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24화 (124/142)

124. 현자, 마법사, 신관

바라흐하의 반란이라고 이름 붙여진 내전은 종식되었다. 반 이상 죽어 나간 프불리오의 군단은 결국 자신들의 폴리스로 귀환했고, 오누리스만의 빈자리는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장군 로사리오 마잔티의 지휘하에 아미나군이 메웠다.

전후 처리도 빠르게 정리되어 나갔다.

공석이 많아진 원로원의 의석은 켈커티스 주요 가문들에게 다시 배정되었다. 정원 70명으로 이뤄진 정식 원로원이 새로 출범했다.

새로운 원로원은 바라흐하의 편에 서서 억지 개혁을 주도했던 원로들과 가주들의 처형을 결정했다. 앞선 전례에 따라 그들의 식솔도 노예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하지만 처리가 난감한 인물들이 몇 있었다. 베베누토처럼 평소 바라흐하를 반대하던 몇몇 가문들이 켈커티스 탈환 당시 가병들을 이끌고 바라흐하를 따랐던 것이다.

꼬장꼬장한 베베누토는 켈커티스로 잡혀 와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켈커티스를 공격하는 건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의 시각에서는 커트리안군이 반란군인 셈이다.

베베누토가 원로원 법정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규정된 관례에 따라 원로회의가 열렸고, 제도 개편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워 안건이 통과됐다. 비록 그릇된 제도라 하더라도 원로원 의결을 거쳤으면, 제도 폐지를 위한 다른 의결이 있을 때까지 정당성을 갖는다. 이를 무시하고 폴리스를 공격한 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다. 따라서 자신은 커트리안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판단은 승리한 자의 입장에서 조율된다. 그리고 승리한 자는 커트리안이었다. 또한 커트리안은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판결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폴리스에는 이렇다 할 성문법이 없다. 하지만 수백 년간 내려온 관습법이 있다. 성문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 관습법이다. 성문법은 법률만 회피하면 징벌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관습법은 피해 갈 방법이 없다. 전례가 없더라도 죄라고 인정되어지면 처벌받는다. 그것으로 새로운 전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베베누토 등이 이에 해당되었다.

원로원은 그들의 재산권은 인정했지만 시민권은 박탈했다. 더불어 켈커티스에서의 추방을 명령했다. 조금 과하다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바라흐하를 따랐다는 관습법상의 괘씸죄가 적용되었다.

새로운 원로원은 며칠간 재판으로 모든 일정을 대신했다. 그리고 마지막 재판은 바라흐하를 포함한 주모자들에 대한 재판이었다.

바라흐하에 대한 판결은 예상된 대로 시민궁 광장에서의 공개처형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바라흐하의 형이 확정됨에 따라 관습법에 의해 직계 식솔들의 연좌처형도 결정되었다.

그 결과, 300년 전통을 이어오던 켈커티스의 명문가 하나가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한 그의 처가인 로메노가 역시 직계 처형을 면치 못했다. 그들의 상단은 다른 상단들에 의해 분할 접수되었다.

그리고 커트리안을 지지하며 이번 내전을 조속히 종식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우무스는 공과를 상쇄하는 선에서 처벌이 마무리되었다.

처형 당일 시민궁 광장에는 이백여 개의 말뚝이 설치되었다. 과거 바라흐하가 시민들을 매달았던 바로 그 말뚝이었다.

바라흐하와 처형이 미뤄지고 있었던 처형자들이 속속 끌려 나와 재갈이 물린 채 말뚝에 매달렸다.

만 하루가 지나고 바라흐하의 자식들과 가족들, 처가의 식솔들이 창에 꿰뚫렸다. 스스로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가장 짧게 고통 받았다.

둘째 날이 지나고 그를 지지했던 당사자들이 모두 처형당했다. 그들은 이틀간 고통 받았다.

마지막 날, 바라흐하의 재갈이 풀렸다.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기 위함이었지만 사흘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가족과 친인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 본 바라흐하의 정신은 아득히 죽어 있었다. 마지막 창형이 집행될 때까지 입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스물두 해나 켈커티스를 지배했던 자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해 겨울 커트리안은 외교와 내실에 전념했다.

