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동상이몽
그 시기 켈커티스에서의 작업도 무르익었다.
더글라스가의 가주 히어데로는 작은 꾸러미를 들고 여러 원로들과 주요 가문의 가주들을 만나 새로운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저 일상적인 방문인 듯 여유로운 한담을 주고받고, 별것 아닌 예물을 놓고 나오곤 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예물의 크기가 조금씩 커졌다.
오늘도 시의 군정을 담당하는 관리, 아르세니오와 차를 나누고 있었다. 최근 몇 개월간 공을 들인 인물이었다.
“어찌 이런 걸 또? 너무 받기만 하여 민망합니다, 공.”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가 어디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인가? 내가 명색이 자네의 후견인이야! 돌아가신 자네 부친이 들으면 섭섭하다고 하시겠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자네 부친이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자네에 대해 신신당부를 하셨다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늘 공의 은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은공은 무슨? 그래, 요즘 일이 많이 바쁘지?”
“티모테우스 공이 암살당하시는 바람에 일이 좀 많아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친구, 열정이 대단했는데. 나도 많이 안타깝네. 아직 할 일이 많은 친군데… 그나저나 자네 건강은 좀 어떤가?”
“공이 보내주신 신관 덕에 아주 좋아졌습니다. 신력이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껄껄껄, 나도 덕 좀 봤다네. 보게, 얼마나 팔팔한가? 적어도 십 년은 거뜬할 것 같구먼.”
히어데로는 보잘것없는 알통을 내보이며 좋아진 건강을 자랑했다.
“그나저나 최근 바라흐하 님이 2군단의 움직임을 탐탁잖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탐탁잖다니?”
“아직까지 존스캐빈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겨울에 군을 움직이지 않는 건 상식이지 않은가? 이제 겨우 추위가 가셨는데 어찌 그리 성급하게 군단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크로아지크를 턴 건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점령한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계속 주둔하고 있는 건 실수 같습니다. 차라리 타라 시나 크리푸 시로 물러났다면 바라흐하 님도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뭐, 그도 그렇지. 워낙 동떨어진 곳이라서… 자칫 연합놈들에게 포위공격이라도 당하게 되면 곤란한 위치인데, 걱정이군.”
“2군단은 켈커티스의 중추입니다. 연합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손실 없이 회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어쩌겠나? 왕께서 최소 존스캐빈까지는 공략하라 명하셨으니 따를밖에.”
“존스캐빈 이후가 더 문제입니다. 왕께서 그 이상을 바라실까 봐…….”
“자네가 잘 좀 고해 드리게. 나와는 완전히 틀어져서 만나려고도 안 하니…….”
“물론입니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추위도 다 갔으니 슬슬 움직일 만도 한데, 연합놈들도 눈치가 있는지라 걱정이군.”
“이건 극비인데, 아도니아 7군단이 깨진 후에 존스캐빈 쪽 방비가 더 두꺼워졌다고 하더군요. 저라면 기왕 거기까지 진출한 김에 비교적 약체인 라지도니아를 먼저 건드려 볼 것 같습니다만? 커트리안 부군단장이 어찌 생각하고 계실지…….”
“그것도 좋은 작전이로군.”
“하여간 요즘도 크로아지크 쪽으로 계속 전령이 달리고 있으니 조만간 움직이겠지요. 전 시민이 2군단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성과를 더 올리고 개선한다면 공석인 제2바실레오스 자리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허, 그 무슨! 이제 겨우 몇 번 이긴 것 가지고.”
“겸손이 과하십니다. 엘리티아 평야를 수복한 것만으로도 동맹 전체가 떠들썩한 상황입니다.”
“아, 그래? 엘리티아 쪽 방비는 잘되고 있다던가? 이제 날씨가 풀렸으니 연합이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데.”
“하하하, 이미 3군단이 완벽히 장악한 상태입니다. 곧 트렌티노 쪽 군단까지 들어간다고 하니 쉽게 내주진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뒤통수에 2군단이 겨누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기도 힘들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군정 관리인 아르세니오와 한담을 나눈 후 히어데로는 발길을 돌려 엔드리지가를 방문했다. 더글라스가와 함께 켈커티스에서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였는데, 운영 중인 상단이 날로 번창해 지금은 로메노가와 함께 켈커티스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엔드리지 가주는 로메노가의 가주와 달리 아직 정정했다. 공교롭게도 최근 바라흐하 측 사람들의 와병이 부쩍 잦아졌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바라흐하는 은밀히 1군단장 우무스를 불렀다. 티모테우스 사망 후 제2바실레오스의 역할을 대행 중이며, 다음 선거에서 공식적으로 그 자리에 오를 것이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바라흐하의 심복이기도 했다.
“자네 말대로 추가 공략을 재촉했는데,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바라흐하의 표정에서 짜증이 묻어 나왔다.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작전에 대한 판단은 모두 현지 지휘관에게 맡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들은 승전군입니다. 섣불리 간섭하다가는 시민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평판을 고려해야 합니다.”
“내 생각도 그러네만, 안 움직여도 너무 안 움직이지 않는가? 그 척박한 땅에 처박혀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분명하게 추가 공략을 명한 상태입니다. 그대로 개선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한 개 이상의 폴리스를 공략해야 할 겁니다. 이미 보급도 많이 부족해진 상태일 것이고, 추가 공략을 진행하다 보면 틀림없이 병력 손실이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개선나팔을 울릴 처지는 못 될 겁니다. 그리고…….”
