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통일 전쟁의 서막
둘은 그렇게 라쿠스 시에 도착했다. 라쿠스 시는 그레체와 달리 항구와 폴리스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구조였다. 폴리스는 그레체와 달리 높고 튼튼한 성벽에 둘러싸인 웅장한 도시였고, 라쿠스 시의 항구 페르만시오는 서문에서 뻗어 나온 가도를 따라 십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레체항도 상당했는데, 페르만시오항은 그레체보다 최소 두 배는 컸다. 항구에는 전선들과 수송선, 어선들로 빽빽했다. 무엇보다 장관은 항구에 나란히 정박되어 있는 갤리온들이었다. 네 대는 수리에 들어간 듯 육지로 끌어 올려져 있었고, 아홉 대만 웅장한 모습으로 항구에 정박돼 있었다. 총 열세 대, 들었던 것보다 두 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사이에 추가 건조가 있었던 것 같다.
연합에서도 다가올 격전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벤트와 함께 항구를 둘러보던 조노량은 장엄할 정도로 거대한 갤리온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중원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전선은 보지 못했다.
항구 출신인 벤트도 거대한 갤리온의 위용에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저렇게 큰 배는 나도 처음 보는군.”
저렇게 크고 멋진 건조물을 부숴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빼앗으면 좋을 텐데, 너무 아깝군. 밥 먹고 시작할 건가?”
“아까워도 어쩔 수 없지. 밥 먹고 하세.”
항구와 배에 들어간 돈만 해도 폴리스 하나를 건설할 만한 비용일 것인데, 둘은 미련 없이 밥을 먹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그레체에서 그랬듯 번듯한 식당을 잡고 넉넉히 음식을 시켜 먹은 후 또 넉넉히 계산을 해 줬다.
식사를 하는 동안 슬슬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목표는 항구다. 그 규모가 가히 장해도 항구와 전선들만 철저히 뭉개고 빠지면 되는 일이었다.
벤트가 짐을 매달고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조노량은 항구 끝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조노량이라고 해도 이 정도 규모의 항구를 파괴하려면 상당한 내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조노량은 선 채로 소주천을 마치고 내력을 집중했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갈무리되지 않은 정광이 쏟아져 나왔다. 삼 갑자 내공이 담긴 눈빛이 황혼 빛을 뚫고 폭사되었다. 그것도 잠시,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으로 정광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준비를 마친 조노량의 몸이 캐터펄트에서 쏘아진 거탄처럼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에 기환을 소환하고, 왼손으로는 연속으로 파마장을 날렸다.
번잡스런 하루일이 끝나고 천천히 어둠에 쌓여 가던 평화로운 항구가 악신의 강림으로 인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회오리바람이 항구를 휩쓸듯 조노량의 동선을 따라 일정한 방향을 타고 모든 시설이 터져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로 건조된 선착장이 터져 나가고, 목조지붕이 통째로 하늘로 떠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밝혀 놓았던 횃불이 흩어지며 나무로 된 시설물에 불씨를 옮겨 놓았다.
느닷없이 발생한 재난에 항구를 수비하던 경비대조차 머리를 처박고 공포에 질렸고, 항구 전체가 몸서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물 위에 떠 있던 접안 시설이 끊어져 떠내려갔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쓰레기처럼 흩날렸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항구가 파괴되고 가까이 떠 있던 배들이 파괴됐다. 그리고 수리시설에 올라 있던 갤리온의 옆구리가 터져 나감과 동시에 굉음을 내며 옆의 배로 쓰러져 충돌했다. 갤리온들은 서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연속으로 넘어가며 깨졌다.
항구의 주요 시설들을 파괴한 조노량은 물 위에 떠 있는 배들로 옮겨 갔다. 배와 배를 건너뛰며 규모가 되는 전선 위주로 기환을 던져 넣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거대한 갤리온들이었다. 기환을 맞은 배들은 구멍이 뚫리다 못해 산산이 터져 나갔다. 워낙 육중한 갤리온들이었기에 오히려 빨리 가라앉았다. 경비대와 인부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항구를 빠져나가기 바빴다.
