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12화 (112/142)

112. 아도니아의 그림자들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하이오지다운 방문이었다.

“잘 잤나? 오랜만이지?”

“하룻밤 만이다만?”

“에헤이, 그거 말고 그거!”

중원에서는 보통 이런 식으로 묻지 않는다. 하이오지라서 그런 건지, 이쪽 사람들의 정서가 원래 그런 것인지 거리낌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옷 좀 찾아다 주지 않겠나?”

“그건 세탁을 맡겨 놨다네, 친구. 그게 어떤 가죽인데? 잘 관리해야지. 우선 새 옷을 준비해 주지.”

하이오지는 넉살좋게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의 맨 궁둥이를 찰싹하고 두드렸다.

“가서 최상품으로 한 벌 준비해 와.”

샤를 닮은 여인은 전혀 거부감 없이 하이오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알몸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가운을 걸친 후 방을 나섰다. 다른 여인은 여전히 알몸으로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녀를 취한다 해도 거부할 것 같지 않았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노량은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하늘거리는 천 옷을 이리저리 둘러서 입었다. 이전 아도니아인들이 즐겨 입던 복식과 유사했다. 활동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으나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이오지와 함께 간단히 아침을 마친 후 술집을 나섰다. 어느새 벌건 대낮이었다.

조노량에게 멋진 밤을 선사한 하이오지가 으스대며 조노량을 인도했다. 목재의 검수고 뭐고 다 뒷전으로 미뤘다. 당장 게이트를 타고 크로아지크로 향할 생각이었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 것인가? 마치 칭찬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어린아이가 된 심정이었다. 기뻐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사실 생존자들 간에는 노리앙에 대한 이야기를 삼갔다. 우연치 않게라도 노리앙이 언급되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리앙은 모두에게 마음의 짐이었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노리앙의 희생으로 그 땅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노리앙이 아니었다면 그 빌어먹을 땅에서 썩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생환자들에게 있어서 노리앙이라는 존재는 다른 누구보다도 무거운 짐이었다. 하이오지는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온 노리앙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크리들과 샤마노프의 놀랄 얼굴을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하이오지의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

거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어젯밤에 헤어진 치안대장이 수십의 병사들을 이끌고 뛰어오다가 하이오지를 발견하고 급히 멈췄다. 곁에 서 있는 노리앙에게 지나가듯 인사를 건네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이오지 경, 시청에 괴한들이 침입했답니다. 아무래도 그림자들 같답니다.”

“그림자? 그 그림자들 말입니까?”

북부에서 그림자라는 말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특별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실력은 웬만한 전사들보다 월등하지만 전사의 자부심은 버린 자들이다. 그렇기에 더럽고 추잡스러운 일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첩보나 암살은 물론 특수한 작전도 수행한다.

“도와주십시오. 놈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듯합니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게 된다. 하지만 하이오지는 지푸라기가 아니라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눈앞에 동아줄이 보이는데, 그냥 지나칠 치안대장이 아니었다.

치안대장의 얼굴에 다급함이 뚝뚝 묻어 내렸다.

“당장 가야 합니다. 어서요!”

치안대장은 당장이라도 하이오지의 팔을 끌고 갈 듯 잡아당겼다.

하이오지가 난감한 표정으로 조노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청이 점거 당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크리푸 시는 크로아지크에게 있어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중요한 도시였다.

잠시 갈등하던 하이오지가 조노량에게 말했다.

“일단 가 보자.”

조노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안대장이 다급하게 하이오지를 이끌었다.

시청은 이미 사단 규모의 병사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시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장 이하 시청의 주요 간부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푸의 유일한 군단장인 제랄드가 발만 동동 구르다가 치안대장 아토스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왔다.

“아토스 경, 어서 오시오.”

“아, 제랄드 장군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방금 농무부 책임서기가 처형당했소.”

“뭐라고요? 아우스턴 경이?”

“그렇소. 몇몇 기대장을 침투시켰다가 벌어진 일이오. 어쩌면 좋소?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소.”

“아니, 어쩌자고 섣불리 침투작전을 펼쳤단 말입니까? 그 책임을 어찌 지시려고요?”

