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21화 (121/142)

121. 여유로운 나날들

켈커티스가 비교적 빠르게 정상을 찾아가고 있을 때 바라흐하는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켈커티스의 상황을 전해야 할 그림자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빌어먹을 아델치! 그 늙은 놈이 설마 배신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델치는 암살 지시를 내리자마자 잠적해 버렸다. 다른 손가락들과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며칠 전 갑자기 보고가 끊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켈커티스를 빠져나오느라 정신이 없어 신경을 못 쓴 것이 탈이다. 덕분에 눈과 귀가 멀었다.

바라흐하는 제3레인저 부대 전체가 괴멸되고, 아델치 또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바라흐하는 신경질적으로 우무스를 호출했다. 지금 상황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오누리스만에 주둔한 네 개 군단, 그중 켈커티스 출신은 1군단이 유일하다. 자신의 명을 듣고 있지만 마테오의 군단도, 쿠아란의 군단도 그리고 프불리오의 군단도 눈치가 좋지 않다.

이대로 시간이 길어지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동맹의 중심, 켈커티스를 빼앗긴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조속히 탈환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빌어먹을 놈들이 감히 자신을 우습게 보다니, 끓어오르는 속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우무스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바라흐하는 인사도 없이 물었다.

“3군단과 4군단에서는 전갈이 왔는가?”

우무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바라흐하는 불길함을 느꼈다.

“3군단은 이미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도착하려면 보름은 예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4군단인데, 그게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연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입니다. 마리노가 뚫리면 마테오까지는 무인지경입니다. 도저히 몸을 뺄 수 없다는 전갈입니다.”

바라흐하의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소린가! 4군단 말고도 마리노에는 무려 2개 군단이나 주둔하고 있어! 그 병력으로 잠시도 막아 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른 일도 아니고 반란이야, 반란! 켈커티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단 말일세! 이보다 중요한 사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회군하라 명하게, 알아듣겠나?”

이렇게 호통을 치고 있지만 사실 판단착오를 한 건 자신이었다.

애초에 우무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3, 4군단을 호출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우무스가 좋지 않은 안색으로 대답했다.

“다시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그보다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 말에 바라흐하의 가슴이 또 한 번 덜컥했다.

“트렌티노가 출병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프불리오에서도 회신이 없습니다.”

“이놈들이?”

바라흐하는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배려를 해 줬는데, 어려움에 처하자마자 안면을 바꾼단 말인가?”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그랬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면목 없습니다.”

“이번 반란을 진압한 후 단단히 맛을 보여 주겠다. 이 바라흐하의 분노를 몸으로 겪게 될 것이야!”

“다행히 마리노의 병력은 하루 이틀이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바라흐하는 분노를 삭이며 냉정하게 계산을 했다. 3군단과 코리노가 도착한다면 오누리스만의 총 군단 수는 여섯 개다. 3군단은 우무스의 1군단만큼이나 믿을 만한 군단이다. 바로 친조카인 시쿳이 지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착하면 켈커티스의 군단이 두 개고, 동맹의 군단이 넷이다. 갤리선에 대한 타격을 염두에 두고 배치한 캐터펄트도 열 기나 있다. 성문을 쪼개기에 부족하지 않은 숫자다.

바라흐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번 기회에 다른 폴리스들의 본심을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트렌티노가 자신의 명을 거부했다. 프불리오도 미심쩍은 건 마찬가지다. 한 개 군단을 던져 놓고는 제 할 도리를 다 한 듯 늦장을 부리고 있다.

그래, 가까운 몇 곳만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총동원령을 내려 보는 거다.

따르는 폴리스와 따르지 않는 폴리스들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 다수의 병력이 켈커티스로 이동하게 되면 따르지 않는 폴리스들도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력시위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말이다.

바라흐하는 즉시 비서관을 호출해 동맹의 전 폴리스에 사자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최소 한 개 사단 이상을 켈커티스로 파견해 달라는 협조문이다. 한 개 사단 정도라면 부담 없는 숫자다. 하지만 모이면 만만치 않은 대군이다. 그리고 그 정도 협조에 응하지 않을 폴리스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동안 각 폴리스의 정치가들에게 들인 공이 얼만데, 이 정도 협조쯤이야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 병력들이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해도 좋았다. 자신의 명에 따라 병력이 출발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전 폴리스가 움직이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커트리안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트렌티노와 같은 배신행위도 근절될 것이다.

