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16화 (116/142)

116. 다시 켈커티스로

그해 여름, 커트리안은 라지도니아 함락을 명했다. 오랜만에 쥬시아누스의 2군단이 나섰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예니에프가 따라나섰고, 당연히 공성 병기 아메조프도 따라나섰다.

출발한 지 불과 여드레 만에 승전보가 전해졌다. 한 개 군단만으로 수비군 두 개 군단을 뭉개고 라지도니아를 싹 쓸어버렸다.

일반적으로 성을 공격할 때는 최소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크로아지크 2군단은 그런 일반론을 깨 버렸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등자로 무장한 기마병들이 성내로 난입해 들어갔다. 기마 상태로 난입한 크로아지크 병력을 보고 라지도니아의 기사들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정규 병단을 상대로 마적 떼처럼 달려드는 모습을 어찌 비웃지 않겠는가?

라지도니아 기사들과 군단병들이 기마대를 맞아 달려나왔다. 기사들이 기마병을 떨구면 파이크병과 방패병들이 마무리하는 수순이었다. 그게 정상이었다.

캉!

첫 격돌에서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기마병과 격돌한 기사들이 그대로 튕겨 나가고, 베어졌다.

지지력이 약하다 해도 기마병에게는 돌격으로 얻은 힘이 있다. 라지도니아의 기사들도 이를 아주 잘 안다. 그렇기에 노련한 기사라면 정면에서 기마대의 차징을 받지 않는다. 검에 힘을 빼고 적당히 흘려 받기만 해도 기마병은 낙마를 면치 못한다.

차징 시 기마병은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관성을 이용하려 한다. 이때 상대가 힘을 흘려버리면 기마병은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하게 된다. 반대로 힘을 덜 주면 격돌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낙마를 한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낙마를 면키 힘들다.

그런데 생각한 것과 달리 격돌한 순간 튕겨 나간 건 라지도니아의 기사들이었다. 등자에 발을 얹고 엉덩이를 들다시피 해 달려든 기마병의 차징은 인간의 힘과 몸무게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백 킬로그램의 체중에 더해 가속을 받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 생겼다.

이를 맞이한 라지도니아 기사들은 그 압도적인 힘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검에 힘을 실은 기사는 그대로 튕겨 나갔고, 힘을 흘리려던 기사는 검과 함께 목이 떨어졌다.

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뚫리고, 받치고, 짓밟혔다.

생환자들이 나설 것도 없이 그것만으로 전세가 기울어 버렸다. 두 배의 병력이 순식간에 괴멸되었다. 기마병의 뒤를 따르던 보병대가 산산이 깨어진 라지도니아 군단을 깨끗이 마무리했다. 부수고 불태워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시를 쓸어버렸다.

크로아지크 2군단은 마치 가벼운 사냥을 떠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왔다. 군단장 쥬시아누스는 할 일이 없었다.

2군단이 돌아오자 수용소가 바빠졌다. 언제까지 크로아지크에 처박혀 금만 캐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커트리안이 켈커티스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2군단이 돌아온 바로 그 날이다.

수레를 정비하고 모아놓은 금괴를 실었다. 수레 세 개를 가득 채웠다.

그동안 게이트를 넘은 금도 많았고, 지참할 금도 많았으며, 앞으로 생산될 금도 많았다. 커트리안군은 자금력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8월 23일, 커트리안군은 출정식을 가졌다. 출정하는 군단은 1군단 하나였지만 수용소에 남아 있을 2군단은 물론 포로들도 함께 도열했다.

그들이 도열해 있는 것만으로 수용소 앞마당이 가득 찼다.

커트리안이 연단에 올라 출정사를 시작했다.

“제군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대들은 오늘, 역사의 한 장을 여는 것이다. 오늘 내딛은 첫 발자국을 위대한 시작이라 칭하고 싶다.”

늘 간략하게 출정사를 끝냈던 것과 달리 이번 출정사를 제법 길게 이어졌다.

“얼마 전 우린 라지도니아를 지도에서 지웠다. 그리고 이제 존스캐빈과 카테니오를 지워 버릴 것이다. 그리고 켈커티스로 돌아간다. 당당히 개선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무엇을?"

