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18화 (118/142)

118. 격변의 켈커티스

유월 첫째 날, 예정보다 한 달이나 빨리 선거일이 잡혔다. 각 원로들에겐 이미 회의 소집 통지가 날아들었다. 켈커티스는 아직도 전시 상황이다. 선거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병사들이 깔렸다. 물론 명목상의 이유일 뿐, 실상은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소요사태에 대비해 바라흐하가 미리 깔아 놓은 병력들이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심지어는 경비를 서는 병사들도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켈커티스군은 병사가 되는 순간부터 명령에 대한 복종을 최우선으로 한다. 설사 그 명령이 자신을 죽일지라도 우선 따르는 것이 켈커티스 병사로서의 덕목이었다.

현재 켈커티스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이라면 단연 커트리안을 꼽는다. 이 년 전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하며 동맹과 켈커티스의 자존심을 한껏 살려 놨다. 그런데 최근 북방에 위치한 연합의 세 개 폴리스를 단숨에 함락시켜 북방 전체를 동맹의 영향력하에 두었다. 이건 자존심이 사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연합에 밀려왔던 동맹이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켰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최근 몇 년간 양상이 달라졌지만 십 년 전만 해도 양 세력 간의 주요 전장은 타라와 크리푸 시를 중심으로 한 북방이었다. 북방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북방을 제외하면 지형상 서로를 직접 타격하기가 수월치 않았기 때문이다.

동맹과 연합의 경계는 남이스테르 강이다. 강만 건너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남이스테르 강은 로지아 삼각주에서부터 오르비스 평야까지 장장 일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강이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연합이 상륙을 시도해 볼 만한 지점은 몇 곳 되지 않았다.

북이스테르 강이 남과 서, 두 갈래로 나눠지는 로지아 삼각주에서부터 엘리티아 평야 남쪽 오십 킬로미터에 위치한 롱고시까지 북부 최고의 산맥인 넬리아 산맥이 위치해 있다. 이 산맥은 엘리티아 평야를 감싸고 강의 서안을 따라 무려 삼백오십 킬로미터까지 뻗어 내려간다. 북이스테르가 서이스테르와 남이스테르로 나눠지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산맥이다.

넬리아 산맥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통칭 우디네스 내해(內海), 혹은 우디네스 삼각주로 불린다. 넬리아 산맥으로 가로막혀 동쪽으로만 세력을 확장하던 강폭이 이 지점부터는 거의 다섯 배 이상 폭을 넓힌다. 그야말로 내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넓다. 이곳이 바로 북부 최강의 해군도시인 라쿠스시가 위치한 지점이다.

이쯤해서는 동맹의 영토인 강의 서안으로도 상륙을 시도해 볼 만한 지점이 여러 곳 있다. 하지만 그곳엔 동맹 측 폴리스인 롱고시와 라그란 시가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한다. 제법 강성한 두 폴리스의 정예병들이 강안을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다. 두 폴리스가 합심해 상륙이 가능한 지점을 둘러싸고 아예 장벽을 세워 버렸다. 물살에 시달려가며 그 넓은 강을 건너더라도 상륙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 남쪽은 더 문제다. 바다처럼 넓어진 남이스테르의 풍부한 물줄기가 서쪽의 크랄 산맥과 동쪽의 르부르토 산맥 사이, 좁은 협곡에 끼어 장장 이백 킬로미터를 진행하는 것이다. 당연히 유속이 빨라지고 곳곳에 소용돌이가 생성된다. 그 마지막 지점이 바로 켈커티스의 앞마당 오누리스만이 위치한 지점이다.

지금은 몰라도 과거에는 소용돌이로 인해 절대 상륙이 불가능한 지점으로 꼽혔다.

다시 그 아래로 이백여 킬로미터를 내려간 곳에 폴리스 마리노가 위치해 있다. 현 시점 최대 격전지다. 거기서 더 내려가면 연합이 점령 중인 오르비스 평야다. 즉, 용병의 길, 머서너리 로드를 관장하는 알티스 공동체의 영역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합의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상륙작전을 펼치기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가능은 하겠지만 병력면에서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설혹 상륙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계속 진격한다면 적 폴리스들에 사방을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고, 또한 확보한 상륙 지점을 지켜내기도 힘들어 진다. 더불어 보급에도 상당한 애로 사항이 발생했다.

그렇기에 과거 연합에서는 북방을 먼저 친 후 상륙 지점이 널린 서이스테르 강을 남하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연합이 엘리티아 평야를 점령할 때도 마찬가지 방법을 사용했었다.

그런 북방을 커트리안이 평정해 버렸다. 연합이 동맹을 칠 수 있는 전통적이고, 유력한 루트를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다.

켈커티스 시민들이 열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속 보이게도 바라흐하는 선거를 앞당김으로써 커트리안의 출마를 원천 봉쇄해 버렸다.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무려 두 개 군단이 모두 투입돼 시민들의 불만을 철저히 봉쇄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시 외곽에도 동맹의 군단들이 주둔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혹시 모를 불미스런 사태에 대비해 폴리스 정부는 선거 기간 동안에는 시민들이 다섯 명 이상 모이는 것조차 불허했다.

그즈음 시민들을 경악시키는 또 하나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바실레오스 선거에 앞서 제도의 개편에 관한 안건이 먼저 처리될 거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물론 이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소문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소문이 확산되는 만큼 시민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바로 병사들에게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고 풀려나거나 심하면 며칠씩 감금당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이렇다 보니 시민들은 원로들을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비록 바라흐하에 대항해 출마한 인물이 그다지 유망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바라흐하에 대항한다는 것만으로도 지지받기에 충분했다.