과거 로메노 상단과 일부 켈커티스의 상단에 의해 위축되었던 폴리스 간의 상거래를 활성화시키고, 켈커티스가 아닌 동맹 전체의 경제를 튼튼히 다졌다. 켈커티스라는 작은 단위를 놓고 보았을 때는 분명 손해였지만 동맹이라는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놀라울 정도로 생산성이 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 동맹의 폴리스들도 켈커티스의 새로운 바실레오스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커트리안은 각 동맹의 폴리스들에게 병사들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동맹의 지도자들도 나름 정치적 감이 탁월한 자들이다. 첫 원정에서부터 엄청난 성과를 일궈 낸 호전적인 켈커티스의 바실레오스가 군사적 준비를 요청했다. 그 노골적인 요청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 못할 지도자는 없었다. 알아서 명년 봄에 불어닥칠 격변을 준비하며 긴장했다.

커트리안은 다수의 말을 사들이고, 장창과 장검을 만들어 꾸준히 크로아지크로 보냈다. 장병기로 무장한 기마병의 위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자도 중요했지만 숙련된 기수와 기마전에 특화된 전술도 필요했다.

☆ ☆ ☆

조노량과 생환자들은 시민궁 뒤편 저택 하나를 통째로 배정받았다. 전통적인 명문가인 히어데로의 저택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최소 백 명은 수용할 정도의 커다란 저택이다. 저택은 널찍한 정원과 수련장까지 별도로 갖추고 있었다. 과거 모 원로의 저택이라는데, 당사자는 바라흐하와 함께 처형당했고, 그 식솔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팔려 나갔다. 바라흐하 치하에서 떵떵거리던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한 것이다.

조노량은 그 저택에서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낮에는 빈 집을 지키고, 밤에는 술을 들고 찾아오는 생환자들과 번갈아 술추렴을 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이야기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느끼기 위한 자리였다. 생환자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집착했다. 그들 모두 낮에는 다른 자들과 어울려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은 스스로를 다른 자들과 분리했고,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살의를 억누르며 애써 일반인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이미 야수가 된 들개처럼 풀을 뜯기 힘들어했다. 그랬기에 더욱 서로를 갈구했다. 그들은 동류들과 함께할 때만 마음의 안정을 찾고, 편안함을 느꼈다.

마물화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게 되는 날, 피에 굶주린 마물이 깨어날 것이다. 조노량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시고 웃고 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생환자들 중 가장 바쁜 건 벤트와 차츠라였다. 무엇 때문인지 어느 날 사라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특별한 임무를 받고 켈커티스를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정신이 어쨌든, 다른 생환자들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기사들을 조련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훈련 효율은 매우 높았다. 기사들은 생환자들과 검을 마주한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환자들이 흘리는 기세를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군단병들은 추위를 이길 정도로 긴장감을 느끼곤 했다. 그나마 면역이 되어 있는 켈커티스 2군단병들은 조금 나았지만, 3군단과 5군단병들은 꾀도 부리지 못하고 근육이 터져 나갈 때까지 훈련에 매진했다.

그 넓은 저택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사람은 조노량이 유일했다. 물론 제우스도 웬만해선 조노량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커트리안 역시 그런 조노량의 일과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노량에게만은 별다른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택하게 된 것이 공부였다. 중단전이 열리면서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의지를 발현하고, 자신의 뜻에 맞도록 가공할 수 있게 되었다. 조노량은 이 힘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다. 커트리안에게 부탁해 현자와 마법사를 초빙했다. 신관도 초빙해야 했으나 최고의 신관이 곁에 있으니 따로 초빙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조노량의 앞에 앉아 있는 노년의 사내가 바로 그중 하나인 엘리아톤 사반치, 켈커티스 최고의 현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세계가 탄생했다오. 세계는 곧 에너지의 다른 모습일 뿐임을 이해하시겠소?”

묵묵부답, 참 난감하다. 외워야 하는 것일까?

조노량이 이해하지 못한 듯하자 사반치는 다시 한 번 장광설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벌써 사흘째 강론을 듣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야기는 그나마 알아들을 만했다.

“그 에너지 중 가장 큰 에너지는 의지라오. 그 자체로는 매우 미약한 힘이나 그 미약한 힘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에너지에 감응할 수 있다오. 다시 말해 휘두르는 채찍에 실린 힘은 미약하나 그 작은 힘으로 말미암아 거석을 실은 수레가 움직이는 것 아니겠소.

