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조노량의 봄
시민궁 본관 3층에 위치한 바실레오스의 집무실은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로 가득했고, 한쪽 벽면에는 갖가지 표시로 낙서장이 되어 버린, 북부 전역도가 걸려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바실레오스.”
“그 호칭을 자네 입에서 들으니 조금 어색하군.”
커트리안은 웃지도 않으며 가벼운 농을 건넸다. 그리고는 미지근한 시선으로 조노량의 눈을 응시했다.
“무슨 일로 호출하셨습니까?”
“움직일 때가 되었다.”
“흠…….”
내켜하는 반응은 아니다.
“한 달 후 원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후방을 든든히 하고 싶다.”
지금 말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노량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격을 하려면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직접 움직이려면 후방이 안전해야 한다. 켈커티스의 안위를 걱정하며 원정을 떠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선행되어야 할 일과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일……?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서이스테르 강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강상은 모두 연합의 영역이나 마찬가지다. 수군력에 있어서 동맹은 연합을 따라갈 수 없다. 공격을 하려면 남이스테르 강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장애가 많지. 그 장애를 없애 줘야겠다. 그리고 켈커티스의 안전을 위해서 라쿠스 시의 갤리온은 남김없이 사라져야겠지. 가능하면 항구까지 사라졌으면 좋겠군.”
“연합의 항구들을 파괴하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벤트를 붙여 주겠다.”
“편한 시간은 다 지나갔군요.”
“전쟁을 석 달은 단축시킬 수 있는 일이다. 희생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고! 이 일을 해낼 사람은 자네뿐이다.”
“희생을 줄이려면 전쟁을 멈추면 됩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깊어졌다.
“지금의 희생이 후대의 안정으로 돌아온다. 불가피하다.”
“분쟁은 다시 생깁니다.”
“그건 후대의 몫이다.”
“트라쿠스를 잡아 오겠습니다.”
그 말에 커트리안의 시선이 더욱 깊어졌다. 노리앙은 아도니아의 목민관을 잡아오는 것을 주머니속의 물건을 꺼내겠다는 것처럼 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자가 말했다면 허풍이나 농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리앙의 말이다.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아니, 그래선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다른 자가 나설 것이다. 그를 잡아오면 또 다른 자가 나설 것이고! 북국의 전사들은 납득하지 않으면 절대 굴복하지 않지.”
“결국 많은 피를 보아야 끝날 일이란 말이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 년을 이어온 전쟁이야. 확실히 종결짓지 않으면 다시 시작될 것이다. 내가 있고, 쥬시아누스가 있고, 예니에프가 있고, 또 그대가 있을 때 끝내는 게 좋다.”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합니까?”
“벤트가 도착해 있다. 언제든 준비가 되면 출발하도록!”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커트리안이 희망하는 일이고, 동료들이 희망하는 일이다. 쓸데없이 피를 보고 싶지는 않으나 자신이 아니라도 피는 흐르게 되어 있었다. 전쟁이 필연이라면 커트리안의 말대로 빨리 끝내는 게 좋았다.
조노량은 중원의 무사로서 늘 피를 보며 살아왔다. 피가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경지에 오르고 보니 마치 개미집을 파헤치며 노는 어린아이가 돼 버린 기분이다. 은거기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어른 된 자가 어린애 손목을 비틀며 논다면 채신없는 행동이기도 했고, 즐거워할 일도 아니다. 아이가 까분다면 혼을 내 물리치면 될 일이지 손목을 부러트릴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참 많이도 컸다. 아등바등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자만이 과하지 않은가? 아직까지도 하기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제에 이런 건방을 떨다니?
조노량은 커트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물러났다.
집무실을 나서자 호위기사들이 잔뜩 얼어붙은 표정으로 조노량을 향해 군례를 취했다. 언제부터인가 조노량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켈커티스 최고의 전사라 불리던 크룬기어를 일격에 잠재웠다는 소문을 듣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그를 겪어 봤던 2군단 기사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인간이 아니었다.
2군단 소속 기사들은 물론 그 끔찍한 생환자들까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서슴없이 대륙 최강의 전사라 말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그랜드 소드마스터라는 의견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했다.
