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27화 (127/142)

127. 상처 입은 영혼들

그 타종소리에 병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빌어먹을 연합 놈들이 또 왔군. 어서 복귀하세!”

한 병사의 외침에 모든 병사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만 병사도 몸을 일으킨 후 벤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 말라깽이. 연합놈들을 혼내 준 후 한잔하세! 자네처럼 힘이 센 친구는 평생 처음이야.”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한 벤트가 대답했다.

“약속한 거다, 뚱땡이. 난 여기 묵고 있으니까 언제든 와서 술을 사라고!”

“껄껄! 좋아, 남자답군!”

술집에 앉아 있던 병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대로 복귀했다. 진탕 퍼마시던 모습과 달리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우리도 잠깐 가 보는 게 어떨까, 노리앙?”

조노량도 이번 제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싸움구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소화도 시킬 겸, 이곳 마리노의 싸움도 지켜볼 겸 병사들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문에 다가갈수록 쿵쿵거리는 충격음이 커졌다.

“캐터펄트군. 성문을 깨려는 수작이지.”

벤트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줬다.

“캐터펄트? 발석거 같은 건가?”

“발석차 말이군. 맞네, 바위를 날리는 장치지.”

대충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중원에서도 간혹 사용되는 공성무기였다.

성문 가까이 다가가자 민간인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병사들이 나서서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벤트가 신분패 하나를 제시하자 두말없이 통과시켜 주는 것은 물론 호위 겸 감시병까지 붙여 주었다. 사단장급 장군임을 증명하는 켈커티스의 특수 신분증이었다. 물론 조노량의 두 번째 신분패는 군단장급 신분패였다. 이런 고위급 신분패에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특수한 마법적 표식이 있었는데, 마법사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둘은 성벽 바로 아래에 대기 중이던 2서클 마법사에게 다시 한 번 신분패를 검사받았다. 완벽한 신분패였기 때문에 둘은 그 즉시 성벽 위로 안내되었다. 켈커티스에서 사단장급 장군이 방문했으니 지휘관에게 안내하는 것이다.

마침 성벽 위에 나와 있던 켈커티스 4군단장 템쉬가 둘을 맞이했다.

“켈커티스에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벤트 폴비우스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조 노리앙 군단장입니다.”

군단장이란 말에 템쉬가 눈을 좁히며 조노량을 살폈다.

“군단장이시라고? 군단장이 왜 홀로 이곳에 온 거요? 몇 군단장이시오?”

“직급이 그럴 뿐, 맡은 군단은 없소.”

“흠, 새로운 바실레오스가 임명한 사람들인가 보군. 혹, 생환자요?”

“그렇소.”

“역시 그렇군. 대단한 전사들이라는 소문은 들었소만, 소문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지. 한 가지 주의를 주겠소.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는 내 전장이오.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쾅!

그 순간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템쉬 뒤편 십 미터 지점 흉벽에 떨어져 내렸다. 성벽이 우르르 울릴 정도로 강력한 타격이었다.

하지만 템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참관만 하시오. 알아들으시겠소?”

템쉬는 자칫했으면 짜부라졌을지도 모를 위험 속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강골임을 알 수 있었다. 일선 지휘관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품이다.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다.

“저 망루가 구경하긴 제격이지. 올라가 보시오. 모시게!”

벤트가 목례를 하자 템쉬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전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템쉬의 명을 받은 부관 하나가 와서 조노량과 벤트를 성벽 내측 망루로 안내했다.

망루 위에 올라서 바라보니 성문 밖 노지가 연합의 병사들로 빽빽했다.

연합군은 대략 백오십 미터 거리에 포진해 거대한 발석거들을 연신 감아 돌리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발석거가 일곱 대나 되었다.

“캐터… 가 상당히 크군?”

“캐터펄트! 저 정도는 돼야 거리가 나오지.”