자, 봅시다. 수레를 움직이려면 무엇을 매어야겠소? 토끼나 고양이를 매어야 되겠소, 아니면 갈리온을 매어야 되겠소? 그렇소! 갈리온을 찾아 묶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갈리온이 있고, 수레가 있소. 그냥 두면 수레는 움직일 수 없소. 당연히 지금 말한 대로 이 두 개체를 이어야 할 것 아니오? 어디에 이어야겠소? 갈리온의 뿔에 이어야겠소, 꼬리에 이어야겠소? 아니면 든든한 어깨에 이어야겠소? 맞소! 당연히 어깨에 이어야 한다오. 튼튼한 밧줄을 준비해서 말이오.

이 에너지도 마찬가지요. 세상 만물에는 다양한 에너지가 있다오. 그 에너지를 어떻게 조합하고,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공하느냐에 따라 무한한 변화가 생기게 되오.

지금 예를 든 바와 같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선 갈리온이라는 큰 에너지를 준비하고, 수레와 이을 질긴 에너지를 준비하고, 이를 최적의 위치에 배열하고, 갈리온을 움직이게 할 채찍이라는 작은 에너지를 준비한다오. 그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바로 의지라오. 이해하시겠소?”

수레와 갈리온을 예로 들었지만 개념 자체는 추상적이다. 하지만 자연의 흐름을 읽고 의지를 구현할 수 있는 조노량으로서는 이런 이야기가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아무리 거대한 흐름도 이에 개입하는 작은 의지로 인해 큰 변화가 발생한다. 지금은 비록 흐름에 개입하는 정도였지만 결국엔 흐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선생, 4서클의 생활마법사 드미트리오 루체스는 말했다.

“보게나! 이 마나는 매우 안정적이라네. 웬만한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이렇게, 자 이런 식으로 힘을 가하면 변형이 일어나지. 어떤가?”

드미트리오가 잠시 의식을 집중하자 그의 손 위에 둥그런 화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게나? 안정적이던 마나를 흔들어 놓으니 이렇듯 다른 에너지가 되지 않는가. 무작정 내 힘으로만 이런 불덩이를 만들어 내려면 석 달은 힘을 모아야 할 거야. 그리고 아마 일주일은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 것이네. 하지만 자연 속에 존재하는 마나에 약간의 변형만 가해도 안정성을 잃고 이렇듯 성을 내게 되는 것일세. 이게 술인 게야.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게 마법의 요체일세. 이 책상, 이 양피지, 그리고 자네의 검을 보게. 웬만한 힘으로는 변형을 가할 수 없지 않나? 물질이란 놈은 그 자체로 안정성을 갖고 있네. 만약 안정적이지 않았다면 그 물질이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 어떤 물질도 무한히 안정적일 수는 없다네. 장작이 타면 숯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수증기가 올라가 서로 반발하면 번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얼마만큼 크게 변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늘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라네. 비단 물질만이 아니라 이 마나란 놈도 같다네.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지. 일반적인 물질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네. 물론 그만큼 강한 의지가 개입되어야 하겠지. 하지만 이를 정형화하고, 규칙을 부여해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마법일세.”

조노량은 중단전이 열린 이후 사물을, 나아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드러난 현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파악하고 원인과 그 의미를 알길 바랐다. 그 모호한 명제를 구체화시키고 싶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법사 드미트리오의 말과 현자 엘리아톤의 말은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청자가 의외로 집중을 하자 드미트리오 역시 조금 더 진지해졌다.

“전사인 자네가 왜 마법에 관심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실레오스의 명이니 조금 더 깊이 있게 설명해 주겠네. 지금 이 파이어볼을 만들기 위해선 2서클의 힘이 필요하다네. 물론 난 전투마법사가 아니라서 3서클로 돌렸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나? 흠흠, 설명함세. 서클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바로 가속일세. 사실 마법사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크지 않다네. 무언가 변형을 가하기 위해서는 이 작은 힘을 계속 중첩해야 한다네. 바로 서클의 회전을 통해서지. 이 서클이란 건 마치 고속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지. 마법사는 먼저 수식을 계산하고 그 톱니바퀴를 돌린다네. 회전을 가하고 가속을 얻어 원하는 만큼의 힘을 뽑아내게 되지. 더 많은 힘을 더 빠르게 모으기 위해선 더 많은 톱니바퀴가 필요하겠지? 그 서클들을 통해 자신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마나의 힘을 키우고, 그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연의 마나에도 더 크게 개입할 수 있게 된다네. 더 많이 개입하고, 더 크게, 더 빠르게, 또 오래 개입할 수 있게 되는 셈이지. 말한 대로 난 4서클의 마법사라네. 파이어볼을 더 위력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범위를 넓힐 수도, 더 오래 유지할 수도 있네. 아, 물론 수식이 갖는 한계는 있어. 파이어볼 수식으로는 절대 플레어(7서클 화염마법)를 만들 수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서클이 높을수록 그가 개입할 수 있는 힘이 강해진다는 말일세. 잘 모르는 말이겠지만 서클과 힘은 배수가 아니라 제곱수에 비례하지.”

