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배틀필드
이틀 후, 크리들은 드디어 금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 4반이 맡았던 32번 갱도를 말끔히 정리하고 나서였다. 이미 반쯤 썩어 푸석해진 비연목 기둥을 들어내고, 테무아가 말했던 막장을 치우자 누런 금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반점이 박혀 있는 흰색 돌 틈에 샛노란 줄무늬가 선명했다. 틀림없는 금이다.
손가락으로 두툼한 줄무늬를 따라 훑으며 흙더미를 털어내자 깊게 팬 자국이 보였다. 과거 테무아가 노리앙과 함께 덩이째 떼어냈다는 그 부분 같았다. 크리들의 손가락이 팬 자국을 몇 차례나 쓰다듬었다.
‘무사히 돌아만 와다오, 노리앙.’
잠시 상념에 잠겼던 크리들이 직접 망치와 정을 들고 주변을 깎아 나갔다. 푸석한 철광석과 달리 단단하기 그지없다. 한 시간여의 작업 끝에 커다란 금광석 덩어리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혹시나 금맥이 끊겼을까 봐 서둘러 뒷부분을 확인해 보곤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떨어져 내린 금광석 뒤로 석영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석영 바위 속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금맥이 손가락 굵기로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금맥 형성이 예상했던 것보다 월등했다. 채광장이들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그들은 잔뜩 흥분한 손길로 바위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잘게 부수고 녹여낼 필요도 없이 금덩어리들이 뚝뚝 떨어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채광조원들이 끌과 망치를 들고 달라붙었다. 노역을 하면서도 신이 나는 일들이 있다. 바로 이런 종류의 일이다. 잠시 후 시끄러운 정 소리가 갱도를 가득 메웠다.
크리들은 채광장이들에게 작업을 지시한 후 일 차로 분리해 낸 금덩어리만 담아 갱도를 나섰다. 그 금을 확인한 사단장들과 생환자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자금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다.
매장량이 예상치보다 더 클 것 같다는 크리들의 보고 이후 나흘이 흘렀다.
그날 아침 커트리안은 동시에 두 개의 소식을 접했다. 반가운 소식 하나와 반갑지 않은 소식 하나다.
반가운 소식은 드디어 게이트의 좌표가 크리푸 시로 연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더 이상 목재와 말먹이용 건초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게이트가 크리푸 시로 연결된 사실은 철저히 보안에 붙여야 했다.
크리푸 시가 크로아지크 보급로라는 것이 밝혀지면 연합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다른 도시로 좌표를 바꿔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우선은 보안에 최대한 힘을 쏟아야 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은 아도니아 7군단이 존스캐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도니아에서 존스캐빈까지는 도보로 대략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 상당한 장거리다. 행군에 지쳤을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보급을 다시 챙겨 크로아지크로 넘어오려면 열흘은 잡아야 했다.
그래 봐야 부나방들이지만 상대해 주지 않을 도리도 없다. 기왕 상대할 거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향후 일들을 생각한다면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자원이다.
커트리안은 수용소 체계 정비에 여념이 없는 킨샤르를 불렀다.
소장실로 들어온 킨샤르가 절도 있게 예를 취한 후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군당장님?”
그날 이후 지나칠 정도로 깍듯해졌다.
“2군단병 중 기마에 익숙한 병사들이 얼마나 되나?”
킨샤르가 단박에 상황을 설명했다.
“워낙에 엘리티아 평야를 누비던 자들이라 대부분 기마에 익숙합니다. 숙련된 인원만 추린다 해도 사단 병력은 됩니다.”
“활과 필라의 재고는 얼마나 되지?”
“활은 장궁이 칠백에, 단궁이 오백입니다. 화살도 충분한 수량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필라는 군단병들에게 지급된 것 외에 칠천오백 개가량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일부 망가진 것들을 수리한다면 이천 개가량을 추가로 더 확보할 수 있습니다.”
