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그녀, 샤
다음 날 커트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킨샤르와 사단장들을 소집했다. 생환자들도 함께였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많이 궁금했을 거라 믿는다.”
커트리안이 조노량을 불러 옆에 세운 후 조노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미소 지었다.
“소개하겠다. 대륙 최강의 전사, 조 노리앙이다.”
커트리안은 성을 앞에 붙여 조 노리앙이라고 소개했다. 조노량의 방식으로 소개해 준 것이다.
커트리안은 계속 노리앙이 이름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뭐가 성이고 뭐가 이름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내용은 사단장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단장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커트리안은 노리앙이라는 사내에 대해 소개를 하며, 동맹도 아니고, 북부도 아닌 대륙 최강이라고 소개를 했다. 사실 표현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뭐, 약간의 과장이 있다고 생각하면 대륙 최강이라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북부고, 대륙 전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작 사단장들이 놀란 이유는 그 말이 커트리안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은 커트리안의 무위를 봤다. 북부 최강의 전사라는 아드리안을 꺾었다.
그러니 그 자신을 북부 최강이라고 칭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예니에프나 쥬시아누스에 비해 모자란다는 말을 한 적은 있었다. 그저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전투를 통해 예니에프와 쥬시아누스의 무위도 견식할 수 있었다. 사단장들 수준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위였다. 실제로 누가 더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각자가 스스로 북부 최강이라 주장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커트리안이 작고 못생긴 사내를 가리키며 대륙 최강의 전사라 칭했다.
커트리안 자신도 아니고, 뒤에 서 있는 예니에프도, 쥬시아누스도 아닌 낯선 사내를 대륙 최강의 전사라고 소개했다.
사단장들의 눈이 예니에프와 쥬시아누스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묵한 쥬시아누스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예니에프는 박수를 치다가 사단장들이 웅성거리자 머쓱해했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표하기는커녕 지극히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사단장들도 모두 전사였고, 전사들은 자부심이 높다. 압도적으로 실력 차가 나지 않는 이상 쉽게 승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 괴물 같은 전사들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기에 다른 괴물들이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직책은 호위기사다. 단 직급은 스마르와 마찬가지로 군단장급으로 한다.”
커트리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이 친구 앞에서는 로크리안이 아니라 닌파 발다사르가 온다 해도 목을 놓고 가야 할 것이다.”
닌파 발다사르! 중부 대륙 아젠타 왕국의 기사로 공인 대륙 최강자며, 현시대 유일한 그랜드 소드마스터다. 검 하나로 약소국 아젠타의 영토를 두 배 이상 늘렸으며, 이십 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아젠타를 중부 대륙 최강국으로 만들어 낸 이 시대 최고의 기사였다.
그렇기에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과대망상이라고 말했을 거였다. 하지만 스스로 최강일지도 모를 커트리안이 말했다. 한 번도 허튼소리를 한 적이 없는 커트리안이 말이다.
사단장들은 침묵에 빠졌다. 저 보잘것없는 사내가 진정 그랜드 소드마스터 닌파 발다사르와 비견될 전사란 말인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가던 커트리안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노리앙, 인사해라.”
“반갑소. 조노량이라고 하오. 그냥 노리앙이라고 부르시오. 사령관님이 소개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오.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오.”
짧게 말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특별히 겸손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인사였다.
인사가 끝나자 생환자들이 제일 먼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평소에 까다롭게 굴던 몇몇마저 미소를 그치지 않고 박수를 쳐 댔다. 특히 스마르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본 킨샤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긴 시간을 함께했지만 저 사내가 미소 짓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사단장들의 의심은 며칠 만에 말끔히 씻겨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수용소에 딸린 간이 검투장에서 생환자들 간에 아주아주, 매우매우 흉악한 검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강자들끼리는 쉽게 대련을 하지 못한다. 한 치만 실수를 해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리앙 군단장이 오고부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실전 훈련을 시작했다.
간이라도 명색이 검투장이니 관중석이 있었고, 관전은 자유였다. 격이 다른 실력자들답게 감출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사단장들과 기대장들은 그곳에서 노리앙의 무력을 보았다.
노리앙은 생환자들과 돌아가며 시합을 벌였다. 생환자들은 그 무시무시한 무력을 부담 없이 뿜어 댔다. 보는 것만으로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무시무시한 강격이었다. 하지만 노리앙이라는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강격들을 받아 냈다.
