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105화 (105/142)

105. 그날 이후

제우니푸스는 이를 악물었다. 미련을 두는 것은 피해를 키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제우니푸스는 현명한 지휘관답게 빠른 결단을 내렸다.

“좋다. 진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물러나라고 전하라. 양익이 후퇴하는 동안 중앙이 버텨내겠다.”

제우니푸스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전령들이 부리나케 말을 달렸다.

전령들이 달려 나가자마자 좌우 양익의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이 제우니푸스의 시야에 들어왔다는 말은 중앙보다도 뒤로 밀렸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도 상황이 더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

“합조! 합조! 천천히 물러난다. 중앙이 뚫리면 양익이 위험하다. 버텨라!”

합조는 좌우 조를 하나로 합치라는 명령어였다. 즉 열을 반으로 줄이라는 말이었다.

수도 없이 반복했던 훈련이다. 군단병들은 제우니푸스의 명령에 따라 넓게 전개했던 진형을 빠르게 좁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유기적인지 상대하던 켈커티스군조차 경탄할 지경이었다.

아도니아 7군단은 물러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유지했다.

보통 병력 피해는 맞붙었을 때보다 후퇴할 때 배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제우니푸스의 7군단은 적의 파상공세를 저지하면서 차분히 후퇴를 이뤄냈다. 과연 아도니아 최고의 군단다운 모습이었다. 7군단의 질서정연한 퇴각에 켈커티스 병력들도 오래 쫓지 못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7군단이 진형을 정비하고 멈췄을 때는 이미 팔 킬로미터나 뒤로 밀린 후였다.

수비형 방진이 구축되자마자 제우니푸스가 절박한 목소리로 보고를 재촉했다.

기대장들과 기대장 대행들이 서둘러 손실을 점검해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사단장들은 다시 이를 집계하여 군단장인 제우니푸스에게 보고했다.

“1사단 보고 드립니다. 부상 칠십삼 명, 미복귀자 사백이십팔 명, 현 총원 구백삼십칠 명입니다.”

“2사단 보고 드립니다. 부상 오십칠 명, 미복귀자 육백사십오 명, 현 총원 칠백구십사 명입니다.”

“3사단 보고 드립니다. 부상 팔십삼 명, 미복귀자 오백육십삼 명, 현 총원 팔백사십이 명입니다.”

제우니푸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복귀자는 사망했거나 적 진형에 남겨진 인원을 말하는 거였다. 후퇴를 한 이상 남겨진 자의 최후는 뻔했다. 사망자와 동일하게 쳐야 했다.

단 한 번의 회전에서 삼분의 일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군단 창설 이래 최악의 패전이었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릴라전에 시달린 탓에 며칠째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숭배하다시피 하는 최고의 검투사들이 적 기사의 칼 아래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대회전에서마저 처참하게 깨져 버렸다. 부상을 입었든 안 입었든 간에 체력이 온전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제우니푸스는 2, 3사단을 맡은 케니온과 브릴리우스를 질책했다.

“상황을 좀 설명해 보게!”

2사단장 케니온이 입을 열었다.

“존스캐빈군에서 말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적은 갈리온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좋아, 설사 그렇다 해도 기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수적으로 몇 기 되지 않는다고 했지 않은가?”

“맞습니다. 저희 쪽에 나타난 갈리온 기사는 불과 셋이었습니다. 그 셋에게 우리 기대장 일곱이 당했습니다. 종사들의 피해는 셀 수도 없습니다. 흑…….”

케니온은 결국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뿌렸다. 병사들의 가슴속에도 비통함이 절절히 전해졌다. 더 이상 질책한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제우니푸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군단의 정비가 끝났다지만 병사들의 체력이나 인원수, 그리고 사기까지 최악의 상태였다. 이대로 두 번째 회전을 감행했다가는 전멸을 각오해야 했다.

제우니푸스는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고 퇴각을 선언했다. 군단 창설 이래 최악의 패전이었다.

하지만 7군단의 역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마대의 기습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적 군단은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크로아지크 황야를 벗어났지만 남은 병력은 불과 한 개 사단에도 미치지 못했다. 최강을 자랑하던 아도니아 7군단이 반의 반토막이 나고 만 것이다.

로크리안은 적 앞마당에서 네 개 군단을 상대로 열하루를 버텨 냈었다. 그럼에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탄핵받았다. 앞장서 로크리안의 탄핵을 주장한 것은 보수파의 트라쿠스였다. 그런데 7군단은 그보다 더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트라쿠스의 군사적 기반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아도니아 7군단을 크로아지크 황야 밖으로 밀어 낸 쥬시아누스의 2군단은 보무도 당당하게 크로아지크 수용소로 귀환했다. 오랜 세월 주눅 들어 있던 엘리티아 출신병들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강 아도니아 군단을 상대로 일방적인 전투를 벌였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다. 비록 전멸을 시키지는 못했지만 전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7군단이 이전의 전력을 회복하려면 십 년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2군단이 당당히 귀환하는 날, 부소장 로뜨는 절망했다. 병사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크로아지크에 들어온 병력이 아도니아 7군단임을 알았다. 군단장인 제우니푸스는 고지식했지만 그래도 최고의 장군 중 하나였다. 제우니푸스가 이끄는 7군단도 아도니아 최강의 군단 중 하나였다. 때문에 추호도 구출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7군단을 맞으러 나간 것은 불과 한 개 군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히 수용소로 귀환했다. 그 말은 막강 7군단이 패했다는 말이었다.