“좋아, 예니에프와 폴을 호출하라.”
그날 커트리안에게 불려간 둘은 센드버그와 노르드스톰 출신 중에서도 기마에 익숙한 자들로만 네 개 기대를 꾸려 크로아지크를 출발했다.
그리고 열흘 후 커트리안의 예상대로 제우니푸스의 아도니아 7군단이 크로아지크 황야의 경계를 넘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거미줄처럼 깔린 정찰대로 말미암아 낱낱이 파악되었고, 곧바로 예니에프의 타격조에 전달되었다.
크로아지크는 황야다. 즉, 기마대를 운용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심지어는 작전을 번거롭게 하는 수림조차 드물었다.
제우니푸스의 7군단은 황야에 들어선 첫날부터 끊임없이 기마 투창병들과 궁병대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7군단은 멀리서 먼지만 일어도 긴장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전사답게 당당히 싸울 일이지, 이 무슨 비겁한 행동이란 말인가!”
제우니푸스의 부관인 로아니온은 투창을 날리고 달아나는 기마병들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황야에 들어선 이후로 내내 이 모양이었다.
쥐새끼 같은 켈커티스 놈들은 비겁하게 멀찌감치 떨어져 화살이나 투창을 날리고 달아나길 반복했다. 군단병들의 대응도 기민했고, 무장도 탄탄했기에 정작 피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도무지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행군 중에도 화살이 날아오고, 숙영지를 만들 때도 투창이 날아왔다. 마주 필라를 날릴라 치면 어느새 뒤로 빠져 있었고, 쫓아가면 말을 타고 달아나 버리니 도저히 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마병들을 다시 내보내자니 결과가 뻔했다.
벌써 여러 차례 기마대를 내보내 추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 번 나간 기마대는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매번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 남은 기마는 백여 기에 불과했다. 더 이상 손실이 발생하면 전령으로 쓸 기마도 부족할 판이다. 그렇다고 존스캐빈으로 돌아가서 보충 받아 오자니 시간이 아까웠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매복이었다.
적 기마병이 보이지 않을 때 빠르게 숙영지 밖에 구덩이를 파고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한밤중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일단의 기마대가 숙영지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러 방비를 허술하게 세운 위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매복한 병사들로 뒤를 둘러쌀 수 있었다. 매복한 병사들이 포위망을 구축하면 숙영지에서 준비하고 있던 보병들이 들이친다는 작전이었다.
작전은 순조로웠다. 기마대는 매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숙영지 백오십 보 안까지 여유 있게 접근했다.
“돌격!”
로아니온의 명령에 따라 준비하고 있던 병사들이 빠르게 기마대를 향해 돌격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기마대는 화살과 투창을 날리고는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구덩이에서 나와 적 기마대의 뒤를 둘러싸고 방패와 파이크를 세워 들었다.
날카로운 파이크의 창날이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났다.
기마대는 기본적으로 방패와 파이크로 막아서는 중갑 보병을 당할 수 없다.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하지만 로아니온은 곧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기마대가 삼각뿔 형태로 진형을 잡고 막아서는 매복 병력을 향해 그대로 돌격해 버린 것이다.
선두에 선 갈리온 두 마리가 방패병들을 찢어 버렸다. 그 틈 사이로 들이닥친 기마대가 틈을 넓히며 유유히 빠져나가 버렸다.
기마병과 달리 갈리온은 방패와 파이크 병들로는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피를 본 갈리온이 미쳐 날뛰게 되는 것이다. 방패병들도 피해가 크겠지만 함께하는 기마병들도 갈리온의 습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오오라 유저라면 광분한 갈리온을 죽일 수 있겠으나 기사는 결국 보병들 손에 떨어지고 만다. 또한 나머지 기마병들도 빠르게 복구된 방진에 가로막힌다. 정상적인 수순은 원래 이랬다.
