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물밑 작업
극지 크로아지크에도 봄기운이 꿈틀거리는 계절, 하이오지는 크리푸의 시장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삼류건달의 위상이 높아져도 너무 높아졌다.
하이오지의 가소로운 당부에도 시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에 대한 비밀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소. 군단장님께 잘 말해 주시기 바라오.”
“물론입니다요. 그리고 조만간 노르드스톰에서 여분의 밀이 도착하거든요.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신경 좀 써 주세요. 물론 값은 넉넉히 쳐드리지요.”
“여부가 있겠소. 덕분에 날이 갈수록 폴리스가 부유해지고 있소이다. 조그만 예물을 준비했는데, 커트리안 님께 전달해 주시기 바라오. 기사님 것도 따로 준비했다오.”
하이오지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요.”
시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원숭이 같은 기사는 절대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사양은커녕 예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으면 금방 불퉁해진다. 한두 차례 겪어 보고 나서는 그를 위한 예물도 함께 준비했다. 기꺼이 말이다. 최근 크리푸가 벌어들이는 수입을 생각하면 저택이라도 지어 주고 싶다.
“그나저나 군단 자금이 넉넉한 모양이오?”
“연합놈들이 좀 많이 빼돌려 놨어야죠.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에서 노획한 자금만으로도 일 년은 거뜬합니다요.”
곡창을 끼고 있는 센드버그나 노르드스톰은 가난한 크리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유한 폴리스다. 두 폴리스에서 착취한 연합의 자금을 몽땅 털어왔으니 크로아지크가 부유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시장이 감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이오지는 적당히 면담을 마쳤다. 크로아지크의 금광 이야기는 아직까지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시장과의 면담을 끝낸 하이오지는 느긋이 마쯔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원 한구석에서 낙엽을 쓸고 있는 보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북부 도둑길드의 부길드장까지 지낸 보웬이지만 이제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됐다.
그동안 쌓아 온 원한 관계가 적지 않아서 마쯔의 저택을 벗어나지 못했다. 딱히 보호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마당에 공으로 놀릴 수는 없는 일, 마쯔는 밥값이나 하라고 보웬에게 정원 손질을 맡겼다. 생전 해 보지도 않은 일을 잘할 수 있겠는가? 변변치 못한 게 당연했다. 일을 하고도 쓸모없는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다. 그 덕에 노예들조차 보웬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이오지의 모습을 보았을 게 뻔한데, 보웬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있지도 않은 낙엽만 주야장창 쓸어 댔다. 하이오지의 예민한 귀에 빠득 소리가 들려왔지만 희죽 웃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저택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쯔의 호위기사 하나가 쭈뼛거리며 하이오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드시지요.”
표정이 굳고, 입꼬리가 어색하다. 주눅 든 티가 역력하다. 오오라 기사라 해도 기세를 잃으면 삥 뜯기는 시전상인과 다를 바 없다. 하이오지는 히죽이 웃으며 호위기사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소식을 들었는지 마쯔가 계단참에서 하이오지를 맞았다.
“아이고, 기사님. 어서 오십시오.”
마쯔는 만면에 가식적인 웃음을 띠며 반가워했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처럼 속까지 좋을 수는 없었지만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
“여, 마쯔 님, 요즘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사업이 잘되시나 봅니다요?”
물론 사업이 잘되긴 했다. 그놈의 외상만 아니라면 말이다.
“덕분에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오늘은 결제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이오지는 탁자에 놓인 쓴 차를 한 입 머금은 후 마쯔의 얼굴을 응시했다.
“언제 우리가 떼먹는다고 했습니까요? 우리 군단을 그렇게 못 믿으시나요?”
마쯔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단지 다음 물건 조달을 위해 자금이 좀 필요해서 그러지요. 오해십니다.”
하이오지가 씨익 웃으며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십 킬로그램짜리 금괴 열 개입니다요. 충분하겠죠?”
마쯔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물론입니다. 충분하고말고요. 공급에 전혀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결제는 완료한 겁니다요?”
마쯔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이놈이 또?
“거간도 떨어지는 게 있어야 주둥이를 놀리죠? 마쯔 님도 도매업을 하시니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요.”
마쯔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요.”
“제가 군단과 마쯔 님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거 맞습죠?”
“그, 그렇지요.”
“마쯔 님과 전 입장이 같네요? 역시 말이 잘 통한다니까.”
말과 함께 하이오지가 품에서 흰색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거금을 들여 섭외해 온 자신의 호위기사를 병신으로 만든 그 단검이었다.
