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15화 (115/142)

115. 해방된 토리도

그로부터 얼마 후 커트리안은 3군단을 크리푸로 파병했다. 마법사까지 포함된 아도니아의 그림자들이 시청을 점거하고 주요 인사들의 납치를 시도한 이유는 분명했다.

크로아지크에 주둔한 지도 이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크로아지크로 이동된 물류만 해도 엄청나다.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했다고 하더라도 정보의 유출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와 더불어 차츠라로부터도 관련된 소식이 전달되어 왔다.

이런저런 소식들을 종합해 보면 연합이 크리푸를 주목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연합의 입장에서 크리푸는 비교적 손쉬운 먹이다. 크리푸가 크로아지크의 주요 보급통로인 것을 짐작한 이상 건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황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크리푸와 가장 가까운 연합의 폴리스 카테네오로 각종 장비들이 들어갔다. 군단 규모의 병력이 추가로 카테네오 인근으로 이동했다.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크리푸 시청에서 샜을 수도 있고, 다량의 식재료를 공수하고 있는 센드버그나 노르드스톰, 혹은 말과 갈리온의 공급을 책임지고 있는 카샤린에서 샜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크로아지크 보급에는 다수의 상인과 암흑조직이 관여되어 있다. 어디서 샜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 확인할 필요는 없다. 정보가 샜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대비를 하면 그만이다.

현재 크리푸 시의 자체 전력은 한 개 군단이다. 많은 병력은 아니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 전장이었던 탓에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 많다. 소드마스터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요격이나 회전을 피하고 수성만 한다면 그리 문제 될 병력도 아니다.

물론 통상적인 공격일 경우 그렇다. 지금의 상황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크리푸가 크로아지크 보급의 중심지임을 확인한 이상 어설프게 들어올 리가 없다. 연합이 마음먹고 들어온다면 크리푸의 병력으로는 절대 막아 낼 수 없다. 크리푸를 단숨에 끝장낼 목적으로 병력을 구성할 테니까 말이다.

커트리안은 3군단을 크리푸로 파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커트리안의 명령은 신속하게 3군단장 크리들에게 전달됐다. 크리들은 3군단 전 병력을 이끌고 크로아지크를 나섰다. 광산 작업은 채광꾼 출신인 뮤트에게 일임했다.

크리들은 영리하게도 크리푸를 향해 곧바로 나아가지 않았다. 행군 방향을 카테네오로 잡았다. 크로아지크군의 행로는 카테네오의 정찰병들에 의해 곧바로 카테네오로 전해졌다.

카테네오는 병력을 성안으로 물리고 공격에 대비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크리들은 방향을 틀어 전속 행군으로 크리푸로 들어가 버렸다. 카테네오는 폴리스 인근과 크로아지크 방향으로만 정찰병을 운용한 탓에 3군단이 크리푸 시로 들어간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보름 후, 카테네오는 연합에서 파견된 증원군과 함께 크리푸를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크리푸 시에는 크로아지크에서 단련된 3군단과 게이트를 타고 원호를 온 생환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카테네오 정도의 전력으로는 절대 뚫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조노량도 몇몇 생환자들과 함께 게이트를 타고 가 과하지 않게 몸을 풀었다.

☆ ☆ ☆

크로아지크 2군단은 정찰병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부분 기마에 능숙했기 때문이다. 물론 갈리온이 더 편하지만 말에 비해 비싸고 귀하다.

아이렌 대륙이라 불리는 이 세계에서는 말보다는 갈리온을 선호한다. 편하기 때문이다. 반면 말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요동이 심하기 때문에 승마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쉬이 피로가 쌓인다. 갈리온에 비해 지구력도 떨어진다.

피를 본다고 갈리온처럼 미쳐 날뛰지는 않지만 전투에 활용하지 못하는 건 똑같다.

기사가 힘을 발휘하려면 디딤발이 단단해야 한다. 말을 타고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했다. 과거 뱅갈스톤의 기마병들이 궁병 위주로 운용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땅에 발을 굳건히 디딘 기사와 말에 타고 있는 기사가 맞붙으면 열이면 열, 말을 타고 있는 기사가 불리하다.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말에서 굴러떨어지기 일쑤다. 이들에게 있어서 갈리온이나 말은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그저 빠른 이동수단에 불과했다.

반면 중원에서는 기마병의 가치가 대단히 높았다. 보병에 비해 월등한 전투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철기병이라고 부르는 중갑기마대는 무림인들도 꺼린다. 그만큼 전투력이 높기 때문이다. 보병으로서는 그들의 돌진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조노량은 말이 이렇게 많음에도 전투에 활용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하이오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가 비웃음만 샀다. 하이오지는 전투에 말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조노량을 놀렸다.