☆ ☆ ☆

조노량은 켈커티스의 웅장함에 반했다. 로두카나 크리푸를 봤을 때만 해도 전반적으로 중원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인구수도 그랬고, 거리의 모습도 그랬다. 하지만 켈커티스를 보고 나자 그 생각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건물 대부분이 석재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웅장함은 아도니아에 못지않았다. 군대의 규모도 그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도 중원에 못지않았다. 물론 그래 봐야 백만에 육박하는 병사를 보유한 대명제국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마냥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커트리안을 비롯한 일부 인물들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조노량은 여전히 한가했다. 무료한 오후를 보내기 위해 헤리엇을 대동해 시내 구경에 나섰다.

여전히 인파가 몰려 있는 시민궁 광장을 거쳐 고급 주택가로 들어섰다. 크리푸와 달리 바닥에도 신경을 많이 쓴 테가 났다. 흙 위에 반듯한 석재를 박고 그 틈을 손톱만 한 자갈로 메웠다. 비가 와도 진창을 밟을 일이 없어 보였다. 건물들의 모습도 외곽과 많이 달랐다. 일부러 그랬는지 거리 전체가 붉은색 지붕이다. 흰색 회를 칠한 외벽과 어울려 독특한 향취를 풍긴다. 격자로 이루어진 창문들이 규격에 맞춰 나란히 자리해 묘한 통일감을 준다. 중원의 건물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높고 웅장했다.

주택가를 벗어나자 바로 잘 정비된 하천이 보인다. 너비가 대략 삼 장? 넓지는 않지만 매우 깔끔하게 꾸며 놨다. 자연 그대로 방치된 중원의 하천과는 많이 달랐다. 강변 전체를 석재로 마감했고, 강둑에는 연초록색 잔디가 고르게 깔려 있다. 폭은 좁은데 깊이는 제법 깊어 보인다. 물이 맑아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마시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물이다. 신기하게도 그 하천 옆에는 더러운 물이 흐르는 도랑이 따로 있다. 아마도 오수를 배출하는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는 중원보다 훨씬 낫다.

하천을 건너자 시장통이 나온다. 넓게 형성된 가도를 따라 차양을 친 가판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각종 식재료와 먹거리, 장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나란히 늘어섰다. 시장통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불쾌할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명색이 시장통인데 이 정도 냄새는 당연한 거다.

조금 걷자 공터에서 커다란 돼지를 통째로 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웃통을 벗어 젖힌 사내가 커다란 통에 담긴 양념을 솔로 찍어 돼지 위에 바쁘게 발라 댔다. 겉이 익자 면이 좁은 칼로 쓱쓱 베어 내 접시에 담아낸다. 익은 부위만 기가 막히게 베어 냈다. 접시에 담기기가 무섭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셈을 치르고 집어 갔다.

조노량과 헤리엇도 한 접시씩 사 와 맛을 봤다. 새콤하고 달달한 맛도 일품이었지만 무엇보다 간이 제대로다. 맛깔스럽게 한 접시를 비워 냈다.

시장통을 누비며 다양한 형태의 먹거리들을 맛봤다. 색색이 고운 간식도 사 먹었고, 신기한 모양의 과일도 먹었다. 그렇게 조금씩 집어 먹은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왔다.

간단한 무기들을 파는 상점도 있었는데,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에 가까웠다.

조노량과 헤리엇이 건성으로 무기들을 건드려 보고 있는 동안 화려한 복장을 한 젊은 사내가 가병으로 보이는 병사 둘과 함께 그 거리에 나타났다. 사내는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사람들을 밀쳐 가며 길을 서둘고 있었다.

다른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켈커티스에도 수많은 명문가가 있다. 그리고 그 가문에서 떨어져 나온 방계가 있다. 일반 시민으로 분류되는 자들도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명 가문과 끈이 닿아 있다.

거리에 등장한 사내, 유타파는 명문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있는 다키우스가의 가까운 방계다. 켈커티스 2군단 3사단장인 치아파 다키우스가 차기 가주로 내정되어 있는 바로 그 다키우스가 출신이다.

