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재회
게이트에 파견 나가 있던 폴이 조노량을 보자마자 제자리에 서서 울었다. 병사들이 보고 있음에도 게이트가 떠나가라 울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엉엉 울기만 했다.
가면 같은 얼굴이 울음을 터트리자 괴기로움마저 느껴졌다.
폴의 울음소리에 놀라 뛰쳐나왔던 마법사 파온이 질겁하고 막사 안으로 되돌아가 꼭꼭 숨었다.
조노량은 폴을 안아 진정시킨 후 새삼스런 눈으로 게이트를 둘러보았다.
이 게이트를 통해 아도니아를 오가곤 했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게이트의 풍경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게이트를 둘러싼 나무와 연못도 그대로였고, 그 연못의 물맛도 여전했다.
왜 그렇게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연못물에는 다량의 기운, 이곳 말로는 마나를 내포하고 있었다. 게이트를 타고 흐르는 흐름이 느껴졌다. 게이트는 주변의 에너지를 왕성하게 끌어들이고 있었다. 크리푸의 게이트와는 흐름의 구조 자체가 달랐다. 좀 더 강하다고 해야 할까? 왜 이 쓸모없는 땅에 이 정도의 게이트가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에너지의 양 자체가 달랐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에너지가 집중되는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섬 위에 위치한 기둥들 중 왼쪽 두 번째 기둥 꼭대기였다. 안력을 집중해 보자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작은 돌조각이 보였다. 게이트의 에너지는 그 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마정석이라고 했던가? 직감적으로 펜던트에 박혀 있는 돌조각과 같은 종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마정석을, 아니 저 기둥만 파괴해도 게이트의 기능이 마비될 것임도 알 수 있었다.
폴은 눈물도 닦지 않고 취사병들을 닦달해 음식을 내왔다. 역시 보급이 풍부한 게이트답게 제법 먹을 만한 요리들이 차려졌다.
폴은 조노량의 옆에 앉은 하이오지를 건너편으로 밀어내고 굳이 조노량의 옆에 앉았다. 하이오지는 자랑스런 표정으로 너그러이 물러났다. 마치 자신이 노리앙을 구출해 오기라도 한 듯이 우쭐거렸다.
“노리앙, 많이 먹게! 술도 내올까? 좋은 술이 있는데?”
“아니, 술은 됐네. 크리푸에서 실컷 마셨다네.”
조노량은 폴에게 미소를 보여 주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사실 출발 전에도 시장으로부터 접대를 받았던 터라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음식에는 정이 담겨 있었다. 하이오지는 배가 부른 탓에 딴전을 피웠다. 폴은 포크를 놓고 조노량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흐뭇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노량의 생각대로 폴은 조노량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기꺼웠다. 기대원들은 만 삼 년하고도 오 개월을 냄새나는 마물의 고기만 씹었다. 조리는커녕 간도 못했다. 따져 보면 노리앙은 그곳에서 일 년 반이나 더 있었던 셈이다. 오직 자신들 때문이다. 노리앙의 입으로 제대로 조리된 음식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니 또다시 울컥했다.
폴은 아직까지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남겠소.’
그 한마디가 잊히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폴은 아직까지도 잠만 들면 마계의 문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몽은 늘 노리앙의 말 한마디로 끝을 맺었다. 잠에서 깰 때마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폴의 가슴을 짓눌렀다. 매일 지옥을 꿈꾸고, 매일 노리앙 덕에 지옥을 벗어났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함께 남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갔다. 기대원들은 노리앙에 대한 희망을 잃어갔다.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동료의 희생 덕에 살아난 주제에, 무슨 면목으로 전사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강해다 해도 동료를 버린 사람은 전사라 불릴 수 없었다.
노리앙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주책 맞게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조노량이 폴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표정을 지을 수 없다 해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폴과 하이오지를 대하고 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얼른 만나고 싶었다. 모두 모여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애석해하는 폴을 뒤로하고 그가 준비해 준 갈리온에 올랐다.
길들여 타고 다니지만 갈리온은 기본적으로 몬스터라 했다. 포로 시절에는 탈주자들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공포스런 존재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생전 처음 타 봤지만 적응하고 자시고 할 이유도 없었다. 등 자체가 평평해 앉아 있기에도 좋았고, 어깨쯤에는 발을 올려놓기 안성맞춤인 뼈도 하나 불거져 있다. 그 덕에 등자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갈리온을 달리기 시작하자 또 한 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상하 요동이 거의 없었다. 승마를 할 때 가장 불편한 점이 이 상하 요동이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말등이 승마자의 몸을 튕겨 내기 때문이다. 말을 달릴 때 말 등에서 엉덩이를 떼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갈리온은 말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쾌적했다. 지위가 높은 자들이 왜 갈리온을 타는지 이해가 갔다.
갈리온을 타고 달리자 불과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아 수용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투사 시절 한나절이나 걸렸던 길이다.
낯익은 목조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점점 더 가슴이 뛰었다. 자신이 동료들을 이토록 그리워했었나 싶다.
하이오지나 폴이 자신을 형식적으로 반겼다면 이렇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신이 동료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동료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느끼자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거리낌이 날아갔다.
못 보던 석담이 보였다. 거의 한 길은 되어 보인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 노리앙이 돌아왔다!”
