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09화 (109/142)

109. 노량, 세상 속으로

조노량은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붉은색 펜던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가 권능을 부여했고, 홀연히 나타난 주운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난감한 물건이 되었다.

몇 차례 버려도 보았으나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목에 걸려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지만 언제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돌아와 있었다. 조노량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펜던트 중앙에 자리 잡은 매끈한 돌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물건이다. 바로 데몬의 심장을 뒤져 찾아낸 돌조각이다. 마정석이라 했던가? 아마도 내단 같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내단은 영물이나 되어야 품을 수 있는 물건이다. 당연히 오크나 롤 같은 경우는 아예 있지도 않았고, 기형마물 정도는 돼야 손톱 끝 크기의 작은 돌조각이 형성된다. 그래 봐야 먹을 때 이만 상하게 만드는 영 쓸모없는 돌조각일 뿐이다. 하지만 거인족이나 데몬 정도라면 온전한 손톱크기까지 자란다. 하지만 이 펜던트에 박혀 있는 돌조각은 거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기다. 같은 데몬이라도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흐름을 읽어 본 결과, 이 펜던트와 자신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이어져 있었다. 아무리 벗어 던져도 결국은 이어지게 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이런 것이 마법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분명한 건 이 펜던트가 자신에게는 족쇄라는 점이다.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 자신과 연결할 수 있는 족쇄.

조노량은 더러운 가죽옷 틈에 펜던트를 밀어 넣었다. 무슨 그럴듯한 장신구도 아니고, 누가 봐도 불길한 느낌의 펜던트를 굳이 겉으로 꺼내 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당장의 문제는 펜던트가 아니었다.

그 지긋지긋한 곳을, 그 끔찍한 곳을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청명한 하늘과 투명한 대기를 마주하며 느꼈던 감동도, 사흘을 굶고 났더니 더 이상 감동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신선한 공기라도 갈증을 해소해 주거나 배를 불려줄 수는 없었으니까.

도대체 이곳이 어디란 말인가? 고골리에게 길이라도 물어보고 나올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마계의 문을 벗어난 후 무작정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이틀째에 사막을 만났다. 얼마나 넓을지도 모를 사막을 물도 없이 건널 수는 없어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그래 봐야 여전히 황무지다. 한쪽은 사막, 한쪽은 황무지, 뭐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사막이든 황무지든 음식을 구할 수 없는 건 동일했다. 사흘간 전갈을 닮은 곤충 몇 마리를 잡아먹은 것이 목에 넘긴 전부였다. 그곳에서 벗어나 겨우 해방을 외쳤더니 이제 굶어 죽게 생겼다.

아무리 환골탈태를 겪은 몸이라지만 무한정 굶어서는 버텨 낼 재간이 없다.

조노량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겨운 풍경이다.

세상이 회백색에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마계의 문과 별반 차이가 없는 지형이었다. 검붉은 황토 흙과 드문드문 굴러다니는 덤불, 파도처럼 굽이진 둔덕, 그 너머 또 둔덕. 이 모든 풍경이 반복적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메마른 풍경을 보니 목이 점점 더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돌조각 하나 입에 문다고 해결될 갈증이 아니었다.

싱싱한 놈으로 마물이라도 한 마리 잡아들고 나올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니, 검은 이끼라도 넉넉히 집어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벗어나서까지 마물의 고기와 검은 이끼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까짓 황무지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두고 볼 참이다.

그러나 조노량은 그로부터도 이틀이나 더 굶어야 했다. 매우매우 재수 없게도 인간의 마을만 피해 내달린 탓이다.

엿새가 지나서야 마침내 황야를 벗어나서 산과 숲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먹을 만한 짐승을 사냥해 피를 마시고 날고기를 씹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조노량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만났던 숲과 비슷한 모양의 숲이었다. 옷을 걸쳤다지만 거지꼴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살피니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보였다.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조노량은 흔적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아직 날이 저물려면 멀었고, 배도 불렀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산마루를 끼고 검게 그을린 밭에 농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중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화전민촌이다.

마을은 높다란 목책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래도 후미진 마을이다 보니 야생짐승이나 몬스터를 늘 염두에 두어야 했을 터였다.

목책 문을 두드리자 몇몇 청년들이 나와 조노량을 맞았다. 손에는 제각기 다양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조잡한 창과 도끼를 든 사람도 있었지만 개중 절반은 농기구인지 무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모양이야 어쨌든 무기를 들었다는 것은 낯선 자를 경계한다는 의미였다.

“어디서 온 손님이시우?”