하지만 적의 갈리온은 미쳐 날뛰지도, 기사의 손에 죽지도 않았다. 방진을 찢어 넓히고는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렸다. 그 뒤를 이어 기마대가 찢겨진 틈을 벌리며 유유히 빠져나갔다. 찢겨진 방진은 수습되지 못했다. 갈리온에 치이고 뒤이어 닥쳐든 기마병에 밟혀 곤죽이 되었다.
전장을 수습하고 보니 아군 피해는 백여 명에 이르렀고, 잡은 적 기마는 열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나마 기마병의 시체는 여덟 구였다. 세 명은 동료들과 함께 도망쳤다는 말이다. 작전은 대실패였다.
그런 식으로 다시 나흘간 이동하고 나자 진이 다 빠졌다. 행군은 지지부진했고, 군단병들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다. 군단의 사기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군단장 제우니푸스도 분통을 터트렸다. 제우니푸스는 과거 마계검투를 총괄했던 장군이다.
마나팔찌를 채운 채 마계광장으로 포로를 몰아넣는 것이 부당하다 하여 롤의 팔찌를 제거해 줬던 것도 제우니푸스였다. 그만큼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장군이다.
그랬기에 이런 비겁한 작전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북국의 전사답게 정정당당한 대결을 펼치지는 못할망정 중부 대륙의 비겁한 전술을 그대로 베껴와 사용하는 동맹놈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수용소를 이십 킬로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드디어 적 군단을 마주하게 되었다. 정규 한 개 군단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이었지만 적 보병을 대하자 이를 갈며 전의를 불태웠다.
제우니푸스는 교본에 나온 진형 중 가장 공격적인 진형을 선택했다. 제우니푸스의 명에 따라 각 사단은 이백열 종대로 진형을 전개했다. 중앙에 1사단이 서고 2, 3사단이 사선으로 전진 양익을 펼쳤다. 대표적인 공격형 방진이다. 전투력이 강하기로 소문 난 아도니아 병사들이기에 가능한 진형이기도 했다.
일렬은 방패와 글라디우스, 이열은 필론과 파이크로 무장한다. 이를 일조라 했다. 한 개 사단, 천오백 명을 이백 열로 전개하면 종으로는 일곱 줄이 나온다. 즉, 3개 조와 예비병 하나로 한 개 열이 구성된다. 3개 조만으로 종심(縱深)이 뚫리지 않을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는 펼칠 수 없는 진형이었다.
중앙 본대가 적의 진공을 버텨내는 사이에 좌우 양익이 적의 측면을 뚫어낸다는 것이 이 진형의 요체다. 제우니푸스가 펼친 진형은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반면 적은 군단 전체가 하나로 뭉쳐 삼백 열로 전개했다. 진형의 너비로만 따지자면 아도니아군의 절반이다. 방어와 공격을 적절히 혼용한 진형이다.
제우니푸스는 승리를 장담했다. 종심이 두껍다고 전투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1사단은 군단 내에서도 최고의 병사들로만 꾸려졌다. 몇 배의 적을 맞아서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백전불굴의 전사들이다. 1사단이 버티는 동안 2, 3사단은 적의 양쪽 측면을 타격할 것이다. 이런 진형 간의 격돌이라면 적의 측면이 먼저 무너지느냐, 아군의 중앙이 먼저 무너지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 1사단이 먼저 뚫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제우니푸스는 7군단과 함께 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 세월 동안 7군단을 최정예 군단으로 키워냈다. 덕분에 7군단의 전투력은 로크리안의 직할군단에 비견되기도 했다. 특히 방어력만큼은 로크리안의 군단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7군단은 보수파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 ☆ ☆
양군의 진형이 갖춰지자 적 본진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제우니푸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도니아 검투장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던 자로 제우니푸스도 알고 있는 사내였다. 자신의 손으로 마계의 문으로 밀어 넣은 자 중에 하나였다.
