 크리들의 3군단을 막아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배를 띄우고 농성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띄울 만한 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보름 전 악신의 방문을 받아 대부분의 배와 항구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악신은 하필 밤 시간에 세라실을 방문했다. 날이 저물어 항구로 돌아 온 고깃배까지 싹쓸이 되었다.

세라실 입장에서 크리들의 방문은 연이은 재앙이었던 셈이다.

크리들은 세라실에서 약탈한 대량의 보급품을 끌고 카디널 평원을 향해 남하했다.

현재 카디널 평원은 동맹군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커트리안이 직접 이끌고 출정한 일곱 개 군단이 북진하고, 라그란을 출발한 다섯 개 군단이 남진하여 카디널 평원에서 합쳐졌다. 이 엄청난 대군 앞에 엄브로시아와 판티노는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도시를 넘겨줘야 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연합이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도니아 평야에 위치한 일곱 개 폴리스에서 선발대로 다섯 개 군단이 출진했고, 뒤를 이어 다시 열 개 군단이 출진했다. 병력만 놓고 보았을 때는 오히려 우세했으나 막상 판티노를 중심으로 회전이 벌어지자 밀린 건 오히려 연합군이었다. 결국 엄브로시아에 이어 판티노마저 동맹에 내주고, 주전선이 카티널 평원과 아도니아 평야 사이에 위치한 루이텐 구릉지로 고착되었다. 그 후 보름간 양진영 모두 대량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소모적이고 지루한 공방전을 펼치는 상황이 돼 버렸다.

대륙력 882년 5월14일, 전쟁 발발 후 한 달 반이 흘러간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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