커트리안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무엇이겠는가? 우리 동맹의 숙원이 뭔가? 통일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었던가? 그렇다. 통일이다. 동맹의 힘을 하나로 모아 칠십 년 전 그랬던 것처럼 북부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 것이다. 아도니아 시민궁에 우리의 깃발을 꽂는 그 날까지! 쉼 없이 나아갈 것이다.”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동맹에 누가 있어 이렇게 당당히 북부 통일을 천명하겠는가?

통일은 북부인들의 오랜 숙원이다. 그건 연합의 사람이든 동맹의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커트리안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명분을 주었고, 목표를 제시했다.

“또한 남아 있을 2군단병들에게도 당부한다. 크로아지크를 지켜라! 단 한 명의 연합군도 이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도니아로 진군하는 그날! 그날에는 그대들도 나와 함께할 것이다!”

2군단에서도 1군단 못지않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등자를 장착한 이후 기마병들의 사기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기마대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고, 라지도니아에서의 승리를 기억했다. 이번에 함께 출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혈기가 끓어올랐다.

말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수급되고 있었다. 군단병 전체가 기마병이 되었을 때, 그 위력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커트리안은 손을 들어 함성소리를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 말에 군단병들이 호응했다.

“우리는 자랑스런 크로아지크 군단입니다!”

“북부 통일을 이뤄낼 위대한 전사들입니다.”

“북부 최강 군단입니다.”

병사들은 제각기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커트리안이 다시 외쳤다.

“그대들은 누구의 병사들인가?”

군단병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당신의 병사들입니다!”

“사령관님의 병사입니다.”

“오직 사령관님만 따르겠습니다!”

“커트리안 님 외엔 누구도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합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좌에서 우로 훑어갔다. 미지근한 시선이 아니라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열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군단병들에게 전해졌다. 군단병들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그대들은 나의 병사들이다! 자랑스런 동맹의 병사들이며, 하나 된 북국의 영광스런 병사가 될 것이다!”

한쪽에 도열해 있던 포로들마저 전율을 느꼈다. 그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는 연합에서 결행한 세 번의 원정을 모두 막아 냈다. 출정했던 크로아지크의 병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세 복귀했다. 포로들이 아는 한 연합은 단 한 번도 수용소에 코빼기를 비치지 못했다. 자신들의 영토를 잃고 가만히 있을 연합이 아님을 잘 알기에 원정이 실패했음도 알았다.

포로들도 바보가 아니다. 특히 로뜨나 기대장 출신들은 경험이 적지 않았다.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도 전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출정했던 군단이 오래지 않아 별 피해도 없이 고스란히 돌아왔다는 것으로 연합의 군대가 패배했다는 사실을 유추했다.

크로아지크의 병력은 무려 3개 군단이다. 웬만한 폴리스에도 뒤지지 않을 전력이다. 어느 때는 한 개 사단만 남기고 전 병력이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늦게나마 그들이 주변 폴리스들을 공략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연합의 폴리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방어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할 만큼 여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저 사내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포로가 된 기대장 중 일부는 과거 커트리안이 검투반에 있을 때부터 이곳에서 복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트리안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드리안이 그를 주목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왜 그를 주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 죽이지 못한 걸 후회했다.

포로들은 주눅 들고 위축되었다. 과연 누가 있어 저들을 막을 것인가? 로크리안을 떠올리면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커트리안의 연설이 조금 더 이어졌고, 마침내 출정을 알리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

“아고투스, 아르고스!”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함성소리가 잦아들고 1군단이 수용소를 빠져나갔다.

2군단장인 쥬시아누스와 채광을 책임진 뮤트, 크리푸와의 연계를 담당한 하이오지, 그리고 만약을 위해 브리오티스가 남았다. 하이오지가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가 스마르의 엄한 시선을 받고는 찔끔했다.

출진에 참여한 건 조노량, 예니에프, 샤마노프, 폴, 아메조프, 헤리엇이었다.

