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거인의 죽음
검을 뽑고 마주 섰지만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둘이 뿜어내는 기세가 수용소 정문 앞 너른 황토 마당을 가득 채웠다. 단 두 명이 뿜어내는 기세가 둘러 선 수천의 병사들을 주눅 들게 했다.
심지어는 생환자들마저 긴장감으로 손에 땀을 쥐었다. 아드리안이 내뿜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더 이상 상대가 없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던 생환자들은 아드리안을 보고서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감히 상대할 생각조차 못했던 강대한 존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고작 도망쳐 나온 주제에 최고를 자부했다니?
인간들은 오백 년 전에도 그런 존재들과 당당히 맞서서 살아남았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였다.
어느 곳에서든 스스로의 한계와 맞섰던 존재들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름이 전해지는 위대한 전사들, 강대한 마법사와 현자들. 단지 마계의 문에서 살아나왔다고 최강의 전사가 된 양 으스대고 말았다. 듣던 바대로 아드리안의 기세는 북부 최강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상대를 알아보기 위해선 그와 비슷한 경지에 서야 한다. 생환자들은 지금에 와서야 천재, 아드리안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 내뿜는 기세에 점점 더 강해졌다. 생환자들조차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우웅!
검병에서 시작한 오오라가 검첨까지 쭈욱 뻗어 나가며 기이한 울음소리를 토해 놓았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소리가 되어 울렸다.
타고난 천재, 검과 마나 감응도 양쪽 모두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의 검에 어린 오오라는 예니에프의 오오라에 버금갈 정도의 밀도를 지녔다.
그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낮아진 태양빛을 등지고 거붕(巨鵬)처럼 날았다. 커트리안의 브로드소드가 아드리안의 검을 쳐 올렸다. 검이 맞닿는 짧은 순간 서로의 힘을 가늠했다. 힘 차이가 크다면 이 한 수로 승부가 끝난다. 하지만 둘의 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검을 통해 전해져 오는 커트리안의 힘에 놀랐다. 관성과 속도가 더해진 자신의 검을 제자리에 서서 막았다. 로크리안 이후 힘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아드리안은 미소 지었다. 이제 기술을 선보일 시간이다. 아드리안의 신형이 꺼지듯 가라앉았다. 몸은 가라앉았으나 그의 검은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발목, 무릎, 허리! 하나여야 할 검이 셋으로 갈라졌다. 커트리안은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찰나의 시간을 벌었다.
카카캉!
그 시간으로 충분했다. 동시에 세 번의 격돌음이 터지며 아드리안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아드리안의 몸은 차츠라가 그랬던 것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진 후, 커트리안의 그림자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오직 빠른 발놀림으로 이뤄 낸 결과였다. 그럼에도 마치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몸을 돌리기엔 늦었으나 팔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커트리안의 검이 먼저 돌고 아드리안의 공격을 튕겨 내고 나서야 몸이 돌았다.
다시 아드리안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이번엔 오른쪽! 커트리안의 팔은 기이할 정도로 가동 범위가 넓었다. 아니, 관절이 반대로 굴절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아드리안의 검을 차단했다. 자세가 바르지 못했음에도 아드리안의 힘을 감당했다.
아드리안의 검이 다시 셋으로 나눠졌다.
캉!
이번엔 한 번의 타격음이 터졌다. 두 번의 검은 그냥 흘렸다.
아드리안은 감탄했다. 두 개의 실초와 한 개의 허초를 정확히 구분해 내었다. 딱 한 번 부닥쳐 보고 기술의 허실을 간파했다.
언제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커트리안이 아니었다. 커트리안의 검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도 계속 공격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커트리안의 검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유로웠다. 이해할 수 없는 각도, 이해할 수 없는 경로로 검이 들어왔다. 몸의 움직임도 검의 경로와 별개로 움직였다.
눈을 보고 검로를 짐작해 낼 수 없다. 검에 실린 경력도 천차만별이다. 오오라를 빗겨갈 정도로 가볍고, 막아 내는 검을 눌러 내릴 정도로 무겁다. 튕겨진 검이 예상 범위 밖에서 휘어 들어오고, 무거웠던 검이 가뿐하게 물러난다.
그래!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 아드리안이 커트리안의 검을 대하며 느꼈던 자유로움의 정체다. 당시에는 어설펐던 검로가 지금에는 완성된 그림을 그렸다. 부족했던 변화가 어느 순간 이중, 삼중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
아드리안은 스스로 천재라 자부했다. 그렇기에 다른 자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어설픈 칼질에 짜증이 났고, 터무니없는 공격에 한숨을 쉬었고, 겉멋만 잔뜩 든 춤사위에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로크리안과 어울렸다. 그의 검은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검이었다.
로크리안이 힘을 추구한다면 자신은 완결성을 추구했다. 검은 실용적이어야 했고, 그 실용성은 예술적이어야 했다. 검은 단지 살인을 위한 흉기가 되어서는 안 됐다. 생명을 다루는 도구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혼백도 거기에 담겨야 했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커트리안의 검에는 쓸데없는 기교가 배제되어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경로를 그렸다. 이중 삼중의 변화를 담았지만 변화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변화는 언제든 치명적 일격으로 바뀔 수 있는 수단이었다. 상대가 적절한 대응을 못했을 경우, 첫 번째 검로가 마지막 검로가 될 것이었다.