지금의 치아파는 커트리안을 추종하고 있지만 다키우스가도 사실 바라흐하의 비호를 받던 가문 중 하나였다. 자연 가문 내부에는 바라흐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라흐하가 켈커티스를 뜰 때 행세깨나 하는 가문들 중 상당수가 가병들을 이끌고 바라흐하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다키우스가와 같이 규모가 크지 않은 가문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으니 그 방계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내, 유타파는 치아파와 사촌 관계였다. 치아파의 막내 숙부의 아들로, 일찍 부친을 여읜 탓에 본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친형제가 없는 치아파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커트리안이 켈커티스를 장악하자 바라흐하를 추종했던 가문들은 집 안에 꽁꽁 틀어박혔다. 유타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사촌형 치아파가 여전히 2군단의 사단장으로 복무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여러 차례 연통을 넣었다. 하지만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탓에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오늘에서야 치아파로부터 전갈이 왔다. 연통을 받는 즉시 2군단 주둔지로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다키우스가가 바라흐하를 따르는 가문으로 알려진 마당에 언제 무슨 해코지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2군단 사단장으로 있는 형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형의 2군단은 누가 뭐래도 현 정권의 가장 든든한 기반이었다. 유타파의 마음이 급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유타파는 운이 좋지 못했다.

“지나갑시다!”

유타파는 급한 마음에 한눈을 팔던 시민의 등을 슬쩍 밀었다. 말 그대로 슬쩍이었다. 문제는 그 시민이 최근 발목이 삐끗해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았고, 마침 한눈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히 비켜서지 못했다는 점과, 그 시민이 앞에 있던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몸을 기대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할머니가 중심을 잃고 들고 있던 음료수를 쏟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마침 그 앞에 서 있던 헤리엇이 할머니를 적절히 받아 안았지만 할머니가 쏟은 음료수를 뒤집어쓰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 본 헤리엇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유타파는 길을 서두는 바람에 자신의 뒤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이! 그냥 가면 어떡해?”

헤리엇이 소리를 질렀지만 유타파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 갈색머리! 서지 못해!”

두 번이나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유타파가 뒤를 돌아봤다.

허름한 갑옷을 입은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 얼간이가, 무슨 짓이냐? 사람을 밀쳤으면 사과를 하고, 피해를 입혔으면 보상을 해야지!”

유타파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예절머리가 없는 애송아.”

유타파는 손이 귀한 집안에서 떠받듦을 받고 자랐다. 세상을 제대로 알 만큼 나이를 먹지도, 경험이 많지도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떠돌이 삼류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가 켈커티스 명문가 출신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험한 입을 놀린 셈이다.

편협한 성격의 명문가 청년이 고분고분 받아들이기에는 상대의 태도가 너무 고까웠다.

유타파가 돌아섰다. 급한 마음도 손상된 자존심을 누르지 못했다.

“이 자식! 보아 하니 시민도 아닌 것 같은데 죽고 싶은 거냐?”

좌우로 나눠 선 두 호위가 인상을 구기며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헤, 적반하장일세! 이봐, 이거 안 보여? 다 젖었잖아! 네가 그런 것도 모르지?”

헤리엇의 앞섶은 끈적한 액체로 흠씬 젖어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지? 보상이라도 해 달란 말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보상을 원한다면 좀 더 공손해야 하지 않겠나? 여행자?”

“뭐?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좋다. 내가 길이 바쁘니 몇 푼 적선하는 셈 치지. 새 옷이라도 사 입도록! 아무거나 사 입어도 지금 걸친 것보다는 낫겠군.”

유타파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헤리엇을 향해 던졌다. 동전은 헤리엇의 몸을 맞고 튕겨 바닥을 굴렀다.

한마디로 거지 취급이었다.

헤리엇의 인상이 굳어졌다. 헤리엇이 비록 켈커티스 출신은 아니라지만 폴리스 쿠아란의 당당한 시민이다.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헤리엇에게서 살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조노량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시비를 지켜보다가 헤리엇이 살기를 품자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기에 말썽을 일으키면 커트리안에게 누가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헤리엇도 생환자이기 이전에 북국의 전사다. 더구나 혈기왕성한 젊은이다. 모욕을 받고 참아 낼 사내가 아니었다. 다만 노리앙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먼저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얌전히 주웠다.

