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23화 (123/142)

123. 동맹의 기치 아래!

그의 몸은 살처럼 빨랐고, 오오라가 어린 검은 면도보다 예리했다. 켈커티스 최강자의, 혼신의 힘을 기울인 암살 시도!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 짧은 순간 크룬기어는 커트리안의 눈과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미지근한 시선, 검에는 손도 얹지 않고 있다. 성공을 확신했다.

그 찰나의 순간 크룬기어의 눈이 부릅떠졌다. 갑자기 관성이 사라졌다. 분명 코앞에 있던 커트리안의 얼굴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눈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커트리안의 얼굴이 내려다보였다. 커트리안은 여전히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해할 틈도 없이 크룬기어의 사고가 마비됐다.

조노량은 높이 떴다가 떨어져 내리는 크룬기어의 목을 바라보며 오첩도를 갈무리했다.

제법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사내였는데, 무리한 시도를 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애도를 표했다.

북부 전체로 따져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실력이었으며, 십 년만 더 수련을 했더라면 로크리안에게도 도전해 볼 만한 실력자였던 크룬기어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생을 마감했다.

하이블루와 달리 냉정하고 침착한 크룬기어였지만 커트리안 옆에 인외의 존재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크룬기어의 육체는 일반 병사들 틈에 묻혔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크룬기어의 몸뚱이가 천천히 기울어 가는 그 짧은 시간, 커트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놓았다.

전장에 합류하기 위해 양익으로 나눠 진군하고 있던 마테오와 쿠아란 병력들도 이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목격할 수 있었다. 켈커티스 2군단의 전투력이 높다는 건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라니? 무기를 든 손에 땀이 차고 다리가 굳었다. 감히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양익의 전진 속도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같은 켈커티스의 군단은 그러하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한 2군단의 전투력을 보면서도 다른 군단들처럼 얼어붙지는 않았다. 켈커티스 3군단도 정예 중에서도 정예다. 비록 ‘켈커티스의 창’이라는 2군단에 가려 빛을 보진 못했지만 싸우기도 전에 주눅이 드는 나약한 군단이 아니었다. 3군단병들은 곧 있을 전투 투입에 대비해 이를 악물었다.

예상대로 시쿳의 명이 떨어지고 대열이 정비됐다. 후퇴하는, 아니 도망치는 프불리오군을 돕기 위해 진격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3군단의 좌우에 포진해 있던 엘리티아 평야 측 지원군도 3군단을 따라 진형을 정비했다.

그때 1군단 지휘부에서 긴 고동소리가 울려 나왔다. 처음엔 진군을 시작하라는 명령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소리에 맞춰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 측 병력들이 보인 모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3군단의 좌우로 나눠져 있던 두 병력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3군단을 향해 돌아섰다. 3군단을 향해 방패를 세워 들고, 파이크를 겨눴다.

놀랄 틈도 없이 이번엔 켈커티스 1군단이 기습적으로 3군단의 앞뒤를 겹겹이 포위했다. 전후좌우로 완전히 봉쇄된 모습이었다.

바라흐하의 심복이자 조카인 3군단장 시쿳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의 배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1군단이 왜 자신들을 돕기 위해 온 3군단을 위협한단 말인가?

커트리안군을 좌우에서 포위하려고 움직이던 마테오와 쿠아란의 병력도, 후위를 담당하던 코리노와 라그란의 병력도, 갑자기 급변한 사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커트리안군을 포위하기는커녕 제자리에 멈춰 서서 다급히 수비형 방진을 구축했다.

지금으로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도저히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형편없이 깨져 버린 프불리오 병사들도 어디로 후퇴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견 켈커티스 1군단과 3군단이 대치한 국면이었다. 일감은 3군단의 배신을 의심해야 했다. 1군단은 바라흐하의 본진이며, 그의 충복인 우무스가 지휘하는 군단이다. 반면 3군단은 하루 전 결합한 새로운 군단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무스가 앞으로 나서 외쳤다.

“적과 내통한 시쿳 군단장은 즉각 무장을 해제하고 이쪽으로 나서라!”

“무슨 소리요? 내가 왜 적과 내통을 했단 말이오?”

“결백을 증명하려면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이쪽으로 나서라!”

시쿳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해가 있거나 누명을 썼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당장 결백을 증명하지 않으면 반란군과 내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게 생겼다. 이 긴박한 상황에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나는 결백하오! 내가 숙부를 배신할 이유가 없지 않소? 오해요! 누명이오!”

시쿳은 절박하게 외친 후 앞으로 나섰다. 우무스가 보는 앞에서 무기를 던져 버리고 1군단을 향해 거리낌 없이 걸어왔다. 그야말로 결백한 자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시쿳이 무기를 버리고 나서자 3군단병 전체가 동요했다. 사단장과 기대장들은 설마 진짜 군단장이 배신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사이에 1군단에서 파견한 기사들이 3군단 소속 사단장들의 무장까지 해제시켰다. 꺼릴 것이 없었던 사단장들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1군단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본진으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3군단은 지휘부를 모두 잃게 되었다.

