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크로아지크의 평화
그로부터 반시간쯤 후, 수천의 무리가 수용소로 돌아왔다. 생환자들에겐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행렬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소란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갱도 작업을 마치고 나서 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포로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환호하는 포로들과 달리 경비대의 몰골은 비참했다.
최근 삼 년 전쟁의 결과로 포로의 수는 대폭 늘어나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던 포로들은 오랜만에 배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빵과 고기가 원하는 만큼 배식되었다.
일반반 출신의 생환자들은 각자의 반으로 돌아가 반가운 얼굴들을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하이오지와 뮤트, 헤리엇과 크리들이 그랬다. 처음부터 검투반으로 배속되었던 자들도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크리들과 하이오지가 5반 막사문을 열어젖혔다.
“잘들 지냈나, 친구들!”
하이오지가 과장된 몸짓으로 반원들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반원들이 환호하며 하이오지를 지나쳐 크리들 곁으로 몰려들어 얼싸안고 기뻐했다. 팔을 한껏 벌리고 있던 하이오지가 똥 씹은 얼굴로 반원들을 노려보았다. 누군들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하이오지를 좋아했겠는가?
하이오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5반 반장 우라도였다. 몇 번이고 부반장이 바뀌는 와중에도 굳건히 반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우라도였다.
우라도 입장에서는 크리들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티프와 함께 자기 손으로 부반장의 자리에서 밀어냈던 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해방군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해방이 기쁘긴 했지만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었다. 우라도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헤헤, 반갑구먼.”
다음 날부터 크로아지크 수용소가 아주 부산해졌다. 당연히 귀향을 예상했던 포로들은 안타깝게도 강제 징집을 당해야 했다.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감히 반항하지는 못했다. 전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처지가 바뀐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징집을 해 놓고 보니 포로병만 이천오백 명, 병력의 총합이 무려 일만 삼천 명에 이르렀다. 거의 세 개 군단에 이르는 병력이다.
어쩔 수 없이 체제를 개편할 수밖에 없었다. 켈커티스 2군단의 명칭은 크로아지크 1군단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엘리티아 1군단도 정규 3개 사단으로 인원을 줄여 크로아지크 2군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수감되어 있는 포로들과 엘리티아 1군단의 남은 한 개 사단을 합쳐 크로아지크 3군단으로 편성했다.
1군단장 겸 사령관은 커트리안 자신이었으며, 2군단장에는 쥬시아누스, 3군단장에는 의외로 크리들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고참 기대장들이 사단장을 맡았다.
은근히 사단장 자리를 기대했던 하이오지였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싸움 실력과 지휘 능력은 별개였으니까. 결국 대부분의 생환자들은 그대로 커트리안의 호위기사로 남아야 했다.
겨울을 대비해 서둘러 막사를 짓고 땔감을 비축했다. 그나마 듬성듬성 자라고 있던 비연목들이 때아닌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래도 모자란 목재는 게이트의 좌표가 잡히는 대로 크리푸 시로부터 추가 공급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정찰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우선 가까운 라지도니아의 침입을 대비해야 했고, 카테네오와 존스캐빈의 침략도 상정해야 했다. 기마에 익숙한 엘리티아 평야 출신들로 정찰대가 꾸려졌다. 자연스럽게 2군단은 정찰군단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찰대는 거점부대와 독립부대로 나눠졌다. 거점부대는 크로아지크 황야 곳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길게는 열흘씩, 짧게는 일주일씩 주변을 감시하다가 다음 정찰대와 교대했다. 독립부대는 크로아지크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부챗살처럼 말을 달려 경계까지 정찰을 갔다가 다시 크로아지크로 복귀하는 형태의 정찰대였다. 두 명씩 조를 지어 정해진 루트로 황야의 끝까지 갔다가 귀환하는 방식이었다. 가로 방향으로는 사흘, 세로 방향으로는 열흘씩 걸리는 일정이었다. 두 명씩 조를 지었지만 말은 세 마리를 끌고 나갔다. 수시로 말을 갈아타야 할 만큼 고된 일정이다. 말이 충분히 확보되었기에 가능한 정찰법이었다.