상대에 적절히 대응했기에 유연하게 변화한 것이며, 그 변화는 끝없이 이어질 수 있는 종류의 변화였다. 멋을 부리기 위한 변화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정제된 변화였다. 마찬가지로 검에 실린 무게도 그러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무게도 아니었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무게였다. 모든 검이 허초였고, 또 실초였다. 그의 검은 단 하나도 등한시할 수 없는 검이었다.
“좋아! 좋다! 멋지구나, 커트리안!”
아드리안의 검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을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다. 사양할 이유가 없다. 아드리안은 매우 정직하게 검을 질러갔다.
커트리안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직한 검이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검이었다. 마치 노리앙의 검을 보는 듯 충만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검을 마주 들이댄다고 어설프게 튕겨질 검이 아니다.
역시 아드리안이었다. 지금껏 보여 준 움직임은 그저 탐색일 뿐이다. 온몸의 신경이 경고를 발했다.
커트리안의 몸이 처음으로 제자리를 벗어났다. 관성이 무시된 움직임을 보였다. 변이된 신체가 삐걱거릴 정도로 격한 움직임이다.
아드리안의 검이 좌로 쓸어져 왔다. 역시 단순한 검이다. 하지만 이번엔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커트리안의 검도 정직하게 아드리안의 검을 마중했다.
쾅!
검과 검이 만났음에도 공기가 터져 나갔다. 기파가 회오리치며 주변을 휩쓸었다. 붉은 먼지가 기파를 맞고 용솟음쳤다. 뿌옇게 솟구쳐 오르는 먼지 속에서 연속적으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황야는 허리케인이라도 맞은 것처럼 휘날리는 흙먼지로 뒤덮였다.
쾅! 콰쾅!
콰콰쾅!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예니에프가 입술을 핥았다. 손이 근질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저런 싸움을 구경만 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커트리안의 무위도 놀라웠지만 아드리안의 무위 역시 놀랍기 그지없었다. 인간의 땅에서 어떻게 저런 검술을 체득할 수 있었을까? 변이가 아닌 수련으로 얻은 경지였다.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방식의 경지였다. 자신의 방식과 그의 방식을 비교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다섯이 붙어도 이기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를 아도니아 최고의 무력이라고 부르는지 실감했다.
먼지 속에서 오오라의 파편이 비산했다. 자신처럼 일부러 뿌려 낸 것이 아니라 충격에 의해 강제로 뿌려진 파편이다. 그랬음에도 바로 소멸하지 않고 불꽃처럼 튀었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한동안 격렬하게 터져 나오던 충돌음이 갑작스럽게 멎으며 정적이 찾아왔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린 듯 멈춰져 있는 둘의 모습이 시야에 드러났다.
커트리안의 턱 아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까지 적셨다.
아드리안의 가슴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에서 흐른 피가 아니라 가슴에서 번져 나오는 피다. 그 중심에 커트리안의 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커트리안은 검을 회수하지 않고 빈손으로 물러났다. 뽑으면 출혈을 막을 수 없다.
“왜 그랬소?”
커트리안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아드리안은 가슴에 꽂힌 검을 힐끔 내려다본 후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함께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겠나? 폰티나에게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지.”
“폰티나에게 진 빚?”
“부끄러운 일이지. 말하고 싶지 않다. 그만 보내 주겠나?”
아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이런다고 젊은 날 저지른 죄악이 씻기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다.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혼자서도 아니고 다섯이 합공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추잡한 함정까지 팠었다. 그럼에도 최강을 자부하던 사내 셋이 죽고 자신과 로크리안만이 살아남았다.
그가 두려워 사지의 힘줄을 잘라 내고 마나홀마저 흩어 버렸다. 그런 몸으로 검투장에 던져 버렸다. 병사들의 뇌리에 각인된 두려움을 씻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그는 최고의 검투사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시민들도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오오라가 없음에도 북부 최고의 전사로 인정받았다. 아도니아로의 전향을 권유했다. 시민권과 자유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마계의 문을 선택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부끄러운 과거다. 평생의 굴레였고, 자신이 이런 꼴로 크로아지크에 처박힌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털어 버리고 갈 때도 되었다. 훌륭하다, 커트리안!
경천동지할 싸움이 끝났다. 결코 쓰러질 것 같지 않았던 거인이 거친 황야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떨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뿜어내던 기세가 대기 중에 헛되이 흩어졌다.
모두가 숙연해할 때, 오직 로뜨만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마지막까지 무책임하게 가 버렸다. 함께 갈 수도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
로뜨는 아드리안의 무책임함에 또 한 번 치를 떨었다.
로뜨의 무장이 강제로 해제되었다. 공들여 관리해 오던 플레이트 아머가 벗겨졌다.
중부 대륙에서 공수해 온 귀한 물품이었지만 포로의 처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품이었다. 하이오지가 흙발로 짓이겨 고철로 만들어 버린 후 침을 뱉었다. 로뜨의 가슴이 미어졌다.
로뜨와 경비대는 포로를 관리하던 처지에서 포로의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수용소 왼쪽 양지 바른 둔덕에 작은 묘가 하나 생겼다. 전사에 대한 예우로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무덤 앞엔 비연목으로 만든 초라한 묘비가 하나 세워졌다.
묘비엔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전사 아드리안 잠들다’라는 짧은 글귀가 연도와 함께 새겨졌다.
<9권에서 계속>
9권