예니에프가 그 공포스러운 오오라 줄기를 마구 뿌려 댔고, 쥬시아누스의 도리깨가 거침없이 노리앙이라는 사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공격들은 노리앙이라는 사내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때로는 가볍게 쳐 내고, 때로는 흘리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가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상대를 직접적으로 굴복시키지 않았다. 마음껏 실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적당히 놓아주고, 적당히 끊어 줬다. 그리고 함께 웃으며 수련을 마쳤다.
사단장들도 과거 겪어 봤고, 해 봤던 그런 장면이었다. 즉, 수련담당 기사가 훈련생들을 가르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물론 그 속에 포함된 흉험함은 달랐지만, 형태는 같았다.
내심 커트리안의 말에 의구심을 갖던 사람들도 며칠이 지나자 모든 의심을 떨쳐 버렸다.
노리앙이라는 사내는 공포스러운 생환자들을 수련기사처럼 취급했다.
생환자들이 격이 다른 실력을 갖고 있듯, 노리앙 군단장은 생환자들조차 넘어서는 또 다른 경지의 전사라고!
그랜드 소드마스터라는 발다사르의 무위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저 사내라면 쉽게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사단장들은 물론 킨샤르마저도 조노량을 단순히 호위기사로 칭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직급을 호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한 명의 군단병도 거느리지 않은 이름뿐인 군단장이었지만 말이다.
조노량에게는 크로아지크의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정겹기까지 했다. 하긴 마계의 문만 아니라면 어디든 살 만하다고 느끼는 건 당연했다.
크로아지크는 무려 사 년 가까이 지냈던 곳이다. 알게 모르게 정은 들었다. 더구나 동료들과 함께였다. 이제는 옛 보무관의 동료들보다 오히려 정이 깊다. 덕분에 샤에 대한 감정도 조금씩 무뎌져 갔다.
커트리안이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지 않은 덕에 조노량의 하루는 여유로웠다.
과거 4반에서 함께 지냈던 동료들도 만나 반가움을 나눴다. 과거 동료들은 현재 3군단에 편성되어 맹훈련을 받고 있었다. 잘 먹고 규칙적으로 수련을 해서인지 체구들이 건장하다. 굶주려가며 노역에 시달리던 과거의 모습과는 천지 차이다. 저 친구가 저렇게 멋진 사내였나 하며 새삼스레 바라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감독관이었던 일르크의 얼굴마저 반가웠다. 처지가 반전돼 고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챙겨 온 빵덩이를 건네주자 들킬세라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서야 감사의 눈빛을 전달해 왔다.
대장간에 가 번쩍이는 금덩이에 파묻혀 있는 가우렐리온 영감도 만나 보았다. 이전보다 대우가 나아졌다고 만족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검들은 아도니아에서도 인정받았다며 즐거워한다. 가마에 뼛조각을 넣은 후부터 강도가 좋아졌단다. 그러며 붉은색 뼛조각을 하나 보여 준다. 천생 장인이다.
금광도 다녀왔다. 넌덜머리가 난다고 생각했던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정겨웠다. 갈리온을 타고 크로아지크 황야를 자유롭게 돌아봤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자유로웠다.
매우 여유롭고 편안한 생활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항상 아렸다.
잠자리가 편해진 기대원들과 달리 조노량의 잠자리는 편하지 않았다. 가끔은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넓은 방, 푹신한 침대에 누웠지만 이유 없이 우울했다. 오늘 밤에도 악몽을 꿀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 ☆ ☆
조노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뿌연 대기가 천지를 덮고 있다.
흐릿한 시야에 샤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늘 곁을 떠나지 않는 샤를 보고 새삼 안도감이 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어나 앉아 샤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바라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얼굴을 거리낌 없이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이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왜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무런 기운을 끌어 올리지 않은 맨손이다. 그 얼굴이 검은 연기로 화하는 순간, 인간의 손 정도는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을 알지만 그런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손이 샤의 이마를 쓰다듬고, 눈가를 어루만졌다. 샤는 자연스럽게 그쪽 눈을 감았다. 마치 진짜 사람 같지 않은가?
조노량의 손이 인중을 거쳐 코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붉고 매끈한 입술로 미끄러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신비할 지경이다.
그렇게 교감하는 사이에,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뭔가 색다른 감각이 전해져 왔다. 놀랍게도 그녀에게서 알을 품은 어미 새처럼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부처를 섬기는 여승처럼 무한한 자애(慈愛)가 느껴졌다.
그녀의 아름다운 껍질과 흄이라는 끔찍한 가면에 가려진 내면의 성품이 전달되어 왔다. 왠지 모를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조노량은 자신도 모르게 샤를 끌어안았다. 샤는 반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주 안지도 않고 그대로 조노량에게 몸을 맡겨 두었다.