조노량은 작고 가까운 배엔 파마장을 쓰고, 크고 먼 곳에는 기환을 날렸다. 몸은 북쪽에 있으나 남쪽에 정박한 배들이 더 크게 부서졌다. 항구 전체가 동시에 공격을 받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항구가 깨져 나가고 있으니 누구도 이 엄청난 사태를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이 엄청난 재앙이 인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날은 어둡고, 사람들은 터져 나가는 구조물과 구조물에서 쏟아져 나온 파편들을 피하느라 눈 돌릴 틈도 없었다.
항구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넋을 잃고 재앙을 지켜봤다. 난데없는 태풍이 불어 와 항구만 집중적으로 파괴하는 느낌이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몇 층 높이로 쌓아 올렸던 하적물이 회오리치며 떠올랐다가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사람들은 손도 못 쓰고 수백 년 라쿠스 시의 역사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조노량은 마지막 갤리어스에 기환을 던져 놓은 후 물 위를 달렸다. 대기하고 있던 벤트가 잘린 노를 조노량의 앞쪽에 던져 놓았다.
둘은 그렇게 이스테르강 최강의 해군도시를 지워 버린 후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여정을 잡았다. 페르만시오 항과 갤리온의 파괴, 커트리안이 지시했던 일 중 가장 핵심적인 임무는 끝냈다. 몇몇 항구만 더 마무리 지으면 모든 임무가 완수된다.
이후 페르만시오 항에서 수면 위를 날아가는 유령을 보았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라쿠스 시에 앙신이 강림했다는 소문으로 번져 갔다.
그레체에 이어 라쿠스에도 발생한 천재지변은 라쿠스에 대기 중이던 그림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켈커티스로 전해졌다. 커트리안은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준비해 두었던 병력을 남쪽으로 몰았다.
트라쿠스가 미처 예상치 못한 시점에 전면전의 신호탄이 울렸다. 대륙력 882년 봄, 향후 통일전쟁이라고 불릴 위대한 전쟁이 막을 올렸다.
커트리안이 직접 끌고 나선 군단만 일곱 개 군단이었다.
켈커티스 방위를 위해 1군단만 켈커티스에 남기고, 커트리안의 직할군단인 2군단을 중심으로 3군단과 5군단도 함께 출정길에 올랐다. 켈커티스 300년 역사상 한 개 군단만을 남기고 도시를 통째로 비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불어 오누리스만에 주둔 중이었던 아미나 군단과 쿠아란 군단도 원정길에 합류했다. 라쿠스의 갤리선이 모두 파괴된 마당에 오누리스만을 방비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트렌티노에서 출격한 트렌티노 최정예 1군단이 결합했고, 마테오를 거치며 마테오의 공격 군단 하나를 추가로 합류시켰다.
커트리안이 이끄는 일곱 개 군단은 그대로 남하를 계속해 엿새 후 마리노에 도착했다.
무려 일곱 개 군단,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드넓은 들판에 보이는 건 오직 병사들의 투구뿐이었다.
마침 간 보기 공격에 들어왔던 아도니아 4군단도 그 모습을 보았다. 들판을 가득 메운 동맹의 깃발과 갈색 물결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했다. 아무리 천하의 아도니아 군단이라고 하더라도 몇 배나 되는 대병력을 상대로 버텨 낼 간담은 없었다. 무적군단이라고 불리던 로크리안의 3군단도 오누리스만에서 네 개 군단을 상대로 병력의 삼분의 이를 잃고 패퇴하지 않았던가?
아도니아 4군단장 콜롬비아누스 델루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르비스로 발길을 돌렸다.
오르비스성에 처박힌 콜롬비아누스는 대대적으로 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성벽을 높였다. 그동안의 전술을 버리고 방어 위주의 전술로 전격 선회했다.
연합의 병력이 오르비스에서 옥쇄를 각오하고 웅크리고 있는 시간, 커트리안은 마리노 총사령관인 템쉬 장군을 만나고 있었다.
“아니, 오르비스를 치지 않는단 말씀이시오?”