전통적으로 바라흐하를 지지하는 원로의 비율이 사 할, 반대하는 원로의 비율이 사 할이다. 나머지 이 할은 비교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의 정서라면 그 이 할의 원로들이 바라흐하를 지지할 가능성이 낮았다. 잘하면 선거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었다. 나름 정세를 분석할 줄 아는 시민들은 이번 선거 결과가 결코 바라흐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공명정대함에 익숙해져 있었던 시민들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바라흐하에 반대하는 원로들 중 상당수가 와병 중이거나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선거 당일 실제로 제도 개편에 대한 안건이 먼저 상정되었다. 바실레오스 선거와 달리 제도 개편은 시민 전체 투표를 치르거나, 원로원에서 처리를 하더라도 제적 원로 삼분의 이 출석에 삼분의 이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선거 당일, 최근 노환이나 사고로 죽은 몇몇 원로들을 빼고 상당수의 원로들이 부상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참여율은 삼분의 이를 거뜬히 넘겼다. 그리고 바라흐하 측 원로가 발의한 제도 개편안을 접하게 되었다.

임기가 종신인 단독 목민관제!

사전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원로들은 경악했다.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안건이란 말인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바실레오스제를 폐지하고 종신 목민관제라니? 그것도 다른 목민관이 없는 단독 목민관으로?

오래전부터 떠돌던 소문이 사실이었다. 바라흐하가 왕정을 획책한다던 터무니없는 소문이 반쯤은 진실로 밝혀졌다.

독재와 독선을 이어 가던 바라흐하를 참아줬던 단 하나의 이유는 선거제였다. 다음 선거에서 무조건 낙선시킨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반란이라도 일으켰을 터였다. 그런데 이 안건이 통과되면 그마저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병상을 털고 나왔던 일부 원로들이 피를 토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노옴, 마브로! 이런 안건을 제안하다니, 공화제를 뿌리째 말아먹을 셈인가?”

“오스카 원로! 말이 지나치지 않소!”

“말이 지나치다니? 마드리히 원로야말로 제정신이시오?”

“어찌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본단 말이오? 국론을 통일하고 내정을 굳건히 해야 전쟁에도 집중할 수 있는 거 아니오?”

“알렘 경!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소?”

“순서대로 발언권을 얻고 제대로 토론을 하잔 말이오! 충분한 토론을 거친 후 투표로 결정하면 되는 일 아니냔 말이오!”

회의장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원로들과 안건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로들 간에 고성이 오고갔다. 원로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로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원로들은 중립을 표방하는 소수의 원로들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지지하지 않으며 오직 폴리스의 이익에 부합되는 쪽으로만 의견을 피력해 왔던 원로들이다. 그 원로들은 난장판이 되어가는 회의장에서 눈을 돌리며 안색을 붉혔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서로 간에도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안건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소. 난 돌아가겠소!”

마침내 일부 원로들이 퇴장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들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회의장 문이 봉쇄되고, 쏟아져 들어온 병사들이 원로들의 퇴장을 가로막았다.

그 후로의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말도 안 되는 토론이 형식적으로 이뤄졌고, 제도 개편에 대한 투표가 시작됐다. 각자가 지니고 있던 두 개의 목패 중 하나가 중앙으로 던져졌고, 그로써 결과가 결정됐다.

삼분의 이가 찬성해야 한다. 개편안에 반대를 표하는 원로들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목패를 헤어 보니 57명의 출석원로 중 무려 39명이나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종신 목민관제 개편안이 가결되었다. 반대의사를 표한 의원은 17명이었고, 기권이 한 명이었다.

그 한 명이 바로 현 바실레오스이자 원로인 바라흐하였다.

켈커티스 삼백 년 전통이 무너지는 현장을 지켜본 몇몇 원로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벽을 들이박고 자해를 시도하는 원로도 있었다.

“아, 히어데로는 어찌 이런 중요한 순간에 외유를 나섰단 말인가?”

선거 전에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다섯 명의 원로, 그들 중 셋, 아니 둘만 있었어도 찬성률 미달로 투표는 부결이었다. 참석 인원수나 찬성 수 등 모든 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어찌 이 중요한 시기에 외유를 떠났다가 실종될 수 있단 말인가? 일부 원로들이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는 바라흐하를 노려보았다. 히어데로의 실종에 대해서도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중립을 지켜왔던 원로들을 노려봤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개편을 반대하다가 쓰러지거나 자해를 시도한 원로들이 실려 나갔다. 안 봐도 뻔했다. 종신제 목민관 선출, 오늘 회의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속셈이다. 제도 개편과 달리 목민관 선출은 총인원의 절반만 있으면 가능했다.

그 시간 커트리안군은 라그란 시 외곽을 지나 남하 중이었다. 원래 예정된 일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현재 위치에서 켈커티스까지는 전속력으로 행군을 했을 땐 사흘, 여유 있게 행군을 하면 나흘이 소요된다. 하지만 커트리안은 자주 쉬어 가면서 행군을 최대한 늦췄다.

다음 날, 이십여 기의 갈리온이 커트리안군의 행로에 나타났다.

개편안을 발의했던 원로 마브로와 그를 호위해 온 호위병들이었다.

마브로는 이번 제도 개편에 대한 정당성을 피력하며, 이를 지지해 줄 것을 당당히 요청했다.

커트리안은 행군도 멈춰 놓고 마브로의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순히 들어 주었다. 기세가 산 마브로가 켈커티스의 장래와 발전을 언급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킨샤르는 물론 사단장들까지 모여들었다.