샤의 품은 의외로 따뜻했다. 가능한 일일까?
가만히 안고 있자 그녀의 육체를 타고 흐르는 흐름이 느껴졌다. 가공할 에너지 속에 둘러싸인 가녀린 영혼이 느껴졌다. 끔찍한 흄의 영혼이 아니라 성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영혼이었다.
조노량은 두 손으로 샤의 얼굴을 감싸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맑은 샘물 속에 놓아진 물고기처럼 그 샘 안을 한없이 헤엄쳐 들어갔다. 그녀의 영혼은 그 샘 깊은 곳에 있었다. 자신의 기운을 쏙 빼닮은 작고 여린 기운이 깊숙이 숨어서 떨고 있었다. 가공할 에너지에 둘러싸여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조노량은 그녀의 영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왜? 왜 그녀의 영혼이 자신의 기운과 동일한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왜일까?’
의문을 품은 채 시간이 흘렀고, 날이 지났다. 조노량과 샤는 여전히 무한히 반복되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전과 달리 조노량은 매일 밤 샤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이상하게도 속된 욕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따뜻했을 뿐이다.
☆ ☆ ☆
여명이 틀 무렵 조노량은 잠에서 깨어났다. 품에 안겨 있는 따뜻한 육체가 느껴졌다.
흄은 밤새 잠들지 않는다. 그저 조노량이 안으면 안는 대로 그대로 누워있을 뿐이었다.
조노량은 그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잤소?”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노량은 그녀가 미소 짓는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샤를 놓아주고 일어나 앉았다. 샤도 따라 일어났다.
조노량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을 털어 냈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벌써 잠에서 깨어난 오크들이 췩췩거리며 시끄럽게 출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 그대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언데드들의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잠을 자지 않는 불사의 존재들이지만 야간에는 다른 마물들을 위해 활동을 멈춘다. 혹 살아있는 동료들에 대한 배려일까? 설마 샤와 자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터무니없는 소리,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가부좌를 틀었다. 이때만큼은 아무도 조노량을 건드리지 않았다. 건드릴 수도 없다. 샤가 허락지 않을 테니까.
단전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진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벽은 하나도 없다. 거대한 흐름이 거침없이 사지를 휘돌았다. 중단전은 중단전대로 자신의 기운을 뿌려 댔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존재하는 공간을 타고 확산됐다.
잠깐 사이에 대주천을 끝냈다. 일각도 걸리지 않은 느낌이다. 조노량은 개운해진 몸으로 이동을 준비했다.
운기가 끝난 것을 확인한 샤가 마물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개미를 닮은 괴물들이 먼저 움직이고, 트롤이나 오우거 등의 마물이 언데드들과 섞여 그 뒤를 따른다.
검은 오크부대는 제멋대로 위치를 잡아 행군한다. 특이한 점은 다른 마물들과 잘 섞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다.
전투라면 지긋지긋했지만 나름 유용한 점도 있다. 따지고 보면 하루 종일 수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도 치열하기 짝이 없는 실전훈련이다.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오래가지도 않아 일단의 마물들과 조우했다. 불과 오십도 되지 않는 소규모 마물의 무리다. 조노량이나 샤가 나설 필요도 없이 간단히 쓸어버렸다. 삼천 대 오십이라니?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숫자다.
지금까지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침략군은 서로 간에 협조를 하지 않는다. 그저 기계적으로 모여 있을 뿐, 함께 움직이는 마물들과 유기적인 작전을 펼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 가도 신경도 쓰지 않고 살육의 대상만 찾아 헤맨다. 지능이 떨어져서인지 본성이 그런 건지는 알 수가 없다.
반면 토착마물들은 철저히 유기적인 싸움을 펼쳤다. 심지어는 집단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물론 인간들과는 다르다. 인간들은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마물들은 강한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강한 마물이 살아남아야 집단이 승리할 수 있으니까.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히 이타적이면서도, 집단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이기적인 습성이다.
각 개체의 전투력은 침략군이 월등히 높았음에도 토착 마물들이 밀리지 않는 이유다. 월등한 숫자와 희생정신! 이런 점에선 조노량조차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정오가 넘어갈 즈음 오백여 마리의 침략군을 만났다. 삼천 대 오백, 숫자상으로는 압도적이지만 전력 면에서는 백중세다. 물론 샤와 조노량 자신을 배제했을 경우에 말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노량은 어떤 마물을 만나도 두렵지 않았다.
약한 마물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강한 마물들은 자신의 기에 맥을 추지 못했다.