하이오지는 천연덕스럽게 가방에서 금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요 정도? 요 정도?”
하이오지가 금괴 위로 단검을 옮겨 가며 마쯔를 바라보았다.
마쯔는 썩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많잖아? 그렇게 떼면 남는 것도 없다고.’
“에이, 마스터님이 너무 짜게 구시네. 좋습니다요. 이번엔 이 정도로 합의를 보죠.”
하이오지는 금괴의 삼분의 일 지점에 단검을 대고 꾸욱 눌렀다.
내려 친 것도, 써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그시 눌렀음에도 금괴가 뚝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마쯔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건 일종의 협박이었다.
무르긴 하지만 금도 엄연한 금속이다.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금괴를 케이크 자르듯 눌러 자르지는 못한다. 그리고 하나 더, 어떤 기사도 저렇게 뻔뻔스럽지는 않다.
“그럼 마쯔 님만 믿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요. 구스타프 형님이 기다리고 계셔서요.”
하이오지는 마쯔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오지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자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금은 지금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지만 그 출처를 밝힐 수는 없었다. 당분간은 조금 어려운 모습을 보이라는 커트리안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 어려울 것도 없었다. 돈도 주고, 겁도 주면 알아서 다 잘될 일인데 골치 썩일 이유가 뭐 있겠는가?
☆ ☆ ☆
생환자 중 가장 바쁜 건 물고기 벤트였다. 체력 좋은 갈리온이 지쳐 쓰러질 정도로 이 도시 저 도시를 뻔질나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작업지인 트렌티노에 도착했다.
동맹에 속한 폴리스는 총 24개였다. 적지 않은 숫자다. 카샤린이나 크리푸, 악타르처럼 작은 규모의 폴리스가 있는가 하면, 케이론이나 트렌티노, 쿠아린같이 성세를 자랑하는 폴리스들도 있다. 특히 켈커티스와 인접한 관계로 오랜 세월 앙숙이었던 트렌티노는 켈커티스에 비견될 만큼 대단히 큰 폴리스다. 폴리스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정치적인 역관계가 복잡하다. 트렌티노에 도착한 벤트가 노린 지점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동맹의 맹주가 켈커티스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맹은 엄연히 독립된 폴리스 간의 결합이다. 그럼에도 결성 이후 줄곧 켈커티스에 의해 주도돼 왔다. 어느 조직이나 주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단체든 주체가 있기 마련이다. 동맹에서는 켈커티스가 그랬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도하는 것과 독선은 다른 문제다. 최근 이십 년간 켈커티스는 무슨 맹주라도 되는 듯 독선적인 행동을 지속해 왔다.
처음에는 경제적 협조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폴리스 간의 상거래를 통제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상단들이 과다한 이윤을 취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물류를 조정했다. 당연히 상단의 이문이 줄고 경영이 악화되었다.
십 년이 흐르자 군소 상단이 문을 닫았다. 많은 상단이 문을 닫자 당장 물류의 이동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일부 상단은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원행에 나서야 했다. 대부분 켈커티스의 상단들이었다.
각 폴리스들은 켈커티스의 솔선수범에 감동했다. 그들의 손실을 보전해 주기 위해 최대한 물량을 몰아주었다. 그 덕에 물량을 빼앗긴 대형 상단들도 하나둘 사업을 접게 되었다.
다시 십 년이 흐르자 그나마 소금이나 철 등 필수품을 독점한 일부 상단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업을 축소하거나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품목의 가격이 조금씩 올라 이전 가격을 회복했다. 대체로 사치품들이었다.
특정 물품의 거래를 거부하는 폴리스에는 다른 물류, 특히 필수품의 공급이 지연되었다. 그로 인해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상단측은 항의를 해 보아도 여러 가지 그럴싸한 사유를 내세우며 시간만 끌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거래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켈커티스를 등에 업은 상단의 전횡을 눈감아 줘야 했다. 이 정도 물량을 소화할 만한 다른 상단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규모 상단과 달리 대형 상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자금력도 자금력이지만 물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상품, 지리, 시기, 저장 등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기반과 노하우가 없다면 열 번을 성공해도 단 한 번의 실패로 문을 닫아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난 이십 년간 각 폴리스들의 경제는 야금야금 켈커티스에 종속되었다.
그 시간 동안 정치적으로도 은밀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켈커티스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에게는 넉넉한 자금과 각종 정책적 지원이 이뤄졌고, 반대하는 정치인들에게는 여러 형태의 방해가 들어왔다. 당연히 세월이 갈수록 켈커티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득세를 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다시 켈커티스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견제되었다. 작금에 와서는 작전에 동원된 각 폴리스의 군단들까지 제멋대로 타 지역으로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연합과의 전쟁이라는 대의가 앞세워진 건 당연했다.