사내 예니에프는 갈리온에서 내려 양 진영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홀로 나와 아도니아 7군단 앞에 버티고 선 예니에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켈커티스의 명예로운 전사 예니에프다! 전투에 앞서 나와 어울려 볼 용기 있는 전사는 앞으로 나서라!”
회전에 앞서 양 진영을 대표하는 기사들 간에 일대일 대결을 청하는 것이다. 양 진영의 사기와 밀접하게 연관된 대결이기에 상대가 도발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우니푸스의 우측에 서 있던 스피로스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스피로스는 제3목민관 트라쿠스가 제우니푸스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히 파견한 인물이었다.
스피로스는 당연히 예니에프를 알아보았다. 검투장에서 이미 여러 차례 맞붙어 본 적이 있는 자로 재능은 있었으나 경험이 부족한 친구였다.
이미 죽은 것으로 치부했던 자가 눈앞에 나타나 기사전을 청하고 있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다.
물론 놀라고는 있었다. 마계의 문에서 탈출한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나 사실 믿지는 않았다. 궁지에 몰린 동맹이 꾸며낸 사기극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실력은 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밀릴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얼굴도 시커메진 것이 예전보다는 어른스러워 보였으나 그뿐이다. 스피로스가 보았을 때 예니에프는 예나 지금이나 아직 애송이였다.
“허락하신다면 목을 따 오겠습니다.”
자신만만한 스피로스의 말에 제우니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피로스는 아도니아 검투계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다. 켈커티스 촌놈에게 질 이유가 없는 전사였다.
제우니푸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스피로스가 글라디우스 한 자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방패라고는 손목에 장착된 손바닥만 한 원반이 다였다. 전형적인 검투사의 무장이었다.
“오랜만이군, 애송이!”
스피로스가 나서자 예니에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나서 주다니, 매우 고마웠다.
예니에프는 한껏 미소 지으며 브로드소드를 세워 들었다.
바짝 긴장해야 할 상대가 미소를 보이자 스피로스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서로 간에 알 만큼은 아는 사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자신을 이겨 본 적이 없는 애송이가 긴장은커녕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곳은 검투장이 아니란다, 애송아!”
“스피로스, 나와 줘서 고맙긴 한데 말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아졌지?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계속 주절거리고 있을 건가?”
스피로스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지만 바로 안정을 찾았다. 스피로스는 노련한 검투사였다. 섣불리 흥분해 싸움을 망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아아, 그래, 인정하지. 더 이상 애송이로 대할 순 없겠어. 그럼 붙어볼까?”
스피로스는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예니에프에게 다가갔다.
무방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피로스가 이런 식으로 다가들면 대부분의 상대들은 뒷걸음질 치기 마련이다. 스피로스가 뿜어내는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 애송이는 이전에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스피로스의 장점은 상대에 대한 적응력과 임기응변 능력이다. 멀리서 빙빙 돌며 견제하는 것보다는 직접 검을 맞대고 수를 교환하는 것이 성격에 맞았다.
한 번, 두 번 합을 이루다 보면 오래지 않아 상대의 허실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런 싸움이야말로 스피로스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싸움이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늘 자신이었다. 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괴물 아나스타시오스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오오라를 잔뜩 끌어 올렸다. 검신이 가려질 정도로 파랗게 빛나는 상대의 검을 보며 스피로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오오라의 밀도는 인정해 줄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검이 조금 더 튼튼할 뿐이다.
그 순간 상대가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 검을 뻗었다.
스피로스는 어이없어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검의 간극도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것인가?
캉!
하지만 스피로스는 곧 볼썽사납게 땅을 구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자칫했으면 한방에 골로 갈 뻔했다.
상대의 검에서 뻗어 나온 오오라가 순간적으로 검을 벗어났다.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몸을 던지며 쳐내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대로 목을 내줄 뻔했다.
