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06화 (106/142)

106. 마계의 문 - 두 번째 전화(戰火)

하기는 권속들에게 전면적인 반격을 명했다. 더불어 조노량에게도 전쟁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조노량은 오백여 마리로 불어난 오크의 무리와 함께 테트리카 산맥을 나선 지도 어느덧 달 반이 넘었다. 그리고 몇 번의 전투를 거치는 와중에 무리의 숫자가 조금씩 불었다.

흔히 몬스터라고 칭하는 마물들은 물론 언데드 군단까지 합류했다. 이제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신세가 돼 버렸다.

데스나이트 하나가 어둠의 기운을 물씬 뿜어내며 옆을 스쳐갔다. 그 뒤로 왼손에 투구를 받쳐 든 듀라한이 따른다. 함께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어색하다.

뚱한 표정을 한 조노량이 지나가는 언데드를 바라봤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크들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했다. 생명체니까. 하지만 죽은 자들과 함께할 줄이야?

소위 말하는 언데드는 굳이 흐름을 읽을 필요도 없이 정상적이지 못한 존재들이다.

안식해야 할 영혼들이 섭리를 거스르고 존재를 부여잡고 있다. 비록 도사 나부랭이는 아니지만 천기를 거역하는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조노량은 오늘 손에 내기를 집중했다. 장심 위로 탱자만 한 기환(氣丸)이 형성된다. 생사현관을 타동하고 난 후 구현이 가능해진 능력이다. 기의 흐름에 지연도, 막힘도 없다. 일 순배도 한순간이다. 그 기를 가늘게 뽑아내어 회전을 가하면 이처럼 유형의 기환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작은 구슬이 가진 힘은 과거 파마장으로 발현했던 힘을 아득히 넘어섰다.

더불어 이 기환은 의지의 구현체였다. 즉, 뜻하는 바대로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했다. 나아가고 멈추고 변화함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진다. 자유롭다. 다만 내공이 술술 샌다는 단점이 있지만 회복 속도가 받쳐주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날 이후 단전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기환은 검막(劍膜)이니 검강(劍罡)이니 이기어검(以氣御劍)이니 하는 전설 속의 경지 중 하나다. 스스로 검사라 자부했는데, 어쩌다가 권사(拳士)들의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이미 경지에 오른 강기(罡氣)나 기막(氣膜)도 마찬가지로 권사의 것이었다.

반면 아직까지 수어검(手御劍)이니 목어검(目馭劍)이니 하는 것들은 감히 구사할 엄두를 못 냈다.

시험을 해 본 결과, 기환을 뽑아내듯 공간을 격하고 오첩도에 기운을 실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냥 저 혼자 떠 있을 뿐 제대로 된 힘을 싣지도,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도 없었다. 그저 흉내만 낸 가짜다.

사실은 이 기환보다 더 유용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생사현관을 타동한 이후 중단전이 열렸다. 중단전에 기운을 집중하면 절로 자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었기에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돼 발생하는 인위적인 흐름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물론 감지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그 인위적인 흐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의지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구사하고 있지만 원리는 깨닫지 못했다. 단지 하단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내공과는 완전히 별개의 능력이라는 것만 안다.

환골탈태 후 중단전이 열림으로 인해 내부가 아닌 외부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개입은 숨을 쉬거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물론 손을 드는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무게에 따라 들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르듯 이 힘에도 한계가 있다.

흐름의 작은 변화나, 작은 힘으로 틀어버린 흐름에는 얼마든지 개입이 가능했으나 큰 변화나 강대한 힘으로 틀어버린 흐름에는 쉽게 개입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 정도는 무시하고 힘으로 틀어버리는 데는 도리가 없다.

조노량의 시선이 힐끗 전라의 샤를 돌아봤다.

이 흄을 제외하고는 아직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존재를 만나진 못했다.

바로 이놈처럼 말이다.

조노량은 허공을 향해 의지를 쏘아냈다.

