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30화 (130/142)

130. 이들도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노는 물살을 가르기 좋도록 유선형으로 깎아 낸다. 다듬지 않은 나무판에 비해 밀기가 월등히 수월했다. 나름 재미가 들린 벤트는 힘을 주어 멀리 밀어내도 보고, 잡고 헤엄치며 장난도 쳤다. 갑자기 속도를 높이거나 멈춰 세워도 봤다.

하지만 노리앙은 노에 못이라도 박아 놓은 듯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노리앙의 체구가 큰 편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가벼울 수는 없었다.

벤트는 노리앙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결론 내 버렸다. 그가 구사하는 마법만 해도 그랬다. 속으로 헤아려 보니 제법 많은 수의 마법을 구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본 것만 해도 탐지 마법, 헤이스트 마법, 홀드 마법, 사일런트 마법, 스톤스킨, 블링크, 윈드 에로우였고, 오늘 그가 구현한 공격 마법은 전설 속의 7서클 마법인 소닉 버스터 급이라도 해도 과하지 않을 위력이었다. 대상을 폭발시켜 버리는 특성까지 유사했다. 노리앙이 손도 안 대고 성문을 깬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관계로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벤트가 보았을 때는 분명 마법이었다. 그 어떤 전사도 노리앙과 같은 기술을 구사하진 못한다.

벤트와 조노량은 철저히 파괴된 그레체 항을 빙 돌아 인적이 드문 모래톱에 상륙했다. 다음 목표는 연합 최강의 해군도시라는 라쿠스 시였다. 라쿠스 시는 우디네스 삼각주 동안에 위치한 폴리스로 과거 오누리스만에 상륙했던 거대한 갤리온의 주인이었다. 커트리안이 반드시 초토화시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항구, 페르만시오가 바로 이 도시 소속이다.

그레체에서 라쿠스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대로 남이스테르 강을 따라 크랄 산맥과 르부르토 산맥 사이 좁은 협곡을 거슬러 헤엄치는 방법이고, 두 번째 방법은 르부르토 산맥을 관통하는 방법이었고, 세 번째는 카디널 평원 서쪽을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벤트에게 너무 고된 일정이라 제외했고, 두 번째 루트는 몬스터가 많은 험산들을 통과해야 했기에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둘은 카디널 평원을 지나게 되었다. 중간에 연합의 폴리스인 로두카와 엄브로시아를 거치는 루트였다.

적지를 관통하는 루트였기에 불안할 법도 했지만 조노량은 물론 벤트 역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준비된 신분패도 있었고, 여차하면 몸을 빼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정은 무미건조할 만큼 평탄했다. 먼저 가까운 로두카 시에 들러 여행용품과 식량을 보충했고, 며칠간 노숙을 한 후에 엄브로시아 시에 도착했다.

북부인들의 삶은 동맹이나 연합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사이였지만 문화적으로도 비슷했고, 언어 면에서도 거의 동일했다.

거칠지만 유쾌한 성격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활보했다. 밝고 활기찼다.

간혹 용병 차림의 사내들이 한 무리씩 지나다니기도 했다. 대부분 르부르토 산맥의 몬스터 사냥꾼들이다.

르부르토 산맥은 남이스테르 강을 가운데 두고 동맹 쪽에 위치한 크랄 산맥과 나란히 달리는 길쭉한 산맥이다. 험준하기로 따지면 크랄 산맥보다 오히려 더했다. 그 험지에는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활동한다.

가장 흔한 몬스터는 고블린이나 오크였고, 가장 무서운 몬스터는 오우거였다. 그리고 가장 가치 있는 몬스터는 트롤이었다. 트롤의 피는 마법사의 시약 재료로 귀한 취급을 받는다.

르부르토 산맥에서 가장 가까운 엄브로시아 시가 바로 이들 사냥꾼들의 후방 기지이자 판매처였다. 사냥꾼들은 보통 이삼십 명 단위로 움직이는데, 목숨을 건 사냥인 만큼 실력들이 만만치 않았다.