우무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 뇌리에서도 잊힐 테고 말입니다. 느긋이 기다리면서 독촉 전령이나 주기적으로 보내면 됩니다.”
바라흐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정치가가 다 되었구먼.”
“다 잘될 겁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공략이 지지부진해지면 군중들은 흥미를 잃기 마련이다.
“뭐… 그렇긴 하네만, 자네는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부정적인 면도 늘 고려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어허, 전하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구먼.”
“오해하라고 하십시오.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제도 개편은 언제쯤 공표하실 생각이신지?”
“차기 선거 전에는 단행해야 하지 않겠나? 일단 좀 기다려 보세.”
그리고 그해 여름 바라흐하의 의도대로 2군단은 크로아지크를 중심으로 치열한 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연합에서는 두 개 군단을 편성하여 재차 크로아지크를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고, 이를 어렵게 막아 낸 커트리안군은 역으로 라지도니아를 쳤다. 물론 공성에는 실패했지만 라지도니아 방위를 위한 수비군 수를 늘리도록 강제했다. 이를 예상하기로도 한 듯 커트리안군은 다시 존스캐빈 쪽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연이어 카테네오를 공격했다. 자연 크로아지크를 중심으로 한 세 개 폴리스는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여름 내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추위가 시작되면서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도니아 입장에서 크로아지크는, 계륵이라고 해야 할까? 빼앗겼다고 해서 타격이 큰 것은 아니지만 상징성 면에서 기분이 나빴고, 탈환하자니 저항이 거셌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져들면서 차라리 켈커티스의 가장 큰 전력을 크로아지크에 묶어 두었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했다.
물론 커트리안의 목적은 시간 지연이었다. 굳이 주변 폴리스 공략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적을 자극해 자칫 대규모 병력이라도 몰려오게 한다면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연합이 방어에 신경을 쓰도록 적당히 위협만 하고 빼앗지는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덕분에 커트리안군은 한 해 내내 지루한 공방전만 펼치게 되었다. 물론 이를 통한 실전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적당히 공격하고, 적당히 물러나며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했던 크로아지크 2, 3군단을 1군단에 버금가는 정예로 육성했다.
공방전이 길어지자 우무스의 말대로 시민들도 2군단에 대한 기대를 천천히 접어 갔고, 바라흐하 쪽에서도 경계심을 풀어 버렸다.
바라흐하 측에서는 보급도 부실하고 추가 파병도 없었으니 2군단은 현재 보통 곤궁한 처지가 아닐 거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보급과 추가 파병을 요청하는 전령이 뻔질나게 켈커티스를 드나들었지만 원활한 보급은 이뤄지지 않았다. 보급품을 보낼 때마다 매번 연합군에게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바라흐하가 의도적으로 보급품의 이동 루트를 그렇게 잡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저 정도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 용하다는 판단이었다. 이제는 승전군이라는 이름도 많이 퇴색했다.
왜 회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우무스의 질문에 바라흐하는 ‘물론 자존심 때문이지’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바라흐하가 슬슬 원정군 해산 명령을 고려할 때, 우무스는 좀 더 두고 보자는 의견을 견지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한 해가 흘러갔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 ☆ ☆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도 전체적인 전력은 침략군이 앞서 있었다. 그럼에도 침략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죽여 없애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엄청난 숫자의 저항군에 마계의 강대한 권속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권속들을 집중해 특정 지역을 초토화시켜도 다른 지역에 남은 권속들이 당했고, 이동하면 그 지역에 머문 권속들이 또 당했다.
특정 지역만 차지할 생각이 아니라면 결국 전 지역을 장악해야 하는데, 지금의 숫자로는 어림없었다. 새로운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군주 워리놈의 권능에도 한계가 있었다. 다섯 마왕을 밀어 넣는 데 거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차원을 뚫는다는 것은 군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2차 침략군 가운데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다. 네 개의 팔을 가진 마왕 호라스였다. 식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진 자였는데, 말라죽은 덤불만 무성한 플라누라 평원에서 힘도 써보지 못하고 하기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카임은 호라스와 가까운 마왕이다. 주신 아디의 권속이었던 자로 그의 창조자를 저주하며 스스로 마계로 내려온 타락천사였다. 그래서인지 과거 창조자 중 하나인 벨제뷰트를 섬기지 않고, 워리놈을 택한 마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천까지 수를 불린 토착마물의 군대와 카임의 군대가 마주치게 되었다. 조노량이 속해 있던 바로 그 집단이었다. 규모를 불리며 계속 승승장구했으니 마왕과 맞닥뜨리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카임은 폭발성 충격파를 권능으로 가진 마왕이었다. 키는 대략 삼 미터에 불과했지만 우코르바흐를 연상시킬 정도로 탄탄한 몸집을 가졌고, 직선으로 뻗은 두 개의 뿔을 자랑으로 삼았다.
하지만 조노량이 위협을 느낀 능력은 그의 주권능인 충격파가 아니었다. 바로 주운이라는 마법사가 사용했던 마법, 블링크였다. 카임의 블링크는 그야말로 손오공이 사용했다는 분신술과 다름없었다. 얼마나 빠른지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거의 서너 군데에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위진천환영보와 같이 직접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 자체가 이동되는 마법이었다.
충격파를 머금은 권능이 전 방위를 점하고 날아오자 조노량도 혼란에 휩싸였다. 보법은커녕 몸을 움직일 방위조차 여의치 않았다. 가까스로 피해내고 있었지만 벌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보호해야 할 대상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본 샤가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