커트리안군의 진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과거 하이오지로부터 훈련받은 1군단은 행군에 특화된 군단이다.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하루 사십 킬로미터를 주파했다.

불과 보름 만에 크로아지크 남동쪽, 존스캐빈시에 도달했다.

존스캐빈은 아도니아도 무시하지 못할 강성한 폴리스다. 북이스테르 강 북부에서는 연합과 동맹을 통틀어 최강으로 불린다.

존스캐빈의 영역은 북이스테르 강의 풍부한 물줄기를 기반으로 너른 초원과 양질의 숲이 적절히 형성되었다. 그 숲과 초원엔 방목해 키우는 소와 양으로 가득했다. 스스로는 용맹의 숲 병사들이라고 칭하지만 다른 폴리스로부터 목동들이라고 비하되어 불리기도 한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존스캐빈 사람들은 체구가 크고 체력이 좋았다. 그렇기에 과거 엘리티아 점령 시에도 주력군의 역할을 했다. 그 덕에 무려 3개 군단이나 잃었지만 놀랍게도 이 년 만에 추가로 한 개 군단을 만들어 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존스캐빈의 인구는 대략 이십만 명으로 추정된다. 성인 남성의 비율은 삼십 퍼센트가량, 육만 명 정도로 보면 된다. 그중 현역 병사의 비율은 대략 삼십 퍼센트, 이만 명 정도다. 즉 전체 인구의 십 퍼센트가 병사인 셈이다. 이 년 전 3개 군단을 잃고, 당시 탈출한 패잔병과 신규로 모집한 병사들을 합해 한 개 군단을 추가했다.

현재 병사 수는 두 개 군단, 만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 명만 해도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이긴 했지만 군단이란 명칭은 보통의 폴리스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규 병력의 수다. 즉 한 개 폴리스는 한 개 군단을 보유하는 것이 통상적 기준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많이 바뀌었지만 두 개 군단이라면 결코 적은 병력이 아니었다.

인구수는 곧 힘이다.

존스캐빈의 인구는 충분했고,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다시 이전의 성세를 찾을 수 있을 거였다.

연합을 통틀어도 존스캐빈 정도의 인구수를 가진 폴리스는 많지 않았다. 북부 최대 도시라는 아도니아의 인구수도 30만에 불과하다. 켈커티스의 인구는 존스캐빈보다 조금 더 많은 이십오만 정도다. 20만이면 절대 부족하지 않은 인구수였다.

처음 커트리안군이 등장했을 때, 존스캐빈에서는 또 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지난 이 년간 통상적으로 들락거리던 적이다. 이번에도 한 개 군단 규모였다. 으레 몇 번 공격하고 요격하면 접전을 펼치다가 물러날 것이라 판단했다. 늘 그래 왔으니까.

물론 크나큰 오판이었다. 그동안의 공격은 훈련을 위한 것이었고, 이번엔 폴리스의 함락을 위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커트리안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기존처럼 적당히 공격하다가 물러나면 존스캐빈 쪽에서 요격을 나올 것이다. 그 병력을 잡아먹고 다시 공성을 하는 방법이 있었고, 아메조프를 이용해 성문을 뚫는 방법이 있었다.

두 번째는 처음부터 아메조프를 투입해 성문을 여는 방법이었는데, 문제는 쥬시아누스가 없다는 점이었다. 존스캐빈은 라지도니아나 카테네오와 달리 강력한 폴리스다. 아무리 아메조프라 하더라도 혼자 침투해 성문을 열어젖힐 수준이 아니다. 결국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성문을 여는 과정이 필요했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노량에게 향했다.

“아메조프와 함께 성벽을 넘을 수 있겠나?”

조노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성벽을 넘을 이유가 있습니까? 성문만 깨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공성 병기를 만들기엔 시간이 아깝다.”

“단순히 성문을 깨는 거라면 공성 병기까지 필요 없습니다.”

이번엔 커트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

“지금 보여 드립니까?”

“보여 주게.”

조노량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성문을 향해 건들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커트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무작정 성문으로 걸어갈 줄은 몰랐다. 커트리안은 손을 올리다가 그냥 내렸다.