정상적이지 않은 비틀림이 생기고 허공에서 커다란 눈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계 군단의 감시자다. 팔도, 촉수도 없다. 오직 커다란 눈알만 가지고 있는 희한한 놈이다. 알려주는 자가 없으니 이름 따위는 모른다. 그저 보이는 족족, 느끼는 족족 소멸시킬 뿐이다. 조노량은 생성해 놨던 기환을 털어냈다.

끼아악!

커다란 눈알은 허공에 떠 있는 채 산산이 터져 나갔다. 지상으로 역겨운 체액이 흩어져 내렸다. 물론 그 정도 체액을 피하지 못할 조노량이 아니다.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가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일위진천환영보다.

이름만 거창한 삼류 보법은 이제 이름 그대로 환상적인 보법이 되어 버렸다.

어느 순간 보법의 자연스럽지 못한 흐름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 부분을 변화시킨 것만으로 일위진천환영보는 극상의 보법으로 탈바꿈되었다. 원래부터 잘못 만들어진 것인지, 혹은 중간에 잘못 전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능파미보(凌波迷步)니 이형환위(以形換位)니 하는 절대 보법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의지가 생기는 순간 몸이 움직였고, 내재된 변화는 천변만화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 자연스러운 변화를 간파해 낼 수 있는 존재는 아직까지 만나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감시역으로 붙은 샤조차 일위진천환영보에는 속수무책이다.

일위진천환영보를 시전하는 순간 샤는 자신의 위치를 잃어 버렸다.

보법을 시전하는 동안에는 저 불가사의한 존재 흄조차 범위만 가늠했지, 정확한 위치는 잡아내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때마다 저 무감정한 흄이 평정을 잃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장난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샤의 반응을 볼 때마다 이래서 장난을 치는구나, 라고 공감하게 된다. 의외로 재미있다.

그녀의 얼굴은 가면과 같다. 전혀 표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감정을 기운으로 뿜어내기 때문이다.

냄새랄까, 육감이랄까? 규정짓기는 힘들지만 조노량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함! 절실함! 답답함! 혼란함! 그런 유의 감정이다. 그런 감정은 자신이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노골적인 안도감으로 바뀐다. 그 감정이 얼마나 절절한지 안쓰러움마저 생긴다. 아마 외모 탓이리라. 본질 자체가 부정한 존재면서도 뻔뻔스럽게 저런 껍데기를 쓰고 있으니 자꾸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조노량과 함께 이동 중인 무리가 어느새 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노량과 함께 출발한 오크 부족이 오백이었고, 놀이나 트롤, 오우거 등의 익숙한 마물이 삼백, 개미처럼 생긴 대형 괴물이 일백에 언데드 기사들이 일백이다. 상당히 강력한 군대였다.

만일 탈출 과정에 이런 무리를 만났더라면 절망했을지도 모를 구성이다. 동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신을 위해 주저 없이 탈출을 포기했던 사람들, 전사들이다. 나가서, 만나고 싶다.

나흘간 이동해 온 거리는 대략 이백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중간 중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물들을 만났지만 어렵지 않게 쓸어버렸다.

말이 통하는 놈이라도 있어야 물어보지,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조노량은 다시 샤를 곁눈질했다.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도 이 흄이고, 무리의 우두머리도 바로 이 흄이다.

선두를 이끄는 어둠의 기사가 종종 샤에게로 와서 지시를 받았다.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지시를 받고 되돌아갔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언어 이외의 의사소통 수단이 있는 모양이다. 그때마다 흐름이 변하는 것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목적지를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조노량이 이런저런 생각을 한 지 삼십 분도 안 돼서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기감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마물들의 위치는 약 오 킬로미터 밖이었다.

흄 역시 이를 느꼈는지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그쪽에서도 이쪽의 움직임을 포착했는지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빨랐다.

견주고 자시고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시야에 잡히고 또 잠깐 사이에 선두가 격돌했다.

샤가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검은 연기로 화해 날아올랐다.

함께 걷던 오크들이 콧바람을 뿜어내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조노량의 몸이 절로 반응했다. 하단전에서 꿈틀거리던 내공이 빠르게 일 순배를 마치고 기세를 피워 올렸다. 전투를 주도할 생각은 없었지만 피할 생각도 없었다. 마기의 영향인지, 환경의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은근히 호전적이 되었다. 마물들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과거의 조노량이 아니었다.