3군단장 크리들은 직접 기존 포로들 중 최고의 채광꾼들을 추려 채광반과 파쇄반을 편성했다. 가장 힘든 운송조와 갱도 보강을 위한 잡부들은 포로의 신분으로 전락한 경비대의 몫이 됐다. 그중에는 마나팔찌가 채워진 로뜨 부소장의 모습도 보였다. 안 그래도 마른 몸집이 더욱 초라하게 변했다. 그의 자부심이던 번쩍이는 플레이트 아머도 초라한 죄수복으로 대체되었다.
“어이, 로뜨? 할 만한가?”
하이오지가 빈정대며 지나가는 로뜨를 자극했다.
로뜨는 막 저녁을 마치고 왔지만 여전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이를 갈았다.
고양이가 먹어도 모자랄 배급으로 그 고된 노역을 견디는 것도 부족해 이놈, 저놈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으니 그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죽은 아드리안을 원망했다. 이곳은 크로아지크다. 연합의 폴리스에 둘러싸인 연합의 땅이었다. 조만간 연합의 병사들이 구해 주러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그날 이 모든 원한을 갚아 주리라 다짐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며칠이 흐르자 수용소의 시스템이 갖춰졌다. 1군단은 포로들의 관리와 감시, 경비 등 수용소 전반을 관리했고, 2군단은 정찰을 담당했다. 포로 출신들로 이루어진 3군단은 오직 훈련에만 매진하며 쇠약해진 체력을 보충했다.
크리들은 3군단장을 맡고 있지만 당분간 벤트 대신 1군단 2사단을 지휘해 부아칸산의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3군단을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훈련 일정 때문이 아니라 경비병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서로의 위치가 바뀌다 보니 자칫 사적 감정이 개입되어 말썽으로 번질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물론 미리 뽑아놓은 노련한 채광조 오십 명은 예외다.
현재 수용소에 포로의 신분으로 있는 인원은 대략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중 구백 명 정도가 항복하거나 제압된 경비기대원들이었고, 백여 명 정도는 수용소 내 행정관들과 감독관들, 그리고 밀정질 덕에 특별대우를 받던 특수작업조원들이다. 수적으로 절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인원이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굴욕은 애초에 포로들이 느꼈을 굴욕보다 월등할 것이다. 자칫 사달이 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일은 가능하면 배제하는 것이 옳았다.
캉캉캉!
크리들은 귓가를 울리는 익숙한 종소리에 벌떡 일어났다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습관이란 건 정말 무시할 수 없었다. 몇 년이 흘렀건만 저 투박한 쇳소리만 들으면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크리들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침상을 빠져나왔다. 대략 백 제곱미터가량의 널따란 방이다. 거의 한 개 반이 사용하는 막사와 맞먹는 크기다. 바로 부소장 로뜨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크로아지크 수용소의 주요 간부들이 사용하던 관사는 이 층 목조건물이다. 로뜨의 방은 이 관사의 이 층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다. 방은 포로들의 막사와 같은 목재로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벽면도 매끄럽게 다듬은 데다 세심하게 기름칠을 해놔서 윤기까지 흘렀다. 네 명은 동시에 누워 잘 수 있을 것 같은 침상은 차치하고라도 테이블이니, 소파니, 장식장이니 모두가 특별히 공을 들인 장인의 솜씨였다.
일반 막사의 것보다 세 배는 됨 직한 커다란 벽난로 옆에는 일주일을 때도 다 못 땔 만큼의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탁자에 예쁘게 채색된 사기잔이 있었음에도 크리들은 주전자를 주둥이째 물었다. 차가운 물이 목을 간질이며 넘어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벽난로에서 놋그릇을 들어 한쪽에 마련된 대야에 쏟아부었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같은 수용소에서 누구는 이렇게 살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대충 세안을 마치고 가벼운 옷을 챙겨 입었다. 크로아지크의 초겨울 날씨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생환자들에겐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물화가 진행된 후로는 웬만한 추위는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추위에 적응하지 못했던 검투반원들은 무력의 고하와 관계없이 초반에 죽어 버렸다.
