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가질 수 없다면 부순다
대륙력 882년 3월 7일 오후 3시경 조노량과 벤트는 그레체 시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레체 시는 남이스테르 강에 접한 항구도시로, 연합의 곡창 중 하나인 카디널 평원 남서쪽 삼십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11만 명가량의 인구를 가진 중급 규모의 폴리스로 항구도시답게 상업과 어업이 발달해 있었고, 라쿠스 시에는 못 미치지만 제법 강력한 수군을 보유한 폴리스였다.
조노량과 벤트는 그레체 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주변을 관찰했다. 그레체 시는 바다처럼 넓은 강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육지 쪽으로는 두꺼운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항구 쪽으로는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었다. 그만큼 수군력이 강력하기도 했거니와, 동시에 이스테르강 쪽에서 공격받을 일은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항구에 떠 있는 배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각종 형태의 어선과 수송선도 많았고, 돛과 노를 모두 단 중형 갤리온이 있는가하면, 노만 있는 갤리와 갤리어스도 보였다. 특히 노가 이단으로 장착된 갤리어스가 인상적이었다. 선수에 창처럼 뻗은 뿔로 상대 선박을 들이받아 깨뜨리는 몽충형으로 보였다.
“수군력에서 밀린다고 항구들을 모두 파괴해 버리다니… 참 어이없는 작전이군. 그나저나 저걸 어떻게 다 파괴하지? 전투선만 해도 삼십 척은 넘겠군.”
“배야 구멍만 내면 알아서 가라앉을 것이고, 선착장을 파괴하는 게 고되겠군.”
그 말에 벤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많은 배에 일일이 구멍을 내고 다니겠다고?
칼집 좀 내는 걸로는 절대 가라앉힐 수 없는 대형 선박들인데? 그리고 저 거창한 항구를 파괴하는 것을 겨우 고된 일이라고? 마치 조금 피곤한 노역에라도 동원됐다는 말투 아닌가?
벤트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여러 차례 나눠서 게릴라전을 펼쳐야겠군. 며칠이나 예상하는가?”
“며칠은 무슨? 한 시간이면 되지 않겠나?”
말도 안 되는 말에 벌컥 화를 내려던 벤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다시 체념한 듯 한숨을 토해 냈다.
“음… 자네 마계의 문에 남아서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건가? 마왕이라도 한 마리 잡아먹은 건가?”
“별소리를 다 하는군.”
조노량은 찔끔했다. 먹지는 않았지만 잡기는 했다. 카임과 타무즈! 강대한 마왕들이다. 가장 무서웠던 건 베히모스였다. 하기와 맞붙었을 때 조력만 했는데도 거의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하기가 비약적으로 강해졌고, 자신도 이전에 비해 월등히 성장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결국 베히모스는 놓치고 말았다. 샤를 잃고 반쯤 미쳐있던 시기의 일이다.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천행이다.
샤에 관한 일이나 마왕을 잡은 일은 동료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떠벌여서 좋을 일이 아니었다.
“그레체에 들어가 식사나 하고 시작하는 것이 어떤가?”
조노량의 말에 벤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폴리스를 망치려 들어가는 자가 뻔뻔스럽게 그곳에서 식사를 하겠다니, 어이가 없구만.”
“도시 재건에 미리 몇 푼 보태려는 걸세.”
“그까짓 푼돈으로 뭘 하라고?”
“비싼 걸로 먹세.”
“흥!”
벤트는 콧방귀를 끼면서도 폴리스 방향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언덕을 내려가 천천히 걸어서 그레체 시 동문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 서서 검문을 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대충 수상한 자만 찍어서 신분패를 보는 정도다.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평스런 모습이다. 하긴 수군이 취약한 동맹이 강상으로 침투할 리도 없었고, 육상군이 그레체까지 들어올 일도 없으니 태평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얼굴의 조노량과 시커먼 인상의 벤트는 여지없이 경비병들에게 걸러졌다.
“이보시오! 잠시 신분패 좀 봅시다.”
병사의 제지에 벤트가 거만한 표정으로 신분패를 내밀었다.
위조된 아도니아의 시민패다. 정밀 검사를 해 본다면 죽은 자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겠지만 그레체 같은 곳에서 그렇게까지 검사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패의 진위만 가릴 뿐이었다.
병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벤트에게 시민패를 돌려주었다. 조노량의 신분패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되돌아왔다.