양 진영의 마물들이 한지에 물이 흡수되듯 서로가 서로를 향해 스며들었다. 진영의 중간쯤에 있던 조노량 앞으로도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떨어졌다. 조노량은 몰랐지만 마계에서는 켈베로스라 불리는 마물이었다.

조노량은 그 생김새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역겨워서다.

하나의 몸체에 세 개의 머리가 붙어 있었으며, 등에는 털 대신 뱀대가리들이 빼곡히 돋아 있었고, 꼬리에는 용처럼 생긴 머리가 또 하나 붙어 있었다. 크기는 갈리온과 비슷했는데, 풍겨 나오는 기세는 거인족에 버금갔다.

이 역겨운 똥개가 주제도 모르고 조노량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오첩도가 건방진 똥개를 응징하기 위해 울음을 토했다.

썽둥, 콰광!

세 개의 머리가 한 번에 잘려 나갔다. 동시에 절단면으로부터 폭발이 발생했다. 그 폭발의 여파로 몸체가 통째로 터져 버렸다. 과거 거인족들을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위력이다. 켈베로스는 이성이 없는 마물이지만 마계에서도 알아주는 강한 마물이다. 그런 마물을 조노량은 똥개 때려잡듯 간단히 때려잡았다.

검은 오크와 일단의 오크 무리가 또 다른 똥개를 두들겨 잡고 있었다. 벌써 이십여 마리의 오크가 사지를 찢긴 채 뒹굴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오크들의 투지를 잠재울 수 없었다.

조노량은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으나 무시하고 나아갔다. 그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똥개에게 암경을 날렸다. 발출된 암경에는 일성에도 미치지 않는 작은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 덕에 즉사는 면했지만 더 이상 오크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거대한 날개와 두 개의 뿔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다. 자주 보다 보니 흥미도 일지 않는다.

날개 달린 존재답게 하늘 위에서 조노량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데스나이트가 공중에서 악마를 들이받았다. 둘은 한데 엉켜 검은 대지 위에 떨어져 내렸다. 뒹굴던 두 덩치가 서로의 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키보다 긴 날개 덕에 악마의 덩치가 월등히 커 보였지만 거인족처럼 압도적인 덩치는 아니다. 둘은 마치 힘 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향해 기운을 방출했다. 데스나이트의 텅 빈 목이 덜컥 떨어져 나갔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설렁설렁 지나가던 조노량이 손바닥 위에서 굴리던 기환을 악마에게 던졌다.

작은 구슬 모양의 기환이 악마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퍼서석!

악마의 이마에서 쏟아진 빛 덩어리가 데스나이트의 몸체까지 쓸어버렸다. 몸체를 향해 날아오르던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투구 틈 사이로 점멸하던 붉은 안광도 빛을 잃었다. 곧이어 두 거구가 가을바람에 날린 안개처럼 동시에 대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늘 위에서 전장을 관조하던 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의를 담은 비명을 마음껏 토해 놓았다.

거대한 연기 회오리가 전장을 휘돌며 데몬과 케이드와 다양한 형태의 짐승들을 끌고 날아올랐다. 흄에게 끌려 올라간 마물들은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육편으로 흩어져 비처럼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샤는 하기의 네 마리 짐승 중 하나다.

지난 전쟁을 통해 오백 년간 축적한 것 이상의 힘을 얻었다. 그리고 우코르바흐에게 소멸된 다른 짐승을 흡수하며 또 한 번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강대한 힘을 얻은 샤는 하기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아니, 애초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었다.

샤는 육화를 벗어 버리고 마음껏 대기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더욱 왕성해진 식욕으로 새로운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호하고 감시해야 할 대상은 그녀 자신도 가늠하지 못할 힘을 가졌다. 그 대상은 저 아래에서 산책이라도 하듯 전장을 걷고 있었다. 그녀가 전장을 마음껏 휘돌아도 위험하지 않듯 그도 위험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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