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연합의 땅으로!
켈커티스 4군단장 템쉬는 물론 성벽 위의 병사들도 두 사람의 활약을 똑똑히 지켜봤다. 그들을 처음 발견한 건 적진을 향해 미친놈처럼 달려 나갈 때였다. 성문이 깨지자마자 이성을 잃고 성문 밖으로 뛰쳐나간 신병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의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앞서 달려 나간 사내는 비조처럼 빨랐다. 연합군의 머리 위를 번쩍번쩍 뛰어넘어 순식간에 새까만 점이 되었다.
두 번째로 달려 나간 사내의 모습도 만만치 않았다. 아도니아 4군단의 깃발을 든 정예병들 사이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그 직후 연합의 진형이 갈대숲 갈라지듯 일직선으로 갈려져 나갔다. 피분수가 터져 나오고 사람의 신체가 조각나 비산했다.
템쉬는 올해 나이 쉰셋이다. 열 살 이후로 사십삼 년을 수련했다.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최상급의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단기로 아도니아 4군단에게 달려들 용기는 없었다.
연합의 맹주답게 아도니아 기사들의 실력은 상당했다. 기사 대전을 펼친다면 누가 와도 자신이 있었지만 둘러싸인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차치하고라도 병사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두 번째 사내는 거리낌 없이 적진을 파고들어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도륙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무위가 가능하단 말인가?
잠시 후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새처럼 적진을 뛰어넘던 첫 번째 사내가 캐터펄트를 장난감 부수듯 부숴 버리는 장면이었다.
기본적으로 캐터펄트는 높이 오 미터에 너비는 십오 미터에 이른다. 스윙스틱은 무려 삼십 미터에 이른다. 그 정도 크기가 되지 않으면 돌덩이를 멀리 날릴 수 없다. 캐터펄트에 사용되는 자재도 단단하기로 이름 난 비연목이나 카리나루목이 아니면 안 된다. 일반적인 목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도를 지녔다. 각재의 지름만 해도 최소 오십 센티 이상이다. 워헤머로 두드려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런 캐터펄트가 퍽퍽 깨져 나갔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는데, 지나간 자리에 있던 캐터펄트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캐터펄트에 달라붙어 있던 투석병들은 감히 달려들 생각조차 못하고 자신들의 공성병기가 깨져 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이 누군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조금 전 인사를 나눴던 생환자들이다.
오랜 기간 원정에 나와 있었기에 생환자들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겉모습만 보았을 때는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소문이 과장됐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무력은 인간의 무력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템쉬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었다.
템쉬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가 있었다. 켈커티스 4군단, 3사단 제7기대 소속의 종사, 코리였다.
코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엄청난 모습을 바라봤다. 처음 성벽 아래 나타났을 때 이미 누군지 알아봤다.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옷차림이었다. 약간 낡은 듯 보이는 갈색 가죽옷을 걸친 말라깽이! 조금 전 술집에서 함께 팔씨름을 했던 사내였다.
자신이 어깨를 두드리며 놀리던 사내는 말라깽이가 아니라 사신(死神)이었다. 자신은 사신의 팔을 붙잡고 팔씨름을 했고, 사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놀린 셈이다. 코리는 저도 모르게 뻐근해져 오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건 템쉬였다. 켈커티스에서의 향락도 마다하고 야전에서 평생을 싸워온 노장답게 서둘러 사태를 파악했다.
두 사내가 엄청난 활약을 해 주고 있지만 연합의 병력은 이미 성문 가까이 육박한 상태였다.
“개진! 성문을 막아라! 공격 안 하고 뭣들 하는가? 어서 필라를 날려!”
그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독전관들이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 댔다.
성벽 아래에 포진하고 있던 사단장들이 진형을 정비하고 좁은 성문을 틀어막았다. 상대는 아도니아의 정예병들이다. 켈커티스 4군단 병사들 못지않은 강병들이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도 서둘러 필라를 날리고, 준비된 돌덩이를 성벽 아래로 쏟아부었다.
