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22화 (122/142)

122. 바라흐하의 반격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 두 진영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켈커티스에서는 바라흐하에 협조했던 인물들과 또 내부에서 바라흐하에게 호응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추리고, 다시 내정을 안정화시키는 데 진력을 소모해야 했다. 무려 이십 년간 켈커티스를 통치했던 바라흐하다. 그가 일구어 놓은 기반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반면 바라흐하 역시도 시간이 필요했다. 남하 중인 3군단도 합류해야 했고, 각 폴리스에서 출발한 병력들이 집결할 때까지 시간도 벌어야 했다.

바라흐하가 오누리스만에 주둔한 지도 어느덧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동맹의 폴리스들로부터 회신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를 받아 든 바라흐하는 참담함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26개 폴리스 중 병력을 출발시킨 폴리스는 불과 다섯 군데다. 나머지 폴리스들은 이번 사태를 켈커티스 내부 사정으로 치부하며 타 폴리스의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비슷한 답변을 전해 온 것이다.

그동안 동맹 폴리스들에 기울여 온 정성이 한낱 물거품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바라흐하는 처남이자 이제 로메노 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된 핀토 로메노를 호출했다.

“각 지부에 지시는 했는가?”

“그게… 지시는 했습니다만 의외로 잘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매형.”

갑자기 뒷목이 뻣뻣해졌다.

“뭐라?”

“거래 지연을 통보했더니 오히려 납품 지연 시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답니다. 무슨 배짱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압력을 가하라 했더니 거꾸로 통첩을 받았단 말인가? 도대체 뭘 믿고?”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상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자네! 그동안 상단 관리를 어떻게 해 온 건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나?”

처남을 엄히 꾸짖어 내보낸 후 바라흐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

대 켈커티스의 종신 목민관이다. 그런 자신이 이런 허름한 군막에 처박혀 시간만 죽이고 있다니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일이면 조카인 시쿳이 지휘하는 3군단이 도착한다. 또한 가까운 코리노와 라그란에서 출발한 병력들은 이삼 일 내에 켈커티스 인근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들이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도록 호응해야 했다. 이제 용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출진을 미뤄 봐야 아무런 득이 없었다.

총 여섯 개 군단, 아니, 코리노와 라그란의 병력까지 합류하면 일곱 개 군단이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도착할 동맹의 병력도 한 개 군단 규모다. 상대는 불과 두 개 군단, 그나마도 5군단은 온전치도 못했다. 전력상으로 봤을 때 지금의 병력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등골을 타고 오르는 불길한 느낌이 자꾸 결단을 망설이게 했다.

바라흐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눈을 뜬 바라흐하의 시선이 두 명의 호위기사에게 돌아갔다.

그들을 바라보자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커트리안이 강하다고는 하나 자신에겐 이들이 있다. 켈커티스 최강의 전사들, 하이블루와 크룬기어!

켈커티스에서 최강의 전사라면 서슴없이 하이블루를 꼽는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소드마스터 상급의 경지에 올라 수많은 강자들을 꺾고 켈커티스 최강의 전사로 인정받은 천재다. 비록 지난번 커트리안과의 시합에서 졌었다고는 하나 거의 대등한 싸움이었다. 하이블루는 자만했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자만은 방심을 낳았고 그 방심은 패배를 불러왔다. 만약 그때 하이블루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승부가 어떻게 됐을지 짐작할 수 없다.

켈커티스 방어전 때도 전장으로 보내 달라는 것을 가까스로 달래 놓았다.

하이블루는 커트리안에게 불알을 차이고, 등을 밟혔다. 전사로서의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졌다.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면 전사도 아니었다.

바라흐하는 검을 손질하고 있는 하이블루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명상에 빠져 있는 크룬기어에게 눈을 돌렸다.

사람들은 켈커티스 최강의 전사로 하이블루를 꼽지만 실질적인 최강자는 바로 이 친구, 켈커티스가 낳은 최고의 천재 크룬기어다. 워낙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하이블루처럼 나대지 않아서 그렇지 아는 사람들은 안다.