조노량이 감탄사를 내뱉자 벤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캐터펄트라고 불리는 발석거에서 발사된 바윗덩어리가 연신 성문 주변 성벽을 두드렸다. 어떤 것들은 성벽을 넘어 들어오기까지 했다. 아마도 성문을 겨냥한 것이겠지만 정확도는 이곳의 발석거도 그다지 높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은 중원의 것보다 좋은지 성벽을 적중시킬 때마다 망루까지 진동이 전해져 왔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성문이 왜 그렇게 무지막지한가 했더니 바로 이런 공격에 대비해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성벽 위 회랑에도 캐터펄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상대의 캐터펄트를 맞히기에는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 다른 충격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하나가 정확히 성문을 가격한 것이다. 워낙 튼튼한 성문이라 단번에 깨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들썩거렸다.

성문 앞에 모여 있던 군단병들이 긴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몇 번만 더 가격당한다면 아무리 튼튼한 성문도 견디기 힘들 것이고, 성문이 깨지면 그다음에는 육박전이 벌어질 것이다. 진형을 짜고 적의 돌진을 막는 것이 성문 앞에 모인 병사들의 역할이었다.

성문이 깨어진다고 성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넓지 않은 성문을 틀어막고 버틸 수 있다면 좁은 성문 앞에 몰려든 적병들은 성벽 위에서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막아낼 수만 있다면 방어하는 측이 월등히 유리한 전투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또다시 바위 하나가 날아와 성문을 가격했다. 제대로 맞는 놈보다는 빗맞는 놈이 많았지만 언젠가는 뚫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분이 흐르자 또 다시 성문이 두드려 맞았고, 한쪽으로 잔뜩 기운 성문은 무너지기 직전 상태가 되었다.

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거 깨고 올까?”

“성문 말인가?”

“무슨 미친 소린가, 노리앙! 왜 아군의 성문을 부숴? 저 캐터펄트 말일세.”

“군단장에게 말버릇이 없군.”

“왜 노리앙만 군단장인 거야? 이 벤트가 우습게 보인단 말인가?”

조노량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저놈이 있으면 매번 성문이 두들겨 맞을 테니 우리가 해결해 주자는 말이지.”

“자신 있나?”

“자네와 함께 간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참관만 하라 했다네.”

“참관하고 있지 않나? 참관하다가 위기에 빠진 아군을 구한 것뿐이네.”

“그다지 위기 같아 보이지 않는군.”

“캐터펄트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기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또 하나의 바위가 성문을 정확히 두드렸다. 잔뜩 기울어져 있던 성문이 비스듬히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보더니 조노량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네, 가세!”

“어어, 노리앙, 난 저기까지 못 뛰어!”

“하하, 알겠네. 내가 모시지.”

조노량은 벤트를 번쩍 안아들고 경공을 발휘했다. 한 번 도약에 성벽 위에 내려서고, 두 번 도약에 성벽 아래에 도달했다. 단번에 뛸 수도 있었으나 벤트에게 충격이 갈 것을 대비해 나눠서 뛴 것이다.

“후아, 놀랍군. 메뚜기 아메조프는 저리가라잖아?”

“헛소리하지 말고, 잘 따라오게!”

말과 함께 조노량이 달리기 시작했다.

성문이 깨진 것을 확인한 연합군도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에 이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런 연합군을 향해 조노량과 벤트가 내달리고 있었다. 마치 수천의 군사들을 홀로 맞서러 나가는 장수들 같았다.

앞서 달리던 조노량과 연합의 병사들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설사 최상급 기사라도 군단 병력을 향해 단신으로 달려들지는 못한다. 그런데 연합의 병사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자를 발견했다.

어이없는 건 어이없는 것이고, 달려드는 적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선두에 달리던 병사가 자살자를 향해 글라디우스를 찔러 넣었다.

자살자에게는 방패도 없었고, 단숨에 좁혀진 거리 탓에 몸을 틀 여가도 없었다. 병사는 자신의 글라디우스가 완벽하게 자살자의 몸에 박혀들어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라디우스 끝에서 전해져야 할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필라를 막기 위해 들어 올렸던 방패에 육중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병사의 허리가 툭 하고 꺾여 나갔다.

조노량은 진각으로 병사의 방패를 밟고, 가볍게 몸을 띄워 징검다리 밟듯 다른 병사들의 방패를 차례로 밟고 도약했다.