성가퀴(battlement)에는 수십 개의 갈고리와 사다리가 걸렸다. 도끼로 갈고리의 밧줄을 쳐 내고, 기다란 장대를 든 수비병들이 달려들어 사다리를 힘겹게 옆으로 밀어냈다. 밀기도 힘들었지만 사다리에 매달린 병사들의 무게 때문에 옆의 사다리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성벽 위라고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돌덩이를 집어 던지기 위해 회랑 밖으로 상체를 내밀다가 성벽 아래에서 던져 대는 필라에 꿰뚫려 추락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치열하긴 성문 앞이 더했다. 캐터펄트에 파괴돼 떨어져 나간 성문을 경계로, 각각 동맹과 연합을 대표하는 정예병들이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벌써 몇 년간 이어진 전투다. 이제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익숙했다.
“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안 되는 거 알잖아. 이제 고만 좀 와라!”
켈커티스 병사가 소리치자 아도니아 진영에서도 맞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무식한 켈커티스 놈들아, 그만 좀 버티고 항복해라! 지겹지도 않느냐!”
양군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 소모전을 벌이고 신병을 보급 받는다. 그리고 다시 소모전을 펼친다. 이게 몇 년간 이어진 패턴이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켈커티스 4군단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도니아 병사들은 단단하게 틀어막힌 성문을 뚫지 못했다.
공성전에서는 아무래도 공격 측이 피해가 크기 마련이다. 한동안 접전을 벌이던 아도니아 병력들은 더 이상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퇴각은 아주 질서 정연했다. 방패를 치켜 올리고, 서로를 보호하며 침착하게 물러났다. 아도니아군은 한 번의 실패로 허둥대는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아도니아 측은 이번 전투에서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보름이면 새롭게 보급을 받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다시 공격해 올 것이었다. 단, 파괴된 캐터펄트의 재보급은 만만치 않은 문제일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은 여유가 생겼다.
전투가 끝나자 병사들은 익숙하게 목재를 날아오고 밤새 성문을 만들어 올렸다.
다음 날이 되자 템쉬는 성안을 샅샅이 뒤져 조노량과 벤트를 찾았다. 조노량과 벤트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갈색나무 숲’이라는 이름의 여관에 묵고 있는 것을 아는 병사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수배가 끝나자마자 템쉬는 두 명의 호위기사만 대동하고 ‘갈색나무 숲’이라는 여관을 찾았다. 그리고 아침을 먹기 위해 내려오는 조노량 일행과 딱 마주쳤다.
템쉬는 새삼스런 눈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처음 저 남자가 군단장의 지위를 가졌다고 했을 때, 새로운 바실레오스에게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같은 생환자라 하여, 혹은 친한 자라 하여 마구잡이로 직위를 내린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다. 하지만 어제의 활약을 지켜본 후에는 그런 우려를 싹 날려 버렸다. 대신 템쉬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저런 엄청난 전사가 마리노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시 묻겠소. 이곳엔 무슨 일로 오신 거요? 오르비스를 정찰하기 위함이오? 바실레오스께서는 오르비스로 진군할 계획인 거요?”
대답도 단도직입적으로 돌아왔다.
“알려 줄 수 없어서 미안하오.”
같은 직급의 사람을 심문하거나 추궁할 수 없는 일, 더구나 말도 안 되는 무위를 지닌 전사였다. 그리고 템쉬도 북부인답게 강한 전사에 대한 과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템쉬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밀인가 보군. 하긴 그대와 같은 전사가 허튼 일을 맡았을 리는 없겠구려.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인 점 사과하겠소.”
조노량과 벤트는 템쉬가 한사코 함께 식사를 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아침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 템쉬는 끝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검술에 대해, 생환자들에 대해, 마계의 문에 대해. 템쉬는 나이 지긋한 노장답지 않게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조노량은 밥이 입으로 넘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산만했다. 둘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노장군을 피해 서둘러 마리노를 벗어났다.
그날 저녁 늦게 조노량과 벤트는 남이스테르 강의 장대한 물줄기 앞에 섰다.
보무관이 자리 잡은 제현은 산동 반도 남쪽에 위치해 있다. 바다를 접한 성시는 아니었지만 바다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때문에 바다에 꽤 익숙했다.