적의 폴리스 한복판에 들어왔음에도 벤트는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죽은 자의 것이라 해도 차츠라가 준비해 준 아도니아 신분패는 진품이었고, 소지한 자금도 넉넉했다. 대륙 최강의 사내와 일행이었고, 오오라가 실린 검이 아니라면 흠집조차 내지 못할 최고의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불안하거나 초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노량 입장에서도 매우 홀가분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낯선 세계의 풍물들을 접하고 신기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실컷 즐겼다. 전에처럼 돈이 없어서 야간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커트리안이 당부한 기한도 넉넉히 남았기에 급할 것도 없었다.

엄브로시아를 벗어나면 또다시 한참을 야지로 떠돌아야 했다. 여행을 위한 물품과 비상식량을 구입하고 적당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큰사슴 여관’이라는 이름의 중급 여관이었는데, 이름에 걸맞게 홀 중앙벽에 멋진 뿔을 가진 수사슴의 머리가 박제되어 있었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내려온 조노량과 벤트는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장에서 이것저것 집어먹었던 터라 간단한 안주 거리와 엄브로시아 특산 흑맥주를 시켜 놓았다.

“엄브로시아는 중부 대륙의 엄브로이안 왕국 출신들이 세운 도시라네. 전통 깊은 왕국이지. 지금에 와서는 남이나 마찬가지지만 아직까지도 교류가 이어지긴 한다더군.”

벤트는 도시의 기원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도 어언 십 년이 넘어가지만 사실 조노량에게는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수용소에서 4년 반, 마계의 문에서 5년을 보냈다. 마계의 문을 벗어나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크로아지크에서 보냈다. 겨울 한철을 켈커티스에서 났다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다였다. 기초 지식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벤트가 해 주는 모든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조노량이 관심 있게 듣자 신이 난 벤트는 이것저것 마구 떠들어 댔다.

“그래서 이곳이 몬스터 사냥꾼들의 본거지가 된 거지. 우리가 흔하게 잡던 트롤은 돈 덩어리고, 고블린만 해도 약재로 가치가 제법 있지. 오우거의 가죽도 특상품으로 쳐주는 귀한 재료지. 성체 한 마리 분이면 적어도 사십 골드는 받을 수 있네.”

지난 번 오우거를 잡고 촌장에게 이십오 실버를 받았던 기억이 났다. 백 실버에 일 골드니 대략 이백 분의 일을 받은 셈이다.

“한 잔 더 할 텐가? 제법 맛이 좋군. 주인장, 여기 큰 걸로 두 잔!”

점원이 쪼르르 달려와 주문을 받아갔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시킨 것이 어느덧 열 잔이 넘어갔다. 조노량이야 멀쩡했지만 벤트는 혀가 꼬이고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져 갔다.

“그 흔했던 트롤이 이곳에선 귀한 몸 취급을 받는단 말씀이야. 사실 트롤 정도는 일검에 한 마리씩 아니었나?”

벤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았나 보다.

건너편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냥꾼 셋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얼치기 용병들인가 본데 허세가 대단하군.”

“크크크, 막상 트롤을 만나면 꼬리를 말 놈들이 허풍은!”

“입심은 장하네그려.”

오만한 벤트가 발끈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난 번 그레체에서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했던 벤트인지라 시비거리가 생기자 얼씨구나 하고 몸을 일으켰다. 번거로워지는 것을 저어한 조노량이 그런 벤트를 잡아 앉혔다.

“그만두게. 쓸데없이 피를 보고 싶진 않군.”

“하긴, 저런 조무래기들을 상대하기엔 너무 귀한 몸이시지.”

그 말 또한 사냥꾼들의 귀에 정확히 전달되었다. 앞의 허세야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니 비웃고 넘어가지만 방금의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사냥꾼 하나가 인상을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고 나니 상당한 거구였다.