로뜨는 솔직히 저 무지막지한 커트리안에 대해서는 내심 걱정을 했다.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무위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출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7군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훈련이 고된 만큼 강건하기로 소문 난 제우니푸스의 7군단이 어떻게 이런 오합지졸들에게 패했단 말인가?

그날 이후 한동안 수용소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게이트를 통해 다량의 보급품이 도착했고, 전장으로 나갔던 2군단이 승전군이 되어 귀환했다.

싱싱한 고기와 술이 풀렸다. 마음껏 마시고 즐겼다. 심지어는 포로들에게까지 양질의 배급이 이뤄졌다.

현재 크로아지크 수용소는 웬만한 폴리스에 버금가는 전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비록 성벽을 쌓지는 않았지만 참호를 깊게 파고 작업장에서 날라 온 석재로 방벽을 세웠다.

방벽의 높이가 일 미터에도 이르지 않았지만 강력한 기사들과 노련한 고참병들이 이를 대체했다. 더불어 북부 최고의 기마병들이 크로아지크 황야를 물샐틈없이 감시했다. 수용소 출신병들도 날이 갈수록 건강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광산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금맥은 예상보다 더 양호했다. 굳이 찢고 빻아 물로 거르지 않아도 금덩어리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덩어리를 떼어낸 나머지 광석은 파쇄장으로 옮겨 2차로 금을 채취했다. 잘게 빻아 물로 거르는 작업이었다. 워낙 양질의 광맥이어선지 2차 작업에서도 꽤 많은 사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작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분리된 금에는 아직까지도 상당한 양의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부아칸산의 서쪽에는 제법 시설을 갖춘 대장간이 있었다. 대장간에는 철광석을 녹여 괴로 만드는 대형 고로(高爐)가 있었다.

금은 철광석보다 용융점이 낮아 처리에 들어가는 시간도 적었고, 작업량도 많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지만 평생을 대장간에서 보낸 가우렐리온은 바뀐 세상에서도 대우를 받았다. 숙련된 대장장이는 꽤 귀한 직종이기도 했거니와 백발의 폴 등 안면이 익은 생환자들이 뒤를 봐준 덕에 병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가우렐리온 입장에서는 허구한 날 쇠만 두드리다가 금을 다루게 되었다. 눈이 호강하는 건 둘째 치고 물러터진 금을 다루다 보니 한가롭기까지 했다. 더욱 마음에 드는 건 병사들 몰래 자투리 금 조각을 챙겨 넣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봐야 티도 나지 않았다.

가우렐리온은 막 주물 틀에서 떨어져 나온 따끈한 오 킬로그램짜리 금괴를 세밀히 검수했다. 표면에 기포도 없었고, 무게도 딱 맞아떨어졌다. 조심스럽게 금괴 상자에 집어넣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게이트를 통해 차츠라가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에 칼자국이 하나 늘었다.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역경을 헤쳐 왔다는 의미였다.

“조직을 만들었다고?”

커트리안의 물음에 차츠라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구성원은?”

“그림자 일곱과 그들의 수족 팔십입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켈커티스에는 부유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 말에 커트리안은 배시시 웃었다. 차츠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하긴 차츠라가 가져오겠다고 마음먹으면 지켜낼 수 있는 자가 없을 터였다.

“도둑질은 적성에 맞던가?”

오랜만에 차츠라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폴리스를 통째로 훔치려는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가지게 될 거 미리 덜어냈을 뿐입니다.”

커트리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매우 드문 일이었다. 차츠라의 일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차츠라는 한동안 수용소에 머물며 오랜만에 생환자들과 함께 여유 있는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상당량의 금괴를 챙겨서 다시 떠나갔다. 켈커티스에는 차츠라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남아 있었다.

차츠라가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이번엔 벤트가 묵직한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북부 대륙에서도 최북단 변방, 크로아지크에서 음모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간 마계의 문에서는 격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전체적으로는 토착마물의 군대가 밀리고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힘의 역전이 시작되었다.

날이 갈수록 흄들의 기세가 광포해졌다. 더불어 이 땅의 권능을 부여받은 언데드 군단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군대 앞에 육체를 가진 존재들은 조금씩 지쳐갔다.

원래 언데드는 영혼을 가지지 못한다. 단지 인형처럼 육체만 살아나 시술자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하지만 마계의 문에 존재하는 언데드들은 특이하게도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땅에서 절멸한 존재들은 영혼조차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탓이다. 그들의 영혼은 결국 스스로의 육체를 찾아 들어갔다. 육체에 영혼이 깃듦으로 인해 그들은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무려 오백 년간 말이다.

또한 지난 전쟁 동안 죽어간 수많은 마물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 땅에서 죽은 존재는 이 땅에 구속된다. 그들이 부활했다. 육체가 남아 있는 마물들은 육체를 찾아 들어갔고, 육체가 망실된 마물들은 영체로 부활했다. 먼 옛날 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힘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흄에게 잡아 먹혔다. 무한히 반복되고,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고리가 형성되었다.

순식간에 살육을 마친 샤가 얌전히 조노량의 곁에 내려앉았다. 언제 그렇게 미쳐 날뛰었냐는 듯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샤의 양면성에 조노량은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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