“무슨 소리요? 그럼 그냥 두고 본단 말이오?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치안대장의 추궁에 제랄드가 발끈하면 소리를 질렀다.

“아, 알겠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습니까. 대책을 상의해 봅시다.”

사실 치안대장 아토스 입장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괴한들에게 시청이 점거된 책임은 결국 치안을 담당한 아토스가 져야 할 일이었다.

“숫자는 파악되었습니까?”

“흠흠, 현재까지 파악된 수는 대략 이십 명이오. 특이한 것은 놈들 중에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오.”

“마, 마법사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치안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치안대도 모르는 일을 낸들 알겠소?”

제랄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이오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몇 서클이나 되는 것 같습니까요?”

“아, 하이오지 경. 인사가 늦었소.”

“인사는 됐고, 몇 서클인 것 같아요?”

제랄드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어렸다.

“그, 그게… 이마에 써 붙인 것도 아니고, 솔직히 잘 모르겠소.”

“마법사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파, 파이어볼이 날아왔소.”

“마법사가 맞나 보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크리푸에 나타난 거지?”

“하이오지 경!”

하이오지의 중얼거림에 제랄드가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정색하시긴,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요. 그나저나 침입자들의 정체는 밝혀졌습니까요?”

“전혀 짐작도 못하겠소. 하지만 보통 실력들이 아니오. 오오라를 다루는 기대장들이 형편없이 깨져 버렸소.”

“요구사항은 들어 봤습니까요?”

“별 쓸데없는 것들이라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소.”

“뭔데요?”

“어험, 그, 그게… 요리와 술을 대령하라는…….”

“뭐요? 요리? 술? 밥이나 먹자고 시청을 점거했단 말입니까?”

치안대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게 나도 잘……. 일단 점심때가 됐으니까 식사를 하고 뭔가 다른 걸 요구하려는 것이 아닐지?”

제랄드가 한심한 소리를 지껄였다.

“요리를 준비 중입니까?”

“이제 막 주문을 넣어놓긴 했는데, 워낙 가짓수가 많고 복잡한 요리들만 주문한 터라 한참 걸릴 거라는 보고를 받았소.”

황당해하는 하이오지의 시선을 받자 제랄드는 연신 헛기침만 날렸다. 뭐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오오라 기사들을 가볍게 다루는 실력자들에다가 마법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별다른 요구사항도 없이 음식이나 주문해 놓았다? 단순하게 볼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하이오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노량이 헛웃음을 날렸다. 세상에, 하이오지가 저렇게 의젓한 모습을 보이다니?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곧 의젓한 모습을 던져 버리고 하이오지다운 질문을 던졌다.

“음식에 독을 풀면 어떨까요?”

“지금 바보들이 시청을 점거했다고 말하는 거요? 마법사까지 포함되어 있다지 않소!”

“큼큼, 그도 그러네요. 확인을 안 하고 먹을 리도 없고…….”

바보 같은 질문을 무마하려는 듯 하이오지가 헛기침을 했다.

“어떤 단체가 저 정도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거죠?”

“솔직히 난 연합을 의심하고 있소이다. 어제 시청에 도둑이 든 것도 그렇고,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연합이라니? 침공을 준비하고 있기라도 하단 말입니까?”

치안대장이 화들짝 놀라며 제랄드를 돌아봤다.

“짐작이오, 짐작! 아직 아무것도 파악된 것은 없소. 단지 저 정도 실력자들을 투입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는 말이었소.”

“그게 그 말이잖습니까? 연합이 아니면 불과 스무 명으로 누가 저런 터무니없는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성공이라니? 그게 치안대장의 입에서 나올 말이오?”

“아니, 그… 저 뭐랄까, 일단 시청 점거는 성공했잖습니까? 반은 성공한 거란 말이지요…….”

치안대장의 말에 제랄드의 눈썹이 하늘을 향했다.

“지금 이게 군에서 나설 문제요? 시의 경비는 치안대 책임 아니오? 치안대장이라는 자가 군대보다 늦게 도착해서 하는 말이라고는?”