벤트의 말대로라면 분명 강이었다. 조노량의 눈에도 분명 강으로 보였다. 파도가 일고 있지만 분명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노량의 밝은 시력에도 건너편 강변이 보이지 않았다. 강변은커녕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만이 넘실대고 있었다.
“무슨 강이 이렇게 넓은가?”
“다 이렇게 넓은 건 아니야. 오누리스만 쪽이 그나마 좀 좁지.”
“얼마나?”
“배를 저으면 대략 하루면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다.”
“좁은 데가 하루? 그럼 여기는?”
“여기선 이틀은 저어 가야 하지.”
조노량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바다로군.”
“강이라니까.”
“바다 같은 강이라는 말일세.”
“여기도 넓긴 하지만 사실은 우디네스 삼각주 쪽이 더 넓지.”
조노량은 입을 쩍 벌렸다가 말을 이었다.
“서이스테르 강은 이렇게 넓지 않았네.”
“그래서 주로 그쪽을 공격 루트로 삼는 거지.”
조노량은 결국 체념한 듯 현실적인 것을 물었다.
“어떻게 건널 건가?”
“일단 자네를 실을 만한 통나무를 구해야겠지.”
“자네가 밀고?”
“영광으로 알라고! 자네니까 이 벤트 님이 수고를 해 주는 거다. 다른 자들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
벤트는 턱을 치켜들며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맙군.”
“통나무를 구하지.”
“이거면 되겠군.”
조노량은 일 척 반 정도 되는 나무 조각을 주워 들었다.
“너무 작지 않나? 가라앉을 거야.”
“이것도 충분하네. 주저앉아도 될 정도군.”
벤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중간에 빠져도 난 모르네.”
“걱정 말게.”
“물 위에 띄우고 올라타 보게.”
벤트의 요청에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 수고를 조금 덜어 주지. 얼른 따라와야 할 걸세. 안 그러면 내가 떠내려가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벤트가 의아한 눈빛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조노량은 나무토막을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실 가능하다고만 생각했지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진기를 빠르게 휘돌려 사지백해로 골고루 흩어 놓았다. 충만한 내기가 솜을 파고드는 물처럼 전신을 파고들었다. 골고루 파고든 진기가 빠르게 회전하며 상승의 기운을 담아냈다.
몸이 깃털처럼 가뿐해지자 조노량은 양 다리에 폭발적으로 힘을 주었다. 조노량의 신형이 살처럼 쏘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조노량의 몸이 남이스테르 강으로 빨려들어 갔다.
가속을 받은 조노량의 몸이 빠르게 수면을 치고 나갔다. 물의 저항을 극대화하기 위해 발을 최대한 평평하게 만들어 연달아 수면을 걷어찼다. 동시에 살짝 구부린 발가락으로 수면을 밀어내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백여 미터를 달려 나가자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게 한계였다. 발목이 잠기자마자 물이 잡아당기는 힘이 강해졌고 가속이 그 인력을 이기지 못했다. 조노량은 들고 있던 판자를 앞쪽으로 집어 던지며 마지막으로 발을 굴렀다. 살같이 쏘아진 신형이 나무판자를 밀어내며 올라서자 나무판자가 뒤집힐 듯 출렁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중심을 잡고 수면 위를 미끄러졌다.
그 순간 조노량은 새로운 사실을 자각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떠 있을 수만 있다면 물을 차고 나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과 함께 한 발로 수면을 밀어냈다. 조노량을 태운 나무판이 쑤욱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등평도수(登萍渡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넜다는 모 선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번엔 벤트가 놀랄 차례였다.
강변에 서서 조노량의 모습을 보며 멍청해져 있던 벤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런, 미친?”
한참 만에 나무판에 올라선 조노량을 보고서야 서둘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벤트의 모습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신체 구조로 어떻게 그런 속도가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쏜살같이 조노량을 따라잡았다. 마치 잉어가 물살을 가르듯 유연하면서도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벤트는 헤엄을 치면서도 속으로 연신 투덜거렸다.
‘내가 미쳤거나, 저 친구가 사람이 아닌 거다.’
그날 벤트는 밤늦도록 나무판을 밀어 그 넓은 강을 가로질렀다. 벤트가 속도를 내자 배로 이틀은 저어 가야 한다던 거리가 세 시간으로 단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