“허, 조무래기? 이 시커먼 촌놈들이 위대한 오우거 슬레이어를 몰라보고 함부로 입을 놀려?”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렁우렁한 목소리다.

조노량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적의 폴리스에 들어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때 한쪽에서 전사 복장의 젊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옷차림을 보니 여행자들인 것 같은데, 적당히 사과하고 끝내는 게 어떻겠소?”

분명 벤트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거구의 사내는 중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넌 또 뭐지? 어르신들 일에 버릇없이 끼어들면 안 되지.”

그 말에 젊은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비를 말리고 대신 사과를 받아 주려 했음에도 자신에게까지 시비를 걸어온 셈이다. 마침 레이디를 모시고 식사를 하던 참이라 이대로 물러나기도 민망했다.

“말이 지나치군.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가?”

“뭐가?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망신당하지 말고, 고개 박고 마저 처먹지 그래?”

일에 묘하게 돌아갔다. 당사자인 벤트는 오히려 이게 더 재미있겠다는 듯 관전 모드로 돌아섰다.

젊은이는 한눈에 봐도 전사 차림이었다. 레이디 앞에서 무시를 당하고 참아낸다면 복장을 바꿔야 한다.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 놈이군!”

젊은이는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벤트는 이제 미소까지 지으며 상황을 주시했고, 조노량은 인상을 찌푸렸다.

“노리앙, 내기할까? 난 젊은 친구에게 걸고 싶군.”

“어허, 자네로 인해 일어난 일일세. 그리고 주먹질로는 필패, 검을 뽑아도 이기기 어렵겠군.”

“오오라 유저인데?”

“적어도 하나는 노련한 스크래치군.”

“오호?”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거구의 사내와 젊은이가 마주섰다. 거구의 사내가 위로는 머리 반 개, 옆으로는 한 명을 더한 정도로 덩치가 컸다.

“애송아, 쓸데없이 나서면 다치는 법이다.”

“덩치만 큰 놈이 말을 함부로 하는군.”

둘 모두 거친 북국의 사나이들이다. 대화는 그걸로 마침표를 찍었다.

거구의 사내가 콧바람을 뿜더니 젊은 사내의 어깨를 잡아 갔다. 완력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젊은 사내도 상당한 수련을 쌓은 듯, 가볍게 몸을 틀며 거구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신기한 것은 손님들이 알아서 주변에서 비켜 주는 것이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손님들은 테이블째 들고 물러나 공간을 넓혀 주었다. 이런 싸움에 무척 익숙한 모습이었다.

젊은 사내의 주먹이 그대로 거구의 사내의 안면에 꽂혔다. 쩍 소리가 날 정도로 정통으로 들어간 주먹이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이런 주먹을 맞고 버틸 수는 없는 법, 정신을 잃지는 않았어도 순간적으로 주저앉는 것은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구의 사내에게는 동료가 둘이나 더 있었다. 왜소한 몸집의 사내가 날렵하게 젊은 사내를 기습했다. 어깨로 태클을 걸고 그대로 젊은 사내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보통 몸놀림이 아니었다. 젊은 사내는 가까스로 태클은 버텨 냈지만 주먹은 허용하고 말았다. 가죽슈트 덕에 큰 충격은 없었지만 왜소한 사내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연속으로 날아오는 주먹에 정신없이 물러나다 음식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에 걸려 결국 엎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엉덩방아를 찧었던 거구의 사내가 젊은 사내의 다리를 잡아채며 몸으로 눌러 버렸다. 안 그래도 힘에서는 밀리는데, 자세까지 이래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러면 검을 뽑을 틈도 없겠군.”

벤트의 말에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뽑는다면 다치는 건 오히려 젊은 사내가 될 것이다. 지금 싸움에 개입하고 있지 않은 마지막 사내가 문제였다. 분명 오오라 유저는 아니었지만 거구의 사내가 쓰러졌을 때 순간적으로 내보이던 기세는 보통이 넘었다. 검투반 시절, 노련한 스크래치는 어렵지 않게 어설픈 오오라 유저를 압도했다.