벤트는 마치 자신의 폴리스에라도 들어가는 듯 턱을 치켜들고 당당히 성문으로 들어섰다. 조노량의 밝은 귀에 병사들의 투덜거림이 들여왔다.
“하여간 아도니아인들은 너무 거만하디니까. 남의 폴리스에 와서까지 재수 없게 굴긴.”
조노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벤트의 오만함이 아도니아인의 자긍심으로 비쳐진 모양이다.
언덕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레체 시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다. 도시 전체의 색상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오후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그늘진 곳 없이 반짝거렸다.
대부분의 항구도시가 그렇듯 경사진 언덕에 세워진 폴리스였다. 강이 범람했을 경우를 대비한 입지다.
그 언덕을 끼고 작고 아담한 석재 건물들이 둥글둥글한 선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촘촘히 박혀 있었다. 모양은 가지각색인데 반해 건물의 색상은 온통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마치 언덕위의 건물들이 모두 하나의 건물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보였고, 가까이서 보면 거대한 성 같아 보였다.
조노량과 벤트는 항구에 위치한 예쁜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레체는 원래 수산물로 유명하지. 남이스테르 강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대형 바라만디가 잡히는 곳도 이곳뿐이지.”
“하하, 수산물이라.”
조노량은 절로 침이 고였다. 그레체에 들어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노량이 살던 제현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성시였기에 해산물이 풍부한 편이다. 특히 겨울이면 싱싱한 해산물로 가득했다. 사람은 뭐든 자주 먹던 음식을 즐기게 된다. 조노량도 해산물을 무척 좋아했다. 한동안 맛보지 못했기에 더욱 입맛이 돌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사님들! 다양하고 싱싱한 수산물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해맑은 표정의 청년이 큰 소리로 일행을 맞이했다.
조노량과 벤트가 입고 있는 옷은 마물의 가죽을 가공한 옷이다. 갑옷형태로 재단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갈리온이나 오우거의 가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귀한 물품이다.
물론 모양은 볼품없다. 켈커티스에서 조금 손을 보긴 했지만 낡고 투박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전사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북부 대륙에서는 어딜 가나 전사란 칭호를 선호한다.
“독립된 룸이 있나?”
청년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있습죠. 육인실인데 괜찮겠습니까?”
“물론! 육인분 이상 시킬 거니까 괜찮아. 안내해라.”
“화통하신 전사님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널찍한 테이블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저희 집에 단둘뿐인 독실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흠흠, 그럭저럭 괜찮군.”
납작한 돌을 가지런히 깐 바닥도 청결했고, 외벽과 마찬가지로 흰색 회칠을 한 실내도 깔끔했다. 강 쪽으로 커다란 창문이 뚫려 있어 전망도 좋았다.
“이 집에서 잘하는 요리는 뭐지?”
“무엇이든 잘합니다만, 메인으로는 특히 틸라피아 튀김과 바라만디 찜, 케이치 타르타르, 크랩숫불구이는 저희 집을 따라올 식당이 없지요. 그리고 에피타이저로는 베스냉채와 살몬 양념구이가 좋습죠. 날생선을 좋아하신다면 바라만디 크로키트도 일품입니다.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디저트로는 우르친 당조림과 스쿼트 푸딩, 케니젤리 등이 있습니다.”
“좋군. 지금 말한 것 다 가져오고, 코투르 스테이크도 되나?”
“오, 안목이 있으시군요? 당연히 됩니다. 마침 아주 싱싱한 놈이 들어왔습니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바라만디 크로키트는 특별히 두 접시를 주게!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지!”
“음료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과일쥬스로는 헤니언과 필라온이 싱싱하고요. 술 종류로는 존스캐빈 산 몽드르동 와인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노량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이곳 언어에 익숙해졌다지만 생전 들어도 못 본 수산물 이름과 다양한 요리명까지 배운 건 아니다. 조노량은 벤트와 청년의 대화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주문을 마친 벤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내 고향 케이론은 서이스테르 강 하구에 위치해 있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이네. 아주 다양한 해수산물들이 존재하지. 덕분에 수산물 요리가 매우 발달했다네. 아마 북부 대륙 전체를 놓고 봐도 수산물 요리로 케이론을 따라갈 폴리스는 없을 걸세. 그나마 견줄만한 곳이 그레체라더군. 기대가 되는군.”
주문한 지 오래지 않아 에피타이저부터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켈커티스와 달리 전체와 주 요리, 후식이 차례로 나오는 코스방식이었다.
