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20화 (120/142)

120. 그림자의 운명

켈커티스에는 세 개의 레인저 부대가 있다. 넬리아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제1레인저 부대는 2년 전 엘리티아 평야가 수복된 후 원래 근무지인 넬리아 산맥으로 본부를 통째로 이동해 갔다.

제2레인저 부대는 크랄 산맥이 주된 활동 영역이다. 그들은 크랄 산맥에 속한 수많은 산들을 넘나들며 주로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첫 번째는 연합의 침투조들을 방비하거나 추적하는 역할이며, 두 번째는 산속 깊이 숨어 있는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레인저 부대가 있다. 바로 차츠라가 속했던 바로 그 부대다. 그들 역시 공식적인 주둔지는 크랄 산맥이다. 하지만 제2레인저 부대가 주로 방어적인 임무를 담당한다면 제3레인저 부대의 주요 임무는 적진 침투 및 교란 등 공격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총원은 220명,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스무 개의 손가락과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침투조로 구성된다.

스무 명의 손가락들은 적 폴리스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요인의 암살 및 포섭 등의 임무를 맡는다.

200명의 레인저로 구성된 침투조는 부대 단위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게 된다.

원래의 역할은 그랬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그들의 작전지는 적진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켈커티스 내부가 되었다. 물론 폴리스 내에 침투해 있는 적 스파이의 색출 등, 본래의 역할도 수행하긴 했다. 하지만 주요 임무는 바라흐하가 지정한 인물들에 대한 감찰 및 감시였다. 그들 중에는 원로원의 원로도 있었고, 주요 가문의 가주들, 그리고 고위직 행정가들과 군부의 장군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바라흐하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감시에 들어갔다.

그러던 차에 죽은 것으로 치부했던 생환자들이 폴리스로 귀환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자체는 그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생환자들 중에는 그들의 동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손가락이라 인정받던 사내, 차츠라였다. 과거 바라흐하의 지시로 특정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연합의 땅으로 넘어갔던 그가, 그 특정인물과 함께 폴리스로 귀환한 것이다.

첫 번째 손가락이자 차츠라의 스승과 같았던 아델치 시실리아니가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차츠라를 소환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 차츠라는 공식적으로 배신을 선언했다. 스승과 제자가 섬기는 주인이 서로 갈린 것이다.

아델치는 그림자다. 임무가 하달되면 친인척도 묻어야 하는 그림자였다. 감정 자체를 말살하도록 훈련받았고, 또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비록 차츠라가 그의 뒤를 이을 최고의 그림자였다고는 하나 적이 된 이상 제거하는 것이 당연했다.

몇 번의 개별적인 실패를 거친 후 아델치는 차츠라를 잡기 위해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다. 대부분의 손가락들을 동원하고 시내 곳곳에 레인저들까지 깔아 놓은 대규모 작전이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필요한 모든 자원을 끌어들였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그림자들을 투입했다.

차츠라는 그래야 할 만큼 뛰어난 그림자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아델치의 판단은 착오였음이 밝혀졌다. 그렇게 준비하고 동원하면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철저한 오판이었다. 차츠라는 그들의 힘으로 잡을 수 없는 진짜 그림자였다. 아델치가 그렇게 닮고 싶어 했던 스승, 클라흐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과연 차츠라를 잡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개별적으로 투입됐든, 집단으로 투입됐든 모두가 차츠라의 제거에 실패했다. 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귀환했다. 임무에 실패했음에도 죽지 않은 것이다.

아델치는 차츠라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한 번씩은 살려 주겠다는 약속, 두 번은 투입하지 말라는 부탁, 스스로도 그러마고 약속했던 바였다. 설마 혼자서 제3레인저 부대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아델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전사가 아니라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신의와 믿음은 그림자의 덕목이 아니었다.

아델치는 차츠라와의 약속을 여러 차례 어겼다. 그리고 그 결과 손가락들은 물론 제3레인저 부대의 절반을 잃고 말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되기까지 딱 이 년의 세월이 걸렸고, 나머지 절반마저 요 며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총원, 220명인 레인저부대 하나가 통째로 지워진 것이다.

지금 아델치에게 남은 손가락은 하나, 차츠라와 함께 키웠던 세 번째 손가락뿐이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임무가 떨어졌다. 커트리안의 암살!

아델치는 세 번째 손가락과 함께 시민궁 지하 암도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이틀을 웅크렸다. 당일 밤에도 밤새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기다렸고 새벽이 되어 마침내 수직으로 뻗은 좁은 사다리를 움켜잡았다. 한 점 빛도 들지 않는 벽과 벽 사이 좁은 틈에 설치된 사다리다.

이 사다리는 시민궁 동관 삼층에 위치한 바라흐하의 침실, 벽난로까지 수직으로 연결된다. 벽난로 안쪽 벽돌을 몇 개 들어내면 한 사람이 통과할 정도의 작은 통로가 확보된다. 바실레오스를 위한 비상 탈출구다. 물론 탈출로로 사용될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 은밀하게 바라흐하에게 보고해야 할 일이 생길 경우만 사용되었다. 그 탈출구가 역으로 침투로가 되었다.