“이상이네! 난 부군단장이 반드시 이번 개편을 지지해 줄 거라 믿네. 바라흐하 목민관께서도 부군단장에게, 아니 이제 군단장이라고 해야겠군. 커트리안 군단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다네. 더불어 여러 가지 호의를 보이셨지. 잠시 귀를 빌려 주겠나? 고맙네. 목민관께서는 자네와 자네 가문에…….”

원로 마브로는 커트리안의 귀에 입을 가까이 붙이고 바라흐하가 보장한 지위와 가문의 이권 등을 자세히 읊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커트리안이 마브로를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마브로는 커트리안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사된 검은 눈부시게 하얬다.

머리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인지했으나 마브로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 검을 좇고 있었다. 검이 우측으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떨어져 내렸다. 마브로의 사고는 그 지점에서 멈췄다. 정오의 햇살 아래 벨벳처럼 부드러운 붉은색 도폭이 대지에 내려앉았다.

마브로를 수행해 온 가병들이 당황해 검을 뽑아 들었다.

커트리안의 호위무사 몇이 미끄러지듯 그들을 덮쳐 갔다.

“한 명은 남겨 두도록!”

커트리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물에 이르는 목숨이 떨어졌다.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도 없었고, 비명도 없었다.

한순간에 다섯의 목숨을 취한 샤마노프가 광폭한 살기를 뿜어냈다. 주인을 잃고 막 발광하려던 갈리온들이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커다란 덩치들이 포식자를 맞닥뜨린 토끼처럼 웅크렸다.

마치 꿈결처럼 소리 없이 장면들이 이어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병은 사고가 마비됐다.

압도적인 살기가 공간을 채우고, 가병의 근육은 한올 한올 풀려 버렸다. 방광을 조이던 근육도 본분을 잊고 늘어져 버렸다.

커트리안은 하루 전 차츠라로부터 바라흐하의 대계가 이루어졌음을 전해 들었다.

바라흐하는 협작과 음모와 폭력으로 개편안을 관철시켜 냈다. 그리고 스스로 초대 목민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날로부터 바라흐하의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차츠라는 전문을 통해 시민들은 자유를 박탈당했고, 반발하는 시민들은 강제 진압되고 항의하는 자는 무차별적으로 두드려 맞고 구금되었음을 알려왔다.

바라흐하는 마브로를 사자로 보내 커트리안에게 각종 이권과 함께 차기 목민관의 자리를 제안했다. 당연히 회유는 실패했다. 커트리안은 바라흐하가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 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바라흐하의 대계가 이루어 졌으니 이제 자신의 대계를 이룰 차례였다.

커트리안은 군단병들에게 켈커티스에서 벌어진 상황을 공표했다.

켈커티스의 300년 민주 전통이 무너지고, 바라흐하의 일인 독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들의 가문이, 그들의 형제가 바라흐하의 공포정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알렸다.

커트리안의 말이 한마디 더해질 때마다 군단병들은 분노했다.

안 그래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비상령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과거 병사의 신분으로 시민들을 통제했었지만 그들도 시민이었고, 그들의 가족도 시민이었다.

그런데 그에 더해 독재라니? 바라흐하는 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 생각인가? 왕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커트리안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난 바라흐하를 왕으로 섬길 생각이 없다! 바라흐하가 켈커티스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꼴을 지켜볼 생각이 없다! 자랑스런 켈커티스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겠는가?”

“따르겠습니다!”

“당장 진군합시다!”

“개선이고 나발이고 가서 싹 다 쓸어버립시다!”

“진격하자!”

“시민들에게 자유를!”

“독재자에게 창형을!”

“폴리스를 되찾자!”

“폴리스를 시민들의 품으로!”

“켈커티스 만세!”

군단병들이 글라디우스로 자신의 방패를 두드리며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가도와 온 들판이 쩌렁쩌렁 울렸다.

커트리안이 살려둔 마브로의 가병을 돌아보았다.

“보았는가? 이것이 우리 군단병들의 뜻이다. 가서 바라흐하에게 전하라! 목을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고!”

하나 남은 마브로의 가병은 혼비백산했다. 행여나 커트리안의 마음이 바뀔까 봐 허겁지겁 갈리온에 올라탔다. 주눅이 든 갈리온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부리나케 꽁무니를 뺐다.

다시 군단병들에게 돌아선 커트리안이 두 손을 높이 쳐 들고 외쳤다.

“켈커티스 만세!”

커트리안이 선창을 하자 전 군단병들이 목이 터져라 따라 외쳤다.

“켈커티스 만세! 만세! 만세!”

“켈커티스 동맹 만세!”

“켈커티스 동맹 만세! 만세! 만세!”

커트리안은 군단병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진군을 외쳤다.

1사단부터 차례로 진군을 시작했다. 서로 간에 발을 맞추고 일부러 발을 높이 들어 강하게 굴렀다.

착! 착! 착!

정연한 군홧발 소리가 들판 가득 울려 퍼졌다.

2년 전 켈커티스를 출발했던 2군단이 먼 길을 돌아와 이제 다시 켈커티스로 진군을 시작했다.

개선군이 아니라 진압군으로서, 행진이 아니라 진군을 선택했다.

군단병들은 커트리안의 지휘기대 앞을 지나며 자신들의 결의를 보여 주듯 보무도 당당하게 군홧발을 굴러 댔다. 1사단이 그렇게 지나가고, 이어 2사단이 지나갔다. 군단병들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폴리스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만큼 분노도 컸다. 어금니를 악다물고 허리에 찬 글라디우스를 굳게 움켜쥐었다.