조노량이 보았을 때 젊은 사내는 이제 갓 오오라를 다루기 시작한 초급 유저였다. 반면 마지막 사내가 보이는 기세는 과거 A클래스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스크래치, 자벤투스에 못지않다.

사냥개가 주제도 모르고 호랑이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승냥이에게 당한 꼴이다.

전사차림의 젊은 사내는 거구에 눌려 더 이상 저항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젊은 사내와 함께 왔던 레이디는 실망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니었나보다.

“나 참, 조금 거들어야겠군.”

쓸데없이 나섰다가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을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심하게 다루지 말게.”

조노량은 가볍게 대꾸해 줬다.

최상급의 소드마스터라도 벤트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스크래치 정도야 말해 무엇 할까.

“어이, 조무래기! 살고 싶다면 그만 떨어져라!”

한참 짝짝 달라붙는 주먹맛에 취해 있던 거구의 사내가 귀찮다는 듯 왜소한 사내에게 말했다.

“저 자식은 네가 좀 만져 줘라.”

거구의 사내는 벤트의 말을 무시하고 젊은 사내를 깔고 앉아 계속해서 주먹질을 이어 갔다.

“애송이가 감히 어르신 얼굴에 주먹질을 해?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왜소한 몸집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벤트의 앞을 막고 나섰다. 하지만 벤트의 신형은 순식간에 왜소한 사내를 지나쳐 거구의 사내를 걷어차 버렸다.

뻥!

젊은 사내의 주먹질엔 주저앉는 정도로 그쳤지만, 벤트의 발길질은 그 정도로 그칠 위력이 아니었다. 벤트의 발길질 한 방에 그 큰 거구가 번쩍 들리다시피 해서 나가떨어졌다. 벤트를 놓치고 당황하던 왜소한 사내가 급히 몸을 날려 태클을 걸어왔지만 그런 태클에 꿈쩍할 벤트가 아니다. 왜소한 사내는 마치 철벽에라도 부닥친 듯 그 자리에 멈췄고, 벤트는 사내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무릎을 날렸다. 왜소한 사내의 안면에서 쩍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조노량이 조용히 읊조렸다.

‘무림인이 다 됐군.’

왜소한 사내마저 나가떨어지자 마지막 사내가 쾌속하게 몸을 날렸다. 조노량의 예상대로 보통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마치 보법이라도 펼친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벤트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오크라도 주춤거리게 만들 강력한 타격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지막 사내가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벤트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사내의 주먹은 벤트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꽂힌 채 멎어 있었는데, 벤트는 꿈쩍도 안 하고 마지막 사내를 노려봤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마지막 사내가 몸을 비틀며 두 번째 주먹을 날렸지만 그 주먹은 벤트의 손에 그대로 잡히고 말았다.

조노량의 말대로 마지막 사내는 오오라 유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하고 노련한 스크래치였다. 하지만 마리노의 비만병사처럼 힘으로 벤트를 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벤트는 마지막 사내의 주먹을 틀어쥐고 힘을 가했다. 사내의 손목이 역방향으로 꺾여 올라갔다. 비명을 지르던 사내가 다른 손과 발을 총동원해 벤트를 타격했지만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은 공격은 벤트에게 안마나 다름없었다.

그사이 잠시 정신을 놓다시피 했던 거구의 사내가 머리를 털며 일어서려 했다. 맷집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한 사내다. 벤트는 마지막 사내의 주먹을 그대로 틀어쥔 채 끌고 가 거구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걷어찼다.

그걸로 거구의 사내는 완전히 정신 줄을 놓았다.

“져, 졌소. 항복이오. 우리가 잘못했소. 아악, 놔… 놔주시오.”

“그래? 잘못한 걸 깨달았나? 그럼 좀 맞아야지.”