바실레오스 커트리안의 손에 북대륙 최강의 전사라는 아드리안이 명을 달리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더불어 그런 커트리안이 노리앙 군단장을 일컬어 전 대륙 최강의 전사라 공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현시대 유일한 그랜드 소드마스터로 알려진 닌파 발다사르를 제쳐 두고 말이다.
조노량이 겨울 내내 저택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동안, 그가 그랜드 소드마스터라는 소문과 그 소문을 뒷받침해 주는 여러 소문들이 왕성하게 퍼져 나갔다. 손짓 한 번에 성을 무너뜨리더라,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사단 병력이 사라진다더라, 그 두려운 생환자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노리앙 군단장을 당할 수 없다더라 등등의 믿을 수 없는 소문들이었다.
조노량은 번거로운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시민궁을 나섰다.
저택으로 돌아온 조노량은 일찌감치 짐을 꾸려 놨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미룰 필요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벤트가 찾아왔다. 두어 달 만에 보는 얼굴이다.
“이것저것 음모를 꾸미고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다.”
“음모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정치다. 정치를 모르는가?”
“됐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커트리안에게 지시를 받았겠지?”
“그랬지. 이 벤트 님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조노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만함도 병이라면 날로 병세가 깊어지는 친구다.
“언제 출발하라던가?”
“마음 내킬 때! 내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지!”
“하하하, 그런가.”
“왜 웃는 것이지? 불쾌하군.”
“별 뜻 없다네. 그래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벤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레 출발하면 어떤가?”
“모레라, 나쁘지 않군. 도강할 배는 준비했는가?”
“내가 있는데 배가 왜 필요하지?”
“아, 그런 의미인가?”
“그런 의미?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아니네. 아무 뜻도 없다네.”
“노리앙! 자네, 오늘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하하,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니까 그러는군. 자네와 거사를 함께하게 되어 기쁘네.”
“흠흠, 당연하지.”
이틀 후, 조노량과 벤트는 간소한 복장으로 배낭을 짊어졌다. 봄이 왔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북부의 날씨는 싸늘했다. 하지만 둘에게 날씨 따위는 아무런 제한이 될 수 없었다.
두 마리의 말을 끌고 여행자처럼 켈커티스의 남문을 나섰다.
벤트가 계획한 여정은 남이스테르 강 하류의 마리노시를 거쳐 연합의 폴리스인 그레체까지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둘은 마테오에서 하루를 묵고 사흘 후 마리노에 도착했다.
마리노는 오르비스 평야에 주둔한 연합군과 늘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폴리스였다. 또한 커트리안군에 의해 떨어진 북방 3성을 제외하면 가장 뜨거운 격전지이기도 했다.
한때 동맹은 마리노를 거점으로 오르비스 평야를 수복하기 위해 상당한 대군이 집결시켰으나 오누리스만이 위협받고부터는 방어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아도니아의 정예군단이 있었다. 연합 최강이라 불리는 아도니아 군단 중 무려 두 개 군단이 오르비스 평야에 주둔 중이었고, 남부 파실 산맥 인근 고원지대에 위치한 폴리스인 아델모의 군단도 오르비스시에 주둔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에 맞서 동맹 측도 마리노에 세 개 군단을 배치했는데, 그중에는 켈커티스의 정예 4군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켈커티스 4군단의 군단장은 템쉬 아스파하라는 인물로 바라흐하와는 먼 인척관계에 있는 자였다. 하지만 과거 바라흐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굳건히 마리노를 지켜 낸 심지 있는 군인이었다.
조노량과 벤트는 템쉬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마리노에 입성했다. 각자 확실한 신분패가 몇 개나 있었기 때문에 입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리노시의 성문은 특이하게도 엄청난 굵기의 통나무를 몇 겹으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
조노량은 그 거칠고 육중한 성문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발했다. 도르래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열 마리의 갈리온은 동원해야 여닫는 게 가능할 듯싶었다.
“대단한 성문이군.”
조노량의 말에 벤트도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로울 정도로 치밀한 검색을 거친 끝에 입성한 마리노시는 군사기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삼엄한 분위기였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거참.”