“아니, 어제 술이 좀 과하다 보니… 늦잠을 잤고… 또…….”

제랄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치안대장을 바라봤다.

“아토스 경! 당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오?”

생각에 잠겼던 하이오지는 티격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조노량에게 시선을 던졌다.

“노리앙, 어때? 우리가 들어가 볼까?”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던 터라 구경꾼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조노량이 의문을 담아 하이오지를 바라보았다.

조노량에 앞서 군단장 제랄드가 펄쩍 뛰어올랐다.

“인질들을 다 죽일 셈이오?”

그 순간 치안대장 아토스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하이오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못 시켰군요. 이 분의 이름은 노리앙이요, 조 노리앙. 오해 마세요. 조가 이름이 아니고 성이에요. 좀 이상하죠?”

하이오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질문의 요지가 그게 아님을 깨달고 바로 부언했다.

“동료예요. 우리 중 최고 실력자지요.”

마치 비밀얘기를 하듯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대충이나마 하이오지의 실력을 알고 있는 치안대장이 의아한 눈으로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떠돌이 용병 같던 어제와 달리 말끔한 차림이었지만 뛰어난 기사로 생각될 외모는 아니었다.

제랄드 역시 의심스런 눈빛으로 조노량을 일견하고는 말했다.

“하이오지경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둘이 들어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적은 스물도 넘소. 아까 말했듯이 마법사도 포함되어 있소. 불가능하오.”

제랄드가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하이오지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조노량을 향해 말했다.

“제랄드 장군의 말대로 아무래도 연합놈들이 의심스러워. 크리푸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도시거든. 어때, 생각 있어?”

“필요하다면 들어가 보지. 지금 가겠나?”

“물론! 시간 끌 거 있나, 바로 가자고!”

“안 된다잖소! 인질들이 어디 보통 인질들이오? 시장님도 포함돼 있단 말이오!”

제랄드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이자 하이오지가 귓구멍을 후벼 팠다.

“난 안 돼도 노리앙이 가면 다 해결된다니까, 시끄럽게 구네.”

조노량은 슬그머니 시청 아래로 접근했다.

크리푸 시의 시청은 4층짜리 대형 석조건물이었다. 워낙 침탈을 많이 당했던 탓에 화려함보다는 방어에 유리하도록 지어졌다. 일층에는 창문이 아예 없었고, 2층 이상의 창문도 좁고 높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도시가 점령당하더라도 상당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진 성과 같은 건물이다.

침입자들은 첨탑과 각 층 창문에 기대어 외부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조노량이 접근한 루트는 첨탑에 가려 3, 4층에서는 볼 수 없고, 2층에서만 시야각이 나오는 묘한 위치였다.

2층 창문에 기대어 밖을 감시하던 복면인이 조노량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검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가벼운 천 옷만 걸친 것으로 보아 실력 있는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보고는 해야 했기에 막 신호를 보내려는 참이었다. 그 순간 복면인은 조노량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조노량은 거리가 확보되자 복면인을 향해 암경을 날렸다. 죽이기 위한 암경이 아니라 혈도를 제압하기 위한 암경이다.

복면인은 뭔가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서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조노량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제랄드와 아토스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복면인은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조노량이 신호를 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이오지가 사각을 이용해 조노량에게 접근했다.

2층 창문에 기대어 있던 복면인은 하이오지의 접근을 눈치채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제랄드와 아토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노량이 신형을 쑥 뽑아 올렸다. 복면인이 경계를 서고 있던 바로 그 창문을 향해서였다. 조노량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도 복면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조노량이 신호를 하자 하이오지도 2층 창문을 향해 뛰어올랐다. 아메조프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하이오지도 놀라운 신체 능력을 가진 자다. 아무리 높아도 2층 창문 정도는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었다.

하이오지가 무사히 2층 턱을 딛고 서자 조노량은 복면인을 슬쩍 밀어 놓고는 창문 안으로 슬며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랄드와 아토스는 헛숨을 들이켰다.