시간은 대략 새벽 네 시쯤, 누구나 깊은 잠에 빠져들 시간이다.

아델치는 기운을 갈무리하며 사다리를 올랐다. 여인의 몸이지만 그가 가르친 자들 중 차츠라 다음으로 뛰어났던 세 번째 손가락이 뒤를 따른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바라흐하의 침실이었고, 지금은 커트리안이 잠든 공간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은밀하고 생쥐처럼 민첩했다. 최고의 그림자들답게 살기는커녕 터럭만큼의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다.

벽돌을 드러낼 때도 기름을 흠씬 먹여 일절 소리가 나지 않도록 했으며, 벽난로를 통과할 때도 잿가루 한 점 날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천을 재단해 만든 솜신발은 발자국 소리를 감춰 주었다. 목표를 이룬 후에는 발자국을 지운 후 감쪽같이 사라질 터였다.

두 그림자는 숨까지 멈춰 가며 은밀하게 접근해 침상의 좌우로 나눠 섰다. 침상에는 목표물인 커트리안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품에서 꺼내 든 날붙이가 창틈으로 스며든 달빛에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잠든 이의 목과 심장, 두 곳으로 그 날카로운 빛이 떨어져 내렸다.

이쯤 되면 설사 깨어난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두 그림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인후가 뚫리고, 심장이 찢어져야 할 사람이 멀쩡히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미지근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두 그림자는 몸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들려진 손은 굳어진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 눌러도 마치 남의 손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커트리안이 쓸데없는 물건을 치우듯 두 사람의 손을 슬쩍 밀쳐 놓으며 일어나 앉았다.

“이 친구들이 마지막인가?”

커트리안이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누군가에게 물었다.

아델치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제야 그의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잡혔다. 방 안에 커트리안 외에 누군가가 있었다.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창가로 스며든 옅은 달빛에 그늘진 자신의 그림자, 그 아래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입니다.”

커졌던 아델치의 눈이 다시 작아졌다. 잘 아는 목소리였다. 오래전에 현역에서 물러난 자신이, 이렇듯 직접 단검을 쥐고 복귀하게 만든 원인이 된 사내, 차츠라의 목소리였다.

아델치의 눈에 체념의 빛이 떠오르고 입가에는 허허로운 미소가 맺혔다.

그림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목은 완벽한 임무수행이다. 과정은 중요치 않다. 결과가 좋으면 그 어떤 비겁한 수단과 더러운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제자와도 같은 차츠라와의 약속을 배신했음에도 부끄럽지는 않다. 명령을 받았고, 임무에 충실했으니까.

그림자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수단이 아니라 결과였다. 그리고 자신은 부끄러워해야 할 결과를 맞이했다. 하지만 왠지 실패에 따른 자괴감이 들지 않았다. 이미 실패를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두 명을 마저 던져 넣음으로써 제3레인저 부대의 실패에 마침표를 찍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델치는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다. 완전한 실패를 확인하자 마음까지 편해졌다.

미련을 내려놓자 위안거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손에서 최고의 그림자가 탄생했다는 사실, 과거의 스승 클라흐보다 더 완벽한 그림자를 자신의 손에서 만들어 냈다. 그림자로서는 실패했지만 스승으로서는 그리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리하게.”

“명받습니다.”

차츠라의 모습이 아델치의 그림자 위로 떠올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뒤쪽, 스승에 대한 마지막 배려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차츠라의 손에 들린 가는 침이 아델치의 뒷목을 부드럽게 뚫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몇 방울이 피가 흘러나왔지만 차츠라가 소매로 닦고 잠시 누르고 있자 피마저 흐르지 않았다. 아델치의 시신을 조용히 받아 눕힌 후 세 번째 손가락의 뒤로 돌아갔다.

왜소한 체구의 복면인이다.

세 번째 손가락은 사사건건 자신과 대립하던 앙숙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옛 감정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단지 서로의 위치가 달랐을 뿐, 사심은 없었다.

“젠느, 예전엔 너를 사랑했었다. 우리의 신분이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구나. 다음 생엔 평범한 여자로 태어나 평범한 삶을 누리기 바란다.”

제3레인저 부대의 세 번째 손가락은 ‘사갈’이라 불리는 여인이다. 그녀의 잔인한 손속에는 동료들조차 치를 떨고는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금 거칠고, 조금 독한 정도였다.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 몸을 담다 보니 어느새 사갈이라는 별명을 쓰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방어였는지 아니면 여인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 것인지 그녀는 그림자들 사이에서도 잔혹하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다.

젠느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녀 역시 젊어서는 차츠라를 사랑했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차츠라가 미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립각을 세웠다. 그의 앞에서는 더욱 잔인하게 굴었다. 그렇게 쌓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비겁하게 왜 이제 와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굳어 버린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차츠라의 손에 들린 강침이 젠느의 뒷목을 무심히 뚫고 들어갔다.

바닥에 눕혀진 여인의 손은 여인의 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칠었다. 차츠라는 그 거친 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두 구의 시체를 끌고 방을 나섰다. 마음에 담았던 여인과 스승, 차츠라의 눈이 과거 조노량과 함께 본진을 찾아 헤맬 때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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