그 이론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드미트리오의 손끝에 형성된 불덩이가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의지의 발현, 조노량은 그 흐름에 작은 개입을 가했다.

그 순간 활활 타오르던 불덩이가 촛불 꺼지듯 폭 하고 사라져 버렸다.

“엇, 왜 이러지?”

깜짝 놀란 드미트리오가 다시 불덩이를 소환했다. 생활마법사라 그런지 불덩이를 소환하는 데 약간의 지체가 있었다.

드미트리오는 자신의 마법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조노량의 의지가 다시 한 번 공간을 지배했다.

드미트리오가 불덩이를 만들기 위해 소모한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 번 불덩이가 소멸해 버리자 드미트리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미안하군. 오늘은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 컨디션이 좋지 않네. 내일 다시 보세.”

드미트리오는 저서클 마법이 이유 없이 계속 실패하자 크게 긴장했다. 자신의 마법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고 의심했다. 마법사가 안정적으로 마법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마법사가 아니게 된다. 드미트리오로서는 지금의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흐름을 읽지 못하는 그는 꿈에도 조노량이 자신의 마법에 개입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또 한 명의 선생은 바로 제우스였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창세신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태초에 아주 작은 점이 있었습니다. 주신 아디는 그 점을 아주 넓게 흩어 놓았죠. 빅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수많은 은하가 탄생합니다. 그 은하는 무한히 넓지만 그 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은하 역시 점과 같았죠.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 은하 하나하나가 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뒤로 물러나 보면 그 은하들이 모여 하나의 면을 이루죠. 이 천처럼 말이죠. 노리앙의 옷, 리넨이라는 천입니다.”

제우스는 노리앙의 옷깃을 슬쩍 만지면 말했다.

“하나의 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선이죠. 수많은 실들을 격자로 짜 면을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당겨 보면 그 틈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선도 따지고 보면 무한한 점으로 이어져 있답니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고, 면은 공간이 되죠. 이 양피지를 보세요. 이 양피지는 아무리 당겨도 틈이 보이지 않지요? 하지만 이 양피지도 알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으로 이루어진 면입니다. 그 점과 선 사이에는 수많은 틈이 존재합니다. 이 책상도 마찬가지고, 노리앙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보다는 텅 빈 공간이 더 많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어요? 사실이랍니다.”

제우스는 입이 말랐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즉 노리앙 자신도 하나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 공간 안에 은하와 같은 작은 점들이 무수히 이어져 노리앙이 된 거랍니다. 이건 신학뿐만 아니라 마법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에요. 노리앙이 게이트를 통과할 때 그 수많은 점들이 흩어졌다가 건너편에 다시 모이게 되죠. 그게 텔레포트라는 마법입니다. 통째로 이동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 작은 점들을 차원의 틈에 밀어 넣었다가 정해진 출구를 통해 약속대로 재구성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반대편 게이트에 생성될 때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거랍니다. 재구성될 때 무언가 있으면 합쳐지게 되니까요. 아 물론 티끌 같은 미세한 것들은 상관없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노리앙의 몸은 물질보다는 텅 빈 공간이 더 많으니까요. 사실 작은 흙조각까지도 괜찮아요. 신의 창조물은 그렇게 허약하지 않으니까요. 존재에 기억되지 않은 이질적인 뭔가가 몸에 들어오면 신체가 알아서 녹여 버린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제우스는 그렇게 전설과 신화를 이야기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들려주던 반고 신화처럼 하나의 신화였지만 여와나 반고의 이야기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은하요? 은하는 이 세계와 같은 작은 별들이 수만, 수억 개가 모여 만들어지는 별들의 모임이랍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태초부터 존재한 건 아니랍니다. 암흑성을 아세요? 물질은 물론 빛과 시간조차 잡아먹는 괴물이죠. 저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암흑성이 있답니다. 그 암흑성은 모든 것을 잡아먹어요. 무한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잡아먹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커지지는 않죠. 아무리 배가 불러도 커지지는 않아요. 먹으면 먹을수록 무한히 작아진다고 하죠. 그러다가 한 번에 뻥!”