이를 확인한 커트리안의 눈빛도 뜨겁게 불타올랐다. 자랑스러운 자신의 군단이었다. 이제 이들을 이끌고 켈커티스로 당당히 입성할 것이다.

커트리안군은 행군에 특화된 군단이다. 하루 오십 킬로미터도 거뜬히 주파한다. 그동안 일부러 지연시켰던 행보에 가속이 붙었다. 켈커티스로부터 겨우 백십 킬로미터, 서둔다면 이틀이면 거뜬했다.

커트리안군의 진군 소식이 켈커티스에 전해졌다.

2군단과 함께 최정예로 불리우는 1군단이 수성을 준비했다. 켈커티스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5군단은 주둔지를 켈커티스 성내로 옮겼다. 바라흐하의 명을 거부한 5군단장 파스쿠알레가 경질되고 1사단장 아쑨타가 임시 군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폴리스 아미나에서 파병된 아미나 2군단이 켈커티스 북문 밖에 포진했고, 마테오의 군단이 동문을 지켰다.

시민들도 커트리안군의 소식을 접했다.

군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폴리스를 향해 창을 겨눠선 안 된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반란에 대한 진압이다.

시민들은 바라흐하의 부당한 제도 개편을 지켜봤다. 원로원은 제 기능을 잃었고, 원로들은 자부심을 잃었다. 바라흐하의 폭거와 공포가 시민들을 향했다. 자유를 구속당하고, 구금당했다. 시민을 위한 군대가 시민들에게 무기를 겨눴다.

바라흐하의 치세를 몸으로 겪은 원로들과 시민들은 커트리안이 켈커티스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를 성토하기는커녕 거꾸로 지지를 표했다. 커트리안군을 진압군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했다. 입을 열어 주장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삽시간에 폴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아 온 바라흐하가 이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동시에 해결책도 알고 있었다.

커트리안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를 지지하는 자들은 반란에 동조한 것으로 간주했다. 오래전부터 눈엣가시 같은 이들을 골라내 본보기로 공개처형하고, 그 가족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중엔 원로원의 원로도 있었고, 주요 가문의 가주도 포함됐다.

시청 앞 광장에 수십 개의 말뚝이 세워지고, 수십 구의 시체가 내걸렸다.

켈커티스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가도가 뻗어 있다. 그중 켈커티스 평야를 관통하는 서쪽 가도가 가장 번화하다. 북쪽 가도는 군사적 목적으로 자주 이용되었고, 남쪽 가도는 오르비스로 이어져 있기에 정비가 잘되어 있다. 반면 동쪽 가도는 오직 오누르스만으로만 이어져 있기에 이용도 뜸하고, 정비 상태도 좋지 않다.

치밀한 바라흐하는 만약을 대비해 이 동쪽 성문에 마테오 군단을 배치하고, 공격이 예상되는 북쪽 성문 밖에는 만만한 아미나 군단을 배치했다. 커트리안군의 전력을 탐색하고 일부 병력을 줄여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할 군단이었다.

대략 열한 시경, 북쪽 가도 끝에 어렴풋이 커트리안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위로 높게 치솟은 감시탑에 배치되었던 병사가 커트리안군의 모습을 확인했다. 비상종이 울리고, 시민궁으로 전통이 날았다.

어제부터 잔뜩 긴장해 있던 5군단이 서둘러 성벽에 올랐고, 북문 밖 개활지에 주둔지를 구축한 아미나 2군단도 급하게 전투대형을 갖췄다.

커트리안군은 전장의 나팔도, 진군의 북소리도 없이 묵묵히 행군해 왔다. 자신들의 폴리스에 대한 예의였다. 만일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면 원정에서 돌아오는 군단으로 오해할 만큼 조용한 행군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고 있는 대형만으로도 공격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횡으로는 150열, 종으로는 30열, 열 개 조로 전개했다. 2군단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호프론방패를 앞세우고 필라를 꺼내 들었다.

가로로 넓게 전개된 진형이 한 치의 삐뚤어짐도 없이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전 군단병의 발자국 소리가 하나인 것처럼 맞춰졌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행군법이다.

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군단이 아도니아 군단인 것처럼 동맹에서 가장 강력한 군단은 켈커티스의 군단이다. 그중에서도 켈커티스 2군단은 ‘켈커티스의 창’이라고까지 불리는 극강의 공격 군단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커트리안군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4,500명에 이르는 군단병들이 마치 한 개 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켈커티스 평야에는 네 개의 폴리스가 존재한다. 서쪽의 트렌티노, 동쪽의 켈커티스, 북쪽에는 호전적인 프불리오가 위치해 있다.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소규모 폴리스가 아미나다. 아미나는 강성한 폴리스들에 둘러싸여 항상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바라흐하의 압력으로 켈커티스의 내부 일에 동원된 셈이다. 그것도 화살받이처럼 성 밖에 홀로 내던져진 입장이다.

방어진을 구축한 아미나 군단 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성문이 들어 올려졌다.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아미나라고 귀를 막고 살지는 않는다. 군단병들은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군단이 어떤 군단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동맹 내 최정예 군단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몇 년간 이전의 명성을 갈아엎어 버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지금에 와서는 과거 무적군단이라 불리던 로크리안의 직할군단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는 최강의 군단이었다.

아미나군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승전보를 들으며 열광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군단을 맞이해 싸워야 했다.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니 쫓기듯, 내몰리듯 이 자리에 세워졌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위축되고, 사기가 꺾여 나갔다.