설사 객관적으로 자신보다 강한 마물이라 해도 자신의 기에 반응하는 한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강하면 강한만큼 더 강하게 반응하니까.
최근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마물이 겁 없이 조노량을 향해 달려왔다. 아스르부테처럼 산양의 뿔을 가진 마물이다. 물론 몸통은 다르게 생겼다. 털 대신 갑옷 같은 가죽을 둘러쓰고 있는 커다란 놈이다. 그래 봐야 짐승일 뿐, 조노량은 환영보를 펼쳐서 놈의 뿔을 잡고 등에 올라탔다. 최근 맛들인 소소한 놀이다.
조노량이 등에 올라타자 이 마물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길들이지 않은 말처럼 길길이 날뛴다. 사실은 이 맛에 탄다. 한 가지 단점은 조노량이 올라타는 순간 다른 마물들의 표적이 된다는 점이다.
조노량을 발견한 다른 마물들이 산양을 들이받았다. 다른 산양의 뿔이 조노량이 탄 산양의 옆구리에 구멍을 냈다. 옆구리가 찢어지며 초록색 피와 함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내린다. 산양의 뿔은 조노량에게는 손잡이지만 다른 마물들에겐 치명적인 무기다. 조노량의 신형이 한쪽으로 넘어가는 산양의 등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들이받은 산양의 등 위에 나타났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묘기라고 극찬을 했을 움직임이다. 조노량은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묘기를 선보이며 마물들의 등을 넘나들었다. 스릴 넘치는 유희였다.
그 순간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개가 조노량을 향해 뛰어올랐다. 덩치 면에서는 산양이나 개나 거기서 거기다. 도약력이 뛰어난 놈들이라 얼마든지 조노량을 한입에 물어내릴 수 있다.
조노량은 한 손으로는 산양의 뿔을 단단히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파마장을 날렸다. 개의 가운데 머리가 목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다시피 하며 나가떨어졌다. 반발력 때문에 지지대로 삼았던 산양도 옆으로 나동그라진다.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린 조노량이 가뿐히 지상에 내려앉았다. 대략 십여 분 이상 탄 것 같다.
아쉽게도 기록을 깨진 못했다. 그런 생각 중 조노량은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방금의 상황이 너무 낯이 익다. 이다음엔 악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릴 것이다.
조노량의 몸이 미끄러지듯 왼쪽으로 이동했다. 삼 미터 이르는 거체가 떨어져 내렸다.
쿵!
‘이다음엔 내가 암경을 날렸던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 중에 저절로 암경이 뻗어져 나갔다.
‘좌반신이 터져나갈 텐데?’ 한쪽으로 치우쳐 암경을 맞은 악마의 좌측 반신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뭐지?”
다음 장면들도 그린 듯 떠올랐다. 샤가 하늘을 누비는 동안 자신은 적진 깊숙이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몸이 움직였다. 아니, 상황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새로운 사실이 떠올랐다.
고- 고- 고- 고- 고옹-
왼쪽 숲에서 바람이 단절되며 뚫리는 듯한 소리가 툭툭 끊어지며 가까워졌다. 무서운 속도다.
“안 돼!”
사자후라도 터트리듯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 단절음이 덮쳐 왔다.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까지 떠올랐다.
‘카임!!!’
절대 알 수 없어야 할 이름이 떠올랐다. 마왕 카임이다.
거대한 충격파가 덮쳐들었다. 모양도 색도 없다, 그저 인지할 뿐! 이 또한 익숙한 느낌이다. 급히 몸을 미끄러트렸지만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중심에서 비꼈음에도 둔통이 밀려든다.
몸을 빼려던 방향에서 하얀 날개를 단 잘생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측으로 몸을 틀며 방향을 바꿨다.
그 자리에도 같은 사내가 서 있다.
아, 그랬었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이 사내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환영보의 첫 방위조차 밟을 수 없었다.
잇달아 충격파가 밀려들었다.
조노량의 몸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강기와 기막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았다면 열 번도 넘게 뭉개졌을 위력이다. 파마장을 날려 보고, 오첩도를 뻗을 때마다 사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암경도 날려 보고, 기환도 뻗어 보았다. 맞아야 반응할 텐데 도무지 맞힐 수가 없다.
그래 기억난다. 블링크다.
계속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었음을 안다. 그 간극이 시각으로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짧은 간극으로 오첩도가 지나갔고, 기환이 빠져 나갔다. 마치 호수 속에 돌멩이를 집어 던진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카임의 충격파는 연달아 조노량을 스쳐 갔다. 그 스침만으로도 피부가 찢어지고 기혈이 막혔다.