개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장년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질문을 던졌다.

“길을 잃었소. 길도 묻고 잠시 쉬었다 가고 싶소만.”

가능한 한 불쌍해 보이는 목소리와 표정을 지었다.

조노량의 몰골은 척 봐도 매우 지치고 고달파 보였다. 휴식이 절실한 모습이다.

마을 주민들의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들었다.

“쯧, 어쩌다가 이런 오지를 헤매게 되셨수? 여행자는 실로 오랜만이우. 어이! 폴, 자네 집에 여유가 좀 있지?”

“넉넉하긴 함다만 낯선 이럴 들이기가 쪼매…….”

“아따 저런 비실한 몸으로 해라도 끼칠까 봐 그렁가? 소심허긴, 쯧!”

장년인이 청년을 타박하곤 조노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참, 객도 행여나 쓸데없는 마음은 먹지 마시우. 이 지역은 우리가 뜨르르 꿰고 있수. 행색을 보아 허니 딱해 보여서 후의를 뵈는 것이우. 얼굴 붉히는 일은 허지 마시우다.”

척 봐도 순박한 이들이었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낯선 이를 맞이하는 모습이 그랬다.

장년인이 손짓을 하자 청년들이 무기를 내리며 문에서 비켜 주었다.

“이리 오시우다.”

아까 그 청년이 조노량에게 말하곤 바로 등을 돌려 앞장서 갔다.

조노량은 고개를 숙여 다른 이들에게 인사를 한 후 폴이라는 청년을 따라 나섰다. 폴의 집은 마을 초입에 위치한 허름한 통나무집이었다.

청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라든가, 주방이라든가 하는 구분도 지어지지 않은 통으로 된 실내였다. 절반은 나무로 짠 마루가 놓여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주방과 창고를 겸한 공간이었다. 청년의 말처럼 넉넉한 크기는 아니었다.

“누추하우. 그래도 제법 따숨다. 한데서 자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거우다.”

청년의 말대로 난롯가에는 후끈하게 장작이 지펴져 있었고, 그 옆으로 땔감도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산골마을답게 땔감은 넉넉한 모양이었다.

“고맙소.”

“바울이우. 그냥 편하게 폴이라 부르시우다.”

“노리앙이라고 하오.”

“노리앙? 이름 참 좋수다. 그런데 우짜다가 이런 오지에서 헤매게 되셨슴까? 차림새럴 보네까 사냥꾼 같수만?”

“여행 중 도적떼를 만나서 도망치다가 길을 잃었소.”

“저런, 혹시 파코 패거리 아니었슴까? 이눔들이 안적까지 잽히지 않았다니. 원제 한번 본때를 보여 주야 혀는데 말이우다.”

적당히 둘러대는 말에 청년은 누군가의 실명까지 거명하면서 분개했다. 괜히 멋쩍어진 조노량이 헛기침을 했다.

결기를 부리는 청년을 보니 몸이 제법 탄탄했다.

“제법 수련을 했나 보오?”

“지가 이래 봬도 늑대까지 패서 잡았다 아님까? 지난겨울엔…….”

몇 마디 섞고 나자 청년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며 금세 친근하게 굴었다.

청년은 사냥한 고기라면서 탱탱 얼은 기름덩어리를 내와 난로에 얹은 후 푹 삶아서 칼로 석석 썰어 주었다. 아침나절에 날고기를 배불리 먹었지만 구수한 냄새가 새삼 시장기를 자극했다.

조노량은 주머니칼을 꺼내 적당한 크기로 베어 물었다. 담백한 것이 의외로 맛이 좋았다.

“순록의 뱃대지 살임다. 추울 땐 이눔을 재게 먹어 줘야 병에 안 걸림다.”

청년은 고기와 함께 차랍시고 약초 우린 물을 내놓았다. 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노량이 인상을 쓰는 걸 본 청년이 말했다.

“몸에 좋은 물임다. 쓰도 재게 드시우. 아참, 술 좋아하시우? 셈만 치루믄 한 통 드릴 긴데?”

“돈이 없소. 미안하오.”

“허긴, 도적떼에게 당하셨음 뭔들 남아 나셨것수. 좋수, 기분이우다. 공으로 드시우.”

청년은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더니 밀봉된 조롱박 하나를 꺼내 왔다.

“이기 요래 쪼맨혀두 독함다. 카세올라 열매로 담근 건디 찬찬히 드시우.”

청년은 투박한 목기에 그득히 술을 따라 주었다.