조노량은 그 이유를 직접 말을 타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발 받침대가 없었던 것이다. 기마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말을 달려 보고 나자 그 불편함을 절실히 느꼈다. 갈리온과 달리 말은 상하 요동이 심하다. 빠르게 달릴수록 몸도 거세게 튕겨진다.

타보기 전에는 예사로 보아 넘겼던 사실이다.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타보고서야 알았다. 등자가 없었던 것이다.

중원에서도 서진(西晉)에 이르러 비로소 등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연의로 잘 알려진 삼국시대는 물론 한나라 때나 시황제 때도 등자는 사용되지 않았다. 즉 삼황오제 이후 서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 중원인들도 등자 없이 말을 탔다. 하지만 조노량이 살던 명대엔 등자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등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활용도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 기마 자체가 월등히 쉬워진다. 그리고 전투 시 타격에 힘을 실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말의 가속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공격을 당하는 자는 기사의 힘뿐만 아니라 천근에 이르는 말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워낙 기본적인 부분이라 조노량도 간과한 것이다. 사실 등자는 별것도 아닌 물건이었다. 발을 끼울 수 있는 둥근 테에 불과했다.

조노량은 그 즉시 안장에 등자를 만들어 걸고 커트리안을 찾았다.

조노량 덕에 대장간이 바빠졌다. 비록 별것 아닌 물건이지만 이천 조가 넘는 등자를 생산하자니 바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물건을 달았다고 해서 별도의 훈련이 필요치는 않았다. 기마에 익숙한 엘리티아 평야 출신들은 단박에 등자에 적응했다. 아이렌 대륙 최초의 중갑기마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사람들에게 조노량이라는 존재가 익숙해질 무렵 수용소에 벤트가 모습을 나타냈다.

폴리스들을 전전하며 누구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벤트는 크리푸 방어전에 조노량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작업을 작파하고 스무 날이나 걸려 수용소를 찾은 것이다. 커트리안조차 이를 말리지 못했다.

벤트는 오만한 자답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며칠간 조노량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그럼에도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할 일이 많다고 들었다. 이렇게 오래 머물러도 되나?”

조노량이 우려를 표하자 벤트가 발끈했다.

“노리앙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걱정돼서 말했을 뿐이네. 괜찮으면 됐고.”

“흠흠, 그래서 주운이 다시 나타났단 말이지?”

“그랬지. 하기와 함께 찾아왔더군.”

“하기와 함께?”

“적대적인 관계로 보이진 않더군.”

“하긴 수백 년간 같은 땅에 살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폰티나 님은?”

벤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만 보이지 않더군.”

“다행이군. 폰티나 님이 왜 그러시는 건지 이해가 안 돼! 고골리 님은 잘 계시던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뻔했다. 사지가 모두 절단된 사람이 자고 일어나니 사라져 있었다. 스스로 굴러갔을 리는 없고, 누군가 데려갔을 게 뻔했고, 기대원들은 그 누구를 주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주운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한 클라흐는 그렇다 치고, 고골리는 여전히 괄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노량과 눈을 마주치자 그 흉측한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험악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커다란 살덩이가 달려 있는 왼손도 여전했고, 투핸드소드를 글라디우스처럼 쥐고 있던 오른손도 멀쩡했다.

“잘 계시더군. 사지 멀쩡하고.”

“하, 역시 놀라운 마법사군. 신관도 아니면서 그걸 붙여 놓다니?”

“멀쩡하면 된 거지.”

“하긴, 그럼 된 거지. 그나저나 주운이…….”

벤트는 주인인 주운의 이름은 마구 부르면서도 그의 종인 가디언들을 부를 때는 꼬박꼬박 존칭을 붙였다.

돌이켜보니 조노량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고골리를 부를 때는 꼬박 님 자를 붙였고, 주운이나 클라흐를 칭할 때는 그냥 이름을 불렀다. 물론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폰티나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우당탕!

그때 조노량의 숙소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노리앙 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우스와 차츠라, 그리고 얼굴을 가렸던 천을 슬그머니 걷어 내고 있던 우무스였다. 그들을 안내해 온 것은 크리푸 시로 파견 나가 있던 3군단장 크리들이었다.

부들부들 떨던 제우스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조노량의 발에 입을 맞추며 기도를 올렸다. 항상 자신을 당혹하게 만들던 모습 그대로였다.

