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루드
오십 중반의 사내, 건장한 체구에 콧수염을 밀고 회색 턱수염만 짧게 기른 모습이 멋들어졌다. 이목구비도 굵직굵직해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 사내 피온 치프만은 인중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고뇌에 빠졌다.
내우외환이라 했던가? 지금 그의 처지가 딱 그랬다.
안 그래도 집안일로 머리가 복잡한데, 연합이 통째로 흔들릴 사건이 발생했다.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피온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특히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이 성장하면서 문제가 대두됐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자식일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했던가? 피온이 그랬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둘째 파란에 비해 첫째 루이드는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가문을 이을 장자라 더욱 애정을 쏟았던 루이드, 어려서부터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딸처럼 살갑게 굴었다. 그 어떤 부모가 그런 자식을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볼을 발그레 물들인 채 품에 와 안기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그날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할 때면 그야말로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첫째 루이드는 하인들의 말조차 무시하지 않고 세심히 들어줄 정도로 성품이 고왔다.
피온은 그렇게 차분하고 사근사근한 루이드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커서까지 계속 사근사근했으니 말이다.
치프만가는 태생이 전사의 집안이다. 마계대전 당시 수많은 마물들과 싸우며 아도니아를 건국한 다섯 영웅 중 하나인 루이드 치프만이 일군 가문이다. 초대 가주가 그랬듯 치프만가는 아도니아 오백 년 역사 동안 이름 높은 전사들을 배출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까지 그렇지는 못하지만 전통은 전통, 치프만가는 후계자에게 반드시 전사로서 일정 경지에 오르도록 강요받았다.
그것뿐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둘째 파란을 후계자로 세우면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치프만가의 또 하나의 전통, 장자승계의 불문율이다.
장자가 살아 있는 한 다른 누구도 후계자의 자리를 탐할 수 없었다. 건국 영웅 중 하나이며 초대 가주인 루이드 치프만이 엄히 세운 전통이다.
피온과 마찬가지로 초대 가주 루이드도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던 모양이다. 형제들 간에, 혹은 숙질 간에 발생할 수 있는 후계싸움을 용납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분란을 저어해 장자승계 원칙을 확고히 했다. 이를 어기거나 획책한 자는 파문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그 원칙이 이어지다 보니 끔찍한 변형이 발생했다.
바로 장자를 살해하는 편법이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 모자란 장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피온은 설마 자신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초대 가주의 이름을 받은 첫째 루이드, 심성도 여린 데다 전사로서의 자질은 눈곱만치도 갖추지 못했다. 근력도 부족했고, 마나 감응력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천박한 노예들이나 익히는 악기 따위에 빠져들었다.
반면 둘째 파란은 전사로서 놀라운 자질을 보여 줬다. 대범한 마음씀씀이며, 뛰어난 머리까지 첫째 루이드와는 크게 달랐다.
그 둘의 성장을 지켜보며 가문의 어른들이 쑥덕대기 시작했다. 듣지 않아도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피온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파란을 사랑하듯 여러모로 모자란 루이드도 사랑했다. 그랬기에 행여나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가문의 전통을 생각하면 나약한 후계자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해도 좋았다. 그저 전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만 되어 준다면 모든 불만을 무시하고 후계자로 확정 지을 생각이었다. 루이드가 후계를 잇고, 파란이 형을 받쳐 준다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되는 거였다.
해서 멀리 오르소 시까지 사람을 보내 유명한 검술 선생을 초빙해 왔다.
그게 통한의 실수였다.
여리다 생각한 것이 알고 보니 여성스러운 것이었다.
검술 선생을 붙여 줬더니 낯 뜨겁게도 검술 선생과 붙어먹었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차라리 미소년을 탐했다면 이해해 줄 수 있다. 성적 취향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노예 소년들도 얼마든지 붙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이드는 남성의 역할이 아니었다. 어찌 치프만가의 후계자가 남색도 모자라 여성의 역할을 한단 말인가?
그 빌어먹을 검술 선생은 그날로 목을 날려 버렸다.
차마 아들을 죽일 수는 없어서 죽은 것으로만 꾸미고 수용소로 보내 버렸다. 혹시 몰라 중부 대륙에서 활약하던 옛 부하를 끌어 올려 감시자 겸 호위로 붙였다. 사지로 보내면서도 호위를 붙여 준 것은 모질지 못한 부정(父情) 탓이다.
그렇게 죽은 것으로 치부한 자식이 돌아왔다. 그의 앞에 나타나 배시시 웃으며 돌아왔음을 고했다. 죽였다던 첫째가 돌아왔으니 가문에 난리가 난 것도 당연했다. 가문의 원로들이 연달아 피온을 찾았다. 현 치프만가의 가주이자 아도니아의 최고 실세인 자신을 감히 힐책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은 우려를 담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현 후계자인 파란 치프만은 가문에서도 몇 대 만에 배출한 천재였다. 불과 스물에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룬 것도 모자라 어느새 중급에 다다랐다. 가병들의 마음을 확고히 틀어잡는 통솔력도 보였고, 단호한 결단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문에 어울리는 최고의 후계자였다.
그런 파란을 두고 다시 루이드를 후계로 내세울까 봐 저어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자식을 다시 죽일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전통을 바꿔서라도 어떻게 살려 볼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문제는 돌아온 루이드에게 있었다. 돌아온 루이드는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가문의 수석기사가 루이드 손에 목숨을 잃었다. 시비 끝에 발생한 정당한 대결이었다.
비록 수석기사를 잃었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치프만가의 수석기사는 소드마스터 상급에 다다른 엄청난 실력자다. 그런 수석기사를 루이드가 정당한 대결로 누른 것이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좋아해야 할지 꾸짖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명분을 얻은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도 루이드는 연달아 가문의 기사들을 살해했다. 사유를 들어 보면 딱히 루이드가 잘못한 것이 없었다. 시비를 건 것도 기사들이었고, 죽은 것도 기사들이었다.