아미나 2군단장, 과거 헤트르 폰티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합군을 수도 없이 물리치며 위명을 떨쳤던 노장, 로사리오 마잔티 장군은 비참함에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차라리 연합군 열 개 군단을 상대하라면 명예롭게 뛰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상대해야 할 군대는 연합의 군대가 아니었고, 그가 서 있는 전장은 명예로운 전장이 아니었다.

한때 누구보다 용맹했고, 또한 현명했던 노장은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십 분, 규칙적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켈커티스 2군단과 조우가 예상되는 시간이다.

노장은 사단장들을 호출해 몇 가지 지시를 내렸고, 돌아간 사단장들이 기대장들에게 하달했다. 지시가 전달된 걸 확인하고 로사리오는 즉각 진격을 명했다. 성벽 위의 호응을 포기하고 켈커티스 2군단을 맞이하기 위해 전진하는 것이다.

그 미친 짓에 성벽 위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켈커티스 5군단 임시 군단장, 아쑨타 장군이 당황하여 후퇴 나팔을 불어 젖혔지만 로사리오는 오히려 진군 속도를 높였다.

목표 거리는 사백 미터, 방진을 유지한 채 전진하면 대략 6, 7분 거리다. 성벽으로부터 사백 미터, 아주 애매한 거리다. 숙련된 병사가 필라를 내던지면 최고 백 미터까지 날릴 수 있다. 이십 미터 높이의 성벽 위에서 던진다면 백이십 미터가 유효 사거리다. 즉 이삼백 미터만 밀려도 적은 성벽 위로부터의 공격까지 대비해야 한다.

반대로 아미나처럼 허약한 군대는 이삼백 미터를 밀리는 동안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군단병들은 군단장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군을 독촉하는 기대장들 탓에 억지로 발을 놀렸다.

두 군단은 백여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필라의 사정거리다.

커트리안군은 150열 횡대였고, 아미나 군단은 터무니없게도 400열 횡대로 전개했다. 밀집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전열을 엄청나게 넓힌 것이다.

로사리오 마잔티는 당당히 아미나 군단의 선두에 섰다. 대열이 멈췄음에도 홀로 커트리안군을 향해 나아갔다. 마치 기사전이라도 신청하려는 모습이었다.

아미나 군단의 대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한때 대단한 전사였다고는 하나, 이제 늙고 노쇠했다. 기사 대전은 무리였다. 사단장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군단병들을 쏘아보며 소요를 진정시켰다. 그런 사단장들의 눈시울이 붉게 충혈됐다.

커트리안군 앞에 홀로 당당히 나선 로사리오가 외쳤다.

“명예로운 켈커티스의 창이자 자랑스런 동맹의 기둥인 켈커티스 2군단의 개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 동시에 동맹의 기상을 드높인 커트리안 군단장님께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요. 존경하는 그대를 이렇게 적으로 마주하게 된 점,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하지만 전장에서는 우정을 논하지 않는 법. 나 로사리오 마잔티는 당당한 북국의 전사로서 그대에게 기사 대전을 신청하니 받아 주기 바라오!”

투구 아래 가려진 노장의 눈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렸다.

노장을 바라보고, 다시 아미나 군단의 비정상적으로 넓은 포진을 바라보던 커트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뚫어 달라는 주문 같지 않은가.

커트리안은 스마르와 킨샤르를 불렀다. 늙은 장수를 오래 세워 놓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만 이 또한 노장군이 원하는 바를 이뤄 주기 위한 지연이니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로사리오가 쓰러지는 순간 아미나군이 진격을 시작할 것이다.”

“아?”

킨샤르는 커트리안의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깨달은 듯 나지막이 감탄사를 발했다.

“호위 기대원들과 사단장, 기대장들에게 전하라! 돌파에만 치중하고, 살상은 최대한 피한다.”

커트리안의 말에 킨샤르가 확인하듯 물었다.

“뒤가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뒤를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미나를 돌파하고 곧장 북문을 공략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스마르와 킨샤르가 물러나고 커트리안이 로사리오 장군의 앞으로 나섰다.

시간을 지체한 커트리안을 바라보면서도 로사리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명한 사령관일 거라 생각했소. 시간이 지체된 것으로 보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구려. 그대 같은 지휘관이 존재하는 한 동맹의 앞날은 밝을 것이오. 먼저 가서 지켜보리다.”

“로사리오 장군, 그대의 희생정신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오.”

희생정신이라는 표현에 로사리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커트리안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음을 알았다. 이제 명예롭게 죽을 시간이었다.

“차 한 잔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오. 이제 시작하겠소. 늙은이의 검이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내 검은 항상 진지하다오.”

로사리오 장군은 일반병사가 드는 투박한 방패와 낡은 글라디우스를 단단히 움켜쥐고 기세를 발했다.

‘호오.’

노장군이 발하는 기세를 느낀 커트리안이 가볍게 경탄했다. 노전사답지 않게 강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은퇴할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왜 아직까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그 기세가 설명해 주고 있었다.

로사리오의 검이 커트리안의 이마를 쪼갤 듯 날아들었다. 빠르지도 날카롭지도 않으나 실린 힘이 묵직했다. 또한 노련했다. 피해야 할지, 막아야 할지 갈등하게 만드는 속도다.

가벼운 탐색처럼 보이지만 그 검에는 무거운 경력이 실려 있다. 보통의 전사라면 방심하고 막다가 한 방에 당할 만한 힘이다.

하지만 상대는 북부 최강의 전사라는 아드리안조차 꺾어 버린 커트리안이었다. 노장군의 검은 커트리안에게 고스란히 읽혔다.

노장군의 명예도 살려 줄 겸 잠시 어울려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아미나군의 사기가 올라가거나 분노할 틈을 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노장군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안타깝지만 승부는 짧을수록 좋았다.