노리앙이라는 사내의 손에 밀리면서도 복면인이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노량에 이어 하이오지까지 창문 안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시청 안은 대낮임에도 이전 좀비 폴리스의 시청을 떠올릴 만큼 어두침침했다. 2층 복도 끝에도 복면의 사내 하나가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조노량의 암경을 맞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이오지는 히죽히죽 웃으며 지켜보기만 했다. 성지에서 많이 경험해 봤던 기술이라 새삼 놀랄 이유가 없었다.

조노량이 앞서 나가자 하이오지는 느긋이 뒤를 따랐다. 조노량은 거침없이 앞서 나가며 복면인들을 보이는 족족 처리해 버렸다.

시장실이 위치한 3층에 오르자 하이오지가 계단 좌측으로 뻗은 복도를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렸다.

‘시장실.’

침입 전에 들었던 말이 있었기에 조노량은 처음으로 환영보를 시전했다.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환영보는 시전자의 모습을 잡아내기도 어려울 정도의 절정 보법이 되었다.

시장실 문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침입자들 중 제법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들이다. 그들의 감각에 정상적이지 않은 바람이 감지되었다. 사방이 닫힌 실내에서 바람이 일 일은 흔치 않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경계심을 끌어 올린 채 사방을 경계해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갑작스럽게 낯선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훈련된 자들답게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다섯 명의 사내 사이를 바람처럼 휘돈 조노량이 우뚝 멈춰 섰다.

막 움직임을 가져가던 사내들이 각기 괴상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자세를 낮춘 사람, 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입을 벌린 상태에서 멈춰 버린 사람, 손잡이를 쥐었지만 검을 뽑지도 못한 채 굳어 버린 사람, 품에서 단검을 반쯤 꺼내 든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좌측으로 몸을 날리다가 굳어 버린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 사람은 중심이 잡히지 않아 넘어가고 있었다. 조노량이 슬쩍 받아서 눕혀 버렸다.

몸은 굳었지만 사내들의 정신은 멀쩡했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내보려고 애를 썼지만 아혈까지 제압된 터라 소리는커녕 혀끝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도 마지막 사람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관계로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황이 정리된 걸 아는지 하이오지가 뒤늦게 나타나 히죽이 웃었다.

조노량은 벽 안을 향해 감각을 집중했다. 시장실 안에서는 네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면 시장실 우측 방 안에서는 삼십 명이 넘는 기척이 느껴졌다.

더불어 시장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포착했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흐름이었다. 직감적으로 마법적인 흐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좀 더 감각을 집중하자 시장실에는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와 긴장감을 발하는 사람이 셋이 포착됐다. 반면 우측 방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삼십에, 긴장감을 발하고 있는 사람이 셋이다. 즉, 시장실에 세 명의 침입자와 중요한 인질 한 명이 있었고, 우측 방에는 삼십 명의 인질과 세 명의 침입자가 있다는 의미였다.

조노량이 하이오지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시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도록!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하이오지는 화들짝 놀랐다. 조노량의 목소리라는 걸 구분해 내지 못했다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조노량과 수년간 함께한 하이오지지만 이런 기술은 금시초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조노량이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느끼고 혀를 내둘렀다.

하이오지는 이상한 자세로 굳어 있는 복면인에게서 복면을 벗겨내 뒤집어썼다. 그 모습을 보고 이번엔 조노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이오지의 얍삽함은 여전했다.

복면을 뒤집어쓴 하이오지는 태연히 시장실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들어와!

지시가 떨어지자 하이오지는 거침없이 시장실 문을 열었다.

시장실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하이오지에게 집중되었다.

노크를 했고,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들과 동일한 복면을 썼다. 자연히 방심할 수밖에 없었다. 복장이 상이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수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조노량의 신형이 열린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극한으로 발휘된 환영보로 인해 사내들은 바람을 느꼈다.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이번 작전의 핵심인물들이었다. 하나같이 놀라운 실력을 감추고 있는 그림자들이다. 물론 조노량에게 대항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넘어지거나, 작은 타격음 정도는 발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방심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그들 모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순간에 굳어 버렸다. 그 굳어버린 사람 중에 하나는 하이오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시장인 에미디오 사란이었다. 침입자가 되었든 인질이 되었든 소리를 내서는 곤란했기 때문에 함께 제압한 것이다.

