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대륙의 봄
트라쿠스의 성을 나와 천천히 걸어서 제1목민관저로 향하는 하드리아누스 트라쿠스는 인사를 건네 오는 시민들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인사를 나눈 사람들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현재 트라쿠스의 신경은 온통 봄에 시작될 정세 변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난해 초가을에 치러진 목민관 선거에서 당당히 제1목민관으로 선출됐다.
이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새롭게 판을 짜야 했다. 그 판을 짜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방금 전 오찬에서 마법사 피오레가 했던 충고가 귓가를 아른거렸다.
트라쿠스 성에서부터 제1목민관저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회색 도로 위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지긋지긋한 눈이다.
‘전쟁을 주도하시려면 최대한 전선을 넓혀야 합니다. 반면 확실한 승기를 잡으시려면 오히려 전선을 좁혀 오르비스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트라쿠스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제1목민관이니까.
‘켈커티스는 틀림없이 오르비스로 옵니다. 선택은 전장을 집중할 것인가 확산시킬 것인가 입니다.’
그랬다. 피오레의 말대로 자신의 첫 번째 원정을 오르비스로 정하면 그곳에서 향후 십 년간의 판도를 가를 결전이 펼쳐질 것이다. 전력은 충분했다. 이미 주둔 중인 4, 5군단만 있어도 켈커티스는 오르비스를 뚫기 힘들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소모전이 예상된다. 소모전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자원과 병력은 넘쳐났다. 그 전투에서 승리하는 쪽이 향후 십 년간의 전장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런 양상의 전투라면 연합이 밀릴 이유가 없다.
문제는 연합을 위해 아도니아가 약간의 손실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힘을 아껴 둘 것인가였다. 소모전이다. 전투 초반의 희생은 필연이다. 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아도니아의 정예군단을 투입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아도니아 군단이라 하더라도 희생을 피할 방도는 없다.
반면 5년 전처럼 전장을 전면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월등한 병력과 물량을 기반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전장을 넓히는 방법이다. 지루한 싸움이 될 수는 있어도 확실히 유리한 싸움을 벌일 수는 있다. 우선 크로아지크 황야로 한 개 군단을 파병하고, 크리푸와 엘리티아 평야로 각각 두 개 군단씩을 파병한다. 라쿠스의 갤리선을 이용해 해안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롱고와 라그란으로도 병력을 보낸다. 서이스테르 강 안쪽 깊숙이 병력을 투입하는 방법도 있다.
어리석은 바라흐하는 기르던 개에게 물렸다. 결정적인 도움을 줬는데도 이를 살리지 못하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 제 무덤을 팠다. 독재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욕심으로 가득 찬 돼지새끼 같으니라고.
뭐, 덕분에 켈커티스가 혼란스러워졌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한동안은 동맹의 폴리스들을 단속하기도 벅찰 것이다. 병력이 부족하면 손발이라도 맞아야 할 텐데 자신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다.
이 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동맹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선택의 폭은 무한하다. 북방에서의 패배가 오히려 연합을 강하게 단결시켰다. 그게 두려움이든, 분노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으로 인해 동맹에 대한 경각심이 잔뜩 고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각각의 폴리스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이유는 성이라는 든든한 방어책이 있어서였다. 한 개 군단만 있어도 세 개 군단, 네 개 군단을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성이다. 그런데 그런 성이 어이없이 깨져 나갔다. 폴리스들이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엘리티아 평야를 도로 잃고, 크로아지크를 빼앗겼을 때만 해도 아도니아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동안 끝없이 치솟았던 연합의 자존심이 단번에 뭉개졌으니까 말이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충격이 작으면 반발하고, 충격이 크면 숙이게 되어 있다. 작은 충격에 반발하던 폴리스들이 북방 3성의 함락이라는 큰 충격에 잔뜩 긴장해 버렸다. 콧대 높던 존스캐빈이 깨져 나가고, 카테네오와 라지도니아는 연합의 지원을 받고도 버텨 내지 못했다. 성 안에 틀어박혀서 여유를 부리던 폴리스들이 긴장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때리기만 해 봤지 맞아 보질 않아서 그런 거다.
덕분에 말 잘 듣는 개가 되었다. 맞기 전에 먼저 때리자고 보채기까지 했다. 아도니아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자신이 그림을 그리면 알아서 물감을 대령할 태세니 말이다.
어쩌면 북부통일의 대업을 자신의 대에서 이룰 수 있을 것도 같다. 로크리안의 대계를 방해한 것은 정말 절묘한 수였다. 만약 당시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로크리안과 치프만의 치적으로 남았을 대업이다. 하지만 이제 역사는 북부통일을 이룬 위대한 지도자로 자신을 기억할 것이다.
한참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트라쿠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치프만가의 붉은색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부터 거의 반 블록이 치프만가의 저택이었다. 켈커티스의 돼지들처럼 욕심이 많은 집안이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이제 그 성세는 다했다.
치프만가의 저택을 바라보는 트라쿠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치프만가의 분열,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누가 알았겠는가? 수백 년을 걸쳐 성세를 구가하던 치프만가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줄!
저 넓은 저택조차 좁다고 북적거리던 집 안이 썰렁하게 비었다. 수많은 방계가 피온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많던 가신들과 가병들이 짐을 싸들고 이탈해 버렸다. 치프만 출신의 원로들은 피온과 반목하고 끼리끼리 뭉쳤다. 위세 등등하던 파벌 자체가 통째로 붕괴된 것이다.