그 모습을 보던 유타파가 비웃음을 머금고 몸을 돌렸다. 사실 이렇게 지체할 틈이 없었다. 그를 호위하던 두 명의 가병 역시도 떠돌이 용병에 대한 편견이 많았다. 비루하게 동전이나 줍는 용병을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가병은 이미 걸음을 떼놓고 있는 유타파를 따라 몸을 돌렸다.

헤리엇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애송이, 동전은 가져가야지!”

헤리엇은 유타파가 그랬듯 동전을 모아 돌아선 유타파의 얼굴에 뿌렸다.

다다다닥.

한 개도 빗나가지 않고 유타파의 얼굴에 적중했다.

강하게 뿌리진 않았지만 두 가병보다도 실력이 없는 유타파로서는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별이 번쩍인 건 잠시, 유타파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이런 모욕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칼을 먼저 뽑아 든 것은 유타파의 두 호위였다. 아직까지 오오라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나름 강한 전사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언제부터 떠돌이 용병 따위가 켈커티스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굴었던가?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지금 같은 시국에 말썽을 일으켜서 좋은 일은 없으니까. 다만 팔다리 하나씩은 분질러 놓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반성할 테니 말이다.

그런 마음에서였는지 두 가병은 검 날이 아니라 검 면을 사용했다. 그건 두 가병에게 있어서 천행이었다.

가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휘두르자 이를 지켜보던 부녀자들이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며 미리 비명을 질렀다.

의도대로 전개된 상황에 헤리엇이 노리앙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쯤 되고 보니 조노량으로서도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죽이진 말게.”

헤리엇이 손을 쓴 후에야 조노량의 의사가 전달됐다. 물론 헤리엇도 켈커티스 시민에게 심하게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 특히 검 면을 사용한 점을 높이 샀다.

두 가병의 실력으로는 헤리엇에게 검을 뽑게 만들 수도 없었거니와 나름 귀여운 짓을 한 보답으로 가벼운 징계만 내릴 생각이었다.

헤리엇은 매섭게 갈라오는 글라디우스의 궤적에서 살짝 비켜섰다. 그 궤적이 그대로 진행되면 노리앙에게까지 닿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적어도 켈커티스에는 노리앙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아니, 대륙 어디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살짝 비켜서는 것만으로 두 개의 글라디우스를 모두 피해 냈다. 그리고 두 가병의 안면으로 한 방씩의 주먹이 꽂혔다. 살짝, 아프지 않게! 하지만 두 가병에게는 정신이 몽롱할 정도의 매서운 주먹이었다.

두 가병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을 때, 헤리엇의 몸은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어때? 동전에 맞으니까 기분이 좋냐?”

어느새 유타파 눈앞에 바짝 다가선 헤리엇이 이죽거렸다. 유타파가 당황하는 사이에 헤리엇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유타파의 안면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가격했다. 뺨을 때린 것이 아니라 안면 정중앙을 때렸다. 물론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강하게 때리지는 않았다. 다만 유독 찰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난히 하얀 유타파의 얼굴 한복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이 붉은색 도장을 선명하게 찍었다.

정신이 멍했다. 자신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나마 가병들은 부잣집 도련님을 호위할 만큼 눈치가 빠른 자들이었다. 엉덩방아를 찧고 있던 두 가병은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유타파를 막아섰다.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리기 위해서였다. 유타파의 성격을 잘 아는 가병들이 행여나 유타파가 발광할까 봐 우려한 것이다.

이건 뭐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다. 이 자리에서 유타파가 발광을 해 봐야 대책이 없다. 망신은 둘째 치고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두 가병의 입장에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타파가 발광하면 자신들이 막아서야 하는데,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할 수 없는 실력자임을 눈치챘다.

두 가병은 양쪽에서 유타파의 겨드랑이를 끼고 줄행랑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타파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놔! 이거 놓지 못해? 이런 모욕을 당하고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이냐? 당장 결투를 신청하겠다!”

한참 후 유타파가 분한 마음을 안고 도착한 것은 켈커티스 2군단 군영이었다. 주둔지 입구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잠시 기다리자 치아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유타파의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얼굴이 그게 뭐냐? 무슨 일이 있었더냐?”

치아파는 어린 동생의 얼굴에 찍힌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단둘뿐인 형제였기에 치아파는 동생을 끔찍이 생각했다. 유타파를 부른 이유마저 잊고 유타파를 추궁했다.