문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았는데, 하이오지가 한껏 고함을 질러 댔다. 감시탑에 올라가 있던 병사가 하이오지의 모습을 확인하고 서둘러 울타리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하이오지는 갈리온의 속도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열린 문을 지나 수용소 내부로 진입했다.
“노리앙이 돌아왔다! 노리앙이 돌아왔어! 노리앙이 돌아왔다구!”
하이오지는 갈리온을 탄 채로 사방으로 내달리며 수용소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커트리안을 비롯한 생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노리앙!”
샤마노프가 속옷 바람으로 뛰어나왔다가 조노량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힘껏 뛰었다.
생환자의 기세는 평범한 몬스터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느낀 갈리온이 뒷걸음질을 쳤다.
샤마노프는 갈리온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마치 들쥐에게 덮쳐드는 매처럼 날았다. 수 미터를 날아 조노량을 덥석 안았다. 얼마나 기세가 강렬했는지 과거의 조노량이었으면 샤마노프와 함께 나뒹굴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조노량은 샤마노프를 안아 멈추고는 가볍게 갈리온에서 뛰어내렸다.
샤마노프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조노량을 안고 돌렸다. 벙벙 뛰며 미친 듯이 광소했다.
“크아아, 노리앙! 돌아온 겁니까? 살아온 거 맞지요? 으허헝!”
샤마노프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눈가가 축축이 젖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병사들을 뚫고 몇 명의 사내가 미친 듯이 뛰어왔다. 연병장을 가로지르고, 가로막는 병사들을 밀어붙이며 달려들었다. 예니에프와 아메조프가 조노량의 등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 뒤로 헤리엇이 달라붙어 손을 뻗었다. 군단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집애처럼 뛰며 울었다. 쥬시아누스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손만 들었다 놨다 했다.
“노리앙.”
생전 감정을 드러낼 것 같지 않던 커트리안의 눈도 붉어졌다. 심지어는 스마르조차 움찔거리고 있었다.
조노량을 감싸 안고 벙벙 뛰어 대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풀려난 조노량이 커트리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돌아왔습니다, 기대장님.”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시선에 오만 감정이 다 담겼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조노량을 덥석 안았다. 키 작은 조노량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과거에 그랬듯이 조노량의 등을 쓰다듬었다.
“잘 돌아왔다. 잘 돌아왔어. 고맙다. 정말 고맙다.”
커트리안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 넓은 품에 안겨서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 조노량도 절로 눈물이 솟았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느낌이다.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지만 가족의 품에 안긴 것 같았다.
커트리안은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조노량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했다. 커트리안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다.
커트리안은 스마르가 다가온 것을 보고서야 조노량을 놓아주었다.
스마르도 조노량을 안았다. 다른 이들처럼 눈물짓지는 않았지만, 팔에 들어간 힘을 통해 감정이 전해졌다.
“기다렸다, 노리앙.”
엄격한 스마르의 시선에서도 따스함이 묻어났다.
스마르에게서 벗어나자 쥬시아누스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조노량이 함빡 웃으며 쥬시아누스를 끌어안았다.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늘 기도했다. 거르지 않고 기도했다.”
바위처럼 묵묵하지만 누구보다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쥬시아누스다. 그런 쥬시아누스가 낯부끄러운 소리까지 하며 조노량의 생환을 기뻐했다.
“이제 편안히 잠들 수 있겠구나. 고맙다, 노리앙.”
“쥬시아누스…….”
“쥬시라고 불러도 좋다.”
“쥬시! 보고 싶었소.”
그 말을 듣자 쥬시아누스는 그 큰 입을 벌려 껄껄거렸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가는 잔뜩 붉어져 있었다. 덩치 큰 어린애 같았다.
아메조프는 저 혼자 연신 점프를 하며 소리를 질렀다.
“노리앙이 돌아왔다! 노리앙이 돌아왔어! 푸하하, 돌아왔다고!”
생환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병장 한가운데서 그렇게 한참을 울고 웃었다. 십 년을 떨어졌던 연인을 만난다 한들 이토록 기쁠 수는 없었다. 죽었을 거라고 체념했던 사람이 당당히 돌아와 그들 앞에 서서 웃고 있다. 자신들을 위해 죽음의 땅에 남았던 가족이 살아서 돌아왔다. 쥬시아누스의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마음의 짐을 덜고 이제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킨샤르와 사단장들은 연병장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웃다가 우는 생환자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저 사내가 누구기에 커트리안마저 저런단 말인가?
그러나 감정의 회오리는 끝나지 않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일을 팽개치고 달려 온 브리오티스와 뮤트, 그리고 크리들과의 재회도 남아 있었다. 한 번 안고 끝을 내기엔 묻어 놨던 감정이 너무 많았다.
그날 밤 생환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조노량의 생환을 축하하고, 동시에 죽은 자들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클리브가 막사 안에서 몰래 오줌을 싸다 들킨 일, 질로가 스마르에게 혼나고 숨어 있던 이야기를 하며 웃었고, 쓸데없는 데 집착을 보이던 롤의 고집을 흉보다가 울기도 했다. 둘러앉아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함께했던 자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먼저 간 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죽은 자들을 추억하며 마음껏 웃고 떠드는, 그게 북부 전사들의 방식이었다.
무릎을 두드리며 다 함께 ‘설원의 여행자’를 불렀다. 그들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가슴에 남았다. 그 날만큼은 부끄러움을 잊고 마음껏 감정을 표출했다.
커트리안도 내내 쓸쓸한 미소를 띤 채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