인질마저 제압해 버린 조노량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복장은 같았으나 특이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 하나가 시장실 우측 바닥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던 자세로 굳어 있었다.

둥그런 원 안에 다양한 기호와 문자, 도형을 빼꼭히 적어 놓은 상태였다. 무슨 진법인가 의심했으나 이런 쪽 지식이 전무한 조노량으로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단지 그 원 안에서 비정상적인 흐름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과 사내가 마법사라는 것만 이해했다.

하이오지에게 이곳을 감시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방문을 나섰다. 우측 방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우측 방의 정리도 금방 끝났다. 우측 방을 지키던 침입자들은 반응속도 면에서 시장실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차이가 컸다. 인질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까지 제압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을 따름이다.

우측 방의 정리도 끝나자 사층의 감시자 둘을 정리하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일곱 명의 복면인이 정문에 각종 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 중이었고, 주변으로 수십이 넘는 시체가 그대로 널려 있었다. 끔찍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 일곱 명마저 어렵지 않게 제압해 버렸다.

조노량은 다시 감각을 확장해 인기척을 찾아냈다. 제압한 자들 외에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각 층에서 제압한 감시자들까지 숫자를 헤어 보니 총 스물한 명이었다.

이미 구해 낸 인질 외에 다른 인질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점거 당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은 시청 밖으로 쫓겨났고, 시청의 경비 병력도 인질로 위협하는 바람에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노량은 정문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들을 파마장으로 부숴 버리고 문을 딴 다음 다시 삼 층으로 올라가 하이오지에게 말했다.

“다 정리했다. 이제 인질들을 풀어주지.”

“정말 깔끔하잖아? 역시 노리앙이군! 이분이 시장님이셔. 얼른 풀어드려.”

조노량은 두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인질들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시장, 사란과 크리푸의 주요 인물들은 조노량을 보고 크로아지크의 저력에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저런 경인할 그림자까지 보유하고 있는 크로아지크가 두렵기까지 했다.

침입자들은 한순간에 시청을 점거했다. 불과 스무 명 안팎의 인원으로 시청의 경비대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주요 인물들을 인질로 잡았다. 시청이 장악 당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십 분여, 개개인 모두가 놀라운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침입자들도 저 자에 비하면 어린애나 진배없었다. 주눅이 들어서인지, 혈도가 풀렸음에도 사람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중에는 똥 씹은 표정으로 굳어 있는 마쯔도 있었다.

조노량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작전이 허무하게 실패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한편 그 시간에도 제랄드와 아토스는 시청 정문만 주시하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문이 빠끔히 열렸지만 감히 진입할 생각도 못했다.

☆ ☆ ☆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물론 고문이라는 편리한 방법이 동원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무 명의 복면인들 중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반면 유일한 마법사는 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술술 불어 젖혔다.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진실로 인해 크리푸 시가 발칵 뒤집혔다. 제랄드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놈들은 아도니아에서 파견된 일급 그림자들이었다. 마법사는 4서클의 실용 마법사로서 요인 납치와 포탈을 담당했다. 침입자들이 쓸데없이 술과 요리를 주문한 이유가 밝혀졌다. 포탈을 완성시키기 위해 시간을 번 것이다.

포탈은 거의 완성 단계였다. 5서클의 마법사였거나 조노량이 반시간만 더 늦었다면 시장은 물론 시의 주요 인사들이 모조리 아도니아로 납치될 뻔했다.

납치 미수사건도 큰일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아도니아가 크리푸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안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샜고, 아도니아의 특수부대가 성내는 물론 시청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난입했다. 보안과 경비가 동시에 뚫려 버린 것이다.

시장, 사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도니아에서 뭔가 낌새를 차린 게 분명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시장의 우려와는 별개로 하이오지는 시종일관 희희낙락했다. 크리푸 시의 위기 따위보다는 노리앙을 동료들에게 데려갈 생각에만 부풀었다. 식사를 마치고 시장의 인사조차 건성으로 받은 후 서둘러 게이트를 넘었다. 목재 검수 따위는 까맣게 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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