유타파는 그래도 부끄러움을 알았는지 우물쭈물할 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치아파의 시선이 두 가병에게 향했지만 가병들도 시선을 피할 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두 가병의 눈두덩이도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한참을 닦달한 끝에 사유를 듣게 된 치아파는 그 급한 성격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무리 켈커티스가 혼란스럽기로서니 떠돌이 용병 놈들까지 무법천지로 시민들을 폭행하고 모욕한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3사단 예하 열 개 기대 중 첫 번째 기대를 맡고 있는 마이크를 호출했다. 자초지종과 인상착의를 설명한 후 기대원들을 대동해 서둘러 야시장 쪽으로 가라 일렀다.

최강 2군단 병력 중 무려 한 개 기대나 동원했으니 놈들을 잡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사 야시장을 빠져나갔어도 탐문을 한다면 오래지 않아 행선지를 잡아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떠돌이 용병들을 수배한 후 자신도 유타파를 앞세워 야시장 쪽으로 향했다.

야시장을 샅샅이 훑던 제7기대장의 눈에 조노량과 헤리엇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사도 드리고 탐문도 할 겸 서둘러 다가갔다.

“노리앙 군단장님과 헤리엇 기사님을 뵙습니다.”

“어, 마이크 기대장 아닙니까? 여긴 어쩐 일로? 병사들까지 끌고?”

헤리엇이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떠돌이 용병 놈들이 행패를 부리고 시민들을 폭행한다는 제보가 있어서 수습차 나왔습니다. 혹시 보신 바 있으십니까?”

헤리엇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조노량 역시 금시초문이라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글쎄요… 못 봤는데. 그나저나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켈커티스에서 행패를 부리지?”

“그러게 말입니다. 혼란을 틈타 경거망동하는 놈들이 생긴 듯합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병사들은 야시장을 뒤지며 탐문을 이어갔다.

마침 유타파와 함께 이쪽 거리로 들어서던 치아파가 조노량을 발견했다.

커트리안군에 가장 늦게 결합한 노리앙이었지만 군단병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북부뿐만 아니라 대륙 최강일지도 모를 엄청난 전사를 존경하지 않을 북부인은 없었다. 치아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같지 않은 그 무위를 견식한 이후로 노리앙의 추종자가 되다시피 했다.

치아파의 곁에 있던 유타파도 기대장이 그 무뢰배를 잡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 병사들이 그를 포위하지 않고 왜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기대장쯤 되는 전사에게 붙잡혔으니 도주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겁 없는 놈들이 도망도 안 가고 있었단 말이지?”

달려오며 외치는 유타파의 말에 기대장은 물론 함께 달려가던 치아파도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소린가?

워낙 목소리가 컸기에 마이크 기대장과 함께 떠돌이 용병을 성토하고 있던 헤리엇도 소리 난 방향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 노리앙 님? 저 친구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아까 그 친구군.”

그 사이에 치아파와 유타파 형제가 도착했다.

“노리앙 군단장니임…….”

“이 무례한 자식드을……!”

동시에 말을 흐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군단장님이라니요……?”

“설마 이분들께 떠돌이 용병이라 했던 것이냐?”

퍽!

치아파의 눈이 뒤집어졌다. 감히 누구더러?

커트리안에 이어 두 번째로 존경하는 노리앙 군단장에게 떠돌이 용병? 무뢰배? 오냐오냐 키웠더니 이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어린 동생이 눈이 이마에 가 붙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저 귀엽게 봐줬었다. 하지만 이건 봐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애초에도 성미가 불같은 치아파다. 눈이 돌아가자 동생이고 뭐고 없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두들기고 걷어찼다. 함께 따라온 가병들이 눈에 띄자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두들겼다. 눈이 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저기… 치아파 장군님, 그러다가 사람 잡겠습니다.”

보다 못한 헤리엇이 치아파를 말렸다.

“아닙니다, 헤리엇 님! 말리지 마십시오. 더 맞아야 합니다.”

유타파는 생전 처음 형에게 맞았다. 그것도 정신이 까무룩 해질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때려 대고 있었다.

유타파는 의식을 잃어 가며 생각했다. 군단장이라니? 군단장이 왜 저런 복장으로 시장바닥에서 더러운 음식을 집어 먹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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