묘한 대치 상황이었다. 불과 한 개 군단뿐인 커트리안군이 전방에 넓게 포진해 바라흐하군을 압박하고 있는 형상이었고, 우측에 마테오군이 사각 방진을 구축하고 커트리안군과 바라흐하군 양쪽을 모두 경계했다. 좌측의 쿠아란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후방의 코리노군과 라그란군도 각각 흩어져 방진을 구축하고 서로를 경계했다.

바라흐하군의 중추라 할 수 있는 1군단이 3군단 전체를 무장해제시키고 둘러쌌다. 3군단 군단장과 사단장들을 모두 제압한 우무스가 진형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는 우무스의 호위대장인 이크네우몬과 다른 호위 기사들로부터 엄밀한 경호를 받고 있는 바라흐하가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3군단을 모두 제압한 우무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옆에는 3서클 마법사가 그의 목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서 있었다. 덕분에 우무스의 목소리는 들판 너머까지 퍼져 나갔다.

“나는 우무스 포트토르다. 켈커티스의 1군단장이며 제2바실레오스 대행을 맡고 있다. 나 우무스는 부정한 방법으로 삼백 년 켈커티스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르려 한 바라흐하를 탄핵한다. 더불어…….”

전체 진영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모든 음모를 주도해 왔던 바라흐하의 심복 우무스가 난데없이 바라흐하를 탄핵하고 나섰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낀 시쿳이 발광하려 했으나 그의 몸은 이미 우무스의 호위기사들에게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바라흐하는 지난 이 년간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치밀한 음모를 꾸몄으며, 시의 주요 인사들을 위협하고, 은밀히 위해를 가했다. 그가 세운 계획의 끝이 겨우 종신 목민관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라! 그가 세운 계획의 마지막은 황제다. 대대손손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줄 세습 황위다. 나 우무스는 더 이상 그의 망상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에…….”

바라흐하가 미친 듯이 머리를 저었다. 절대 그런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하려 했지만 사이런트 마법에 의해 봉쇄된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동맹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바실레오스든 목민관이든 집정관이든 켈커티스의 내정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황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안 그래도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켈커티스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된다면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킬 것이 자명했다. 즉 그는 켈커티스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동맹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고 봐야 했다.

이미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프불리오를 제외하고 아직 군단이 건재한 마테오, 쿠아란, 코리노, 라그란의 지휘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폴리스는 어느 개인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시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이뤘다. 폴리스는 분명 시민들의 것이다. 바실레오스는 시민들을 대표하는 자이자,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자다. 그대들 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자가 아니다.

이에 나 우무스 포트토르는 선언한다. 부당한 방법으로 목민관의 자리에 오른 바라흐하를 탄핵하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 바실레오스 자리에 오른 커트리안 님을 지지한다!”

온 들판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1군단병들 사이에서 작은 박수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박수가 함성소리로 바뀌고, 조금씩 커져 순식간에 온 들판을 가득 채웠다.

1군단에서 시작된 함성은 3군단으로 번지고, 동맹의 군단들로 번져 나갔다.

우무스는 미지근한 시선으로 전장을 굽어보고 있는 커트리안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뒤로 호위기대장인 이크네우몬과 호위기사들이 양쪽에서 바라흐하의 팔짱을 끼고 따랐다.

커트리안 앞에 선 우무스는 즉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으로 끌어당겨 기사의 예를 취했다.

“켈커티스 제1군단 군단장 우무스가 새로운 바실레오스께 인사드립니다. 켈커티스 만세, 동맹 만세!”

커트리안이 우무스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양쪽 진영을 향해 동시에 소리쳤다.

“보았는가! 들었는가! 우무스 포트토르는 명예를 아는 켈커티스의 시민이자, 곧은 군인이다! 그대들 또한 선택하라! 황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그대들의 대표를 원하는가? 그대들의 위에서 군림할 통치자를 원하는가? 그대들과 함께할 동료를 원하는가?”

잠시 말을 멈춘 커트리안이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커트리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희의 적은 누구인가? 나인가? 연합인가? 당장 무기를 거둬라! 자랑스런 동맹의 병사로 돌아오라! 동맹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나와 함께 아도니아로 진격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거대한 함성소리가 온 들판을 메아리쳤다. 방패를 두드리고 함성을 내질렀다.

전사로서 부끄럼 없는 생을 살고, 용맹하게 싸우다 갈 것임을 전쟁의 신 헤르모스에게 알리는 의식어이자 진격의 구호인 ‘아고투스 아르고스’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공포에 물들고 주눅이 들었던 프불리오 병사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기색이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하고 연합의 북방 3성을 깨트리며 동맹을 들썩이게 했던 커트리안군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다. 감히 원한을 품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저런 군대와는 두 번 다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수성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몇 배의 대군을 맞아 성문을 나서는 커트리안군을 보며 불안에 떨었던 켈커티스 시민들은 결박당한 바라흐하를 앞세워 당당히 귀환하는 커트리안군의 위용을 보았다.

연합의 군대를 연파하며 동맹의 자존심을 드높였던 커트리안군은 또 한 번 그들의 힘을 증명했다. 켈커티스 시민들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저 남자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바실레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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