벤트는 사내의 손을 풀어 준 후 대신 사내의 뺨을 좌우로 몇 차례 갈겨주고 물러섰다.

그리고 기절한 거구의 얼굴에 흑맥주를 부었다. 마지막 사내에게선 완전히 등을 보인 상태였다. 입가로 흐른 피를 닦아 내던 사내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에 찬 검으로 이동해 갔다.

벤트는 돌아보지도 않고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검을 뽑는다면 넌 틀림없이 죽을 거다, 조무래기!”

마지막 사내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사냥터가 아닌 술집에서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잔뜩 얻어터지고 상체만 겨우 일으켜 세운 젊은 전사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날 점심 조노량과 벤트는 여관 앞에 대어진 마차를 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친께서 많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젊은 사내는 멍들고 부은 얼굴로 한껏 미소를 그려 냈다. 그래 봐야 찌그러진 얼굴일 뿐이지만 말이다.

사내가 타고 온 마차는 갈리온이 끄는 정식 일두 마차였다. 오오라 유저가 아니라면 운행이 허락되지 않는 마차다.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는 아니었지만 정갈하고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이런 대접에 익숙한 벤트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윗사람 행세를 했고, 조노량은 번거로운 표정을 지을 뿐 굳이 초대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일행이 도착한 곳은 삼 층 규모의 아담한 저택이었다. 제법 넓은 정원을 거쳐 저택 앞에 도착하자 중년을 넘긴 초로의 사내와 그에 걸맞은 나이의 노부인이 직접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조 프레디라고 하오.”

스스로 조 프레디라고 소개한 초로의 사내가 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벤트도 자연스럽게 조의 손목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조노량도 마찬가지로 손목악수를 나눈 후 벤트를 따라 노부인에게 목례를 했다.

“모자란 아들놈을 도와주셨다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정말 대단한 전사 분이라 들었소.”

“별일 아니었소. 안 그래도 손 좀 봐주려던 참이었소.”

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초로의 사내와 평대를 했다.

종신 목민관의 아들인 벤트에게는 오랜 시간 몸에 밴 기품이 있다. 존은 경험이 많은 남자답게 즉시 이 점을 알아봤다.

“자, 안으로 듭시다. 이야기는 식사를 하면서 마저 나눕시다.”

이름이 조인 사내와 성이 조인 사내는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원래 사각 식탁의 경우 주인이 중앙에 앉고 손님이 한쪽 편에 앉는다. 하지만 도움을 받고 답례로 초대한 관계에는 서로 마주 보며 앉는 게 관례다.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중앙 상석을 비워 두고 우측 첫 자리에 조 프레디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아들 포트 프레디가 순서대로 앉았다.

그리고 당연히 좌측 첫 번째 자리에 앉으리라 예상했던 벤트 대신 조노량이 상석에 앉았다.

조 프레디는 엄브로시아의 명문가인 프레디가의 방계로, 이 대 전에 본가에서 갈라져 나왔다. 현 가주와는 6촌 지간이었기에 포트 프레디의 경우 7촌이 되는 셈이다. 보통 북부의 전통에 따르면 다섯 세대 후 10촌 이상 벌어지게 되면 새로운 성씨로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조 프레디는 본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았다. 조 자신도 본가의 기사 출신이었고, 아들인 포트도 이번에 본가의 기사로 들어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맛이 있을지 모르겠소만,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안히 드시기 바라오. 대단한 전사 분들이라 들었소.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곳 출신이신지 여쭤도 되겠소?”

벤트가 커다란 송아지 스테이크를 기품 있게 썰어 내며 대답했다.

“아도니아 출신이오만 그리 유명한 집안은 아니오. 그나마도 3세대 방계요.”

벤트는 정치가의 아들답게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조노량은 이것저것 음식을 덜어 와 맛봤다. 화려한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제법 맛깔스러웠다.