하이블루와 크룬기어는 동갑내기 친구다. 둘 모두 천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전사로서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 한쪽은 불같은 성격을 가졌고, 한쪽은 태생적인 내정함을 가졌다. 그 성격은 그들의 전투 스타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폭발적인 힘을 바탕으로 전투를 지배하는 하이블루에 반해, 크룬기어는 필요 이상의 힘을 쓰지 않는다. 날카로운 눈과 냉정한 계산으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싸움을 이끌어 간다.

재능은 비슷했으나 성격적인 차이로 말미암아 승패가 갈리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뜨거운 하이블루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크룬기어에게 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열 번을 싸우면 여덟 번은 크룬기어의 우세로 끝난다.

둘은 친구다. 그것도 아주 절친한 사이다. 성격적으로 완전히 상반된 두 사내가 그토록 친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다.

둘에 대해 생각하며 잠시 현실을 벗어났던 바라흐하가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늙으면 나약해진다더니 자신이 그 짝이지 않은가?

번민해 봐야 마음만 약해질 터, 결심을 굳혔다. 뚝심 하나로 버텨 온 사십 년 정치인생이다. 더 이상 나약해지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길밖에 없다. 켈커티스를 쓸어버리고 자신을 거역한 자들을 처단할 것이다. 진정 폭군이 무엇인가 보여 줄 것이다. 자신을 배신한 폴리스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똑똑히 각인시켜 줄 생각이다.

다음 날 예정대로 3군단이 본진에 합류했다. 그런데 3군단만이 아니라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 쪽 병력까지 함께 내려왔다. 그쪽 병력만도 한 개 군단에 가까웠다. 바라흐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한 것은 커트리안이지만 그 병력을 얻은 것은 자신이다.

커트리안은 수복만 하고 바로 빠졌고, 자신은 3군단을 파견해 도시를 재건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과일나무를 심고 방치하면 다른 이가 과실을 따 가는 법이다.

바라흐하는 자신을 위해 그 먼 길을 돌아온 조카 시쿳의 손을 굳게 잡았다.

3군단이 합류하자마자 하루를 쉬고 다음 날 바로 출진을 시작했다. 바라흐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늦출 이유도 없었고, 더 늦추다간 복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바라흐하군은 오누리스만을 그대로 비워두고 캐터펄트까지 총동원했다.

친위군단 격인 켈커티스 1군단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나란한 자리에 3군단과 엘리티아 군단이 자리를 잡았다.

3군단을 중심으로는 좌측엔 센드버그, 우측엔 노르드스톰 병력이 포진했다. 실질적인 중군의 역할을 할 병력이다.

양익으로는 마테오 군단과 쿠아란 군단이 넓게 포진했고 선봉으로는 프불리오 군단을 세웠다. 각 가문의 가병들이 후미에 포진했다. 총 삼만에 가까운 병력이 위풍당당하게 진군을 시작했다.

연합과의 전쟁에서도 이 정도 병력이 동원된 일은 없었다. 병사들로 들판이 가득 찼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바라흐하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 정도 병력이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켈커티스까지는 반나절, 캐터펄트를 끌어도 한나절이면 족하다.

바라흐하의 대군은 켈커티스를 십여 킬로미터 남겨 둔 지점, 켈커티스 평야가 시작되는 곳에서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코리노와 라그란의 병력과 조우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가병들과 함께 후위에 포진시키고 전진을 재개했다.

바라흐하는 풍요로운 켈커티스 평야를 가로지르며 다짐했다. 반드시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아 지금의 수모를 모두 되갚아 주겠다고!

현재 켈커티스의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건 차츠라였다. 동료들이 모두 크로아지크로 간 이 년간 차츠라는 홀로 켈커티스에 남았다. 그 이 년간 차츠라는 켈커티스 최고의 레인저부대인 제3레인저 부대와 홀로 맞섰다. 과거 동료였고, 부하였고, 제자였던 자들이 꾸준히 차츠라를 찾았다. 켈커티스 최고의 레인저들과 그림자들, 설사 바실레오스라 하더라도 그들의 타깃이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그런 그들조차도 차츠라에게 있어선 귀찮음의 대상일 뿐,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차츠라가 숨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차츠라는 일부러 자신의 종적을 드러냈다.