작은 틈만 마련한다면 반격을 가할 수 있을 텐데, 상대의 움직임은 그런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장면, 익숙하다.
그 순간 조노량은 또 한 번 부르짖었다. 다음 장면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안 돼!!!”
샤가 빛과 같은 속도로 사내를 덮쳐 들었다. 검은 회오리가 거칠게 용트림 하면서 사내를 감싸고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쳤다. 뭉클거리며, 회전하고, 들썩이며 솟구쳐 오르려고 애를 썼다.
샤가 사내를 감싼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조노량의 공격은 매번 순간적인 선을 그렸지만 샤의 몸은 공간을 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샤에게 둘러싸인 사내는 더 이상 공간을 넘나들지 못했다.
샤는 사내를 들어 올리지 못했고, 사내는 공간을 넘지 못했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들썩이고 기환을 소환했지만, 샤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카임을 공격할 수 없었다.
샤는 카임을 구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꿈틀댔다. 하기와는 달리 샤는 조노량에게 공간을 열어 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노량은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내려놓았다. 공격은 가능했지만 샤가 다칠 것이 뻔했다. 마치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처럼 발만 굴렀다.
샤는 지난 전쟁을 통해, 다른 짐승을 먹으며 몇 번이나 한계를 극복하고 강해졌지만 마왕을 상대할 만큼 강하진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샤의 연기가 희미해졌다. 카임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칠흑 같은 연기가 점차 옅어지며 카임의 육체가 드러났다. 카임은 자신의 기운을 마음껏 뿜어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면인데도 마치 그 웃음을 본 것만 같았다. 강렬한 기억으로 뇌리 속에 남아 있다.
“샤, 물러나! 내가 상대하겠다!”
조노량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샤는 대답이라도 하듯 뭉클거렸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제발, 샤… 내가 상대할 수 있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간절한 마음뿐 커지지 않았다.
샤의 연기가 더욱 흐려졌다. 무엇을 뜻하는 건지 잘 알았다. 과거 우코르바흐와의 싸움에서 하기의 권속들이 저렇게 소멸돼 가는 걸 보았었다.
그 순간 조노량의 마음속으로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의미가 전달되어 왔다.
소리로 전달되고 해석되어야 뜻을 알 수 있는 언어와 달리 그 자체로 의미가 되었다.
-로리안 님, 공격해 주세요. 제발! 이대로 공격해 주세요. 아악! 제발…….
그녀의 의미는 가녀렸다. 모호했다. 너무 흐려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절절히 전달되어 왔다.
무슨 의미인지 안다. 마왕이 풀려나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다. 그래서 샤가 물러서지 못함도 알고 있다.
샤의 의지대로 공격해야 마땅했다. 그동안 아무리 정을 나눴어도 그녀는 그냥 흄일 뿐이다. 자연의 흐름을 거부한 끔찍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조노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지금의 샤로서는 절대 자신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다. 자신이 공격을 가하면 그녀가 소멸한다.
샤가 쏟아 내는 감정이 점점 옅어졌다. 한눈에 봐도 오래 버티지 못할 상태였다. 흐려진 연기 속에서 카임이 웃고 있었다. 광폭하고 파괴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제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요. 이대로 소멸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공격해 주세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마지막 기회예요. 제발, 제발…….
전달되는 의미가 기운을 다했다. 뜻은 더욱 모호해졌다. 그리고 이대로는 더 이상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감정이 전해져 왔다. 자신이 공격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의미 같았다. 누가? 그녀가? 아니면 자신이? 역시 모호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 감정에 일말의 희망을 실었다.
온몸의 기운을 개방했다. 단전이 텅텅 빌 정도로 기환을 키웠다. 중단전도 개방했다. 구체화된 의지가 공간을 점하고 샤와 카임을 동시에 감쌌다.
카임의 웃음이 멎었다.
카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기환이 쏘아졌다. 카임의 가슴을 향해, 샤의 연기를 향해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았다.
그 순간 샤와 카임의 육체가 거대한 빛으로 화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주변의 마물들이 분자 단위로 쪼개져 흩어졌다.
전장 한가운데가 텅 비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마물들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쳐 갔다. 적과 아군의 개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피를 튀기며 싸우던 마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멀어져 갔다.
텅 빈 공간에 조노량이 홀로 주저앉았다. 온 정신과 온 힘을 다 쏟아 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힘없이 눈을 들어 샤와 카임이 있던 공간을 바라보았다.
역시 텅 비어 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샤가 없었다.
의식이 멀어져 갔다. 정신을 잃은 조노량의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