베스라는 생선의 살을 얇게 저민 후 갖가지 향채로 풍미를 돋운 요리가 나왔고, 벤트가 특별히 주문한 날생선 요리인 바라만디 크로키트도 맛깔스럽게 차려져 나왔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식감이 뛰어나 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조노량도 맛있게 먹었다. 과거에는 물도 끓인 물만 마셨지만 이곳에 와서는 마물의 고기도 날로 먹었던 터라 특별한 거부감은 없었다.
메인으로 커다란 구운 게 요리가 나왔고, 튀김과 찜 등이 육인용 식탁을 가득 채웠다. 민물 생선 특유의 흙 맛이 풍취를 더했다.
워낙 넉넉히 시켰던 터라 둘이 실컷 먹고도 절반 이상 남았다. 기본적으로 생환자들이 대식가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양이었다.
그렇게 모든 식사를 마치고 둘은 디저트로 나온 존스캐빈산 와인을 홀짝이며 다음 일을 계획했다.
“어둡기 전에 슬슬 준비해야지?”
조노량의 말에 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구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항구를 지워야 한다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둘은 음료를 홀짝이며 천천히 시간을 보낸 후 오후 늦게 식당을 나섰다. 안 그래도 통이 큰 벤트는 만족스런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무려 오 골드나 쾌척했다. 서빙을 담당했던 청년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다.
청년을 보며 벤트가 혀를 찼다. 이제 곧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천천히 항구를 둘러보던 벤트가 갤리어스의 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노를 잘라내면 훌륭한 보드가 되겠군. 충분하겠지?”
“매우 날렵하게 생겼군. 괜찮은 생각일세.”
“좋아, 시작하지.”
연합에서 가장 유명한 미항이 그렇게 어이없이 파괴되었다.
접안시설이 통째로 날아가고, 항구에 떠 있던 배들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힘없이 가라앉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시설을 파괴하는 정도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 피치 못할 살상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파괴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조노량은 손짓 한 번, 발 짓 한 번에 거대한 배가 산산이 부셔져 나갈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 시간여 만에 연합이 자랑하던 아름다운 항구가 폐허로 변해 버렸다.
동시다발적으로 선착장이 날아가고, 사방에 떠 있던 배들이 폭음과 함께 가라앉는 모습을 바라보던 항구 경비대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해졌다. 손을 놓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아야 했다.
물 위에 떠서 엄청난 마법을 난사하는 사악한 마법사에게는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단인 배는 다 파괴되었고, 설사 있다 한들 손 짓 한 번에 날아갈 것이 뻔한 수수깡 같은 배를 타고 나가 적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육지에 서서 필라를 날려 보지만 마법사에게는 닿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천재지변이었고, 재앙이었다.
마법의 맥은 마계대전 당시 대부분 끊겼다. 그럼에도 시대별로 대단한 마법사가 등장하곤 했다. 마계대전 직후 등장했던 ‘탈루한의 살육자’라고 불리던 마법사가 있었다. 중부대륙에서도 강성함을 자랑했던 왕국 하나를 며칠 만에 지도상에서 지워 버린 마법사다. 그 사건 이후 종적을 감췄지만 그때의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금 그레체의 병사들의 뇌리에 떠오른 이름이 바로 그 이름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막아 낼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앞에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마저 망연해 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레체 항을 초토화시킨 조노량은 물위에 떠다니는 갤리어스의 노를 하나 주워들고 손잡이를 쳐 냈다. 그것만으로도 손바닥 두 개를 겹쳐 놓은 것 같은 유선형의 날렵한 보드가 만들어 졌다. 사람의 무게를 버틸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조노량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위에 떠서 조노량이 항구와 배들을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벤트가 혀를 내두르며 노의 밑동을 잡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마물도 보통의 마물이 아니군. 이건 뭐 마왕이나 다름없잖아?”
조노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쳤다. 도력 높은 무당의 장문이라면 이 정도 될까? 이건 뭐, 낙엽을 타고 대해를 건너고 일장에 절벽을 허문다는 전설상의 고인과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삼류무사로 지내왔기에 그런 고인들의 얼굴을 볼 기회도 없었지만 길고 짧은 걸 대볼 정도는 된다는 자만심이 생겼다.
‘이대로 중원에 돌아간다면 천하를 진동시킬 신진고수의 등장인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