조노량은 기도에 열중하는 제우스에게서 슬그머니 발을 뺀 후 차츠라를 향해 팔을 벌렸다.

차츠라는 격하게 조노량을 끌어안았다. 클라흐만큼이나 음침한 차츠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랜 세월 감정을 절제하도록 훈련받은 그림자였지만 오직 한 사람, 조노량에게만은 여과 없이 감정을 노출했다.

그 모습을 보며 벤트가 툴툴거렸다.

“저 음침한 놈은 맨날 노리앙 앞에서만 저러는군.”

그 말을 들은 차츠라가 비시시 웃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본진과 떨어져 두 달을 넘게 노리앙과 지낸 후부터 줄곧 그래 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우스와 차츠라, 특히 제우스가 보이는 감정은 정도 이상이었다. 이 어린 신관으로 인해 난감한 경험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정도 깊이 들었다. 때로는 그의 맹목적인 집착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 한결같음에 결국 두 손을 들어 버렸다.

한참이나 이어진 격한 재회가 끝나길 기다려 우무스가 조심스럽게 조노량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커트리안을 통해 그가 잘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조노량 역시 우무스에게 특별한 적대감은 없었다.

조노량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무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노량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를 마친 조노량이 우무스를 지긋이 바라봤다.

오래전 이 수용소에서 보았고, 마계의 문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마다 그에게선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에게선 그런 꺼림칙한 느낌이 사라져 있었다.

“변했군?”

조노량이 나지막이 물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하나의 존재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모두 노리앙 님 덕분입니다.”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우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약의 완성을 요청드립니다.”

“무슨 소리요?”

“마계의 문을 벗어나면 그 검을 한 번 더 빌려 주기로 하셨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아, 그랬던 것 같군. 그러시오.”

조노량은 거리낌 없이 오첩도를 풀어 건넸다.

우무스는 오첩도를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조용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서너 시간만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아주 가져가지만 마시오. 대단한 놈은 아니지만 손에 익은 놈이라서 없으면 아쉽소.”

“물론입니다. 누가 감히 노리앙 님의 물건을 노리겠습니까?”

우무스는 조노량의 검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수용소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황야로 달렸다.

우무스가 떠나가든 말든 조노량과 제우스 등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했다.

제우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생환자들이 하나둘 조노량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병사들의 훈련까지 팽개치고 나타난 쥬시아누스가 품에서 슬그머니 술병을 꺼내 들었다. 평소 쥬시아누스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이오지가 그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낄낄거렸고,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대낮부터 술잔이 오고갔다. 마지막으로 커트리안과 스마르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생환자들이 빠짐없이 한자리에 모였다. 의자가 모자란 관계로 먼 옛날 그랬듯이 서슴없이 바닥에 둘러앉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즐겁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느꼈다. 다른 이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생환자들만이 갖고 있는 묘한 유대감이었고, 일체감이었다.

방 밖으로 요란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갔다. 생환자들의 기행을 익히 알고 있는 킨샤르가 고개를 젓고는 병사들을 시켜 술과 고기를 충분히 날아오게 했다. 오늘도 절대 쉽게 끝날 술자리가 아니었다.

그 시간 우무스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 자리를 잡고 봉인해제 의식을 시행하고 있었다. 토리도가 명한 대로 최대한 노리앙에게서 멀어졌다. 갈리온을 타고도 무려 한 시간이나 달려왔다.

잠시 후 조노량과 생환자들이 그랬듯 우무스도 그 주인 토리도와 반가운 해후를 할 수 있었다. 둘은 어리석은 인형, 허글러가 없었음에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노리앙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거절합니다.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지요.”

“주인께서 위험하다시면?”

“이제 소환체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니, 본체로도 확신할 수 없겠군요. 가능하면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이롭습니다.”

“그가 그렇게 강합니까?”

“강합니다.”

“그, 그렇군요…….”

지금껏 노리앙과 함께했던 토리도의 말이다. 현재 노리앙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가 토리도였다.

“그럼, 이대로 떠나시겠습니까?”

“우선 아도니아로 가 볼 생각입니다. 이 육신의 한을 조금은 풀어 줘야 도리겠지요.”

“따를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대의 할 일을 하세요. 그리고 절대로 노리앙과는 척을 지지 마세요.”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벤트와 차츠라가 자신들의 일터로 떠나갔다. 조노량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제우스만 수용소에 남았다. 제우스를 부담스러워하는 조노량과 달리 동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일신상의 이유로 보름이나 켈커티스에서 사라졌던 우무스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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