성벽 위에서도 조노량의 모습을 보았다. 협상을 위한 전령이나 혹은 기사전을 청하려는 것으로 착각했다.

조노량은 당당히 성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었다. 손바닥 위에 작은 구슬이 생성되어 있었다. 조노량은 그 구슬을 장난치듯 성문을 향해 던졌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성벽이 요동쳤다. 성벽 위에 올라서 있던 병사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구슬에 정면으로 맞은 성문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성문은 물론 주변 성벽까지 뚫려 버렸다.

존스캐빈 병사들은 물론 커트리안마저 할 말을 잃었다.

저런 결과는 상상도 못했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커트리안이 그 모습을 보고 아스르부테와 우코르바흐를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소름이 돋았다. 냉정한 커트리안이지만 순간적으로 진군을 명하지 못했을 정도다.

겨우 정신을 차린 커트리안이 서둘러 진군을 명했다. 혼란을 수습한 사단장들이 서둘러 병사들을 독려했다. 군단병들조차도 한꺼번에 넋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갔던 것처럼 그렇게 걸어서 돌아왔다.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 커트리안의 곁에 섰다.

전장을 향해야 할 시선이 조노량에게 향했다.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침중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전투에 나서지 말도록!”

“그러겠습니다.”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곤 둘 모두 침묵에 빠졌다.

침묵하는 동안 커트리안은 그동안 계획했던 대계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를 고민했다. 인간의 전쟁을 상정한 계획이었지 인외의 존재가 개입할 것을 상정하지는 않았다.

존스캐빈의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전투랄 것도 없이 일방으로 무너졌다. 불과 반나절 만에 시민궁이 점령당했다. 학살은 없었다. 단지 무림에서 하듯 봉문을 명했다. 두 명의 집정관을 동시에 배석시킨 후 약속의 인으로 조약을 맺었다. 조약서에는 연합에서 탈퇴할 것이 명기되었고, 향후 십 년간 폴리스를 벗어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카테네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애초에 존스캐빈보다 전력이 약한 폴리스다. 더구나 무리하게 크리푸 공략에 나섰다가 병력 손실을 많이 보았다. 크로아지크 1군단, 과거 켈커티스 2군단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최정예 군단을 맞상대할 전력은 아니었다.

성을 끼고 수성을 한다면 상대해 볼 만도 했지만 조노량 앞에서는 아무리 두꺼운 성문도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카테네오까지 봉쇄를 시킨 후 드디어 크로아지크 1군단의 남하가 시작됐다.

북방 3성이 모두 떨어졌다는 소식은 게이트를 타고 순식간에 동맹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물론 켈커티스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이 년간 이렇다 할 승전보를 전하지 못했던 켈커티스 2군단이 삽시간에 북방을 평정하고 개선한다는 소식이었다.

켈커티스 시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소식은 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수십 년간 연합에 밀리던 동맹이 처음으로 한 개 지역을 통째로 먹어 버렸다. 거리에선 연일 축제가 이어졌다. 동맹의 폴리스에서 보낸 축하사절이 개선군보다 먼저 켈커티스에 도착했다. 원로원의 원로들과 주요 가문의 가주들이 앞다투어 더글라스가를 방문했다.

일각에선 커트리안이 차기 바실레오스 선거에 맞춰 개선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일견 타당한 의견이었다. 과거 한 차례 고배를 마셨지만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는 커트리안이 지금과 같은 호기를 놓칠 이유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바라흐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것도 당연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개편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이게 무슨 꼴인가? 병력의 손실은커녕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귀환하고 있지 않은가?”

바라흐하는 우무스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우무스 역시 난감할 따름이었다.

“설마 그 병력으로 연합의 북방 3개 성을 함락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허어, 그야말로 괴물입니다.”

우무스의 답변에 바라흐하가 벌컥 역정을 냈다.

“지금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땐가? 안 되겠어. 일을 서둘러야겠네.”

우무스는 일부러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했다.