독한 냄새가 찌르르 코끝을 자극했다. 술을 마주하자 조노량은 눈시울부터 붉어졌다. 이게 얼마 만에 대하는 술인가?

조노량은 천천히 입술을 적혔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훅 들이켜졌다. 독했다.

한 모금 머금었다.

“컥, 쿨럭.”

절로 기침이 토해졌다.

조노량의 붉어진 눈시울과 얼굴을 보더니 청년이 혀를 찼다.

“거 독하다잖수? 영 술을 못하는 갑네.”

“아니오. 정말 달구려.”

“하, 그려도 술맛은 아시는구먼.”

중원의 술은 원래 독했다. 주정이 육칠 할이다. 그런 독주에 길들여져 있는 조노량에게 이 정도 술은 그리 독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오랜만에 마시는 거라 그 독기를 이기지 못한 것뿐이다.

한 차례 기침을 토해 낸 후 절반쯤 쭉 들이켰다.

목을 타고 짜르르 내려간 독기가 위장을 후끈하게 달궜다. 그 독기에 내공이 절로 움직이려 했지만 가만히 내리눌렀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데 기분을 깰 수 있겠는가?

“허, 못 허는 줄 알았더니 술꾼일세. 무지 독하우. 찬찬히 드시우.”

조노량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 그 기분을 즐기다가 순록의 백육(白肉)을 크게 한 점 떼어 내서 입에 물었다. 달고 늘큰한 기름기가 입안 가득 쩍 달라붙었다. 그 부드럽고 진한 맛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마물의 질긴 고기만 먹다 이렇듯 기름진 고기를 먹자 씹을 필요도 없이 혀에서 벌써 녹아내려 갔다.

“이 술 이름이 뭐요?”

“이름은 무슨, 카세올라로 담가서 기냥 카세올라주라고 함다. 잘 말린 카세올라를 푸욱 찐 담에 갈대를 섞어 나흘을 발효시킨 후 끓여서 내린다우. 이 마을선 내가 맨든기 질이우. 어떠우, 좋슴까?”

“좋소! 잊기 힘든 맛이오, 폴.”

“껄껄껄, 고맙수.”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마셨다. 겨우 두 병 만에 폴이 곯아떨어졌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퍼져 버린 청년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노량은 마지막 한 잔을 놓고 밤이 깊도록 앉아 있었다. 몸이 편해지니 그제야 샤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다음 날 아침, 조노량은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또 샤에 대한 꿈을 꾼 모양이다.

폴은 사냥을 떠난다고 주섬주섬 이것저것 챙겨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조노량은 밥값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따라나서기로 했다.

“따라댕기기 힘들 검다. 그냥 쉬고 계시우.”

“아니오. 사냥이 일이었소. 걱정 마시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계의 문에서 무려 삼 년간이나 마물을 사냥했다. 마지막에는 마왕까지 사냥했으니 사냥꾼 중에서도 최고의 사냥꾼이라 말할 수 있었다.

“허긴, 그라믄 따라나서시우. 활은 잃으신 거 겉고, 그 칼로는 사냥허시기 심드실 터니 대창이라도 드시우.”

폴이 가늘고 짧은 대창 세 개를 건네주었다. 딱 봐도 투창용이다. 딱히 창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성의를 봐서 받아 주었다.

“원채는 사나흘 걸리는디, 객도 있응까 가까이 돌고 오것슴다. 가시우다.”

그렇게 집을 나서니 어제 보았던 장년의 사내가 지나가다 인사를 건넸다.

“폴, 사냥 가는가? 조심서 댕기라. 오우거를 봤다는 소문이 있다네. 어, 객도 따라 가시우? 몸땡이나 추스르지 뭣헌다구 위험시럽게? 어이, 폴. 입성이라도 실헌 놈으로 챙겨 드리지 그랬는가?”

“아, 글게?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슴다. 잠시만 기다리시우.”

“아니오. 지금 이 옷으로도 충분하오. 그냥 갑시다.”

“괘안것수?”

“이 옷도 충분히 따뜻하오.”

“허긴, 꾀죄죄혀두 뭔 거죽인지 실해 보임다.”

“조심서 댕기오거라. 객도 무리허지 마시우.”

“걱정 마시우, 성님. 근방으로만 댕겨올 거우다.”

산이 높지는 않아도 깊고 거칠었다.

청년은 조노량이 의외로 잘 따라오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껄껄, 사냥꾼이라더니 잘 걷슴다. 쪼매 재게 가도 괘안것수?”

폴의 투박한 배려에 조노량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럽시다.”