더욱이 제2목민관 알프치우스 프리온, 그 검투광마저 피온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제 아도니아는 트라쿠스가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장악했다. 어떠한 정책을 펼쳐도 반대할 세력이 없다. 그야말로 힘을 집중하기에 최고의 조건이 아닌가?
어느덧 시민궁 경내에 들어섰다. 시민궁 경비를 총괄하는 기사가 군례를 취해 보인다. 트라쿠스는 미소를 지으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트라쿠스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고민일 지경이다.
☆ ☆ ☆
트라쿠스의 예상과 다르게 동맹은 크게 혼란스럽지 않았다. 커트리안은 엘리티아를 수복하고 북방을 평정한 동맹의 영웅이다. 켈커티스에 독점되었던 물류를 풀어 놓고, 각 폴리스의 정치적 독립성을 인정했다.
눈치를 보던 여타의 폴리스들까지 커트리안의 정책에 지지를 표했다. 군소 폴리스들은 켈커티스를 장악한 정치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성한 폴리스로 알려진 트렌티노와 프불리오까지 커트리안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했다. 특히 지난 전투에서 뜨거운 맛을 보았던 프불리오는 절대 켈커티스와 반목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동맹의 폴리스든, 연합의 폴리스든 올해 전쟁이 격화되리란 예상을 하지 않는 폴리스는 없었다. 지난해는 격동의 해였다. 동맹의 중심이 바뀌었고, 성세를 자랑했던 북방의 폴리스들이 연달아 깨져 나갔다. 라지도니아의 경우는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져 버렸다. 시민들은 뿔뿔이 찢어져 다른 폴리스로 이주를 해 버렸다.
연합에서 이 일을 묵과할 리가 없었다. 겨울 내내 날이 풀리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짐작할 만한 이 사실을 동맹이 모를 리가 없었다. 켈커티스로 오고가는 전령이 확연히 늘어났다. 올해 역시 지난해 못지않은 파란이 예상됐다.
조노량은 완연한 봄기운에 몸이 노곤하게 늘어졌다. 다행히 제우스는 성무일도를 한다고 자리를 비웠다. 무척 홀가분한 느낌이다. 제우스란 청년을 싫어하진 않지만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부담스럽다.
대낮부터 침상에서 뒹굴거리던 조노량은 상념에 잠겼다. 겨울 내내 늙은이들의 잔소리를 들어 가며 중단전의 수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수련에는 전혀 진척이 없다. 뭔가 작은 벽에 가로막힌 듯 좀체 나아가지 않았다. 중단전의 권능은 마법이라는 특이한 능력과 닮아 있는 듯했지만 또 달랐다. 아직까지는 수동적인 느낌이 강했다.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활용하는 마법에 비해 중단전의 능력은 만들어진 무언가를 꼬아 놓고 변형시키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게 문제였다. 분명 중단전의 힘이 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의지의 발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과 달리 있는 것을 조금 바꿔 놓는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조노량은 기억했다. 카임과 타무즈, 베히모스가 보여 줬던 그 막대한 권능을!
그들에 비하면 이곳의 마법사는 그야말로 화톳불 앞의 반딧불이었다. 불덩이를 날리고, 얼음의 창을 소환했지만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헉헉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소환한 불덩이나 얼음덩이가 위력적인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방패로 막을 수 있고, 검으로 쳐낼 수 있을 정도니 들인 공에 비하면 허무할 지경이다.
한 명의 마법사가 탄생하기까지 아주 기나긴 세월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쓸모가 있어지려면 적어도 3서클은 되어야 했다. 다 늙어서 고위급 마법을 이뤄 봐야 병사들과 함께 뛰어다니지도 못한다.
주운을 제외하고 조노량이 지금껏 만난 마법사 중에 가장 높은 서클을 이룬 자는 시민궁 마법사였다. 무려 5서클의 실용 마법사였지만 늙어서 허리도 펴지 못했다. 켈커티스 최고의 마법사라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그야말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 정도 마법사가 펼친 마법이라면 지나가다가도 흐름을 꼬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꼬부랑 마법사를 만나고서야 조노량은 전장에서 왜 마법사를 만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젊은 마법사는 능력이 부족해서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고서클의 마법사는 늙어서 전장을 누빌 힘이 없었다. 마법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육체를 강화할 수는 있지만 늙은 몸은 그 여파를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혈도를 짚어 일시적으로 잠력을 격발시키는 방법과 유사하다.
상념에 잠겨 있던 조노량에게 전갈이 도착했다.
“노리앙 군단장님을 뵙습니다. 시민궁으로 드시라는 바실레오스의 명입니다.”
제법 각이 잡혀 있다.
“아주 기사가 다 됐구나?”
“헤헤, 그래 보입니까? 그럴듯해 보여요?”
헤리엇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조노량도 마주 웃어 주었다. 시커먼 안색만 아니라면 귀여운 청년이다.
“무슨 일인 것 같던가?”
“날도 풀렸으니 출정에 대한 이야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또 피비린내를 맡아야 할 시간이 된 건가.”
“커트리안 님의 의지가 확고하시니 아도니아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멈추진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