한때는 이런 켈커티스의 독주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전면적 확전으로 인해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폴리스의 미래가 경각에 달리게 되자, 내부적인 불만은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각 폴리스들은 지난 전쟁 동안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곡창 두 곳을 한꺼번에 내줄 정도로 처참하게 밀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단은 반 토막이 났고, 시의 재정은 파탄 지경이 되었다.
이런 형편이 되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켈커티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즉, 바라흐하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켈커티스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폴리스였던 트렌티노마저 켈커티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벤트는 케이론 목민관의 둘째 아들이다. 각 폴리스에 안면을 튼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 트렌티노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안면이 있는 정치인을 찾아갔다. 넉넉히 사례를 하고 다시 주요 정치인들과 줄을 놓았다. 그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정치 자금을 충분히 흘려 넣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들이었기에 웬만큼 쏟아부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이오지와 달리 벤트는 졸부처럼 쓰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밀한 상거래를 제안했다. 개인적 이익과 폴리스의 이익을 모두 담보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묘한 시점에 그들의 정적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병으로 앓아눕는 일이 발생했다.
트렌티노에서의 작업까지 원만히 해결한 벤트는 고향인 케이론 시에 머물고 있었다.
케이론 시는 서이스테르 강과 바다가 접하는 지점, 즉 북부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 폴리스다.
북이스테르 강은 크로아지크 북동쪽 나탈리나 산맥에서 발원하여 로지아 삼각주에서 남이스테르 강과 서이스테르 강으로 갈라진다. 남이스테르 강은 남부 오르비스 곡창을 거쳐 동남부 끝에서 바다와 접하고, 서이스테르 강은 그대로 중부를 타고 흘러 서쪽 끝 항구도시 케이론 시에서 바다와 만난다.
케이론 시는 특이하게도 종신제 목민관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한번 목민관에 선출되면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은퇴할 때까지 자리가 보장된다.
물론 정무를 보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스스로 은퇴 의사를 밝히고, 원로원이 새로운 목민관을 선출한다. 현재 목민관인 카토도 슬슬 은퇴를 고려해야 할 나이가 됐지만 아직까지는 은퇴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목민관 카토가 바로 벤트의 아비였다.
벤트는 케이론 시 중심에 위치한 카토의 사저에 두 달을 넘게 머물며 한 가지 일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곧 결실을 거두려는 참이었다.
케이론 시의 특산물은 소금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대형 염전이 열 곳이 넘는다. 한 해 소금 생산량만 해도 3만 톤에 이른다. 케이론의 소금은 불순물이 적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향취가 있고 맛이 좋아, 동맹뿐만 아니라 특별한 루트를 통해 연합 쪽으로도 흘러들어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맛도 맛이지만 소금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영양소다. 과다 섭취도 문제지만 섭취가 부족해도 병이 생긴다.
케이론에는 연혁이 오래된 상단이 하나 존재한다. 시나투스 상단이다. 염전을 네 개나 보유한 대형 상단이다. 이백여 년 전 염상으로 시작해 이제는 웬만한 품목은 다 다루는 종합 상단이 되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동맹의 폴리스들도 각기 특산품이 있다. 오린토는 철광석, 필리파는 양과 소, 악타르의 필라, 트렌티노의 목화, 센드버그의 밀, 카샤린의 말 등이다.
특산품의 거래는 대부분 몇몇 거대 상단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상단들은 대부분 켈커티스 출신이거나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케이론의 시나투스 상단도 마찬가지였다.
시나투스 상단은 동맹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 상단이었기 때문에 바라흐하조차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상단이다. 하지만 작금에 와서는 그 세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상단의 전대 주인인 프레드릭 시나투스 대만 해도 동맹 전체 물동량의 이 할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변치 못한 현 상단주 알레오 시나투스 대에 와서는 반 토막이 나 버렸다.
그 반조차도 알레오가 켈커티스측에 납작 엎드린 덕에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마진을 남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로메노 상단과의 불공정 거래 탓이다.
로메노 상단은 켈커티스에 위치한 상단으로 시나투스 상단과 마찬가지로 제법 유서 깊은 상단이다. 시나투스와는 아주 오랜 세월 경쟁하던 상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십 년 새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
상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맹 전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바라흐하에게 협조해야 했고, 로메노 상단은 그런 바라흐하의 처가였다.