“우리와 비슷하구려. 듣자 하니 격투술이 대단하다고 하더이다. 식사 후에 아들놈에게 한번 지도받을 영광을 베푸실 수 있겠소? 이제 소드마스터 초급에 들었는데, 기교 면에서는 영 발전이 없다오.”

“한두 번 지도를 받는다고 무슨 실력이 늘겠소?”

“견문을 넓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소?”

“대접을 받은 것도 있고 하니 뭐, 그리합시다.”

“껄껄, 고맙소. 역시 아도니아의 전사답게 화통하시구려. 덕분에 이 늙은이도 식견을 넓힐 수 있게 됐소.”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차를 나눈 후 실내에 마련된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초급에 들었다지만 노리앙의 말대로 포트의 실력은 대단치 않았다. 느리고 힘도 부족했다. 케이론 목민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선생들을 모시고 실력을 다졌던 벤트의 눈에는 어설픈 기교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포트, 주먹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무릎의 반동이 허리로 전달되고, 다시 어깨를 거쳐 팔꿈치와 손목에서 극점을 찍는 거다.”

벤트가 강하게 내질러 오는 포트의 주먹을 옆에서 툭 쳐 내자 포트는 제풀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니, 아니야. 그렇다고 무식하게 힘만 주면 그렇게 되지.”

벤트의 발이 비틀거리는 포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발길질을 당하고 바닥에 널브러지게 되자 포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탄성을 살려야지. 짧게 끊고, 바로 되돌려야지! 아무리 강해 봐야 맞지 않으면 말짱 헛일임을 모르나?”

툭하면 걷어차이고, 밀쳐지고 뒹굴고, 정신없이 삼십여 분이 지나갔다. 거의 농락당하는 수준으로 당한 탓에 포트는 기진맥진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체면을 살리기 위해 발버둥친 탓이다.

잠시 쉰 후 다시 검을 들고 대련을 펼쳤지만 검이라 하여 벤트를 당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이제 겨우 초급에 든 포트는 그 대련만으로도 새로운 경지를 엿봤다.

가주인 조 프레디는 벤트의 놀라운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묵어 갈 것을 제안했고, 벤트가 이를 쾌히 수락했다. 그들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검술을 논했다.

“벤트 님만 해도 이렇게 출중하신데, 노리앙 님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못하겠소이다.”

조의 말에 벤트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노리앙이야말로 최강의 전사요. 북부는 물론…….”

좀 과하게 나가는 것 같아 조노량이 눈치를 주자 벤트는 그제야 말을 얼버무렸다.

“흠흠, 과장이 지나쳤소. 하여간 웬만한 기사는 노리앙의 일검도 감당하지 못할 거요. 아도니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이거든.”

아비인 조나 아들인 포트나 모두 소탈한 성격이라 조노량과 벤트도 부담 없이 어울려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노량은 연합의 사람들도 동맹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또 한 번 느꼈다.

동맹이나 연합이나 서로 간에 유사한 문화를 가졌고, 정치체계도 비슷했다. 그동안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사람들의 성격도 소탈하고 화통했다. 중원에서처럼 권력으로 백성들을 찍어 누르지도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공정한 것을 중요시했다. 황제도 없었고, 심지어 지도자도 시민들의 투표로 선출했다. 누구라도 노력만 한다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셈이다.

그레체 시의 순박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 부자, 동맹의 사람들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무엇을 위해 죽을 동 살 동 싸우는 것일까? 싸움을 그치기 위해 싸운다는 커트리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노량과 벤트는 이틀간 조의 집에 머문 후 하루만 더 묵어 가라는 만류를 겨우 뿌리치고 다시 일정에 올랐다.

엄브로시아 시에서 라쿠스 시까지 가려면 르부르토 산맥에서 뻗어 나온 지산을 몇 개 거쳐야 했다. 제법 험로였지만 그 이상의 험지를 겪어 왔던 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낯이 익은 세 명의 사냥꾼이 포함된 강도단을 만나는 등 작은 여흥거리가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여흥거리는 물론 사람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든 지루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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