그림자들은 끊임없이 차츠라를 찾았고, 그런 그들에게 차츠라는 끊임없이 절망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제안했다. 회유를 했고, 또 그 이상의 숫자를 제거했다. 그렇게 포섭된 그림자가 넷이고, 레인저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열여덟이었다. 총원이 220명이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초라한 숫자였다.

커트리안이 바실레오스로 당선된 날, 기습적으로 남은 인원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사흘 후 스승인 첫 번째 손가락까지 자신의 손으로 제거했다. 커트리안의 침실에 숨어든 순간 그는 넘어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제3레인저 부대는 말 그대로 레인저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비록 정원의 일 할밖에 남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척후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들은 바라흐하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했다. 그리고 군대가 움직이자 즉각 차츠라를 통해 보고가 들어갔다. 물론 우무스로부터도 따로 전갈을 받았기에 이미 파악이 끝난 내용이었다.

방어전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커트리안은 5군단의 지원도, 스스로 돕겠다고 나선 아미나의 노장 로사리오의 도움도 거절하고 오직 켈커티스 2군단만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자신의 직할군단인 크로아지크 1군단이다. 하나하나가 최고의 전사들로 이루어진 최강의 군단이다. 상대가 누구건, 얼마가 되었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동맹의 폴리스들에게 커트리안군의 위력을 보여 줘야 할 전투였다.

두 군세는 정확히 켈커티스 동문 밖 오 킬로미터 지점에서 조우했다.

커트리안은 군단을 최대한 넓게 포진시켰다. 종으로 4개 조 12명을 배치했고, 횡으로 400열까지 전열을 넓혔다. 거꾸로 된 활처럼 기다란 진형이 완성되었다. 그 넓은 진형 중간 중간 갈리온에 올라탄 생환자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커트리안군의 사기는 끝없이 치솟았다.

반면 바라흐하군의 선봉인 프불리오 군단은 정석대로 200열 방진을 구성했다. 바라흐하는 특별히 하이블루와 크룬기어를 프불리오 군단에 배치했다. 생환자들의 예봉을 꺾기 위해서였다. 프불리오는 켈커티스 평야 북쪽에 자리 잡은 호전적이며 강력한 군사도시다. 켈커티스나 트렌티노에는 못 미쳤지만 뛰어난 기사들이 많았고, 병사들의 전투력도 강력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폴리스다. 그 프불리오의 정예병이 선봉에서 커트리안군을 막아낸다면 좌우에 포진한 군단들이 커트리안군을 포위할 것이며, 바로 중군이 치고 나올 터였다.

양군 모두 사기가 충천했다. 불패의 커트리안군은 물론이고, 병력 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한 바라흐하군도 마찬가지였다. 뜸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진군의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군 명령을 내려놓고 커트리안은 예의 미지근한 시선으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우무스와 함께 미리 준비해 놓은 각본이 있다. 가능하면 양쪽 모두의 피해를 줄여야겠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반란군에게 진짜 켈커티스 군단의 위력을 보여 줄 필요성도 있었다. 동맹의 병력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한 개 군단쯤은 박살을 내놔야 했다.

우무스는 약속대로 선봉으로 프불리오 군단을 내세웠다. 같은 켈커티스 평야에 자리 잡고 있는 폴리스로 역사적으로 트렌티노와 친하고 켈커티스에게는 각을 세우던 폴리스다. 반드시 희생을 시켜야 한다면 경고의 의미를 담아 프불리오를 희생시키는 것이 좋았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돌았다. 노리앙이 전장을 바라보고 있다. 가능하면 이 친구만은 전장에 투입하고 싶지 않다. 특히 동맹과의 전투에는 절대 투입해서는 안 되는 친구다. 강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재앙에 가까운 친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계의 문에서 탈출할 때까지만 해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었는데, 돌아온 노리앙은 인간의 경계를 아득히 넘어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마물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폭주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일 그렇게까지 변이되었다면 대계를 그르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먼저 제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피를 즐기거나 하는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그게 더 이상한 점이기도 하다.