바라흐하는 시나투스 상단의 뒤를 봐주는 대가로 로메노 상단과의 거래를 요구했다. 명목상으로는 거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마진의 분배에 가까웠다. 몇몇 품목에 대해 매우 비싸게 사주고, 반대로 케이론의 특산품인 소금을 아주 헐값에 파는 방식으로 말이다. 명색이 상단인데, 생산만 책임지고 판매는 로메노가 하는 꼴이 돼 버렸다. 무역으로 벌어들인 마진이 이 터무니없는 거래로 다 까진다.
간이 작은 알레오는 가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데 만족하고 이런 불평등한 거래도 감지덕지하게 받아들였다.
알레오에게는 브레드만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시나투스 가문의 사람답게 상재가 밝았고, 머리가 좋았다. 다만 둘째 치고는 야심이 지나치게 많았다. 아비인 프레드릭이 사망한 후 상단은 장자 승계 원칙에 의해 알레오에게 넘어갔고, 브레드만은 상단의 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제법 유능했기에 형과 가문의 어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지만 야심이 크고 유능한 만큼 쌓인 불만도 많았다.
소소한 불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크게는 세 가지다.
첫 번째, 상단의 소유권을 소심한 형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고, 두 번째, 자신은 일개 고용인에 불과하고 자식 대에 가서는 방계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고, 세 번째, 상단이 얻어야 할 대부분의 이익을 로메노 상단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앞의 두 가지는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마지막 세 번째는 상인으로서 정말 참아내기 힘든 문제였다.
그 자신이 재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손실이 얼마나 크고, 불합리한지 잘 알았다. 물론 그도 불가피한 손실임은 알고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억울했다.
그런 그에게 목민관 카토 폴비우스의 둘째 아들 벤트가 접근했다. 비슷한 또래였고, 비슷한 처지였기에 한때는 제법 어울려 지냈던 친구다.
십 년 만의 만남은 자연히 술자리로 이어졌고, 그 술자리는 우정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계의 문에서 생환함으로써 한동안 온 폴리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만한 성격의 기사가 상단의 별 볼 일 없는 재무 담당을 여전히 친우로 대접해 주었다. 으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둘은 자주 만나고, 예전처럼 흉허물 없이 어울렸다.
벤트는 무려 두 달간이나 브레드만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고 야심을 부추겼다.
그리고 두 달이 다 되어 갈 무렵 둘은 평소처럼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벤트는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무척 애석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타깝군, 친구.”
“무슨 말인가?”
“만일 자네가 상단의 주인이었다면 내가 큰 이득을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이득? 하하, 기사 나리께서 무슨 장사거리라도 물고 왔단 말인가?”
“장사는 못해도 뒷배는 봐줄 수 있지.”
“이 친구, 농담은? 아니 누가 켈커티스를 거슬러 가며 뒷배를 봐줄 수 있단 말인가?”
“자네도 바라흐하가 두려운 게군.”
“두렵지,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나? 알다시피 소금만 팔아서는 수지가 안 맞는다네. 더구나 자네 부친, 카토 공은 철저히 바라흐하를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네.”
“무슨 말인가?”
“잘 알지 않나? 우리가 가진 염전은 불과 네 곳일세. 케이론의 염전은 총 열하나네. 중소 규모 염전은 빼더라도 말일세. 생산량으로 따지면 더 차이가 나지. 협조하지 않으면 우리만 망하게 될 뿐일세. 시정부에서 계속 켈커티스를 지지하는 한 말일세.”
“친구, 내가 누군지 잊었는가?”
“어찌 잊었겠나? 케이론 최고의 기사님 아니신가? 혹시 정치라도 해 볼 생각인가? 아무리 뛰어나도 목민관의 아들은 목민관이 될 수 없다는 걸 모르는가? 세습금지법 말일세.”
“켈켈, 그런 이야기가 아닐세. 자네니까 솔직히 말함세. 아니, 그 전에 몇 가지 묻고 싶군.”
“이 친구 오늘따라 너무 진지하구만? 어쨌든 좋네. 물어보게.”
“소금 거래가 자네 상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삼십 퍼센트를 넘지 않겠지?”
“물량으로 따지면 그렇지. 마진으로 따지면 비중이 십 퍼센트도 안 된다네. 다 로메노 상단 때문이지.”
“좋네. 이야기가 더 쉽군. 소금을 직거래하면 마진율이 얼마나 될 거라고 보는가?”
“로메노가 다른 폴리스에 납품하는 시세대로 우리가 직접 납품한다면 물류비용을 빼더라도 대략 칠십 퍼센트까지 바라볼 수 있겠군.”