오오라의 수련이 깊어지면 검 밖으로 오오라를 뻗어내는 경우가 있긴 했다. 특별한 경우긴 했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의 오오라는 뻗어진 것이 아니라 튀어나왔다.
예니에프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스피로스가 일어나 자세를 잡을 때까지 시간을 주었다. 그 미소를 보자 자존심이 팍 상했다.
“이제 긴장이 좀 되나? 다시 갈 테니 잘 받아 보라고!”
예니에프는 말과 함께 다시 검을 뻗기 시작했다. 한 줄기, 두 줄기, 세 줄기 연속적으로 뿜어진 오오라가 스피로스의 전신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캉! 카캉!
가까스로 튕겨 냈으나 오오라를 받을 때마다 손목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아나스타시오스의 투핸드소드를 받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오라에 실린 경력이 아나스타시오스를 능가한다는 의미였다.
스피로스는 바짝 긴장했다. 성장을 해도 너무 성장했다. 애송이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대로 말려든다면 승산이 없다. 스피로스는 재차 날아오는 오오라를 손목 방패를 이용해 가까스로 비껴 내고는 상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승부는 간격에서 나온다. 상대적으로 길이가 긴 브로드소드는 가까운 거리에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붙어야 했다.
퍽!
붙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발길질에 스피로스는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순간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감히 발길질을!
스피로스는 발작적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처음과 달리 흥분하고 만 것이다. 화살이 쏘아지듯 단번에 예니에프에게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오오라에 살짝 중심을 흩트리고 말았다.
몸이 틀어졌다.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면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힘이었는데, 힘을 받지 못한 몸이 순간적으로 좌측으로 회전했다. 그리고 빈 옆구리로 무언가 후끈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통증은 크지 않았다. 땅에 발이 닿았다. 평소처럼 무릎만 튕겨 물러나려 했는데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몸이 기우는 것을 느끼고 급히 다리에 힘을 줬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절로 몸이 기울어 졌다. 어? 하는 사이에 왼쪽 뺨이 바닥에 닿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팔로 땅을 딛고 일어서 보려 했지만 허리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적이 코앞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수차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보였다. 길고 허연 내장이 차가운 흙바닥에 널려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체는 상체와 직각이 되게 꺾여 있었다. 저것들이 내 것이라고? 현실감이 전혀 없는 장면이었다.
예니에프가 차가운 시선으로 바닥을 기고 있는 스피로스를 바라보았다. 옆구리를 파고든 오오라가 척추까지 잘라 버렸다. 검투사 시절 그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당연히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당연히 그를 꺾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그를 보자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전사였고, 뛰어난 검투사였다. 성격도 나쁘지 않았고,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아는 사내였다.
하지만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원한이 없어도, 상대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어도, 그 어떤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든, 전장에서 만나면 서로의 목숨을 탐해야 했다.
예니에프는 버둥거리고 있는 스피로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단칼에 그의 목을 쳐 떨구었다.
이게 자비다.
와아! 와와!
켈커티스 진영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울려 나왔다. 반면 아도니아 진영은 충격에 휩싸였다. 군단병들은 기본적으로 시민들이었다. 검투에 열광하고 내깃돈을 던졌던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군단병들은 스피로스가 누구인지 예니에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우열도 알고 있었다.
아도니아 검투계를 지배하는 세 명의 강자 중 하나인 스피로스가 한 수 아래로 치부되던 예니에프에게 패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병사들이 스피로스의 패배에 주목하고 있을 때 또 한 명의 검투사 출신 아나스타시오스는 예니에프의 오오라에 주목했다. 어리석은 스피로스는 발출되는 오오라에 당황했고, 비열한 발길질에 분노했다. 그가 목숨을 잃은 원인이었다.