커트리안의 브로드소드가 날았다. 그는 노장군의 검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오히려 노장군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뿐이다.

이제 막 시작이다 싶었는데, 결투는 허무하게 끝났다.

커트리안의 브로드소드가 손잡이만 남기고 노장군의 복부를 관통해 등으로 길게 빠져나왔다.

피를 머금은 하얀색 검이 한낮의 햇살을 반사해 반짝였다.

단 일합,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승부였다.

커트리안은 조심스럽게 노장군을 내려 눕혔다. 마치 죽은 기사에게 예를 표하듯 경건한 모습이었다.

노장군이 죽음으로 준비한 안배에 따를 차례였다. 아미나 군단의 사단장들이 진격을 명했다. 그에 맞서 켈커티스 2군단도 진격을 개시했다.

2군단은 커트리안과 노장군 앞에서 썰물처럼 갈라졌다가 그들을 지나친 후 밀물처럼 모여들었다. 군단병들이 지나가며 커트리안과 노장군의 모습이 가려졌다. 그 자리에 조노량과 제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우스가 노장군의 몸에 손을 대자마자 커트리안은 거침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제우스의 축복이 노장군의 몸에 떨어져 내렸다.

제우스의 힐링은 대륙 최고다. 죽지만 않았다면 어떠한 상태에서도 살려낼 수 있다. 노장군의 눈이 번쩍 떠지는 순간 조노량의 손이 스쳐 지나갔고, 노장군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필라가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거리는 삼십 미터다. 삼십 미터에서 던져진 필라는 방패도 꿰뚫는다. 하지만 두 군단은 약속이나 한 듯 필라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짧은 거리가 순식간에 메워지고 두 군단은 정면으로 맞붙었다.

방패 차징이 시작될 때는 몸을 비스듬히 세우고 팔꿈치를 최대한 접은 후 방패를 어깨에 밀착한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튕겨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후열의 파이크병이다. 마지막 격돌의 순간만큼은 파이크를 포기하고 방패병의 뒤를 받친다. 방패병이 밀리지 않도록 힘을 더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보통 사 열까지 가세한다. 그렇기에 일렬의 방패병이 받는 압력은 엄청나다. 적의 힘과 후열의 힘이 동시에 일렬의 방패병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로 젊고 힘이 센 신병이 일렬을 담당한다.

켈커티스 2군단의 차징 능력은 동맹 전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타이밍, 집중도, 힘 모든 면에서 아미나 병사들은 켈커티스 2군단의 차징을 버텨 낼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아미나 군단은 단 한 번의 격돌로 형편없이 깨져 나갔다. 튕겨지고, 깨지고, 엎어졌다. 밟히고, 찔리고, 무너졌다. 단 한 번의 격돌 만에 아미나군의 방진이 허무하게 깨져 나간 것이다. 방패병이 뚫리자 후열이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열에서 전투를 독려해야 했을 독전관들마저 등을 돌렸다.

힘도 부족하고, 방진의 두께도 부족하다. 전열이 깨지면 후열이 대비하고 있다가 막아 내야 한다. 하지만 아미나군에는 이를 막아 낼 병력이 없었다.

크로아지크 1군단은 그대로 아미나 군단을 돌파했다.

넓게 포진한 군은 중앙이 허약하다. 대신 상대적으로 양익이 길게 전개된다. 중앙이 돌파 당했다 하더라도 이 양익이 적을 감싸고 뒤를 조이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아미나군의 양익은 그마저도 포기하고 솔개를 본 병아리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반전해 추격하기만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커트리안군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지도, 쓰러진 적을 확인사살하지도 않았다.

아미나군을 돌파하자마자 그대로 성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문을 깰 수 있는 장비도, 성벽을 오를 수 있는 사다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추호의 망설임 없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커트리안군이 사정거리 안에 들자 성벽 위에서 필라가 투척되기 시작했다.

이고르는 동료들과 함께 빗발치는 화살과 필라를 뚫고,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방패위로 필라 하나가 날아와 박힐 때마다 가중되는 무게 때문에 방패를 들어 올리기도 벅찼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글라디우스로 방패에 박힌 필라를 쳐서 부러트릴 틈조차 나지 않았다.

이고르는 복무를 시작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신병이다. 다른 군단 같았으면 중진 소리를 들을 만한 경력이었으나 고참병이 많은 켈커티스 2군단에서는 여전히 신병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군단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이고르는 티모테우스 아래서 3년을 복무했고, 커트리안 아래서 2년을 복무했다. 안 그래도 동맹 최강이라 불리던 자신의 군단은 커트리안의 지휘를 받기 시작한 이후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었다. 무패, 무적군단! 그의 군단은 앞으로도 절대 패해서는 안 됐다. 그것이 군단의 자부심이고 자신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상대가 설사 같은 켈커티스의 군단일지라도 절대 질 수 없었다.

함께 달리던 동료의 머리가 젖혀지며 튕겨져 나갔다. 힐끗 돌아보자 왼쪽 눈을 뚫고 들어간 필라가 뒤통수로 비어져 나왔다. 즉사다. 이고르는 이를 악물고 방패를 치켜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해자다. 과거 더 깊이 파야 한다고 투덜대던 바로 그 해자다.

‘연합군이 켈커티스까지 들어왔다면 이미 전쟁이 끝난 건데, 해자가 깊어서 뭐할 거냐.’ 하며 타박하던 기대장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해자가 깊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고르는 망설임 없이 해자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볼 것도 없이 성문이 터져 나가는 소리다. 익숙한 소리며, 기다리던 소리다. 어쩌면 대륙 최강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던 그 기사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이고르는 무너지는 흙더미를 긁어 가며 해자를 기어올랐다. 성문이 뚫렸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달려야 했다. 2군단의 힘을 보여 줄 차례다.