“그렇게 되었을 때 순익의 비중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소금만으로도 전체 순익의 사십 퍼센트까지 올릴 수 있겠네.”
“십 퍼센트에서 사십 퍼센트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군. 애로점은 거래처겠지?”
“맞네. 우선은 거래처지. 두 번째는 운송이고.”
“운송?”
“물론이지. 몬스터나 마적들을 상대하려면 무력도 꽤 필요하다네.”
“그런가? 정예병 천오백이면 물류의 수송에는 문제가 없겠지?”
“예끼, 천오백이나 어찌 끌고 다니나? 급여에, 식대에, 일껏 출행해 봐야 남는 것도 없겠구먼.”
“켈켈, 인원수야 맞추면 될 일이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세. 거래처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로메노 놈들과 거래를 끊고 소금의 직거래를 시작하면 당장 거래처를 봉쇄하겠지. 소금뿐만 아니라 다른 품목들까지 말일세. 켈커티스의 입김을 벗어난 거래는 힘들지. 당장 우리만 해도 누구누구와는 거래를 하지 말아달라는 협조문이 들어오면 거부하기 힘드네. 그건 각 폴리스의 시정부도 마찬가지 입장일 걸세.”
“좋네, 만약 켈커티스 몰래 물건을 받아 줄 폴리스가 열 곳 이상 있다면 어쩌겠나? 그것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물량을 말일세.”
상단이 이득을 남기는 방법은 가져간 물건을 처분한 후 산지에서 싼값에 물건을 사들여 필요한 곳으로 운송해 비싸게 파는 것이다. 이걸 회전거래라고 하는데, 서너 도시만 원활히 돌아도 마진이 짭짤했다. 단 운송에 비용이 많이 드는 관계로 품목에 대한 타깃팅을 깊이 연구하고 최선의 루트와 시기를 잡아야 했다. 물론 대량의 거래인 만큼 거래처와는 사전에 충분히 조율을 하고 별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아무리 많이 가져가 봐야 받아 줄 곳이 없으면 난감한 문제가 발생한다. 물량이 물량인 만큼 시장바닥에서 팔아치울 수는 없는 문제다. 행여 그런 일이 발생하면 손실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대다수 폴리스의 상거래는 켈커티스 측 상단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가져간 물건을 시정부나 그쪽 상단에 넘기고 나면 다시 그 지역 특산물을 구매해야 하는데, 시정부를 등에 업은 켈커티스 측 상단이 전매를 해 버리는 통에 물량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대리인을 두어 물량을 조금씩 긁어모아도 상행에 필요한 물량을 맞추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때문에 근래에는 여러 도시를 돌아오는 회전거래가 아니라 한두 군데만 들러서 돌아오는 편도거래가 주를 이뤘다. 구매나 판매 모두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거래처가 줄더라도 물량만 받쳐 준다면야, 그게 더 알차겠지.”
“물건을 넘긴 후 그쪽 물건도 받을 수 있을 걸세. 충분하게!”
“허허, 꿈같은 얘기구먼? 그쪽 상단이 그걸 두고 보겠나?”
“그쪽에선 모를 걸세.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걱정 말게.”
“정말인가? 믿을 수 있는 얘긴가?”
“물론이네. 하지만 자네가 시나투스 상단의 주인이 아니니 쓸데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구먼. 비밀은 지켜 주겠지?”
“잠깐만! 혹 다른 상단을 염두에 두고 있나?”
“물망에 오른 상단이 몇 개 있긴 하네.”
“기다려 주게. 형님께 이야기해 보겠네.”
“아니, 말하지 말게. 자네니까 해 준 말이지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되네. 반드시 지켜져야 할 비밀일세!”
벤트는 약간의 살기까지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브레드만은 보통의 상인이다. 기사의 살기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벤트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케이론 시에 차츠라가 도착했고, 공교롭게도 그즈음 브레드만의 형 알레오가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몸살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더니 의식마저 잃어버렸다. 신관들이 신력을 쏟아부어도 그때뿐, 다음 날이면 다시 고열이 끓어올랐다. 그러다가 결국 한 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알레오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상단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다.
다행히 알레오에게는 유능하고 믿을 만한 동생이 있었다. 가문 회의 끝에 후계자가 상단을 이어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숙부인 브레드만이 상단을 대리 경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대리경영 체계가 확정된 날, 브레드만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벤트를 찾았다.
벤트와 브레드만의 협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병력이 상단을 호위했고, 상행의 내막을 알 만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출행의 횟수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암거래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벤트는 서둘러 쿠아란 시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