화살처럼 쏘아지는 오오라가 신기하긴 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기사(奇事)임에는 분명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전투 중엔 화살도 날아오고, 그보다 더 위력적인 필라도 날아온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충분히 막거나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을 한 순간 앞으로 나섰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회전이 시작된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채 회전이 시작되면 여러모로 불리했다. 더구나 지금 아도니아 7군단이 전개한 진형은 극도로 공격적인 진형이었다. 그 말은 방어에는 취약하다는 말과 같았다. 기세가 죽으면 전투력을 백 프로 발휘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시오스가 앞으로 나서자 예니에프는 감상을 털어내고 싱긋 웃었다. 아나스타시오스는 아도니아 최고의 검투사였다. 스피로스, 바실과 함께 3대 천왕이라 불리고 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중 최강은 역시 아나스타시오스였다. 아도니아에서의 마지막 검투, 그때 예니에프에게 패배를 안겨준 이가 바로 아나스타시오스였다.
알아서 설욕의 기회를 준다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오늘은 그야말로 설욕의 날이었다.
지난번 아드리안의 무위를 보면서도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아나스타시오스의 얼굴을 보자 그때의 아쉬움이 씻은 듯 날아갔다.
하지만 예니에프의 바람은 또 한 번 어긋나고 말았다. 켈커티스 진영에서 쥬시아누스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싸움은 양보해 주게!”
“아, 쥬시아누스 님? 저도 설욕을…….”
“그에게 세 번을 졌다. 부탁하지.”
평소 쥬시아누스답지 않게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예니에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양보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피곤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예니에프가 물러나고 쥬시아누스가 앞으로 나섰다.
아나스타시오스는 바뀐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익히 아는 자였다. 제법 뼈대가 굵은 전사였지만 지나칠 정도로 우직한 검을 고집했다. 힘이 부족하면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었지만 아나스타시오스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힘에서도 늘 앞서 왔으니 말이다.
“아나스타시오스, 전과 같지 않다.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딴에 경고를 날린다. 제법 강해졌다는 말일 것이다. 아나스타시오스는 거한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그뿐이다. 더 빠르지도 더 힘이 세지도 않았다. 그런 자가 어설픈 경고라니?
아나스타시오스는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달려 나갔다. 누가 위인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줄 작정이었다.
쥬시아누스도 투핸드소드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아나스타시오스의 검을 맞이했다.
쾅!
이전 싸움과는 격이 다른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오오라가 어린 검은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는 골곤의 뼈를 통으로 다듬어 만든 검이다. 같은 부피의 강철보다 단단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오스의 강철검에도 오오라가 어려 있다. 비록 강도 면에서는 모자람이 있다지만 부러져 나갈 정도는 아니다. 아나스타시오스의 강철검은 쥬시아누스의 골검을 당당히 버텨냈다. 하지만 사람은 버티지 못했다.
아나스타시오스는 두 발자국이나 뒤로 주르륵 밀리고서야 중심을 잡아냈다.
아나스타시오스의 두 눈이 치켜떠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힘에서는 자신이 앞섰었는데? 이건 괴물이 아닌가?
검을 쥐었던 오른손 아귀가 쭉 찢어졌다. 첫 격돌로 상대의 힘이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음을 알았다.
아나스타시오스는 정말 오랜만에 투핸드소드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서 밀리니 도리가 없었다.
쥬시아누스가 재차 검을 휘둘러 왔다. 정직한 힘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오스는 발을 움직여 상대의 검을 흘렸다. 사람들은 아나스타시오스의 덩치와 생김새를 보고 둔할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오스는 그 누구보다도 영리한 자였다. 힘으로 안 되는데, 힘 싸움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힘을 배제하더라도 그의 검은 충분히 날카로웠다.