켈커티스 5군단병들은 이 싸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이며 영광스런 개선군인 2군단병들과 왜 싸워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지금 자신이 던지는 필라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가 자신의 형제일지도, 친구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그들을 향해 필라를 날린단 말인가? 하지만 미친 듯이 전투를 독려하며 돌아다니는 사단장과 독전관들의 고함소리에 밀려 연신 필라를 날려 댔다. 하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이 던진 필라는 힘없이 방패에 튕겨지거나 옅게 박혀들어 갔다. 어쩌다가 자신들이 던진 필라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면 가슴이 철렁했다.

그 순간 성벽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따라가다 터무니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웬만한 공성병기에도 끄떡없을 것 같던 성문이 형편없이 깨져 있었다. 마차 서너 대는 동시에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병사는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문 바로 우측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달려 들어오는 2군단병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절대 공성병기는 없었다. 그런데 무엇으로 성문을 뚫었단 말인가?

병사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성문이 뚫린 이상 이제 백병전이 벌어질 차례다. 아무리 같은 켈커티스군이라 하더라도 백병전이 시작된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했다.

뚫린 성문 안으로 과거 켈커티스 2군단이라 불렸던 병사들이 물밀듯 밀고 들어왔다. 그 선두에는 몇몇 생환자들이 서 있었다.

켈커티스 5군단 2사단장, 에토르는 바라흐하의 처가인 로메노가의 차남이다. 상단은 어차피 형인 핀토가 물려받을 것이기에 자신은 군부에 투신했다.

나름 무재가 있었던 터라 나이 서른셋에 사단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종신 목민관의 자리에 오른 고모부, 바라흐하를 도와 군단을 장악했다. 1사단장 아쑨타와 함께 고집을 부리던 군단장 파스쿠알레를 구금했다. 이제 자신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단창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샤마노프라고 했던가? 과거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내다. 정신병자 같은 생환자 중에 하나였다. 살기 어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서슴없이 단창을 내지른다.

혼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군단병들이 자신을 힐끔거렸다. 병사는 병사를, 기사는 기사를! 상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자임을 알았으나 싸움을 피할 상황도 아니었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쉽게 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놈! 비루한 포로병 놈아, 감히 창을 거꾸로 잡다니 죽고 싶었던 게로구나!”

샤마노프의 고개가 에토르를 향해 돌아갔다. 막 창대로 병사 하나의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키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이 병사를 처리한 후 상대해 주려 했던 고급 장교가 도망가지도 않고 자신을 도발했다.

“오호! 기개 있는 기사시군요?”

샤마노프가 거침없이 에토르를 향해 다가섰다.

에토르는 겁도 없이 샤마노프를 향해 도약했다. 그는 선공필승의 신념을 가진 중급의 소드마스터였다.

하지만 샤마노프의 발길질에 몸이 거꾸로 뜨고, 창대에 투구를 가격 당했다. 그것이 에토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커트리안군이 모두 성내로 진입하자 순식간에 혼전이 시작됐다. 커트리안군에게도 성 안은 익숙한 장소다. 그리고 상대하고 있는 5군단병들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인정을 베풀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진압군이자 혁명군이었다. 최대한 빨리 시민궁으로 가 바라흐하를 잡지 않으면 일을 그르친다고 생각했다. 자연 커트리안군의 공세는 매서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켈커티스 5군단병들은 필사적일 수가 없었다. 적이지만 적이 아닌 사람들이다. 한두 다리만 건너도 친구이고, 친지이다. 거기다 그들 스스로도 바라흐하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솔직히 불만이 많았다. 자연 켈커티스의 정예병다운 용맹함이 발휘되지 않았다. 전투는 소극적이 되었고, 커트리안군이 밀면 미는 대로 힘없이 물러나게 되었다.

바로 그 시점에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자랑스런 켈커티스의 시민들이여! 자부심 높은 켈커티스의 전사들이여! 너희들의 도시가 개인의 손에 떨어지는 걸 두고만 볼 것인가? 언제까지 독재자의 편에 서서 검을 들 것인가?”

커트리안의 목소리는 전장의 소음을 뚫고 모든 병사들의 귀에 박혀들었다.

“그대들은 켈커티스의 병사인가? 아니면 바라흐하의 사병인가? 자랑스런 켈커티스 시민들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마땅한가? 독재자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이 마땅한가?”

켈커티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투가 벌어지자 문을 걸어 잠그고 처박혔던 시민들의 귀에도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또렷이 박혀들었다. 겁에 질렸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숙여졌다. 명예로운 켈커티스의 병사로서 전장을 누비던 젊은 나날들을 떠올렸다.

숙여졌던 그들의 눈 속에 천천히 결의가 어려가다 확 하고 불길이 되어 치솟았다. 늙은 퇴역 병사들이 오래된 무기와 날선 농기구를 결연히 움켜쥐고 잠긴 문을 열었다.

“나와 함께하지 않겠는가? 자랑스러운 공화제를 지켜 내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는 시민궁으로 간다. 그대들도 함께 가지 않겠는가?”

전장의 소음이 가라앉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머뭇거리고 있는 5군단병들 뒤로 시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늙은 노병과 아직 성년이 안 된 아이, 팔다리를 잃은 상이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시선이 5군단 병사들을 향했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으나 뜨거운 눈빛으로 대신 말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검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켈커티스의 창’이다. 그들은 켈커티스를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승리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게 영광스런 개선행진을 선사하지는 못할망정 독재자의 수족이 되어 그들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과연 옳단 말인가?