“뭘 그리 생각하는 겐가? 서둘러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원로들과 시민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흥, 자네 아직도 정치를 모르는가? 힘으로 밀어붙인 후에 이유를 만들면 되는 걸세! 적당히 명분만 쥐어 준다면 스스로 납득거리를 찾아내지. 그게 사람일세. 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 집단을 위해 스스로 참아 냈다고 합리화하는 법일세.”

바라흐하의 처진 눈이 음험한 빛을 발했다.

“계획대로 진행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한 말을 왜 하는가? 전이라면 선거 후로 계획을 미룰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선거 결과가 바뀔 수 있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단 말일세! 자네 설마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무스는 절대 아니라는 듯 손까지 내둘렀다.

“내 다음은 자네야! 이번에 반드시 종신제 개편을 이뤄야 하네! 다음 기회는 없어. 자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내 뒤를 이어야지, 안 그런가?”

우무스의 눈이 결의로 빛났다.

그 모습을 본 바라흐하가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종신제 단독 목민관, 바라흐하가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해 온 제도 개편이었다. 북부에는 의외로 종신 목민관제를 도입한 폴리스가 많았다. 동맹에도 네 개 폴리스나 종신제를 도입하고 있다. 단독 목민관을 채택하고 있는 폴리스는 그보다 더 많았다.

따지고 보면 켈커티스라고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일관되게 폴리스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쓸데없이 선거를 치른다고 비용과 정력을 낭비할 이유도 없다.

애초의 계획은 바실레오스 선거를 종신제 개편에 대한 선거로 대체하려 했었다. 선거를 두 달 남겨 둔 시점, 바로 지금 시점에 안건을 상정하고, 두 달간의 작업을 거쳐 이를 통과시킴과 동시에 첫 번째 종신관으로 선출되는 수순이었다. 합이 맞는 원로들과의 협의도 이미 끝났다.

그런데 커트리안의 개선이 발목을 잡았다. 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시점에 지나가던 객이 숟가락을 얹은 꼴이다. 이대로 안건을 상정한다면 첫 번째 종신관으로 자신 대신 커트리안이 앉게 생겼다. 그런 꼴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바라흐하는 결심을 굳혔다. 안건은 마지막 순간에 상정한다!

“아미나와 마테오의 병력은 불러 올렸나?”

“이미 이동 중입니다. 사나흘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5군단장에 대한 정지 작업은?”

“슬쩍 떠봤는데, 파스쿠알레의 반응이 영 시원찮습니다. 농담으로 생각하더군요.”

“상관없네. 사단장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지 않은가? 만약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사단장들이 즉각 군단장을 제압할 걸세. 사유야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고!”

“알겠습니다. 일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대략 한 달이면 2군단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마쳐놔야 합니다.”

“한 달 내에 밀어붙여야지. 커트리안이 뒤늦게 발을 굴러 봐야 쿠데타 외에는 방법이 없을 걸세.”

“그게 문젭니다. 혹여라도 쿠데타를 계획한다면… 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바라흐하가 차가운 눈으로 우무스를 바라봤다.

“자네, 왜 그리 소심해졌나?”

우무스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흐하를 마주봤다.

“소위 전사란 사람이 왜 그리 소심하게 구느냔 말일세! 내전이 두려운가? 싸움이 두려운가 말일세?”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연합이 있는데, 내전을 벌인다는 게 좀 꺼려집니다.”

“이 사람, 생각해 보게. 내가 아미나와 마테오의 병력을 왜 불러 올렸다고 생각하나?”

“혹시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

“성안엔 자네의 1군단이 버티고 있고, 외곽엔 5군단이 버티고 있네. 아미나와 마테오의 병력이 들어오면 무려 네 개 군단일세. 거기에 반나절 거리의 오누리스만에도 두 개 군단이 버티고 있네. 커트리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여섯 개 군단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교전이 벌어진다면 아마 사흘도 버티지 못할 걸세.”