청년이 속도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조노량이 숨차 할까 봐 연신 뒤돌아보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때 조노량의 눈에 풀잎에 묻은 거뭇한 뭔가가 들어왔다. 이곳에 찌루미가 있을 턱이 없으니 다른 곤충이겠지만 제법 군집을 이뤄 똥을 싸질러 놨다. 주변을 살피니 풀숲에 가린 한 무더기의 짐승 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에 산돼지가 있소?”

“멧돼지 말이우?”

“그렇소.”

“있슴다.”

허어, 설마 진짜 찌루미란 말인가?

조노량은 폴을 불러 똥을 보여 주었다.

“이기? 순록임다.”

말과 함께 폴은 손으로 똥을 주물럭거렸다.

“안적 굳어지지 않았슴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우다.”

폴이 가까운 나무를 타고 올랐다. 혹시라도 보일까 해서였다. 하지만 굳지 않았다 뿐 이미 차갑게 식은 똥이다. 근처에 있을 리가 없었다.

조노량은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시들한 풀이 보였다. 풀은 약해 보여도 실상 놀라운 생명력을 가졌다. 짓이겨져도 반나절이면 다시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한두 잎 정도는 수맥이 다쳐 결국 말라 죽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풀은 시간이 지나도, 비를 맞아도 다시 서지 못했다. 지금 조노량이 보는 풀잎이 그랬다. 풀이 누운 방향으로 보아 서남쪽이었다.

폴이 나무 위에서 살피고 있는 동안 조노량은 서남쪽으로 조금 더 나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잔가지가 꺾여 있는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줄기에 가는 갈색털이 몇 가닥 박혀 있었다. 보통은 멧돼지들에게나 있는 습성이다. 벼룩이 있거나 혹은 영역 표시용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보이지 않슴다. 방향이라도 잡아야 헐틴디. 뭣 허시우?”

“이쪽이오. 저쪽으로 갔소.”

조노량이 나무를 두드리고, 순록이 갔을 방향을 다시 가리켰다.

폴이 다가와 나무를 살피더니 눈을 반짝였다.

“사냥꾼이 맞는갑네. 나보다 눈이 밝슴다. 맞수, 가시우다.”

폴이 폴짝이며 조노량이 가리킨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너무 멀리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조노량도 여유 있는 걸음으로 폴의 뒤를 따랐다. 폴의 발걸음이 답답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평범함이 너무 즐거웠다.

오래지 않아 조노량의 기감에 순록으로 짐작되는 생명체가 잡혔다. 상당히 약한 기를 가진 짐승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움직임과 소리가 들렸다.

폴이 방향을 잘못 잡을 때마다 조노량이 방향을 지시해 줬다.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순록의 모습이 둘의 눈에 들어왔다.

“짐부터는 조심혀야 함다. 귀가 밝은 놈이우.”

폴은 제법 능숙하게 발자국 소리를 지우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뒤를 따르는 조노량의 발에선 일체의 소리도 발생하지 않았다. 대충 걷는 것처럼 보여도 돌부리 하나, 나뭇가지 하나 밟지 않았다. 조노량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폴이 틈틈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바로 뒤에 그가 서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나아갔다.

순록이란 놈이 둔한 건지, 폴이 능숙한 건지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폴이 지닌 활은 조잡하기 짝이 없는 활이었다. 중원의 활이라면 벌써 닿고도 남았을 거리를 지나 한참이나 더 좁힌 후에야 폴은 시위를 메겼다.

위력 면에서는 투창만 못했지만 정확도 면에서는 활이 나았다.

탱!

조잡한 활답게 시위 놓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순록이 경계심을 갖기에 충분한 소리였다. 펄쩍 뛰어오른 순록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순록의 아랫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폴은 다급히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얹었다. 하지만 순록은 이미 유효 사거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탱!

명중이었다. 멈춰 있는 순록도 못 맞춘 솜씨로 움직이는 순록을 맞힌 것이다. 운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어쨌든 맞히긴 했다. 하지만 화살은 거죽에만 살짝 박혔다가 순록의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상처를 입었슴다. 추격하면 잡을 수 있슴다.”

또 몇 시간을 헤매야 한다는 소리에 조노량은 들고 있던 투창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후웅!

투창은 바람소리를 내며 맹렬히 날아가 순록의 허리를 꿰뚫었다. 투창에 꿰뚫린 순록이 펄쩍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엎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폴이 경악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돌아보았다.

“원래 투창질로 사냥을 했더랬슴까?”

둘이 다가갔을 때 순록은 아직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 한가득 물기를 머금고 끔벅거리고 있었다.