그동안 벤트가 돌아다닌 폴리스에는 마리노가 제외되어 있었다. 굳이 최전방의 마리노까지 혼란을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격전지 아닌가? 벌써 사 년째 연합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돌아다니는 시민보다 병사들이 더 많군.”
조노량은 투덜거리는 벤트를 앞세워 여관을 찾았다. 마리노에서 목적지인 남이스테르 강까지는 말을 달리면 대략 한나절 거리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기에 둘은 마리노에서 하루 쉬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번듯한 여관을 잡고 여장을 푼 후 식사를 위해 1층 홀로 내려왔다. 무늬가 고아한 갈색 목재를 다듬고 다양한 조각을 넣어 고급스럽게 마감한 홀이었다. 거기에 천장까지 높아 장중한 느낌을 자아냈다. 꽤 비싸 보이는 식당이었지만 그곳에도 시민들보다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병사들은 하루의 긴장을 술로 털어 버리려는 듯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마셔 댔다. 천장이 높아서인지 병사들의 화통한 목소리도 거슬릴 정도로 크게 울리지 않았다.
최전방이라서 그런지 병참은 풍부해 보였다. 병사들의 갑옷은 길이 잘 들어 보였고, 지닌 병기들도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다. 커트리안은 물론 바라흐하도 마리노에는 신경을 많이 썼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유 있게 식사를 마친 둘은 입가심으로 맥주를 시켰다. 아직 찬 날씨 탓인지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렇게 저녁시간을 즐기는 중 병사들 사이에서 팔씨름 시합이 벌어졌다. 건장하다 못해 비만으로 보이는 병사가 내리 다섯 명을 물리치며 포효를 내질렀다.
“아자자! 또 누구 없나? 이 코리 님을 이기면 일 실버를 준다니까. 겨우 십 쿠퍼만 내면 된다고. 자, 누구 없어?”
병사는 조금 전 나가떨어진 이십대 사내가 내놓은 십 쿠퍼를 알뜰히 챙겨 넣으며 소리쳤다.
“힘으로 누가 널 이기겠냐? 술이나 사라.”
동료로 보이는 병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비만 병사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때 건너 테이블에 앉아 있던 병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 병사도 가슴이 제법 두꺼운 게 힘깨나 쓸 것으로 보였다.
“이봐, 너를 이기면 정말 일 실버를 주는 거냐?”
“당연하지! 신용 하나로 전장을 누빈 코리 님이시다. 어디 출신이냐?”
“하하하. 이 친구, 전장에 장사하러 다녔나? 난 미니얀 출신이다. 열 배를 준다니 한번 해 보고 싶군. 조심하라구. 나도 힘이라면 어디 가서 안 빠진다네.”
“남부 출신이군그래. 좋아, 십 쿠페를 내놓게!”
“여기 있네. 자네 돈도 내놔야지?”
“껄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좋아, 어쨌든 공정하게 해야지. 여기 일 실버일세. 이기면 자네 거야.”
“화통한 친구군.”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앉았다.
조노량과 벤트도 흥미를 가지고 둘의 팔씨름을 지켜봤다. 중원의 술집에서도 흔히 있는 팔씨름 내기였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의 손을 맞잡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목을 맞댄다는 점이었다.
다른 병사가 둘의 손목을 잡고 있다가 재빨리 떼며 시작을 외쳤다.
미니얀 출신의 병사는 처음부터 용을 쓰며 비만 병사를 밀어붙였지만 비만 병사의 얼굴에는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이봐, 이것밖에 안 돼? 이런 힘으로 이 코리 님께 도전을 하다니 무모하지 않나?”
비만 병사는 여유 있게 상대를 조롱하기까지 했지만 미니얀 출신의 병사는 입을 열 여가가 없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피가 몰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 가 볼까? 버텨 보라고, 친구. 으자!”
비만 병사가 힘을 주자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던 팔뚝이 천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탕!
미니얀 출신의 병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비만 병사를 바라봤다.
“미니얀에서는 나도 힘 좀 쓴다고 소문이 났는데, 자네는 못 당하겠군. 완전 철벽이잖아!”
“껄껄껄, 이 돈은 기쁘게 받지. 자네 힘도 보통은 넘는군그래. 영업 좀 마저 하고 내가 술 한 잔 사지!”