제우스가 손을 오므렸다가 활짝 펼쳐 보였다.

“터져 버립니다. 먹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토해 놓는답니다. 아주 새로운 것으로 바꿔서 말이죠. 그렇게 하나의 은하가 생겨난답니다.”

제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암흑성이 바로 창세신 아디의 바구니랍니다. 아디는 낡고, 오래된 것들을 모아 생명을 부여하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서 이 세상에 내보낸답니다. 그렇기에 모든 만물에는 주신 아디의 숨결이 숨어 있는 거죠. 노리앙이 바라보는 모든 것, 모든 세상이 아디가 규칙을 부여하고, 질서를 새겨 놓은 것이랍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물질보다는 텅 빈 공간이 훨씬 많은 이것들, 이것들을 이것이게 하는 건 모두 주신 아디가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돌은 돌로, 나무는 나무로, 사람은 사람이도록 스스로 형상을 규정하고 끊임없이 교정하죠. 그게 창조자의 의지입니다. 모든 창조물은 그 규칙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존재 자체에 형상을 새겨 놓았지요. 세포 하나하나가 그 형상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죠. 존재에 새겨진 대로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제우스는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만진 후 탁자를 두드렸다.

“여기, 여기, 이곳, 모든 것에 심어져 있답니다. 그 질서를 벗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섞이고, 혼돈이 시작되는 거죠. 다시 암흑성으로 돌아가는 거랍니다. 아디의 바구니로요. 그 바구니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때까지, 새롭게 탄생할 때까지 무한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죠.

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대지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대기를 가득 채운 창조자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문을 열면 노리앙도 이 모든 것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조노량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는 제우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린 청년이 무슨 칠십 먹은 노승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계의 신화는 너무 복잡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제우스가 하는 말도 다른 선생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고 있는 바였다. 그게 창조자의 의지인지, 자연의 섭리인지 몰라도 분명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현자는 이를 에너지라고 했고, 마법사는 마나라 불렀다. 그리고 제우스는 신의 의지라 말하고 있었다.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장소는 저택에 딸린 실내 수련장이었다. 천장은 높고, 벽은 모두 두꺼운 석제로 쌓아 올렸다. 한때 기사들로 넘쳐났을 공간이지만 지금은 조노량 외에는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쉬었다 하지. 생각할 것이 있네.”

조노량은 제우스가 건네주는 물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가부좌를 틀었다. 자세가 갖는 의미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가부좌를 틀면 잡념이 사라지고 집중이 더 잘되는 느낌이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다.

중단전에 의념을 집중했다. 주변에 흐르는 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과거 하단전만 사용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단전을 이용한 공부는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공부다. 반면 중단전은 내면보다는 외부를 관조하는 공부다. 즉, 중단전을 열면 자신과 세계를 잇는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세계를 가득 채운 기운, 엘리아톤과 드미트리오가 말한 대로 에너지 또는 마나, 혹은 다른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것들이 느껴졌다.

그들과 같이 정립된 이론은 없지만 그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 힘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그 힘이 세계를 이루는 근원이었다. 자연이든 사물이든, 혹은 인간이든 이 힘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힘들이 서로 충돌하고, 조합되고, 새로이 구성되는 순간 다양한 형태로 변화된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도 있고, 자연 속에서 우연히 변화될 수도 있다. 변화된 힘은 다양한 형태를 갖게 된다. 불이 될 수도 있고, 열기를 식히는 산들바람이 될 수도 있고, 천년 묵은 거목을 쓰러트리는 벼락이 될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한 힘이 될 수도 있고, 우주를 흔드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의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지만 자연이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무한하다. 인간이 아무리 의도해도 불가능한 일을 자연은 의도하지 않고도 절로 해낸다.

조노량은 중단전이 열리면서부터 어렴풋이나마 그 원리를 인지하게 되었다.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이를 이용하지도, 일깨우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여 변형을 가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 주운이 그랬고, 마왕들이 그랬고, 작게는 마법사와 오오라를 다루는 전사들이 그랬다. 그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그 에너지를 얼마나 크게 이용할 수 있는지, 혹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는 제각기 달랐다. 또 이용하는 방법도 천양지차였다. 자신의 방법 역시 그들과 다르다.

그 방법이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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