다른 생환자들은 알게 모르게 많이 변화되었다. 육체적 변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피를 보기 시작하면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졌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심하게 우울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급격히 기분이 고조되거나 가라앉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따지고 보면 남의 일이 아니다. 사실 자신조차도 한 번씩 감정이 고조되면 자제하기가 쉽지 않다.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강력한 무력을 지닌 존재가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위험요소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흐르며 조금씩 완화되기를 바라지만, 희망일 뿐이다. 그런데 노리앙의 경우는 검투반 시절이나 지금이나 거의 완전히 동일했다. 자신들보다 일 년 반이나 더 그곳에 머물렀던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여간 다행이다. 행여 자신이 폭주하더라도 말려줄 존재가 있으니 말이다.

들판 가득 군홧발 소리가 울리며 양군의 전진이 시작됐다. 필라가 하늘을 뒤덮었다. 양군의 방패는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방패가 깨어지고 사상자들이 속출하는 와중에 양 진형의 거리가 오십 미터까지 좁혀졌다. 그 순간 점점이 박혀 있던 생환자들이 돌진을 시작했다.

갈리온의 주력은 말의 1.2배다. 순간적인 파워는 말 네 마리와 맞먹는다. 물론 갈리온의 두꺼운 가죽도 필라까지 막아 내진 못한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접근한 상황, 필라 몇 발 정도는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었고, 생환자들의 실력은 한 명, 한 명이 한 개 기대와 맞먹는 위력을 가졌다. 한 개 기대로 이루어진 ‘전진하는 창’이나 다름없다.

프불리오군이 갈리온 기사들의 돌진을 눈치챘을 때, 생환자들의 갈리온은 이미 코앞까지 육박한 상태였다. 설마 갈리온을 타고 돌진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지라 화력을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불리오군도 수십 년간 전쟁터에서 다져진 노련한 병력이었다. 이런 경우를 겪어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갈리온 돌진은 전세가 불리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 펼치는 전술이다. 때문에 이런 옥쇄작전에 대한 대응도 충분히 익혔다.

프불리오군은 즉각 방패를 땅에 박은 후 파이크를 곧추 세워 들었다.

이것만으로 갈리온 돌진을 막아 낼 수는 없겠지만 일정 정도의 저지력은 발휘할 수 있다. 그 사이에 흥분한 갈리온이 날뛰고 기사가 낙상하면, 기사와 갈리온을 동시에 마무리 짓는 수순이다. 정해진 수순을 위해 프불리오의 오오라 기사들이 글라디우스를 단단히 움켜쥐고 이선에서 대기했다. 돌진력이 상쇄되는 시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갈리온이 방패를 들이받았다. 그 전에 갈리온을 겨눈 파이크가 이쑤시개처럼 부러져 나갔다. 일부 파이크는 갑옷 같은 거죽을 뚫고 박혀들었지만 그야말로 거죽만 상하게 했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예상대로 어느 정도 파고든 갈리온들이 돌진력을 잃었다. 적진 한가운데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프불리오 병사들의 예상과 달리 갈리온들은 미쳐 날뛰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병사들을 들이받고, 물어뜯었다. 기사를 낙상시키기 위해 껑충껑충 뛰어오르거나 중구난방으로 발광하지도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인해 프불리오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집요하게 병사들을 노리는 갈리온을 피해 이리저리 밀리고 휩쓸렸다.

이선에 빠져 있던 오오라 기사들이 갈리온과 갈리온 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갈리온을 잠재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갈리온 기사들의 무위는 가공할 정도였다. 브로드소드나 투핸드소드를 글라디우스 쓰듯 자유자재로 휘돌렸다. 그 검에 어린 오오라가 줄기줄기 뻗다 못해 검 밖으로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프불리오에는 대체로 거친 전사들이 많다. 연합에 사례시온이 있다면 동맹엔 프불리오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용맹한 전사들이다. 프불리오의 기사들과 종사들이 겁 없이 갈리온 앞을 막아섰다. 갈리온을 베고 갈리온 기사를 벨 생각이었다. 하지만 갈리온 기사들은 프불리오의 기사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했다.

갈리온의 이마를 향해 오오라가 잔뜩 어린 글라디우스를 찔러 넣던 기사의 검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이 미터가량의 하얀색 단창이었다. 프불리오의 기사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그 순간 기다란 가죽부대가 기사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채찍이나 사슬을 쓰는 것은 보았어도 가죽부대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어쨌거나 기사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가죽부대를 피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휘어져 뒤통수를 가격하는 데는 대책이 없었다.