“아, 그렇긴 합니다만 2군단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왜 버린다고만 생각하나? 아닐 수도 있네. 그가 개선했을 땐 이미 일이 마무리돼 돌이킬 수도 없는 시점이네. 커트리안이 출정하기 전에 그를 한 번 만나 보지 않았는가? 그는 히어데로와 달리 이익에 민감한 자네. 적당히 추어주고, 넉넉한 보상과 자리만 보장한다면 얼마든지 회유할 수도 있어. 나는 이미 늙었네. 생각이 있는 자라면 차기를 노리겠지. 물론 자네를 상대로는 힘들겠지만 말일세.”

말이 이어지는 동안 우무스의 안색이 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바라흐하는 쐐기를 박았다.

“내 다음은 무조건 자네야.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길 기대하네.”

우무스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바실레오스! 만약을 대비해 마리노에 내려가 있는 4군단을 불러 올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 4군단은 마리노를 지켜야 하네. 오르비스에는 아직도 아도니아 정예군단이 두 개나 버티고 있어. 그쪽은 절대 뚫리면 안 되지.”

“그럼 엘리티아의 3군단을 불러 내리는 건?”

“뭐,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군. 트렌티노 측 군단만으로도 당분간 엘리티아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테니까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걸세. 무려 여섯 개 군단이나 있지 않은가? 걱정 말게. 그보다 그림자들을 미리 준비시켜 놓게. 시간이 촉박해졌어.”

바라흐하는 우무스를 내보내놓고 생각에 잠겼다. 우무스에겐 강하게 이야기했지만 내심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무리한 일을 시간에 쫓겨 가며 추진해야 했다.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상령을 강화시키고, 반대하는 원로들에 대한 작업도 강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델치의 그림자들을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필요하다면 가택연금이나 사고, 혹은 암살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자꾸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폴리스의 치안과 군권은 오래전에 장악했다.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왕정의 도입도 가능하다. 불안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사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도 생각해 봤다.

만약 지금 물러난다면 영구 은퇴나 마찬가지다. 뒷방 늙은이로 세월을 죽일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첫 바실레오스 당선 이후 이십 년이나 권력의 단맛에 빠져 살았다. 뼛속까지 권력에 중독이 되었다.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는 잔소리꾼이 된다면 스스로 견딜 자신이 없었다. 중부 대륙의 왕국들처럼 세습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사는 날까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살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선거? 안건? 반대? 이런 단어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무엇이든 가능한 그런 구조를 만들 생각이었다. 욕 좀 먹으면 어떠한가? 그들도 결국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꼬리를 흔들 것이다.

제도 자체를 개편하기 위해선 전체 시민 투표가 있어야 했으나, 과거 전례를 들어 원로회의 의결로만 처리할 심산이었다. 삼분의 이 출석에 삼분의 이 찬성!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었다. 당일 출석할 원로들에 대한 선별작업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필요한 만큼만 출석하면 된다.

바라흐하의 집무실에서 물러나온 우무스는 귀가를 서둘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츠라에게 연통을 넣었다. 상황이 급해진 것이다.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전에 필요한 조처를 취해야 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우무스의 침실에 차츠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음 날 히어데로와 쥬시아누스의 아비인 레오니우스, 그리고 다섯 명의 원로가 트렌티노로 외유를 떠났다.

켈커티스 평야는 동맹의 땅 중 가장 풍요롭고, 가장 넓은 평야다. 강대한 켈커티스 시의 이름을 따 켈커티스 평야로 불린다. 하지만 켈커티스 평야에 켈커티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넓고 비옥한 평야에는 총 네 개의 폴리스가 몰려 있다. 켈커티스, 아미나, 프불리오, 트렌티노다. 그중 트렌티노는 같은 동맹의 폴리스지만 오랜 세월 켈커티스에 각을 세웠던 강대한 폴리스다. 인구도 이십만이 넘었으며 보유한 군단수도 무려 네 개나 된다. 다섯 개의 군단을 운용하는 켈커티스와 불과 한 개 군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셈이다. 작금에 와서는 그 명성도 많이 퇴색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저력을 갖추고 있었다.

히어데로와 원로들이 나선 공식적인 이유는 외교였다. 최근 로메노 상단의 일로 트렌티노와 약간의 마찰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원로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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