아나스타시오스의 투핸드소드가 화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분히 빠른 발을 이용해 좌측으로 돌며 쥬시아누스의 옆구리를 노렸다가 다시 뒤를 잡아갔다. 그 커다란 검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연달아 변화를 만들어 냈다. 검에 어린 오오라도 울음을 토할 만큼 충실하다. 아무리 단련된 강체라 해도 섣불리 들이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쥬시아누스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쥬시아누스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다.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미소를 보자 예니에프는 양보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쥬시아누스의 골검이 변화를 시작했다. 투핸드소드가 마치 단검처럼 자유자재로 휘돌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시오스가 검술에 의존해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면, 쥬시아누스는 힘으로 변화를 만들어 냈다. 글라디우스를 한 번 휘두를 때 단검은 두세 번을 휘두를 수 있다. 그만큼 가볍기 때문이다. 쥬시아누스의 투핸드소드는 단검처럼 놀라운 속도로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나가가다 멈추고, 다시 꺾여, 반대로 휘도는 것이 회초리를 든 것 같다.
아나스타시오스는 갑자기 빨라진 쥬시아누스의 검에 당황했다.
애써 검법을 수련하는 이유는 검의 무게를 거스르지 않고, 가장 효율적인 검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가속과 관성을 적절히 이용해 변화를 만들어 내고, 최상의 검로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상대에게 더 큰 무리를 준다면 성공적인 검로다. 그렇게 식이 완성되고 형이 갖춰진다. 그런데 상대의 검은 가속과 관성을 무시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가 가진 힘이 가속과 관성을 무시할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었다. 오히려 검의 강도가 버텨 주느냐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골곤의 뼈는 오오라를 싣지 않아도 오오라를 받아 낼 정도로 강했다.
아나스타시오스의 검술은 훌륭했다. 하지만 가진바 힘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다. 언제까지 쥬시아누스의 자유로운 검을 피해 가며 검로를 그려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쾅!
검과 검이 부딪쳤다기보다는 바위와 바위가 부딪쳤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커다란 소음이 터져 나왔다.
아나스타시오스는 또 한 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한 손에 쥔 검과 두 손으로 쥔 검이 격돌했음에도 두 손이 밀린 것이다.
아나스타시오스는 최강의 검투사였다. 비록 검투사지만 로크리안이나 아드리안 같은 괴물을 제외한다면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결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인물에게 턱없이 밀리고 있었다. 분명 검술은 자신이 앞섰다. 오오라의 밀도도 앞섰다. 이건 반칙이다.
하지만 그를 상대한 다른 검투사들이 얼마나 반칙을 외쳤는지 알지 못했다. 그 덩치를 하고서도 빠른 몸놀림과 강한 힘, 더불어 놀라운 반사신경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갖췄던 그였다. 하지만 단 하나, 힘에서 밀림으로써 모든 우위가 헛것이 되어 버렸다.
아나스타시오스는 최후의 비기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이대로는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으니까.
번쩍!
섬광이 터지며 아나스타시오스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과 함께였다. 그 빛이 없었다 해도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였다.
그러나 쥬시아누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검을 쏘아냈다. 동시에 쏘아진 두 개의 검이 모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검 끝에 걸린 파육음(破肉音), 비기가 성공한 것을 느낀 아나스타시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바로 일그러졌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 찾아들었다. 왼쪽 가슴을 꿰뚫은 하얀색 검과 검을 쥐고 있는 투박한 손, 아나스타시오스는 미소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시오스의 시선이 다시 쥬시아누스를 향했다. 결과를 확인한 아나스타시오스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투핸드소드를 받아 낸 것은 쥬시아누스의 팔뚝이었다. 목숨을 잃고 팔 하나를 가져온다면 손익이 맞지 않다. 그런데 팔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의 검은 쥬시아누스의 팔뚝을 반쯤 가르고 박혀 있었다. 잘리지 않고 멈춰진 것으로 보아 뼈에 걸렸음을 알았다. 일반적인 대결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오라 검사들의 대결에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반면 쥬시아누스의 검은 아나스타시오스의 심장을 비껴 찔렀다. 비낀 건 중요하지 않다. 심장은 조금만 상해도 기능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쥬시아누스의 검이 거침없이 아나스타시오스의 가슴에서 뽑혀져 나왔다. 심장에 몰렸던 피가 분출구를 찾아 거세게 뿜어졌다. 입으로도 피거품이 벌컥벌컥 쏟아졌다.