조노량은 단검을 꺼내 순록의 멱을 단숨에 따 버렸다. 쓸데없이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유, 살아 있을 때 뱃기야 거죽이 부들부들 헌디? 뭣 헌다고 서둠까?”

조노량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에도 나름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 봐야 납득할 리도 없었다.

폴은 순록의 몸이 굳기 전에 서둘러 가죽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가죽과 근막, 지방층의 경계에 투박한 단검을 쓱쓱 문지를 때마다 경계면이 말끔하게 떨어져 나왔다. 깔끔한 솜씨였다.

가죽을 모두 분리해 낸 폴은 순록의 배를 열어 내장을 걷어 내고, 몇 군데 동맥을 절단해 몸에 고여 있던 피를 마저 뽑아냈다.

그때 조노량의 기감에 거친 살기가 포착됐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폭급한 살기였다. 그때까지도 폴은 운반하기 쉽도록 순록을 토막 내는 등,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순록은 작지 않은 짐승이다. 둘이 져 나를 수 있도록 쓸데없이 무게만 나가는 머리니 뼈 등의 부위를 제거하는 것이다.

조노량은 오첩도를 뽑아 들고는 인상을 썼다. 살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놈 오첩도 때문이었다. 마계의 문을 벗어나고부터 계속 버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괜한 기분이라고 치부하며 살기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쿵쿵, 투둑, 투두둑!

묵직한 발자국 소리와 나무가 꺾여 나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폴이 화들짝 놀라며 순록에게서 물러났다.

“뭣이여? 설매?”

저 정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흔치 않았다. 불현듯 자경대장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를 통째로 부러트리며 나타난 존재는 오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오우거였다.

오우거는 순록의 피 냄새를 맡은 탓인지 몹시 흥분해 있었다. 냄새를 맡고 온 장소에 사람이 보이자 오우거는 옆에 있는 나무를 통째로 뽑아 들었다. 오우거 입장에서는 먹을 것이 늘어났으니 오히려 반길 만한 일이다.

반면 폴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오우거는 웬만한 기사들도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회색늑대 한두 마리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노량이 검을 뽑아 들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다.

“이제 죽었슴다.”

도망도 불가능했다. 인간의 짧은 다리로는 오우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오우거가 뽑아 든 생나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포효를 토해 놓았다. 사냥감의 기를 죽여 놓자는 의도였다.

조노량 입장에서는 별 시답지 않은 마물이 유세를 떠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인족조차 성에 안 차는 마당에 미련한 오우거 따위가 자신의 앞에서 포효를 내지르다니?

가소로워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조노량이 앞으로 나서자 오우거는 흉성을 드러내며 생나무를 그대로 내려쳤다.

쾅!

생나무가 흙바닥에 내리꽂혔다. 생나무는 일 미터 가까이 땅속으로 파고들어가 있었다. 폴은 노리앙이라는 사내의 죽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땅속에 처박혀 납작해지고도 살아 있을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 순간 오우거의 오른쪽 팔뚝이 떨어져 내렸다. 잘려 나간 단면이 하얗게 질렸다가 순식간에 초록색 핏물을 쏟아 냈다.

크아왕!

오우거가 두 번째 포효를 내질렀다. 위협의 포효가 아닌 고통의 포효였다. 오우거는 흉포하지만 고통에 민감한 몬스터다. 자신의 팔이 통째로 잘려 나가자 그 고통을 못 이기고 통나무를 내팽개쳤다. 남아 있는 한 팔로 사방을 휘저으며 혼란에 빠졌다.

그 정면으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마법처럼 뚝 떨어져 내린 것이다. 폴은 그 사람이 노리앙이라는 걸 알아봤다. 너덜너덜하게 해진 가죽옷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노량은 오첩도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마력이 형편없는 놈이군?”

내공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노량이 오우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조노량의 기세를 알아본 오우거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얼마 전까지 같은 진영에 서서 전투를 치렀던 오우거였지만 이곳의 오우거는 단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마물일 따름이다. 살려 둬서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노량은 거리낌 없이 오우거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은빛 선이 오우거의 목덜미를 스치자, 사람의 몸통만 한 목이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목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 거대한 몸뚱이도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폴은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밭 위로 초록색 피가 질펀하게 번져 나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폴이 질겁하며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히끅, 개, 개, 객은 누구심까?”

폴의 목소리는 불쌍할 정도로 떨려 나왔다.

“혹시 오우거의 가죽도 쓸모가 있소?”

마치 토끼라도 한 마리 잡은 듯 무심한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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