피온은 죽은 기사들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멀쩡히 지나가는 루이드의 뒤통수를 때리거나, 발을 걸거나, 욕설을 해 댔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떤 미친 자가 가주의 아들을 그런 식으로 대한단 말인가? 더구나 무려 수석기사를 정당한 실력으로 누른 자에게 그런 식으로 대든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들은 가문의 녹을 먹는 기사였고, 죽은 수석기사의 실력을 잘 아는 기사들이다. 그런 자들이 잇달아 루이드와 대결을 펼쳤고, 죽었다.
혹, 수석기사의 죽음에 대한 복수인가 싶어 기사들을 불러 터놓고 물어 보기도 했다. 여러 사건으로 인해 루이드에게 약간의 적의는 갖고 있었지만 죽이고 싶어 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결투에 대해서도 루이드가 정당했음을 인정했다. 그런 모욕을 받고 참아 냈다면 그게 더 비웃음거리였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당사자가 다음 날 루이드에게 시비를 걸다가 죽었다. 그렇게 죽은 자 가운데에는 방계 가문의 사람도 둘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골치가 지끈거릴 일이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황을 따져 보면 피해자는 오히려 루이드였다.
루이드를 불러 추궁도 해 봤다. 스스로 정당했다는 변명도 않는다. 그저 미안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는다. 엄청난 실력을 쌓아 돌아왔지만 성품은 그대로다. 피온은 그런 루이드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쌓여만 가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합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북방 3성이 고스란히 떨어졌다. 라지도니아가 폐허로 변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존스캐빈과 카테네오가 차례로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불과 며칠 상간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라지도니아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존스캐빈과 카테네오는 아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상당한 군세를 자랑하는 강력한 폴리스였다. 세가 이전만 못하다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폴리스들은 아니다.
이로서 북이스테르 강 이북에는 연합의 폴리스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북방에 위치한 동맹의 폴리스는 무려 다섯 개다. 모두 규모가 고만고만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폴리스들이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그 고만고만한 폴리스들이 이스테르 강 북부를 무인지경으로 넘나들게 생겼다.
이제는 서쪽 말고 북쪽까지 경계를 해야 할 판이다. 갑자기 연합의 전선이 대폭 넓어진 셈이다.
피온이 충격을 받은 것 중 하나는 존스캐빈과 카테네오의 태도였다.
도시의 재건을 위해 향후 십 년간은 그 어떤 외부 일에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연합에서 탈퇴할 의사를 전달해 왔다.
도시 방어를 위한 병력 파견과 경제적 지원 등 여러 가지 제안을 해 봤지만 그 어떤 설득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의 의사는 요지부동이었다.
크로아지크를 빼앗긴 타격과는 궤를 달리했다. 크로아지크야 철광산을 빼면 쓸모없는 황무지일 뿐이다. 하지만 폴리스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삼십여 년 전 헤트르 폰티나에 의해 그레체와 로두카까지 밀렸던 사건 이후 최악의 사건이었다.
몇 개월 전 선거로 애송이 트라쿠스에게 제1목민관 자리를 내주고 대신 자신은 제3목민관의 자리에 올랐다. 너구리같은 트라쿠스가 로크리안의 중도파를 모두 끌어안고 이뤄 낸 결과였다. 뭐 그래 봐야 잔챙이들 몇이 뭉쳤을 뿐이다.
제1목민관은 늘 전장을 떠돌아야 한다. 반면 제3목민관은 아도니아의 내정을 담당한다. 제1목민관의 자리가 화려하긴 했지만 내실은 제3목민관이 오히려 나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는 제3목민관의 자리를 택한 것은 신의 한 수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트라쿠스였다. 애송이가 의욕만 앞서서 자칫 대세를 망칠까 두려웠다. 로크리안이라면 그나마 믿어 볼 수 있겠지만 삼 년 전 오누리스만 작전의 실패로 인해 재기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정치적 기반이 약해서 그렇지, 로크리안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정쩡한 정치인들을 규합해 하나의 세력으로 일궈 내는 수단을 발휘했다. 그런 인물이 중요한 작전을 펼치면서 후방을 소홀히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처음 그 작전을 입안했던 건 자신이었다. 작전을 입안하고 필승을 확신했다. 그 작전은 북부를 통일할 수 있는 결정적 작전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 실패를 용서키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너무 많았다.
어쨌거나 그 실패로 말미암아 본인은 탄핵을 받은 후 칩거해 버렸고, 그의 중도파는 트라쿠스의 보수파에 흡수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이런 골치 아픈 일도 없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도니아의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신병들로 이제 겨우 인원수나 맞춰 놓은 제3군단과 제7군단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4군단과 5군단은 오르비스 평야에서 동맹 측 세 개 군단을 맞아 대치 중이다. 1군단은 아도니아에 남겨 둬야 했고, 2군단은 만약을 대비해 북방 사르보 인근으로 이동 중이다. 결국 당장 가동 가능한 군단은 6군단 하나다.
탄핵을 주도했던 입장에서 이제 와 로크리안을 다시 끌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아드리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대안이라도 삼을 수 있었겠지만 스스로 크로아지크에 처박혔다가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억지로라도 끌어내렸어야 했다.
설마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올 줄 어찌 알았겠느냐 말이다.
연합의 영토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개망신을 당하고도 이를 응징해 줄 마땅한 대책이 없다.
애송이 트라쿠스? 제 딴에는 머리 좀 쓴다고 깝죽거리고 있지만 정작 큰일이 닥치면 과연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역시 무리를 하더라도 로크리안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