“장사꾼이로세. 이봐들, 누구 이 친구 콧대를 꺾어 줄 사람 없나?”
미니얀 출신의 병사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벤트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왜, 자네가 해 보려나?”
조노량이 미소를 지으며 벤트를 부추겼다.
“애들 장난에 이 벤트 님이 나설 것 같은가?”
몸은 벌써 반쯤 일어나 있는 주제에 입에서는 여전히 오만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마침 그때 상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비만 병사가 벤트의 말을 들었다. 비만 병사는 턱 아래로 늘어진 살덩이를 출렁이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소리를 들어본 건 십 년 만이군. 십 쿠페만 준비해서 얼른 오라고, 말라깽이!”
벤트 역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엉덩이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
“분명 자네가 도전을 한 거야. 내가 한 게 아니고!”
새로운 상대가 나타나자 술집 분위기가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십 쿠페!”
“일 실버!”
서로 돈을 꺼내 놓고 두 사내가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조노량은 웃음을 지었다. 비록 벤트가 힘이 센 축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환자들 사이에서 일이다. 일반인들 중에 힘으로 벤트를 누를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도 저런 모습은 보기 좋았다. 저렇게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좋다.
“테이블에 손등을 찧어 줄 테니 각오하라고, 말라깽이!”
“자네 손은 테이블에 찧어도 아프지 않겠군. 너무 푹신하잖아! 공평하지 않아.”
“이 코리 님 앞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입심이 만만찮은 친구군! 껄껄껄.”
비만 사내가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거친 병사들답게 이 정도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른 병사 하나가 둘의 손목을 동시에 쥐었다가 놓으며 시작을 외쳤다.
“힘을 주라고, 말라깽이!”
“내가 힘을 주면 자네는 힘쓸 기회가 없어. 기회를 줄 때 힘을 써 보게, 뚱땡이!”
“후회하지 말라고! 끄응!”
비만 사내가 힘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의 손목은 미동도 안 했다.
비만 사내가 힘을 계속 쓰자 벤트의 얼굴도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조노량은 의외라는 듯 비만 사내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만 사내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맥주잔을 들고 관전 중이던 병사 하나가 놀란 목소리로 감탄사를 발했다.
“코리가 저 정도로 힘을 쓰다니, 마른 친구가 보통이 아니잖아!”
비만 사내는 물론 벤트의 얼굴도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자존심상 신음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조노량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벤트의 손목이 조금씩 아래로 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테이블에 닿았다.
“헉헉헉, 이 말라깽이 친구 보통이 아닐세?”
“빌어먹을! 내가 지다니? 말도 안 돼! 돼지가 아니라 황소였잖아!”
“이 코리 님을 돼지라고 부르다니, 정말 겁 없는 말라깽이군. 좋아! 마음에 들었다. 나와 함께 술 한 잔 하자! 내가 사지!”
비만 병사가 벤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거렸다.
“아, 잠깐! 나보다 더 힘이 센 친구가 있다구. 마저 이기고 술을 마시자.”
벤트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조노량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네 차례다, 노리앙.”
조노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술이나 마시세. 애들처럼 팔씨름은 무슨…….”
둘의 대화를 들은 비만 병사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말라깽이는 키가 크기라도 하지, 지금 바라보는 사내는 체격도 왜소하고 키도 작았다. 열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팔씨름에서 져 본 적이 없는 코리였지만 말라깽이와의 대결에서는 생전 처음으로 애를 먹었다. 그런데 말라깽이가 자신보다 힘이 세다고 말한 사내는 도무지 힘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왜소한 사내였다.
“이 벤트 님의 복수를 안 해주겠다는 말인가, 노리앙?”
“뭐 대단한 걸 졌다고 복수씩이나 해 달라는 거야?”
“뭐든 지면 복수를 해야 하는 거다.”
벤트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서 당당히 복수를 요구했다.
조노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한테도 많이 졌잖아? 복수할 생각인가?”
“그건 다르지. 대륙 최강자에게 지는 건 당연한 거다.”
벤트의 억지스러운 요구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노량의 귓가에 긴박한 타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캉캉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