다른 기사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갈리온 기사들에게 달려들던 프불리오의 기사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갈리온 기사들의 실력에 변변히 대응도 못하고 목숨을 바쳐야 했다. 안 그래도 실력에서 딸리는데, 그들이 타고 있는 갈리온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잠시 갈리온 기사에게 집중했던 프불리오 기사가 갈리온에게 머리통을 물렸다. 아무리 오오라 기사라 해도 갈리온에게 머리통을 물려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

예니에프에게 달려들던 오오라 기사는 공중에서 튕겨져 나갔다. 분명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검과 함께 그대로 밀려 떨어져 피떡이 되었다. 양떼 무리에 사자가 난입한 꼴이다. 그 짧은 시간 프불리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어, 하는 사이에 기사와 종사들마저 병사들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기 시작했다. 어떻게 막아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상대들이었다. 악몽이었다.

그 순간 건장한 사내 하나가 갈리온 기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사내는 거의 사 미터를 도약해 예니에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일반적인 글라디우스보다 반 배는 긴 대형 글라디우스와 라운드실드로 무장한 사내, 하이블루였다.

예니에프는 떨어져 내리는 글라디우스를 브로드소드를 들어 막아 냈다. 예니에프를 태우고 있는 갈리온이 주춤거릴 정도로 묵직하다.

예니에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공격자를 바라보았다.

하이블루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검을 이렇게 가볍게 막아 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크룬기어나 커트리안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검을 가볍게 막아 내지는 못했다.

사실 둘은 초면이었다. 한두 번쯤은 보았어야 정상이나 이상하게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서 첫 대면을 했다.

그야말로 혼전, 둘 모두 상대방에게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기사가 예니에프를 기습했다가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예니에프의 시선은 여전히 하이블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잠시 상대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하이블루도 지금 이곳이 기사전을 벌이는 자리가 아니라 전장의 한복판임을 자각했다.

먼저 움직인 건 하이블루였다. 전사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하이블루였지만 비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대는 적진 한가운데로 무모하게 파고든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다.

하이블루의 글라디우스가 갈리온의 머리를 향해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갈리온을 처치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이블루의 검은 궤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검이 갈리온을 노릴 때 상대방의 검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캉!

검로를 되돌린 하이블루의 검이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를 막아 냈다. 공격이 아니라 방어, 그래도 너끈히 막아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급히 검로를 수정했기에 많은 힘을 실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가 하이블루의 글라디우스를 찍어 누르며 투구까지 반쯤 갈라놓고 떨어져 나갔다. 조금만 더 깊이 내려왔으면 자신의 글라디우스에 머리가 반쪽이 날 뻔했다.

하이블루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글라디우스를 살폈다. 검푸른 오오라가 잔뜩 응축되어 있었지만 글라디우스의 본체가 일 센티 이상 파였다. 하이블루는 일반적인 글라디우스보다 반 배는 더 긴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다. 길이만 긴 것이 아니라 두께도 두껍다. 이렇게 쉽게 파여 나갈 글라디우스가 아니다.

냉정한 크룬기어였다면 여기서 뭔가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미가 급한 하이블루는 자신이 밀렸다는 사실에 흥분을 하고 말았다. 하이블루는 광분했다. 오직 적을 죽이겠다는 살의로 눈이 돌아갔다.

어떻게 몸을 날렸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미친 듯이 예니에프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글라디우스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정신없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예니에프의 눈빛이 스산하게 바뀌었다. 상대의 실력은 충분히 놀랍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생환자들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실력이다. 하지만 예니에프는 웬만한 생환자도 아니었고, 더불어 거친 검에 충분히 익숙한 검투사였다. 상대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롤에 비할까.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가 가볍게 하이블루의 글라디우스를 걷어 내기 시작했다. 틈틈이 찔러 넣고 여유 있을 때마다 베어 냈다. 물론 다른 기사들의 기습에도 충분히 신경을 썼다.

잠깐 사이에 하이블루의 전신이 피로 물들었다. 가죽갑옷에 매달린 스케일이 떨어져 나갔고, 숄더 부위는 통째로 사라졌다. 투구 역시 벗겨져 나간 지 오래였다.

켈커티스 최강의 전사로 알려져 있던 하이블루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생환자에게 형편없이 깨져 나갔다.