아도니아 검투계의 최강자, 무적의 아나스타시오스가 생을 마감한 장소는 검투장이 아니었다.
그 순간 전장의 북소리가 울리고, 뿔나팔을 불었다. 켈커티스군이 진군을 시작했다.
노장, 제우니푸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지금의 진형에서는 후퇴도 불가능했다. 중앙군은 후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양익은 그대로 적에게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제우니푸스도 진격을 명했다. 군단병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양 진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오와 열을 유지한 채 서로를 향해 진군했다.
처음 필라(투창)의 대결은 7군단이 유리했다. 종심이 얇기 때문에 뒤로 날아가는 필라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직격되는 필라만 방패로 막아냈다.
필라를 방어하는 훈련은 지겹도록 받았다. 밀집대형 중 필라를 빗겨 막으면 튕겨져서 옆의 전우가 다친다. 때문에 반드시 정면으로 받아 내야 한다. 단단한 나무를 격자로 엮고 청동을 덧댄 방패는 고슴도치처럼 필라를 받아 내고도 쉬이 깨지지 않았다.
제우니푸스도 호위기대와 함께 1군단의 뒤를 따르며 독전을 거듭했다. 기사전에서는 패했지만 전투는 결국 병사들의 손에서 결정지어지는 거였다. 자신의 7군단은 기사전 한 번 패했다고 흔들릴 나약한 군단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두 군단의 선두가 맞붙었다. 방패와 방패가 부닥치고, 박혀 있던 필라가 부러져 나갔다. 파이크가 방패와 방패 사이 비좁은 틈을 노렸고, 글라디우스가 방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양 진영 모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거세게 격돌했다. 함성이 터지고 피가 터졌다. 온갖 비명과 욕설이 서로를 향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며 아도니아군의 중앙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아무래도 뒤가 두꺼운 적이 유리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밀리면서도 오와 열이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와 열만 유지된다면 조금씩 밀리는 건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적이 아군의 양익 사이에 더욱 깊이 끼워지게 될 뿐이다. 그의 자부심대로 중앙 1사단은 견고히 막아내며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이제 양익의 활약이 시작될 타임이었다.
1사단의 바로 뒤에 붙어 있는 제우니푸스의 시야에서는 적진을 향해 사선으로 전개된 양익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꼭 보아야만 결과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펼쳤던 진형이 바뀌지 않은 한 양익이 적의 측면을 감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개전 초기에 서로 간에 병력수를 확인했고 진형을 확인했다. 적의 진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자랑스런 중앙사단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이제 양익이 얼마나 빨리 적의 측면을 뚫어 주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해도 측면을 뚫린 적은 진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우니푸스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 제우니푸스에게 전황을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다. 각기 양익을 담당한 2사단과 3사단에서 보내온 전령이었다.
전령은 다급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우익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후퇴를 허락해 달라는 전언입니다.”
“사단장님이 버티기 힘들다고 후퇴를 요청했습니다.”
제우니푸스는 거의 동시에 도착한 전투 전령들의 전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는 생각으로 전령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령들은 다급한 표정은 그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가? 왜 양익이 밀려?”
“갈리온 기사들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우리 측 기사들이 감당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익도 마찬가집니다. 놈들의 무력이 놀라울 정돕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됩니다. 방진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병사들이 버티지 못합니다. 어서 명령을 하달해 주십시오.”
그때 우익에서 또 한 번의 전령이 도착했다. 후퇴 명령을 독촉하는 전령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새로 온 전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급합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후퇴도 불가능합니다. 어서 명령을!”
그 말에 제우니푸스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제대로 후퇴를 하지 못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진퇴에 대한 판단을 정확히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장 지휘관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내린 당사자들은 그가 신임하는 최고의 장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