크리들은 포로의 신세가 된 감시병들을 세워놓고 인원 점검에 들어갔다. 로뜨처럼 쓸데없는 연설을 하지는 않지만 인원 점검에 들어가는 시간은 어쩔 수 없었다.
점검은 경비대가 사용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용했다.
인원 점검 결과, 7반에서 결원이 나왔다. 인원을 다시 체크하고 원인을 파악한 결과, 기재 착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맨 앞줄에 서 있는 부소장 로뜨가 오들오들 떨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추운 날씨에 왜 이리 시간을 끄느냐는 뜻일 거다. 그 모습을 보자 크리들은 묘한 가학증이 발동했다. 쓸데없이 시간을 조금 더 끌고, 안 해도 될 주의사항을 반복했다. 파랗게 질려가는 로뜨의 얼굴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얼굴에 윤기까지 돌던 특수작업조원들도 며칠간의 노역으로 초췌해졌다. 같은 포로 신분이었음에도 다른 이들이 형편없는 식사에, 험한 갱도 작업을 할 때도 호의호식하며 수용소에서 노닥거리던 얄미운 놈들이다. 밀정 짓이나 하던 놈들을 군단병으로 편입시킬 수는 없는 일, 그들은 여전히 포로의 신분으로 남았다. 따지고 보면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놈들이다.
인원 점검이 끝나고 행군이 시작됐다. 부아칸산까지 이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다. 수없이 오고 갔던 익숙한 길이다. 포로들의 좌우로 각기 세 개 기대씩 여섯 개 기대가 따라붙었다. 감시와 경계를 위한 병력이다.
행렬은 오래지 않아 부아칸산의 남사면에 도착했다. 비스듬한 절벽에 설치된 잔도가 위태롭다. 어쩌면 크리들 자신이 놓았던 잔도일지도 모른다.
갱도 보강작업에 배정된 백여 명만 45번 광구로 몰아넣고, 나머지 구백여 명의 포로들은 잔도 보수와 파쇄장까지 이어진 도로를 닦는 데 동원됐다. 목표는 수레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을 정비하는 거였다. 끊임없이 갱도를 옮겨 다니는 철광산 작업과 달리 금광 작업은 오직 이 길만을 이용할 예정이었기에 시작된 작업이다. 물론 인력이 남아돈다는 것도 한몫했다.
날카로운 바위조각과 자갈들로 이루어진 비탈길이다. 이놈의 돌과 바위들은 파내도 파내도 끝이 없이 튀어나왔다. 도로 정비조 이백 명이 돌을 파내면 나머지 인원들이 쓸 만한 돌을 골라 등짐으로 수용소까지 나른다. 수용소 보강을 위한 석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작업장은 한정돼 있고, 인력은 남아도니 이렇게라도 써먹어야 했다. 수용소까지 이어진 이 킬로미터는 네 개 기대가 배치돼 운반조를 감시했다.
포로들은 이 추운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였다. 크리들도 해 봐서 안다. 작업조 중 운반조가 가장 고되다. 그렇기에 예전에도 운반을 맡은 반에게는 꼴찌를 주지 않았다.
크리들은 운반조들이 움직이는 걸 확인한 후 갱도로 진입했다. 45번 광구는 폐쇄된 이후로 다시 한 번 무너졌는지 주갱도 입구 십 미터 지점부터 흙더미로 꽉 막혀 있었다.
크리들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오직 이 갱도 하나만 팔 거라면 갱도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감독을 맡은 5반의 고참 채광장이 토니에게 지시해 가로 오 미터, 높이 삼 미터로 주갱도의 크기를 넓히도록 했다. 작업장이 하나로 줄어드는 바람에 버팀목들은 남아돌았다. 규정대로라면 이 미터마다 설치해야 할 버팀목들을 오십 센티로 줄여서 튼튼하게 설치했다. 넓어진 만큼 목재를 규격에 맞게 가공하고, 촘촘히 기둥을 세워 안전을 도모했다. 이 모든 작업은 이전 경비병들의 몫이었다. 각 반에서 가려 뽑은 노련한 채광꾼들은 경비병들이 일을 하는 동안 모닥불을 쬐며 구경했다.
오늘의 목표는 32번 갱도 입구까지 파들어 가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