늙어 가며 처졌던 템쉬의 눈꺼풀이 젊은 날의 그것처럼 치켜 올라갔다. 도무지 이 젊은 바실레오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조금 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오르비스의 아도니아군은 이 개월 이내에 철수할 것이오.”
“허허, 어떻게 확신하시오이까?”
“본토가 유린당하는데 언제까지 오르비스에서 버틸 거라고 보시오, 장군?”
“하지만 연합의 땅이오. 일곱 개 군단이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녹아 버릴 거요.”
“일곱이 아니라 열넷이오. 그리고 곧 후발대가 출발할 것이고! 또한 장군이 병력을 보존한다면 다시 세 개 군단이 추가되겠지.”
커트리안의 말에 템쉬는 침음을 흘렸다. 자신감인가? 아니면 무모함인가?
이 젊은 바실레오스는 도대체 무엇을 꿈꾸고 있단 말인가? 그래 열넷이라고 치자. 아니, 스물이라고 치자! 그게 뭐 어쨌다고? 지난 오 년 동안 동맹의 땅으로 넘어왔었던 연합의 군단만 서른이다. 공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만 그 정도라는 얘기다.
당연히 도시에 웅크리고 있을 병력은 그 두 배도 넘을 것이다. 연합에 소속된 폴리스는 서른셋이다. 공격군과 수비군은 규모 자체가 다르다. 더구나 지리도 익숙지 않은 연합의 땅에서?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만약 아도니아 4, 5군단이 철수하지 않는다면 장군 휘하에 있는 병력은 남이스테르 강을 넘지 않아도 좋소. 단, 내 말대로 그들이 철수할 경우 빠르게 오르비스를 접수한 다음, 바로 그레체 쪽으로 상륙하시오.”
템쉬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젊은 바실레오스는 역사에 무엇으로 기록될까? 북부통일을 이룬 위대한 지도자? 아니면 켈커티스를 망친 마지막 바실레오스?
노장, 템쉬는 커트리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열정도, 자만도, 흥분도, 차가움도 느낄 수 없었다. 미적지근하다고 할까? 도무지 의도를 읽기 힘든 눈이다.
“좋소. 바실레오스 명이니 따르리다. 또 아도니아가 오르비스를 비운다면 당연히 수복할 거요. 그렇게 된다는 전제하에서만 이스테르를 넘겠소. 그렇지 않다면 절대, 한 발자국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거요. 돌아와서 책임을 물으시오. 목을 내어 드리리다.”
하루의 지체도 없이 그날로 커트리안군은 동쪽으로 진군했다. 마리노의 안내자를 따라 남이스테르 강에 도착하자 미리 준비시켜 놓은 수십 척의 배가 커트리안군을 맞이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수송선은 물론이고, 고깃배까지 총동원했지만 삼만이 넘는 병력을 도하시키기에는 부족해도 많이 부족했다. 덕분에 커트리안군은 여러 번에 나눠 도하를 진행해야 했고, 도하에만 보름이라는 시간을 소요했다.
하지만 연합의 경비선들이 모조리 풍비박산이 난 후였기에 커트리안군의 도하 사실은 아주 늦게야 연합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크랄 산맥 북쪽 라그란 시 쪽에서도 동맹의 대규모 병력이 도하를 시작했고, 라쿠스의 잔존 수군과 수상전이 벌어졌다. 전선과 수군의 질에서는 라쿠스 쪽이 월등히 우세했지만 규모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라쿠스의 몽충에 동맹의 전선들이 연이어 깨져 나갔지만 라쿠스의 전선들도 오래지 않아 수십 척의 작은 전선들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라쿠스 전함의 뱃전으로 갈고리가 걸렸다. 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 육박전이 시작되자 오래지 않아 라쿠스는 몇 척 남지 않은 전선들마저 동맹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쥬시아누스의 크로아지크 2군단이 크로아지크를 비워 두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북부 대륙 최초의 기마군단이었다. 더불어 크리푸에 주둔하고 있던 크리들의 크로아지크 3군단도 존스캐빈시의 앞마당을 거쳐 당당히 북이스테르 강을 넘어 남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