시민들의 눈에 어린 적대감만으로도 그 뜻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5군단 병사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폴리스가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았다. 단지 군인이었기 때문에 명령에 복종하고 있을 뿐, 그들이라고 눈과 귀를 닫아 놓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계기가 마련됐다. 스스로 일어설 수는 없었지만 일어선 자의 손을 들어줄 순 있었다.

5군단 병사들은 오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동료들에게 겨눴던 검을 거뒀다. 심지어는 독전관들도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임시 군단장 아쑨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돌이키기엔 늦었다. 몇몇 기대장들이 글라디우스를 거꾸로 쥐고 몸을 돌렸다.

아쑨타 장군은 그의 병사들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었다.

커트리안군은 시민궁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5군단병들이 뒤를 따르고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북문 전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바라흐하에게도 상황이 전달되었다. 아미나 군단이 형편없이 깨져 버리고, 못해도 며칠은 버티리라 보았던 성문이 불과 두 시간도 안 돼서 함락 당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아미나 군단이 깨지는 건 애초부터 상정했던 내용이다. 그들은 2군단의 전력을 확인하고, 적당히 피해를 입히는 역할이었다. 그들은 어차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커트리안이 이끄는 군단은 불과 한 개 군단이다. 계속해서 소모전을 펼치다 보면 결국 밑천이 거덜 난다.

그리고 군단이 온전하다 해도 한 개 군단으로는 켈커티스의 높은 성벽을 공략할 수는 없다. 2군단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5군단도 정예로운 켈커티스의 군단이다. 그리 녹록한 군단은 아니다. 더구나 성을 끼고 싸운다면 상대가 누구든 호락호락 지지 않을 강병들이다.

그런데 터무니없게도 두 시간 만에 성문이 날아갔다. 더구나 싸우라고 내보낸 병사들이 창을 거꾸로 쥐었다. 어리석은 시민들이 그들에게 합류했다. 바라흐하는 노련한 정치가일지는 몰라도 야전을 거친 지휘관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당황했다.

다행히 시민궁은 1군단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켈커티스가 자랑하는 최강의 수비병단이다. 상황이 역전되어 당장은 병력 면에서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쉽게 시민궁을 내어 줄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네 개 군단 대 한 개 군단의 싸움이 어쩌다 보니 거꾸로 한 개 군단 대 두 개 군단의 싸움이 되어 버렸다. 생환자들의 무지막지한 무력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오금이 저렸다.

“후퇴해야 합니다.”

우무스가 한껏 우려를 담아 권했다.

바라흐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우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 굳이 시민궁 수호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바라흐하의 뇌리에 오누리스만의 병력이 떠올랐다. 일단 그쪽으로 몸을 뺀 후 3군단과 4군단을 불러 올리고, 동맹의 군단들을 소환한다면 월등히 유리한 싸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단지 일시적으로 불리해졌을 뿐이다. 5군단이 창을 거꾸로 들었다고 해도 그래 봐야 적은 두 개 군단, 이번 위기만 넘긴다면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노련한 정치가답게 결단도 빨랐고, 행동도 빨랐다.

바라흐하는 우무스의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절대 넘겨줘서는 안 되는 문서들만 서둘러 챙겨 시민궁을 벗어났다. 소식을 들은 바라흐하 측 원로들도 가병들을 챙겨 급히 바라흐하의 뒤를 따랐다. 모아 놓고 보니 가병들의 숫자도 꽤 되었다. 동쪽 성문을 나서 마테오측 군단까지 합류시키고 보니 만만치 않은 병력이 되었다. 이제 수적으로는 오히려 앞섰다. 눈덩이든, 사람이든 오래 구르면 불게 되어 있다. 약해졌던 마음이 다시 자신감으로 차올랐다.

그 덕에 괜한 미련이 생겼지만 신중한 바라흐하는 그래도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좀 더 굴려야 했다. 2군단이 보여준 그동안의 전과를 생각한다면 쓸데없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바라흐하는 애초에 계획한 대로 오누리스만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함께해야 할 시민궁의 고급 행정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라흐하는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열 명의 행정관보다는 한 명의 병사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켈커티스는 인구가 이십칠 만에 달하는 거대 도시다.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도시가 큰 만큼 북문에서 시민궁까지의 거리도 상당했다.

의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커트리안군은 시민들을 차근차근 결합시키며 아주 천천히 시민궁을 향해 행진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커트리안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커트리안군에 합류했다.

커트리안 옆으로 슬그머니 차츠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츠라는 커트리안의 귓가에 은밀히 바라흐하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갖고 있었는데, 도주라니? 당당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진압군을 맞이하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십 년간 시민궁의 주인으로 있었던 자답게 마지막까지 시민궁을 지켜 줄 거라는 기대는 했다.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애초부터 이곳에서 바라흐하를 잡을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자에게 켈커티스를 이십 년이나 맡겨 놓았으니, 그동안 연합에게 밀리기만 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어쨌거나 바라흐하는 도주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를 따르는 원로들과 가문들을 깡그리 이끌고 함께 도주해야 했다. 청소는 나눠서 하는 법이 아니다. 걸레와 함께 두면 새 수건도 걸레가 된다. 한 번에 깔끔히 정리해야 했다.

대계의 마지막은 아도니아의 공략이다. 누가 뭐래도 아도니아 공략은 수십 년간 동맹의 숙원사업이었고, 자신의 최종 목표였다. 그리고 그 일은 뒤를 걱정해 가며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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