방패를 밟힌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옆에서 달리던 병사가 파이크를 휘둘러 봤지만 조노량의 신형은 이미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다.

벤트는 브로드소드를 뽑아 들고 적진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벤트는 물고기 중에서도 미꾸라지에 가까웠나 보다. 바늘 끝처럼 뻗어 오는 파이크와 글라디우스의 숲을 거침없이 파고들며 브로드소드를 뿌렸다.

연합군의 무기는 벤트의 몸을 스쳐 가지도 못했다. 정면에서 벤트에게 방패를 들이밀었던 병사는 차징의 충격을 느끼지도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갔다. 또 다른 병사는 치켜든 글라디우스를 미처 내리기도 전에 팔뚝이 떨어져 나갔고, 뒤에서 찔러 오던 파이크는 중동이 잘려 나갔다.

벤트는 마치 갈대숲을 가르듯 적진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연합에도 기사가 있고, 종사가 있다.

그들이 단기로 돌격 진형에 파고든 벤트를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일반 병사들보다 월등히 빠른 검격과 오오라가 어린 창격이 날아왔다. 아무리 생환자라 한들 무적은 아니다. 특히 벤트는 쥬시아누스와 같은 강체를 얻지 못했고, 백발귀 폴과 같은 힘을 얻지도 못했다. 과거보다 월등히 강해지긴 했어도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상당한 힘을 소모해야 했다.

열댓 명의 기사를 상대하고 나자 벤트도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당장 위험해진 건 아니었지만 급속히 체력이 빠져나갔다.

벤트는 정면으로 짓쳐 오는 기사 하나를 베어 넘긴 후 투덜거렸다.

“노리앙, 나만 두고 가면 어쩌자는 거냐? 내가 저 같은 줄 아는 거야, 엉?”

하지만 이미 적진 한복판, 뒷일이고 뭐고 무작정 검을 뿌려 댔다. 마물들을 상대로 혼전을 벌이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오라를 머금은 글라디우스 하나가 팔뚝을 스쳤다. 허벅지에서도 통증이 밀려들었고, 목덜미가 길게 베어졌다. 가슴께에서도 피가 튀었다. 그렇다고 움직임에 불편을 느낄 정도의 상처는 아니다. 변이된 신체는 이 정도로 멈춰질 만큼 허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는 벤트의 정신은 흔들어 놓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적이다.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흉험한 살기가 환상처럼 과거의 기억을 일깨웠다. 마물들 틈에 홀로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벤트는 어느새 그때와 같은 흉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이 붉게 물들고, 입가에는 마물의 미소가 걸렸다. 이곳이 어딘지도,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도 잊고 살육의 대상을 찾아 눈을 번득거리기 시작했다. 근육은 이미 너덜너덜해졌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쳤다.

그렇게 점점 이성을 잃어 가던 벤트의 어깨를 누군가 툭 하고 건드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짐승처럼 예민해졌던 감각을 뚫고 접근한 무언가를 향해 벤트는 본능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막 검을 내뻗으려던 벤트의 팔이 누군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 직후 벤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트, 정신 차리게! 자네답지 않게 추하구만.”

전장 한복판임에도 긴장감 없는 목소리, 노리앙이었다.

벤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노리앙의 우려 섞인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노리앙, 왜 혼자서 가고 그래! 같이 가야지. 우린 늘 함께여야잖아?”

조노량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벤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후딱 가서 부수고 온다는 게 조금 늦었나 보다.

하지만 왠지 보채는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좋지 못했다. 비단 벤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환자들 모두의 문제였다.

그래도 울 것 같은 벤트의 표정을 보자 조금 미안해졌다.

조노량은 우려를 담았던 시선을 거두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오랜만에 기분도 풀고 좋지 않았나? 이제 돌아가지.”

조노량은 오첩도를 든 오른손으로는 달려들던 기사 하나를 간단히 베어 버리고, 왼손으로 벤트의 머리를 헝클었다.

금세 오만한 표정을 되찾은 벤트가 조노량의 손을 쳐 내며 물었다.

“캐터펄트는?”

“다 부쉈지. 이제 그만 돌아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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