그 시간, 산산이 깨져 버린 프불리오군의 진형에 강력한 파도가 밀려들었다. 어쩌면 북부에서 가장 단단할지도 모를 커트리안군의 방진이었다. 프불리오군 전체로 강력한 충격파가 밀려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진형 전체가 흔들렸다. 하이블루는 마음대로 전개되지 않는 전투에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상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목숨이 끊어져 나가도 좋았다.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형편없이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가 생환자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눈치챘다.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환자들 중 가장 강하다는 커트리안에게도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다. 커트리안에게 복수하기 위해 선봉을 자처했는데, 복수는커녕 이름도 모를 생환자에게 당하고 있는 것이다. 미칠 것 같았다.

하이블루의 터질 것 같은 가슴은 기어이 터져 나가고 말았다. 제 성질에 못 이겨 무리한 공격을 날리다 결국 예니에프의 검에 가슴을 정통으로 허용했다. 단단히 경화시킨 갈리온 가죽도, 주렁주렁 매단 스케일도 예니에프의 오오라를 막아 내지 못했다.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깊이 베어져 나갔다. 잠깐 동안 수축하며 하얗게 질렸던 상처가 벌어지며 피를 뿜었다.

하이블루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수차처럼 뿜어지던 핏물이 기세를 잃고 쿨럭이며 떨어져 내렸다.

멍하니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는 하이블루를 향해 예니에프의 브로드소드가 다시 한 번 날았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자비로운 검이다. 하이블루의 목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상대는 존중받아 마땅한 전사였다.

안 그래도 동맹 최강군단이라 불리는 켈커티스 2군단이다. 지난 이 년간 커트리안과 함께하며 그 전력이 배가 되었다. 정상적으로 붙었어도 프불리오 군단이 막아 낼 수 없는 전력인데 진형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이미 무너진 진형은 방패 차징 전에 눈먼 파이크조차 막아 내지 못했다. 차징이 시작되자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밀려 버렸다.

커트리안군은 정연한 방진을 유지하며 혼란에 빠진 프불리오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커트리안군의 종심은 불과 4개 조, 피로가 쌓일 틈도 없이 4개 조가 풍차처럼 돌아가며 교대로 프불리오군을 유린했다. 개개인의 능력도, 그동안 쌓아 온 훈련량도, 실전 경험과 사기도 압도적이었다. 첫 격돌로 절반 이상이 깨져 나갔다. 좌우로 돌아들어간 커트리안군이 프불리오군의 측면을 감싸기 시작했다.

양군이 격돌한 지 촌각도 지나지 않아 전세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한 프불리오군이 등을 돌렸다. 적의 파이크에 텅 빈 등이 노출되었다. 조금이라도 먼저 달아나기 위해 앞쪽 병사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옆으로 밀어붙였다.

군기가 엄정할 땐 동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개체가 집단의 입장에서 사고한다. 반면 혼란에 빠진 집단은 조직이 아니라 개체의 군집일 뿐이다. 프불리오 병사들은 다른 개체들과 경쟁에 들어갔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했다.

과거 아도니아 7군단이 보여 줬던 정연한 후퇴와는 크게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무방비하게 뒤를 잡히고, 피해는 배가되고 말았다.

두 진영이 한데 엉켜 혼란이 배가된 그 시간, 병사들 틈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온몸 여기저기 피가 엉켜 있는 사내는 악다구니를 쓰며 쫓겨 다니는 패잔병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했다. 눈에 띄는 갑옷도 없었고, 눈에 띄는 무장도 없었다. 잘 봐줘도 종사 이상은 봐 주기 힘든 차림이었다. 그나마 전사답게 아직까지 글라디우스를 움켜쥐고 있었으나 방패는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사내는 혼란에 빠진 다른 병사들 사이에 섞여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있었다.

그 사내의 눈에 여유 있게 전장을 걷고 있는 커트리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리는 대략 이십 미터, 호위기사로 보이는 몇몇 인물들과 함께였지만 불과 다섯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오만이든, 자신감이든,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커트리안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이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내의 눈에 섬광이 일었다. 그렇게 참아 가며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켈커티스의 실질적인 최강자, 크룬기어의 몸이 커트리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았다.

<10권에서 계속>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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